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인계급34

조선후기 한양의 중인들(52.끝)행복한 집 이이엄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52·끝> 장혼이 한평생 설계했던 행복한 집 이이엄 2007-12-24 24면 기자이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이 기자의 블로그 보기 --> 중인들이 인왕산 언저리에 모여 살자, 아들들도 어려서부터 서당에서 같이 글공부를 하며 친구가 되었고, 장성해서 전문직을 얻은 뒤에.. 2008. 7. 23.
조선후기 한양의 중인들(51)인왕산 공동체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51) 중인 지식인들이 꿈꾸었던 인왕산 공동체 2007-12-17 23면 기자이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이 기자의 블로그 보기 --> 중인들은 한 집안에서 같은 직업을 이어받으며 배타적인 기득권을 누렸다. 어려서부터 가정교사를 들여놓고 잡과 시험공부를 시켰으며, 자기네들.. 2008. 7. 22.
조선후기 한양의 중인들(50)通淸運動 율관 장지완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50) 통청운동( 通淸運動 ) 앞장선 율관 장지완 2007-12-10 23면 기자이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이 기자의 블로그 보기 --> 중인 가운데 법률을 담당한 관원을 율관이라 했는데, 율관의 판단에 따라 형률이 달라지기 때문에 아주 중요한 직무였다.1406년에 유학(儒學), 무학(.. 2008. 7. 21.
조선후기 한양의 중인들(49)고아 출신 曆官 김영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49) 떠돌이 고아 출신 역관 (曆官) 김영 2007-12-03 22면 기자이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이 기자의 블로그 보기 --> 관상감은 천문과 지리를 비롯해 달력, 날씨, 시간 등을 맡아보는 관청인데, 영의정이 최고 책임자인 영사(領事)를 겸임할 정도로 중요한 관청이었지만 실.. 2008. 7. 18.
조선후기 한양의 중인들(48)청렴강직 호조 아전 김수팽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48) 청렴강직한 호조 아전 김수팽 2007-11-26 23면 기자이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이 기자의 블로그 보기 --> 호조나 내수사 아전들은 사대부보다 더 많은 돈을 벌었다. 내수사의 아전들이 재산을 축적하는 모습은 10회에서 소개했지만 다른 부서의 아전들도 그에 못지않.. 2008. 7. 17.
조선후기 한양의 중인들(47)譯官 양성 외국어학교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47) 개화기 역관 양성 외국어학교 2007-11-19 23면 기자이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이 기자의 블로그 보기 --> 조선시대에 역관을 양성하던 사역원에서는 외국인 교수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몇 차례 조정에 건의했지만, 외국인 교수를 초청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 2008. 7. 15.
조선후기 한양의 중인들(46)역관 김득련이 본 신세계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46) 역관 김득련이 본 신세계 고종이 1895년 8월 명성황후 시해사건 이후에 신변에 위협을 느끼자,1896년 2월에 이범진·이완용 등의 친러파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시켰다. 마침 러시아가 5월 26일에 거행될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사절단을 초청하자, 고종은 자.. 2008. 7. 9.
조선후기 한양의 중인들(45)세계일주 나선 역관들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45) 세계일주 나선 역관들 세계가 둥글다는 지식이 보편화되고 교통이 발달하면서 서양에서는 세계일주가 호기심의 대상이 되었다. 유럽에서는 세계일주에 나선 귀족들이 많았으며, 누가 더 빨리 세계일주를 하는지 내기를 걸기도 했다. 그런 소재로 1870년대에 쓴 .. 2008. 7. 8.
조선후기 한양의 中人들(44)역관의 어려움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44) 역관의 어려움, 외국어 교육과 험난한 뱃길 외국어를 배우려면 해당 외국에 유학하여 배우거나, 국내에서 배우더라도 해당 외국인에게 배우는 것이 가장 좋다. 그러나 쇄국정책을 펼쳤던 조선시대에는 학생을 외국에 보내지도 않았고, 외국인 교사를 초빙하지.. 2008. 7. 7.
조선후기 한양의 중인들(43)조선 최고 부자 변승업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43) 조선 최고의 부자 변승업과 그 후손 박학다식하기로 이름난 육당 최남선은 조선 최고의 갑부를 변승업이라고 했다. 변승업(卞承業·1623∼1709)은 일본어 역관인데, 중국과 일본을 연결하는 중개무역을 통해 막대한 재산을 축적했다. 그는 연암 박지원의 소설 ‘.. 2008. 7. 4.
조선후기 한양의 중인들(41)마마 전문치료 두의 유상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41) 마마 전문치료 두의(痘醫) 유상 조선시대에 가장 무서운 병 가운데 하나가 마마였다. 마마는 누구나 평생 한번은 걸려야 한다고 생각했던 병인데, 심하면 죽었고, 가볍게 나아도 얼굴에 흉터가 생겼다. 심하게 얽으면 곰보라고 했는데, 조선시대 초상화를 살펴 .. 2008. 7. 2.
