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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先人들의 智異山

점필재가 두류산을 유람하다/이덕무

청장관 전서  제 69권

 

한죽당섭필 하(寒竹堂涉筆 下)

 

 

점필재(佔畢齋)가 두류산(頭流山)을 유람하다


점필재는 함양 군수(咸陽郡守)로 있던 임진년(성종 2, 1471) 중추(仲秋)에 뇌계(㵢溪) 유호인(兪好仁)ㆍ매개(梅溪) 조위(曺偉)와 함께 두류산(頭流山)을 유람하였다. 이때 지은 유록(遊錄)이 있으므로 이제 간략히 옮겨 적는다.

14일(무인) 엄천(嚴川)을 지나 화암(花巖)에서 쉬고 지장사(地藏寺)에 이르렀다. 말에서 내려 지팡이를 짚고 1리(里)쯤 가니 바위가 있는데 환희대(歡喜臺)라고 하였다. 그 아래는 천 길 낭떠러지인데 금대사(金臺寺)ㆍ홍련암(紅蓮菴)ㆍ백련암(白蓮菴) 등 여러 절들이 내려다 보인다.

선열암(先涅菴)ㆍ신열암(新涅菴)을 들러서 고열암(古涅菴)에 이르니 해가 이미 저물었다. 의론대(議論臺)는 그 서편에 있다. 석굴이 있는데 노숙(老宿) 우타(優陀)가 이곳에 살면서 세 사람의 승려와 대승(大乘)과 소승(小乘)의 돈오(頓悟)에 대해 의논했기 때문에 이를 따라 그대로 의논대라 부른 것이다. 나는 험한 곳을 걸었으므로 몹시 피곤하여 깊은 잠에 빠졌다.

15일(기묘) 이른 아침에 걸어서 언덕 하나를 넘었다. 이는 아홉 고개 중 첫째 고개이다. 이런 고개 서너 개를 연거푸 넘으니 조용하고 아늑한 골짜기 하나가 나선다. 여기서 20리를 가면 의탄촌(義呑村)이다. 아홉 고개를 다 넘어 산등성이를 따라 몇 리 안 가서 다시 등성이를 따라 남쪽으로 가면 바로 진주(晉州) 땅이다.

청이당(淸伊堂)에 닿았다. 이 당은 판자로 지은 것이다. 여기에서 영랑재(永郞岾)까지는 길이 매우 가팔라서 해가 정오를 지나서야 비로소 영랑재에 올랐다. 이곳에 이르니
청청천왕봉(天王峯)이 올려다보인다. 영랑(永郞)은 신라(新羅) 화랑의 우두머리였는데 3천 명의 낭도(郎徒)를 거느리고 산수를 구경다니다가 이 봉우리에 올랐다 해서 영랑점이라 부른다.

소소년대(少年臺)는 이 봉우리의 곁에 있는데 푸른 절벽이 만 길은 되어 보인다. 이 산의 동서 계곡에는 잡목(雜木)은 없고 모두 삼(杉)나무ㆍ회(檜)나무인데 잎은 말라 죽고 줄기만 서 있는 것이 3분의 1은 되었다. 산등성이에 있는 나무는 모두 바람과 안개에 시달려 가지와 둥치가 왼쪽으로 쏠려 굽었으며 흐트러진 머리칼처럼 나부낀다.

해유령(蠏踰嶺)을 지났다. 길 옆에 선암(船巖)이란 바위가 있다. 중봉(中峯)에 오르니 겉이 흙으로 덮여 단정하고 중후하다.

성성모묘(聖母廟)에 이르렀다. 세 칸짜리 판자집이다. 소위 성모상(聖母像)은 석상(石像)인데 이마에 흠이 있다. 이는 태조께서 인월(引月) 싸움에서 승리하던 해에 왜구가 이 봉우리에 올라왔다가 상(像)을 찍어 놓고 간 것을 후인이 다시 붙여 놓은 것이다. 성모는 석가(釋迦)의 생모인 마야부인(摩耶夫人)을 말한다. 일찍이 이승휴(李承休)가 지은《제왕운기(帝王韻記)》를 보니,
성모(聖母)가 선사(詵師)에게 명한다/聖母命詵師
한 구의 주에 '지금 있는 지리산 천왕(天王)은 고려 태조의 비(妣)인 위숙왕후(威肅王后)이다.' 하였는데, 이는 고려 사람들이 선도(仙桃)와 성모(聖母)의 이야기를 익히 들어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 임금의 계통을 신격화시키려고 이런 이야기를 만들어낸 것인데, 승휴(承休)가 이를 사실로 믿고《제왕운기》에 쓴 것이다.

