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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先人들의 智異山

■산중일기<상> 8.16일 ~ 8.29일[11]

[현대불교www.buddhapia.com/기획연재/정시한의 산중일기/'부디엔스'님의 글]

 

 

8월

16일 가끔 맑고 흐렸다. 석양으로 접어들면서 비가 내렸다
일찍 밥을 먹고 청언수좌가 길상대(吉祥臺)로부터 와서 곧 함께 출발하였다. 신은, 처민, 국림 등이 따라서 뒷봉우리에 올라갔다. 두 승려는 작별하고 갔다. 국림이 물건을 지고 당현에 도착하였다. 호열이 뒤따라 왔다. 도로 국림과 두 승려를 보냈다. 두 승려와 함께 당현을 내려와서 쌍계(雙溪)로 향하는데 산에 있는 나무들이 바람에 의해 뽑혀서 길 가운데 가로 막혀 있었다. 가로 놓인 나무 위로 걷다보니 위험한 곳이 많았다. 밭곡식이 남아 있는 곳이 없고 숲 속도 말들이 짓밟아 놓은 듯하여 보기에 참담하였다.

시냇물을 따라 10여 리를 내려오는 사이에 단풍잎이 물들기 시작하고 소나무도 울창하였다. 풍경이 맑고 고왔으며 시냇물은 검푸르고 폭포수는 깨끗해서 골짜기마다 즐길 만하였으나 그 주변에 사는 민간인들이 함부로 왕래하므로 아쉬웠다. 심사가 즐겁지 못하였다. 함께 17, 18리를 가서 신흥동에 이르러 길가에서 두 승려와 경수로 하여금 세이암(洗耳 )을 찾아보도록 하니, 한참 만에 돌아와서 말하였다. 그래서 두 승려와 시내를 건너고 산을 넘어서 신흥사 터에 이르니 아래에 큰 냇물이 있었다. 냇물을 건너려다가 짚세기가 나무가지에 걸려서 돌무더기에 넘어지는 바람에 왼발 엄지발가락의 발톱을 다쳐서 피가 흘렀다. 발을 문지르며 조금 안정시키다가 바로 천석을 건너 뛰어 혹은 산을 오르고 물을 건너기도 하여 2, 3리쯤 가니 못가에 서 있는 돌이 둘러 있는데 거기에 평평한 반석이 있었다. 반석의 높은 곳에 세이암이라는 세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글자의 크기가 말만큼 크고 글자 획이 힘이 넘쳐 흘렀다. 최고운의 글씨 같지는 않았으나 맑고 탈속한 글씨였다. 풀을 꺽고 한동안 어루만져 보았다.

두 승려가 나무를 운반해다가 다리를 만들어 주어서 드디어 그 다리를 건너 신흥사 터에 이르르니 시냇가에다 계단을 쌓아서 네모 반듯하고 평평하여 마치 천연적으로 이루어진 듯하였다. 길이가 40, 50칸 쯤 되었고 높이는 두어길 쯤 되었다. 그곳에다 4층을 만들고 철불을 두었는데 그 높이가 한발쯤 되었다. 각각 양쪽에 서서 다 보고 즉시 돌아와서 길가에 있는 홍류교(洪流橋) 근처에서 낮잠을 자고 곧 12, 13리를 가서 쌍계사(雙溪寺)의 냇가에 이르렀다. 청언이 작별하고 갔다. 평소 알고 있는 거사와 호열 등과 함께 독목교(獨木橋)를 건너서 조계문(漕溪門)으로 들어갔다. 상고(上古)의 방장실(方丈室)에 천휘와 종장 방휘가 저녁식사를 성대하게 차려서 상하의 사람들에게 주었다. 대략 35, 36리를 행하였다. 뒷방에서 유숙하는데 다리의 통증과 허리의 통증이 괴로울 정도였으나 다행히 편히 잠을 잤다. 새벽마다 기운이 조금씩 소생하였다.

17일 아침에 비가 약간 내리고 흐렸다
아침식사 후에 천휘선사와 함께 먼저 영주각(瀛洲閣), 봉내전(蓬 殿), 청학루(靑鶴樓)를 보고 동쪽에 위치한 법당 앞에 이르르니, 진감국사(眞鑑國師)의 비가 있었다. 최고운(崔孤雲)이 지어서 직접 쓴 전서(篆書)가 새겨진 비석이었는데 화재에 손상되어서 머지 않아 부서지고 말 것만 같아 애석한 생각이 들었다.

