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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先人들의 智異山

70세에 지리산을 오르다

70세에 지리산 천왕봉에 오른 면암

 

다음은 조선 말기에서 대한제국에 걸쳐 학자이자, 관료, 그리고 의병장으로서 뚜렷한 족적을 남기며 살다 가신 면암 최익현 선생의 저술과 생애를 정리한 '면암집'(민족문화추진회 역)의 마지막 부분인 ‘면암선생문집 부록'에 나오는 내용이다.

 

전에 소개한 바 있듯이 선생은 평소 지리산 등정을 늘 마음에 두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는데, 선생이 지리산 천왕봉에 오른 건 놀랍게도 연세 일흔에 이른 시기이다. 선생이 남긴 詩 중에는 풍경이나, 산중에서의 심상이 아닌 두류산(방장산과 마찬가지로 지리산의 다른 이름)을 오르고자 하던 의지를 나타내던 시 한 수가 있어 흥미로운데 다음과 같다.

 

○두류산(頭流山)에 오르다

칠십에 방장산 오를 약속은 / 稀年方丈約

오직 그대들 있는 까닭일세 / 賴有二三公

원컨대 추진의 힘 더하여 / 願借推移力

최상봉 오르길 약속하세 / 期於最上峯

(민족문화추진회 역)

 

 

의병장으로서, 또 문인 관료로서 잘 알려진 선생이 지리산을 그토록 흠모했다는 사실은 지리산을 좋아하는 오늘날의 우리로서도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니다. 물론 그 어지러웠던 시절, 문창후 고운 최치원 선생을 너무도 사모한 나머지 고운 선생이 주로 계셨던 것으로 알려진 지리산과 가야산에서 그 족적을 따르고자 했음을 짐작할 수 없는 것은 아니나, 그 당시 그 높고 험산 산천을, 그 연세에 등정하였다는 사실은 분명 대단한 일이리라.

 

비록 김굉필,김일손,유몽인, 그리고 남명 선생처럼 당신의 문장에 의한 유람록(기행문)을 남기지는 못한 점은 아쉽지만, 후일 선생의 생애를 정리하는 기록에 짧으나마 이 사실이 들어 있음은  귀한 일이고, 유람록 못지않게 반가운 일이다.

 

전문적으로 면암 선생을 공부하지도 못했고, 한문에 대한 글도 짧아 전적으로 국역기관의 번역본을 따르는 터라, 이 짧은 소개 글에도 잘못이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특히 다음 글에 보면 두류산 천왕봉을 등정한 직 후 가야산 내용이 나오고, 뒤 이어 진주,하동 답사 기록이 나오는데 여정 상 다소 맞지않는 듯하다. 하지만 짧은 식견과 생각으로 더 이상 깊이 들어갈 수 없음을 어쩌랴.(사실은 게으름이 더 크다 하겠지만.) 모쪼록 산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선생의 지리산 등정과 관련 내용만을 추려서 옮김을 이해해 주시기 바라며 그 내용을 옮긴다. (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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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류산(頭流山 지리산(智異山)) 여행을 떠났다.

 

한라산(漢拏山)ㆍ금강산(金剛山)ㆍ두류산(頭流山)을 우리나라 삼신산(三神山)이라 부르는데, 선생이 한라산과 금강산은 이미 한 차례 유람했으나 두류산은 아직 구경하지 못하였다. 이해 봄에 하동(河東)에 있는 종인(宗人) 최정현(崔廷鉉)이 횡천(橫川)에 문창후의 사당을 다시 설립하고 전에는 금천(琴川)에서 제향하였는데 이번에 옮겨 세웠다. 봉안(奉安)하는 날짜를 통고하면서 선생에게 참석하기를 굳이 청했다. 마침 문인 유기석(柳淇錫)ㆍ신종식(愼宗軾)과 종인 최기호(崔基鎬)가 와서 뵙고, 두류산을 관람하기에는 이번이 알맞은 시기라고 하였다. 선생이 이로 인해서 길을 떠났는데 문인 곽한소(郭漢紹)가 모시고 따랐다.

 

공주 공암(孔巖)을 방문하여 충현원(忠賢院) 옛터를 찾았고 옥천(沃川)을 방문하여서는 입재(立齋) 송근수(宋近洙) 상공을 뵙고, 연재(淵齋) 송공을 방문하여, 8대조 상서공(尙書公)의 묘표(墓表)를 청하였다. 드디어 고개를 넘어 안의(安義) 수승대(搜勝臺)와 광풍루(光風樓)에 오르고 함양(咸陽)을 지나면서 남계서원(藍溪書院)에 배례하였다. 돌아서 학사루(學士樓)에 올랐는데, 누(樓)는 곧 함양 인사가 문창후의 남긴 인애(仁愛)를 잊지 못해, 사모하는 뜻으로 창건한 것이었다. 앞에 울창한 숲이 있는데 세상에 전해 오는 말에는 문창후가 손수 심은 것이라 한다. 단성(丹城) 신안 정사(新安精舍)에서 이틀을 유숙하였다. 그때 애산(艾山) 정재규(鄭載圭)와 계남(溪南) 최숙민(崔淑民)이 함께 와서 모였다.