해가 저물자 음산한 바람이 거세게 불고 운무(雲霧)가 몰려들어 외관이 모두 젖었다. 사당 안에다 자리를 깔고 누우니 찬 기운이 뼛속까지 저려드는 듯하여 다시 솜옷을 껴입었다.
16일(경진) 먼저 종자(從者)들을 향적사(香積寺)로 보내어 음식을 준비하게 하였다. 매우 미끄러운 돌길로 몇 리쯤 가니 쇠사슬로 만든 길이 있는데 매우 위태로웠으므로 그냥 바위 구멍 사이로 빠져나와 겨우 향적사에 이르렀다.

절에는 중이 살지 않은 지 이미 2년째이다. 문 앞에 있는 반석(盤石)에 나와 앉아서 살천(薩川)이 구불구불 감돌아 여러 봉우리와 섬이 혹 제 모습을 다 드러내거나 반만 내밀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17일(신사) 새벽, 해가 떠오르느라고 놀빛이 눈부시다. 곧 새벽밥을 재촉해 먹고 지름길로 석문(石門)을 거쳐 성모묘(聖母廟)에 들어갔다. 마침 갠 날씨여서 사방에 구름 한 점 없었다.
이 산맥은 북에서 뻗어내려 남원(南原)까지 이른다. 첫봉우리가 반야봉(般若峯)이고, 동으로 거의 2백 리를 뻗어 이 봉우리에 와서 다시 우뚝이 솟은 다음 북쪽으로 서리다가 끝난다.

끌리듯 둘러쳐진 성(城)은 함양성(咸陽城)이고 흰 무지개가 긋고 지나간 듯한 것은 진주(晉州)의 강물이며, 청라(靑蜾)가 촘촘히 서 있는 듯한 것은 남해(南海)ㆍ거제(巨濟)의 여러 섬이다. 산음(山陰)ㆍ단계(丹谿)ㆍ운봉(雲峯)ㆍ구례(求禮)ㆍ하동(河東)의 산은 모두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

북쪽에 있는 가까운 산으로는 안음(安陰)의 황석산(黃石山)ㆍ함양(咸陽)의 취암산(鷲岩山)이 있고, 먼 것으로는 함음(咸陰)의 덕유산(德裕山)ㆍ공주(公州)의 계룡산(鷄龍山)ㆍ금산(錦山)의 주우산(走牛山)ㆍ지례(智禮)의 수도산(修道山)ㆍ성주(星州)의 가야산(伽倻山)이 있다.

동북쪽에 있는 산으로 가까운 것에는 산음(山陰)의 황산(皇山), 삼가(三嘉)의 감악산(紺嶽山)이요, 먼 것으로는 대구의 팔공산(八公山), 안동(安東)의 청량산(淸涼山)이 있다. 동쪽에 있는 가까운 것에는 의령(宜寧)의 사굴산(闍崛山), 진주(晉州)의 집현산(集賢山)이 있고, 먼 것에는 현풍(玄風)의 비금산(毗琴山), 청도(淸島)의 운문산(雲門山), 양산(梁山)의 원적산(圓寂山)이 있다.

동남쪽에 있는 산으로 가까운 것에는 사천(泗川)의 와룡산(臥龍山)이 있고, 남쪽에 있는 것으로 가까운 것에는 하동(河東)의 병요산(甁要山), 광양(光陽)의 백운산(白雲山)이 있으며, 서남쪽에 있는 것으로 먼 것에는 흥양(興陽)의 팔전산(八顚山)이 있다.

서쪽에 있는 산으로 가까운 것에는 운봉(雲峯)의 황산(荒山), 먼 것으로는 광주(光州)의 무등산(無等山), 부안(扶安)의 변산(邊山), 나주(羅州)의 금성산(錦城山), 고산(高山)의 위봉산(威鳳山), 전주(全州)의 무악산(毋岳山), 영암(靈岩)의 월출산(月出山)이 있으며, 서북쪽에 있는 것으로 먼 것에는 장수(長水)의 성수산(聖壽山)이 있다.

이런 여러 산이 혹은 작은 언덕 같기도 하고 혹은 음식 그릇을 늘어 놓은 것 같기도 한데, 오직 동쪽의 팔공산(八公山)과 서쪽의 무등산(無等山)만이 다른 산에 비해 우뚝하다.
계립령(鷄立嶺) 이북은 푸른 기운이 하늘 가득하고 대마도(對馬島) 이남에는 바다 기운이 하늘에 닿아 시력이 끝까지 미치지 못하여 더 분별할 수가 없다.