한동안 어루만지며 감상에 젖어 있다가 법당을 보니, 장엄하고 화려하였다. 새로 실시한 단청과 금벽이 휘황찬란하였다. 나한전(羅漢殿)을 지나서 영당(影堂)에 이르러 최고운의 영정을 보니, 사모를 쓰고 홍포를 입은데다 신을 벗고 기대어 앉아 있으며 모난 얼굴에 듬성듬성한 수염이 흡사 살아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진감국사와 10여 명의 조사(祖師)의 영정이 나열되어 걸려 있었다. 한동안 구경하다가 빈 누각으로 돌아왔다. 노승 의윤(義允)의 나이는 82세였고, 옥루(玉樓)는 81세였으며, 해민(海敏)은 무진생(戊辰生)이었는데 이 절의 연혁(沿革)과 고적(古跡)에 대하여 물었더니 일일이 말해 주었다.

한동안 앉아 있다가 천휘와 해민 두 승려와 함께 쌍계를 가서 보았다. 옥헌 노장이 2, 3리를 따라와서 쌍계에 도착하니 큰 돌이 좌우에 문처럼 마주 서 있었다. 길이 그 사이로 나 있는데 왼쪽에는 석문(石門)이란 큰 글자가 쓰여져 있고 오른쪽에는 쌍계란 큰 글자가 쓰여져 있는데 글자 획이 마치 살아있는 용이 날아서 움직이는 듯하고 이끼가 끼지 않아 새로 써 놓은 듯하였으며 또 전각한 흔적도 없었다. 날아 내리는 폭포수와 깊은 못이 맑아서 구경할만하였으므로 두어 번을 배회하면서 날이 저무는데도 돌아가는 것을 잊었다. 오후에 돌아오니, 방장(方丈)과 영주(瀛洲) 양실이 동서로 서로 대하고 있는데 이는 곧 고운(孤雲)과 진감(眞鑑)이 각각 한 방에 거쳐하면서 도리를 논하고 오락하던 곳이었다. 주산(主山)이 영신(靈神)으로부터 청룡이 꿈틀거리면서 60여 리를 내려오고 봉우리가 빼어나서 후봉에 이르러 더욱 치솟아 있었다. 양실이 바로 그 명당이라고 할 만한 터에 자리잡고 있었으며 양실 사이에 작은 법당이 남향을 하고 있었다. 3면에 소나무와 대나무가 둘러 있는데 몇만 개나 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마치 병속의 별천지와 같았다.

갑술년 경에 벽암당(碧巖堂)의 각성(覺性)이 창조한 것으로 동쪽에 위치한 전사(殿舍)와 법당 등 큰 집을 청룡 등가에다가 터를 마련할 즈음에 청룡을 많이 깨고 돌을 세웠다는데 평범한 안목으로 보아도 합당한 일이 아닌 듯 하였다. 그러나 어찌 모두 환히 알겠는가. 해민이 말하기를 이 달 초 4, 5일 밤에 천왕봉(天王峰) 백모당(百母堂) 덕산(德山) 등처에 내린 눈이 거의 1장이나 쌓였다. 초6일 오후부터 7, 8일까지 거센 바람이 불어 나무가 꺾이고 지붕이 걷히고 기왓장이 날라갔다. 비단 곡식들만 손해를 입은 것이 아니라 초목까지도 모두 상하였다. 생물들이 모두 다 끝장이 날 것 같다고 하니, 듣기에 참담하여 표현할 수 없었다. <발휘심경> 16장과 <독서록> 속선 끝편을 보았다. 계정이 저녁 식사를 잘 차려서 대접하였다.

18일 흐렸다
옥헌노사가 아침식사를 잘 차려서 상하의 모두에게 대접하였다. 아침식사를 한 뒤에 천휘, 민혜와 함께 출발하여 방장실에서부터 불일암으로 올라가니 원식도 따라 왔다. 대나무 숲을 헤치고 쌍계사 주봉에 올라가니 봉우리 뒤에 한 골짜기가 펼쳐져 있는데 주위의 4, 5리가 온통 대나무숲이었다. 몇리를 더 가니, 천휘대사가 하늘이 운산에 맞닿은 듯한 사이에 있는 불일암을 가리키며 알려 주었다. 마음이 상쾌 하였다.

