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반정59 병자호란 다시 읽기(88)인조의 절박함과 홍타이지의 절박함 병자호란 다시 읽기] (88) 인조의 절박함과 홍타이지의 절박함 인조, 반정 통해 얻은 지존 위신 잃을까 出城 회피 ☞신문기사 읽기 :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080910028001&spage=1 2008-09-10 28면 기자이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이 기자의 블로그 보기 --> 항복을 하더라도 산성에서 나가는 것만큼은 끝.. 2008. 9. 11. 병자호란 다시 읽기(82)남한산성의 스산한 연말 [병자호란 다시 읽기] (82) 남한산성의 스산한 연말 2008-07-30 26면 기자이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이 기자의 블로그 보기 --> 포위된 이후 남한산성 사람들은 바깥 소식 하나하나에 일희일비했다. 근왕병이 근처까지 와서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거나 패하여 물러갔다는 소식이 잇따라 들려오면서 산성의.. 2008. 7. 30. 병자호란 다시 읽기(81)근왕병이 패하다② [병자호란 다시 읽기] (81) 근왕병이 패하다 Ⅱ 2008-07-23 26면 기자이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이 기자의 블로그 보기 --> 당시 근왕병들이 처해 있던 열악한 상황을 고려하면, 청군의 포위망을 뚫고 남한산성을 구원하는 것은 애초부터 여의치 않은 일이었다. 우선 지방의 감사나 지휘관들이 병력을 모으고.. 2008. 7. 23. 병자호란 이야기<80>근왕병이 패하다① [병자호란 다시 읽기]<80> 근왕병이 패하다 Ⅰ 팔도 근왕병 속속 기치 들지만 중과부적에 한숨만… 2008-07-16 26면 기자이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이 기자의 블로그 보기 --> 몇 차례 소소한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상황은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시간은 속절없이 흐르고 있었고, 날씨가 추운 .. 2008. 7. 17. 병자호란 이야기(79)남한산성의 나날들③ [병자호란 다시 읽기] (79) 남한산성의 나날들 Ⅲ 왕세자를 보내지 않으면 화친은 꿈도 꾸지 말라는 청군 지휘부의 요구가 있은 직후 성안의 분위기는 복잡했다. 여전히 화친을 시도해야 한다는 부류와 화친은 이미 물 건너갔으니 최후의 결전을 벌여야 한다는 부류로 나뉘었다. 결단은 쉽지 않았다.1636.. 2008. 7. 9. 병자호란 다시 읽기(78)남한산성의 나날들② [병자호란 다시 읽기] (78) 남한산성의 나날들 Ⅱ 남한산성을 공략하려는 청군 지휘부의 계책은 치밀했다. 그들은 성 주변에 참호를 파고 목책을 설치했다. 이미 1631년 홍타이지가 명의 대릉하성(大凌河城)을 공략할 때 사용했던 전술이었다. 성을 외부로부터 완전히 격리시켜 그야말로 고사(枯死)시키.. 2008. 7. 2. 병자호란 다시 읽기(77)남한산성의 나날들① [병자호란 다시 읽기] (77) 남한산성의 나날들 Ⅰ 인조의 가짜 아우 인질로 보냈다가 더욱 궁지에… 인조는 결국 강화도로 가는 것을 포기했다. 건강이 여의치 않은데다 주요 길목을 청군이 모두 봉쇄했기 때문이다. 무리하게 강화도 행을 시도하다가 청군에게 해를 입을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제기되었.. 2008. 6. 25. 병자호란 다시 읽기(76)남한산성과 강화도 [병자호란 다시 읽기] (76) 남한산성과 강화도 남한산성은 천험(天險)의 요새였다. 성곽의 가장 높은 누대에서는 도성과 살곶이(箭串場)가 한눈에 들어왔다. 더욱이 인조가 들어갔던 무렵은 눈보라가 몰아치고 기온이 몹시 떨어져 성으로 오르는 길이 온통 얼어 붙었다. 청군의 선봉이 제 아무리 ‘강철.. 2008. 6. 19. 병자호란 다시 읽기(75)병자호란 일어나다② 병자호란 다시 읽기] (75) 병자호란이 일어나다 Ⅱ 1636년 12월10일 압록강을 건넜다. 이렇다 할 저항이 없었다. 그들은 곽산(郭山)과 정주(定州)에 사실상 무혈 입성했다. 홍타이지는 투항해 온 곽산과 정주의 군민들을 해치지 말라고 유시하는 한편, 그들의 머리를 깎아 치발(髮)할 것을 지시했다. 또한 .. 2008. 6. 12. 병자호란 다시 읽기(73)최후의 주화-척화 논쟁 [병자호란 다시 읽기](73)최후의 주화-척화 논쟁 최명길의 주장은, 척화(斥和)하여 청과 싸우겠다는 결심을 굳혔으면 ‘공세적’으로 하자는 내용이었다. 말로만 ‘척화’를 외치며 미적거릴 경우, 청군의 철기(鐵騎)를 조선 영토 깊숙이 불러들이게 되어 엄청난 피해를 보게 될 것을 우려한 계책이었.. 2008. 6. 5. 