정오가 되어서야 석문(石門)을 지나 중산(中山)에 오르니 역시 흙 덮인 산이다. 이 고장 사람들이 엄천(嚴川)을 거쳐서 산정에 올라온 자는 북쪽 둘째 봉우리를 중봉(中峯)이라 하고 마천(馬川)쪽에서 올라온 자는 증봉(甑峯)을 첫째 봉우리라 하고 이 봉우리를 둘째 봉우리라 하므로 또한 중봉(中峯)이라 칭한다.

증봉을 거쳐 저여원(沮洳原)에 도착했다. 산등성이에 있는 저여원은 5~6리 가량 되게 평탄하고 넓으며 숲이 무성하고 주위에 물이 둘러 있어 농사를 지을 만하다.

저물녘에 창불대(唱佛臺)에 올랐다. 높고 험하여 밑이 보이지 않으며 위에는 초목이 없다. 저 아래로 두원곶(荳原串)과 여수곶(麗水串), 섬진강(蟾津江)의 하류가 보인다.

악양현(岳陽縣)의 북쪽은 청학사(靑鶴寺) 골짜기이고 동쪽은 쌍계사(雙溪寺) 골짜기이다.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의 호)이 일찍이 이곳을 유람하였다.

영신사(靈神寺)에서 잤다. 절의 북쪽에 가섭(迦葉)의 석상(石像)이 하나 있다. 세조(世祖) 때에는 항상 중사(中使 내관(內官)을 말한다)를 보내 제사를 지냈다. 가섭의 석상 이마에 흠이 있는데 이 또한 왜구가 찍어 놓은 것이다.

가섭전(迦葉殿)의 북쪽 봉우리에 바위 두 개가 우뚝이 솟아 있으니 바로 좌고대(坐高臺)이다. 법당(法堂)에는 몽산화상(蒙山和尙)의 탱화(幀畫)가 있는데 그 위에 쓴 찬(賛)에,

두타를 제일의로 함이/頭陀第一
이 바로 두수거니/是爲抖擻
외형도 이미 속세와 멀고/外已遠塵
내심도 이미 세속과 멀었어라/內已離垢
남 먼저 득도하고/得道居先
맨 뒤에 입멸(入滅)하니/入滅於後
설의 계산이/雪衣鷄山
천년토록 영원하리/千秋不朽

하였다. 그 곁에는 소전(小篆)체로 쓴 '청지(淸之)'란 낙관(落款)이 찍혀 있으니 바로 비해당(匪懈堂 안평대군(安平大君)의 호)의 그림이요 시요 글씨[三絶]이다.

직지사(直指寺)를 거쳐 내려왔다. 고개를 동으로 돌리니 천왕봉(天王峯)이 지척에 와 닿는다. 험한 곳을 다 내려와서 지팡이를 끌고 걸어오자니 골짜기 어귀에 야묘(野廟)가 있다. 드디어 옷을 갈아 입고 말을 타고 실택리(實宅里)에 이르렀다. 등구재(登龜岾)를 넘어서 지름길로 군재(郡齋)에 돌아왔다.

[주D-001]태조(太祖)께서……승리하던 해 : 인월은 인월역(引月驛)을 가리키는데 이 역은 운봉(雲峯) 동쪽 16리 거리에 있다. 고려(高麗) 우왕(禑王) 6년(1380)에 왜구(倭寇)가 운봉(雲峯)을 불지르고 인월역에 주둔해 있는 것을 태조 이성계(李成桂)와 이두란(李豆蘭)이 공격하여 큰 승리를 거둔 것을 말한다.《東史綱目 卷十六上 禑王六年·新增東國輿地勝覽 卷三十九 雲峯縣 驛院》
[주D-002]몽산화상(蒙山和尙) : 원(元) 나라 말기의 고승이다. 그의 법어(法語)를 번역한《몽산법어언해(蒙山法語諺解)》 등이 전한다.
[주D-003]두타(頭陀) : 범어(梵語)로 두수(抖擻)·세완(洗浣) 등으로 번역되는데 이는 번뇌의 티끌을 떨어 없애고 의·식·주에 탐착하지 않으며 청정하게 불도를 수행하는 것을 말한다.
[주D-004]청지(淸之) : 조선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의 자. 시문(詩文)에 능했다. 특히 그의 글씨는 당대 제일이었다.
 
 
[번역 : 민족문화추진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