봉우리 아래에 이르러 애써 더우잡고 올라가서 대략 6, 7리쯤 더 올라가니 지세가 조금 평평하였다. 산허리를 따라가면서 불일암을 바라보았다. 천휘대사가 말하기를 "산을 유람한 병사나 감사와 수령 및 지나는 길손이 여기에 이르러 위험한 잔교를 건너지 못하고 돌아가는 자가 태반이었다"고 하였다. 길이 끊어진 곳에 나물를 가로 놓아 잔교를 만든 곳인데 그 아래에는 다다를 지면이 없다보니 후들후들 떨리고 위험을 느끼게 되어 머리끝이 쭈삣하고 등골이 오싹하였다. 잔교 6, 7개를 지나고 언덕에 매달아 놓은 석등을 지나 겨우겨우 도착할 수 있었다.

문밖에 있는 대위에 앉아서 보니, 입석에 완폭대라는 세 글자가 있었는데 글자의 크기가 손바닥만 하고 서체도 세이암의 글씨와 아주 비슷하였다. 승려가 "이것은 고운의 솜씨가 분명하다"고 말하였다. 바라보니 폭포수가 청룡등의 향로봉 주산에서 흘러 내리는데 모습이 마치 하얀 용이 하늘에 오르는 듯하고 은하수가 아래로 드리워진 듯하였다. 오른쪽에는 청학봉이 있는데 붉은 잎사귀와 푸른 소나무가 수만 길이나 되는 철벽의 사이에 섞여 있고 일천 봉우리가 눈앞에 빙 둘러 펼쳐져 있었다. 맑은 기운이 질펀하여 몸이 삼산의 밖에 있는 듯하였다. 일찌기 이곳을 알지 못하여 이곳에서 여름철을 보내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무주암과 금류동을 생각하니 참으로 아이들의 장난과 같았다. 껄껄거리며 긴한숨을 쉬고 말았다. 문에 들어가서 암자를 보니, 한마디로 깔끔하고 정교하게 지어진 그런 암자였다. 앉아 있는 곳이 평온하니 참으로 신선들이 놀던 곳이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1천 번 듣는 것이 한번 보는 것만 못하다는 말이 새삼스러웠다. 실내로 들어가니 의복만 보이고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한동안 앉아 있노라니 승려가 와서 인사를 하는데 그가 바로 주인이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이 성욱이라고 말하였다. 나이는 병술생인데 금강산에서 6월에 이 암자로 와서 소나무잎으로 식량을 삼고 표주박 한 개와 승복 단벌로 정사를 수리하여서 장차 겨울을 지낼 계획을 하고 있었다. 사람이 정직하고 분명하여 친근감이 갔다. 모습은 20여세 쯤 되어 보였다. 경수로 하여금 밥을 짓게 하였다. 천희 등이 작별하고 간 뒤에 밥을 먹고 앉아서 경치 좋은 산을 유람한 것에 대하여 말하는데 진지하여 싫지가 않았다. 잠시 후에 쌍계사 승려 여징과 함양의 하인 애발이 함께 와서 함양태수의 서찰을 전하고 쌀 2두와 행찬 약간을 보내왔다. 또 아문의 노마와 두 사람의 관인을 보내왔다. 이는 지난번 서찰에 인마를 구하여 무주암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암자에서 오랫동안 머물 수 없게 되었다. 스스로 한탄스러운 것은 신선과 연분이 없어서 이같이 계획을 잘못 세운 것이었다. 애발을 쌍계사로 보내 그곳에서 기다리도록 하였다. 여징도 작별하고 갔다. 대략 10여리를 가니 마음과 정신이 상쾌하였다. 밤이 깊은 뒤에 비로소 잠자리에 들었다.

19일 새벽부터 종일 비가 내렸다
<발휘심경> 15장을 보고 <독서록> 상중 2편을 보았다. <황정경> 외경 하편을 보고 상권을 마쳤다. 저녁밥을 지어서 제공한 자는 성욱수좌였다.