조선후기 한양의 중인들(40)피재길, 고약장수에서 종6품으로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40) 고약장수에서 종6품 오른 피재길 홍천 피씨(皮氏)는 전형적인 중인 집안이다. 대부분의 중인은 문과를 하던 사대부 집안에서 분파되었는데, 피씨는 문과 급제자가 없다. 조선시대 양반들의 1차 시험이었던 생원 진사시의 합격자 명부 ‘사마방목’에도 피씨는 .. 2008. 7. 1.
조선후기 한양의 중인들(37)조희룡의 '호산외기'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37) 조희룡이 지은 전기집 ‘호산외기’ 사마천은 한 시대의 역사를 기록하는 방법으로 본기(本紀)·표(表)·서(書)·세가(世家)·열전(列傳)의 다섯 가지 체제를 채택했다. 본기는 제왕들의 이야기이고, 표는 도표 형식으로 사건을 기록한 것이며, 서는 제도를 서.. 2008. 6. 27.
조선후기 한양의 중인들(36)中人文學②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36) 후세에 전해진 중인들의 문학 서당 훈장인 최경흠을 중심으로 모였던 직하시사(稷下詩社)는 자신들의 창작활동보다도 중인 선배들의 생애와 업적을 정리한 공로로 더 높이 평가받고 있다. 한 개인의 시집을 출판하려면 적어도 몇백 편 정도의 작품 분량이 있어.. 2008. 6. 26.
조선후기 한양의 중인들(35)문학동인 벽오사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35) 조희룡이 만든 중인 문학동인 ‘벽오사’ 조희룡(1789∼1866)은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며 많은 중인 친구들과 사귀었다. 그런 교우관계를 통해서 보고 들은 선배 중인 42명의 이야기를 기록한 책이 56세에 저술한 ‘호산외기(壺山外記)’인데,3년 뒤에 다시 새로운 .. 2008. 6. 24.
조선후기 한양의 중인들(34)화가 조희룡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34) 직업적 화가이기를 거부한 화가 조희룡 신분에 대해 개방적이었던 추사 김정희의 제자는 여러 갈래였다. 흥선대원군을 비롯한 사대부들도 많았지만 중인 쪽에 특별히 많았다. 이상적 같은 역관 제자는 중국을 여러 차례 오가면서 새로운 문물을 전해 주었으며,.. 2008. 6. 23.
조선후기 한양의 중인들(32)조선의 운명을 바꾼 역관 홍순언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32) 조선의 운명을 바꾼 역관 홍순언 문관인 정사(正使)는 공식적인 국서를 전달하고 답서를 받으면 그만이지만, 역관은 배후에서 절충하는 일을 맡았다. 절충하는 과정에는 유창한 외국어가 기본이었지만, 때로는 금품도 오가고, 여러 해 동안 오가며 맺어둔 인맥.. 2008. 6. 19.
조선후기 한양의 중인들(31)민중종교로 번진 천주교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31) 양반의 신문화운동에서 민중종교로 번진 천주교 1791년 전라도 진산에서 윤지충과 권상연이 모친상을 당해 제사를 지내지 않고 신주를 불사르자, 천주교 신자를 어떻게 처리하느냐 하는 문제가 불거졌다. 양반층의 천주교 신자가 대부분 남인이었으므로, 탕평.. 2008. 6. 17.
조선후기 한양의 中人들(27)譯官 오경석의 외교활동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27) 역관 오경석의 외교활동 조선시대 외교의 강령은 사대교린(事大交隣), 즉 ‘큰 나라 중국은 섬기고 이웃 나라 일본과는 사귄다.’는 것이다. 외교는 예조(禮曹)에서 관장했지만, 실제적인 사무는 사역원과 승문원(承文院)에서 맡았다. 중국이나 일본에 가서 통.. 2008. 6. 5.
조선후기 한양의 中人들(25)중국통 역관 이상적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25) 열두차례나 중국 오간 역관 이상적 양반 관료들은 고유 업무가 있었으므로 일생에 한번 사신으로 가기 어려웠다. 두 차례 이상 나갔던 문인은 별로 없다. 그러나 역관들은 외국에 나가 통역하는 게 업무였으므로, 능력만 인정되면 몇 번이라도 나갔다. 외국에 .. 2008. 6. 3.
조선후기 한양의 中人들(24)서울에 中人은 얼마나 살았을까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24) 서울에 중인은 얼마나 살았을까 조선후기 전문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는 중인들은 대부분 서울에 살았다. 지방에는 중인이 맡을 관직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주민들의 신분은 호적에 가장 잘 나타나 있는데, 하버드대학의 와그너 교수가 1663년에 작성된 서울 .. 2008. 6.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