병자호란 다시 읽기(72)절체절명의 시간들 [병자호란 다시 읽기] (72) 절체절명의 시간들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직전, 인조는 나름대로 분발하는 모습을 보였다. 스스로 자책하는 내용을 담은 교서를 반포하여 실책을 사과하고, 내외 신료들에게 구국의 방책 마련을 위해 협조를 당부했다. 신료들도 인조의 호소에 답하여 이런저런 개혁안과 방책.. 2008. 5. 21. 병자호란 다시 읽기(71)높아지는 명분론,어정쩡한 방어대책 [병자호란 다시 읽기] (71) 높아지는 명분론,어정쩡한 방어대책 홍타이지의 ‘조선 비난’ 국서에 조정신료 決戰論 들끓어 몽골 버일러들을 이끌고 왔던 용골대 일행이 도주하고, 청과 관계를 끊겠다는 인조의 유시문마저 용골대 일행에게 빼앗긴 뒤 조선의 분위기는 뒤숭숭했다. 나덕헌과 이확이 홍.. 2008. 5. 15. [병자호란 다시 읽기](70)홍타이지 황제가 되다 [병자호란 다시 읽기] (70) 홍타이지,황제가 되다 평소 여진족을 오랑캐라고 멸시했던 조선이 홍타이지를 황제로 추대하는 데 동참하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후금의 힘이 이미 명마저 넘어선 상황에서 조선의 선택은 국가의 존망까지 걸어야 하는 모험일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신중.. 2008. 5. 7. 병자호란 다시 읽기(69)후금 관계 파탄의 시초② [병자호란 다시 읽기] (69) 후금 관계 파탄의 시초(Ⅱ) 용골대와 마부대 일행은 다목적 사절이었다. 새해가 밝았음을 축하하는 사절이자, 인열왕후의 죽음에 문상하기 위한 조문사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이 조선에 온 가장 큰 목적은 홍타이지를 황제로 추대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리고, 조선의 동참을.. 2008. 4. 30. [병자호란 다시 읽기](68)후금관계 파탄의 시초① [병자호란 다시 읽기] (68) 후금관계 파탄의 시초(Ⅰ) ‘야나가와 이켄’에서 비롯된 일본과의 긴장도 대충 해소되고 있던 1635년 12월, 인열왕후(仁烈王后·1594∼1635) 한씨가 세상을 떠났다. 출산으로 말미암은 후유증 때문이었다.12월4일에 태어난 대군은 곧 사망했고, 한씨 또한 닷새 뒤에 숨을 거두었.. 2008. 4. 23. 병자호란 다시 읽기(67)유화적인 대일정책② 병자호란 다시 읽기] (67) 유화적인 대일정책Ⅱ ‘야나가와 이켄(柳川一件)’에 대한 최종 판결은 1635년(인조 13) 3월15일에 내려졌다. 도쿠가와 쇼군은 소오 요시나리(宗義成)의 손을 들어 주었다. 하지만 요시나리에게 그것은 ‘찜찜한 승리’였다. 주군인 자신을 배신하고 사지(死地)로 몰아 넣으려 했.. 2008. 4. 16. 병자호란 다시 읽기(66)유화적인 대일정책① [병자호란 다시 읽기] (66) 유화적인 대일정책Ⅰ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직전인 1635년 후반 무렵, 조선은 또 다른 난제를 안고 있었다. 다름 아닌 ‘일본 문제’였다. 조선은 갈수록 높아지는 후금의 군사적 위협과 명의 요구를 감당하기에도 버거운 처지였다. 당연히 일본과의 관계 안정이 절실했다. 그.. 2008. 4. 10. [병자호란 다시 읽기(65)전란의 전조(前兆) [병자호란 다시 읽기] (65) 전란의 전조 1634년 말부터 이듬해 봄까지 조정은 강학년(姜鶴年) 발언의 파장 때문에 뒤숭숭했다.‘포악함으로써 포악함을 제거했다.’며 인조반정의 정당성 자체를 부정했던 강학년의 직격탄은 인조와 조정 신료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인조와 반정공신들의 실정(失政)을 문.. 2008. 4. 2. 병자호란 다시 읽기(64)외환(外患) 속의 내우(內憂) [병자호란 다시 읽기] (64) 외환(外患) 속의 내우(內憂) 재원 문제 때문에 청북(淸北) 지역의 성곽 수리와 군량 공급마저 여의치 않았던 상황에서 노유녕에게 십만 냥 가까운 은화를 뜯겼던 것은 너무나 큰 손실이었다. 하지만 인조는 노유녕이 다녀간 뒤 상당히 고무되었다. 명 조정이 왕세자를 책봉해 .. 2008. 3. 26. 병자호란 다시 읽기(63)엎친데 덥치다 [병자호란 다시 읽기] (63) 엎친 데 덮치다 공유덕과 경중명 일당의 후금 귀순은 조선에 치명적이었다. 조선은 명의 강요 때문에 ‘공경 사건’을 놓고 벌어진 명과 후금의 싸움에 말려들었다. 하지만 공경을 저지하는 데 실패했고, 결국 후금으로부터 원망만 사고 말았다. 후금은, 공경의 귀순을 저지.. 2008. 3. 22. 병자호란 다시 읽기(62)반란자와 귀순자들③ [병자호란 다시 읽기] (62) 반란자와 귀순자들 Ⅲ 조명연합군의 필사적인 저지 작전에도 불구하고 공유덕과 경중명은 후금으로 귀순하는 데 성공했다. 비록 중간에 다소의 손실이 있었지만 공경(孔耿)이 끌고 갔던 전함과 수군의 대부분은 후금군으로 넘어갔다. 후금의 홍타이지는 공경이 가져온 전함.. 2008. 3. 12. 이전 1 2 3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