20일 맑았다
성욱이 아침을 준비하여 상하 모두에게 대접하였다. 남은 양미 1승 정도를 남겨 두고 아침 식사 후에 수좌와 함께 뒷봉우리에 올라가서 보조의 터를 보았다. 대략 2리쯤 거리에 폭포수가 있는데 그 머리 위에는 청룡변으로 이어지는 폭포수가 석담으로 흘러 내리고 있었다. 그 아래가 곧 불일폭포였다. 향로봉과 청학봉 등이 무릎 아래의 청룡 백호가 되니, 몸에 가까운 안쪽의 용호 역시 매우 신기하였다. 갈산이 고리처럼 둘러서 비어 있거나 흠이 있는 곳이 없었다. 암자 터가 평평하고 반듯하였으며 손방에는 큰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감천이 있고 그 아래 중보조 터가 있었다. 나머지 기운이 불일암이 된 것이다. 앉아 있는 땅이 상무주암보다 높았으며 바람이 닫지 않고 양지바른 데다 과목 채전까지 있고 또 토질도 좋았다. 보통 안목으로 보아도 지리산의 정맥인 듯하여 너무 마음에 들어서 차마 떠나지 못하였다.

한동안 있다가 불일암으로 다시 내려와서 그대로 쌍계사로 내려오는데 중간에 천휘, 원식, 민혜 등이 와서 맞이하였다. 방장실에 도착하여 젖은 버선을 벗고 즉시 출발하였다. 옥헌 노장등 여러 승려가 문밖에서 작별하였다. 걸어서 냇가에 이르러 외나무 다리를 건너 몇리를 가서 말을 탔다. 민혜가 작별하고 갔다.

승통 회감이 따라와서 화계골짜기 10여리 사이를 지나는데 좌우 양쪽에 소나무와 대나무가 푸르고 인가가 이어져 있으며 깨끗하고 한가로와 보였다. 반석과 맑은 못이 굽이굽이 구경할만하였으니 이름을 헛되이 얻은 것이 아니었다. 큰 강가에 도착하여 회감과 길을 나누어 강을 따라 30리를 올라가서 강변에 있는 송정에 앉아 식사를 하였다. 강물은 넓지 않은데 돌은 많고 물살이 급하여 배를 타고 가기가 온당치 않았다. 구례현을 지나 화암동 입구에 이르니, 천석이 볼만 하였다. 문에 들어서니 불전과 요사가 늘어서 있으니 참으로 큰 사찰이었다. 법당도 굉장하고 화려하여 연곡사나 쌍계사보다 나았다. 향로전에서 유숙하였다. 불존의 승려 옥철은 정축생인데 조용하여 대화를 나눌만하였다. 승통 삼훈이 서로 만났다. 나이는 경오생이었다. 함응 수좌승 변훈은 나이가 기묘생인데 이곳에서 여름을 넘긴다고 하였다. 그를 맞이하여 밤에 대화를 나누었다. 불일암에서 대략 70십리를 행하였다.

21일 가끔 흐리고 맑았다
절에서 아침식사를 차려주었다. 아침식사 후에 옥철, 변훈, 삼훈 및 두어 명의 승려들과 함께 나한전과 시왕전 등을 두루 보고 이어서 장육불전의 터를 보니 반듯하고 넓었으며 석각인 법화경판을 장육불전 터의 뒷편 비어 있는 집에다 쌓아 놓았다. 전면에 있는 석탑은 제도가 이상하였다. 또 부도암으로 올라가 세워 놓은 부도를 보니, 기묘하여 표현하기가 어려웠다. 대개 이사찰은 연기조사가 창건한 절이며, 부도는 곧 석가의 사리를 안치한 곳이므로 조사의 석상은 탑 앞에다 두고 여인상은 탑 아래에 두어 정중하게 이고 있는 형상을 만들어 놓았다. 승려가 하는 말이 여인은 곧 일명 선각조사의 어머니 상이라고 하였고, 장육불전은 임진왜란 당시 소실되었다고 하였다. 절터가 넓고 큰 것과 석축을 높이 쌓아 놓은 것과 석탑이 높고 큰 것은 일찍이 본적이 없었던 것들이었다. 절을 화엄사라고 한 것은 경판을 보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조금 늦게 출발하여 40리를 가서 남원 상동면 운계원에 도착하여 식사를 하고 수성현을 넘어 저물녁에 응양역 마을에 도착하여 역리인 박백운의 집에서 유숙하였다. 대략 70리를 행하였다. 길에서 태익종장을 만났는데, 그는 바로 광삼법사 때에 쌍계사 소은암에 있던 자였다. 말에서 내려 잠시 대화를 나누다가 서로 작별하였다.