 

이에 적벽강(赤壁江)에서 배를 타고 진주(晉州) 청수(淸水)를 지나다가 포은 선생(圃隱先生)의 화상을 배알하고 하동 횡천에 이르니, 선생의 행차가 더디었기 때문에 영정을 봉안(奉安)하는 일은 이미 끝나 있었다. 공경스럽게 배알한 후에 많은 선비를 거느리고 습례(習禮)하였다. 대개 선생이 이르는 곳마다 많은 선비가 구름 모이듯 해서 혹 학문을 강론하고 혹 시율을 읊조렸는데 선비들의 모임이 거의 근고에 없던 일이었다.

 

드디어 두류산에 올랐다. 벽계암(碧溪巖)ㆍ문창대(文昌臺)를 거쳐, 천왕봉(天王峰)에 올라서 연구(聯句)를 짓고 거닐다가 내려왔다. 산천재(山天齋)를 지나면서 남명(南冥 조식(曺植)) 조 선생(曺先生) 묘소에 배알하고 삼가(三嘉)에 이르러 향옥재(香玉齋)를 방문했는데 즉 고(故) 처사(處士) 모려(茅廬) 최남두(崔南斗) 공이 학문을 강론하던 곳이었다.

 

합천에 가서 가야산(伽倻山)을 유람하였다. 가야산은 곧 문창후가 숨어 살다가 일생을 마친 곳으로 봉우리 하나, 골짜기 하나 물 하나, 돌 하나라도 그의 발자취가 머문 곳이다. 이에 따라온 수백 명과 더불어 벽송정(碧松亭)ㆍ주학정(住鶴亭)을 거쳐, 물을 따라 들어가 청량재(淸凉齋)ㆍ칠성대(七星臺)ㆍ홍류동(紅流洞)을 지나서 문창후의 영당을 배알하고 농산정(籠山亭)에 올라 돌에 새겨진 것을 두루 구경하였다. 다음에 자필암(?筆巖)ㆍ음풍뢰(吟風瀨)ㆍ취적봉(吹笛峯)ㆍ완재암(宛在巖)ㆍ광풍뢰(光風瀨)ㆍ제월담(霽月潭)ㆍ분옥폭(噴玉瀑)ㆍ낙화담(落花潭)ㆍ첩석대(疊石臺)ㆍ조산대(造山臺)ㆍ은선동(隱仙洞) 여러 명승을 지나 해인사(海印寺)에 이르러서 이틀을 유숙하면서 유람하였다.

 

다시 진주를 방문하여 촉석루(矗石樓)를 관람하면서,

사직에 대한 정충은 뭇 별이 복두를 옹위했고 / 社稷眞忠星北拱

천자께 조회하는 큰 의리는 물이 동으로 흐른다 / 朝宗大義水東流

라는 시구(詩句)를 짓고 인하여 창렬사(彰烈祠)를 배례하고 다시 하동에 들어가서 제문을 지어 영장(營將) 홍건(洪楗)의 빈소(殯所)에 제사하였다. 악양정(岳陽亭)을 지나, 쌍계사(雙溪寺)에 들어가 학사당(學士堂)의 문창후 화상을 배알하고 인하여 진감 선사(眞鑑禪師)의 비(碑)를 관람했다. 청학루(靑鶴樓)에 모였다가 호남 경계로 들어갔다. 구례 화엄사(華嚴寺)ㆍ남원 천은사(泉隱寺)를 모두 유람하다가 8월 초순(初旬)에 집으로 돌아왔다.

 

대개 이번 여행에 선생이 70연세로, 산을 오르고 물에 굽어보는 천여 리 길에 다섯 달 동안 행역의 수고로움과 수답(酬答)하는 번거로움은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었으나 선생은 조금도 괴로워하지 않고 사람을 대하면 너그럽게 대하였고, 모든 서신과 요청하는 문자를 모두 손수 짓고 남에게 대신 시키지 않았다.

 

[면암선생문집 부록(정리자 미상) 임인년(1902, 광무 6) 선생 70세]

 

 [민족문화추진회 면암집 국역본 중 두류산 관련내용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