22일 흐렸다
일찍 응양역을 출발하여 영원치를 넘어서 운봉현을 지나 비전에 이르렀다. 그곳에 있는 비석은 우리 태조가 황산에서 대첩을 세운 사적을 기록한 비석이 있었다. 김귀영이 짓고 송인이 썼으며 남응운의 전문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경건한 마음으로 오랫동안 감상하다가 승장의 방에 들어가서 점심을 먹고 신시 미시 경에 실상사에 도착하였다. 비전으로부터 30리를 가니 양쪽 협곡이 매우 비좁았다. 태조대왕이 진을 치고 접전하여 왜인을 승리로 이끌었던 곳이라고 그곳에 사는 사람이 일일이 지적해 주었다.

운봉이 산위에 있으므로 넓고 토지가 비옥하여 흡사 화령현이나 중모현과 같았으나 지역이 중모현보다 몇 배나 크고 수구 몇백리의 사이에 산수가 서로 펼쳐져 있으므로 들이라곤 한 곳도 없었는데 운봉현에 이르러 비로서 큰 들을 보았는데 넓고 밝아서 살만하였다. 사면은 태산이 둘러 싸고 들녁이 볼 만하고 인가가 나열되어 있어서 마치 사방에 다닐 길이 없는 듯하였으나 단지 수구를 경유하여 들어가면 옛날에 무릉도원도 여기에 지나지는 않을 듯했다. 아마 지리산에서 가장 좋은 곳인 듯하였다. 냇가에 이르니 승통 정이 나와서 맞이하였다. 향로전에 이르니 불존의 담익과 화주 일행과 계오가 함꼐 와서 인사를 하였다.

승려 한 명이 와서 인사를 하였는데 그는 영휴 대사인데 파근사에서 이곳에 온지 10여일이 되었다고 했다. 대개 불상의 후정을 만들어야하므로 증명인으로 초청해 왔는데 내가 온다는 말을 듣고 바로 와서 만나게 된 것이라고 하였다. 서로 기쁘게 대하였는데 나이는 갑자생이며 귀가 어두워 말을 듣지 못하였다.

수좌승 자경도 와서 보았다. 사람됨됨이가 편안하고 자상하여 대화를 나눌만하였다. 그는 경진생이었다. 견성암의 승려 태감이 와서 서로 보았다. 밤에 그와 함께 유숙하였다. 이 날은 대략 70리를 행하였다. 절에서 저녁을 준비하여 상하 모두에게 주었다. 함양의 아노 애립과 관노 영달과 신애발 등이 말을 가지고 작별하고 떠났다.

23일 흐렸다
아침에 태감선사가 작별하고 떠났다. 영휴, 일행, 자경, 계오, 정행이 모두 와서 보았다. 무장의 승려 대방과 순천의 승려 성유가 지나면서 들렀다. 군자사의 승통 홍간과 자신도 와서 보고 갔다.

24일 흐렸다
아침식사 후에 향로전에서 출발하니, 영휴가 와서 작별하였다. 부도전에 이르러서 계오수좌의 방에서 조금 쉬고 있노라니 담익, 일행, 자경, 정행, 유원이 와서 작별하였다. 견성암으로 올라가서 계오수좌를 뒤따라 보냈다. 중도에서 사정현에 도착하니, 천인암의 수좌 능연이 와서 맞이하였다. 1백 걸음에 한번씩 쉬어가면서 견성암에 도착하니, 태감, 설청, 계초가 서로 반갑게 맞이하였다. 태감이 저녁을 차려 주었다.

천인암의 유일 노장과 지응과 유익이 와서 보았다. 숭헌 종정의 법제인 정명이 마침 와서 그와 함께 조용히 대화를 나누었다. 의전노장도 내원으로부터 와서 함께 유숙하였다. 경수가 무주암으로 가서 떨어진 버선을 가지고 왔다. 상고대 보인수좌도 보고 갔다. 이날은 대략 10여 리를 걸었고 길은 매우 험하였다.

25일 가끔 흐리고 맑았다
능연이 양미 3승을 주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암자의 승려들과 작별하고 천인암에 올라가니 암자의 승려가 반갑게 맞이하였다. 능연이 아침식사를 차려 주었다. 한창 단청을 하는 중이어서 안팎이 휘황찬란하였다. 그림을 그리는 승려 선학이 정해생인데 역사를 한지가 이미 1개월이 지났다. 이번 그믐 사이에 마칠 것이라고 하였다. 식후에 암자의 승려가 반갑게 맞이하였다. 능연이 아침식사를 차려 주었다. 한창 단청을 하는 중이어서 안팎이 휘황찬란하였다. 그림을 그리는 승려 선학이 정해생인데 역사를 한지가 이미 1개월이 지났다. 이번 그믐 사이에 마칠 것이라고 하였다. 식후에 암자의 승려와 작별하고 설청과 무주암으로 올라갔다. 정명을 추후하여 보냈는데 중간에 자겸과 석겸이 무주암으로부터 와서 동행하였다. 산에 가득한 붉은 비단과 맑고 고운 풍경과 높다란 석벽과 절벽에 서있는 단풍나무들을 걸어가면서 구경하다보니 몸이 피곤한 것도 깨닫지 못하였다. 나무 잎사귀가 피기 전에 산에 들어왔다가 지금 단풍이 어지럽게 날리고 있으니 시일이 오래 되었다는 것을 알겠다.

산에 오르니 호준, 신순, 사철, 여행, 상운 등 여러 수좌가 와서 반갑게 맞아 주었다. 손잡고 암자에 도착하니, 산과일을 대접하고 저녁을 정갈하게 차려서 대접하였다. 새벽녘에 안국사 승통 일겸과 불존암의 일잠이 와서 보고 갔다. 마을 사람들 5명이 매를 잡는다고 저녁에 올라와 응막에서 거처하였다. 이 날 대략 6, 7리를 행하였다. 설청이 저녁에 떠났다.

26일 깊은 밤부터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더니 오후가 되면서 맑게 개었다
새벽에 일어나 정장을 하고서 새벽내내 앉아 있었다. 행소를 하였다. 호준수좌가 저녁식사를 차려 주었다. 비가 온 뒤에 흰 구름이 길게 지리산의 1만 봉우리의 허리를 감돌았다. 잠깐 사이에 변화하는 형태와 산에 가득한 단풍이 맑은 구름 사이로 은은하게 비치는 것은 참으로 조물주가 얼굴을 들어내고 희극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의철수좌가 무량굴 암자로부터 와서 보고 떠났다.

27일 가끔 흐리고 맑았다
신순수좌가 아침식사를 정갈하게 차려서 상하 모두에게 먹였다. 식사 후에 서찰을 적어 경수에게 부쳐서 함양으로 보냈다. 자겸과 석겸 두 수좌가 동령하려고 마을로 내려갔다. 여행수좌가 저녁을 정갈하게 차려서 대접하였다. 흰구름의 변화하는 모습이 더욱 기이하였다. 빠진 머리카락을 땅에다 묻었다. 의철수좌와 담론을 하는데 정성스러워서 글을 볼 겨를이 없었다.

28일 새벽에 비바람이 몰아치더니 차거운 바람이 불고 눈이 내렸다. 밤에도 눈이 내렸다
상운이 아침식사를 잘 차려 주었다. 호준수좌의 상좌인 해축이 마을에서 동령을 해가지고 왔다.

29일 새벽에 눈이 내리고 바람이 불면서 추웠다
사방의 산에 눈이 하얗게 내렸다. 흐리고 추웠다. 수일 전부터 새벽에 일어나면 머리가 어지러웠다. 어제는 밤부터 침모를 착용하고 새벽에 일어나 앉아 있었더니, 머리가 어지럽고 눈알이 빙빙 도는 듯하여 거의 쓰러질 것만 같았다. 잠시 후에 안정을 찾았으나 머리와 눈이 맑지 않았고 두통증세가 있는 듯하였다.

아침에 모관을 쓰고 또 두꺼운 옷을 입고서 연일 북쪽창 아래에 앉아서 문을 열고 바람을 쏘였다. 마음은 비록 바람이 싫었지만 문을 닫지 않은 것은 억지로 앉아 있기 위해서였다. 식후에 나아가서 눈으로 덮힌 사방 산을 보았다. 매서운 바람이 마치 한겨울 같았다. 승려가 말하기를, 이달 초 6, 7, 8일에 거센 바람이 불고 눈이 내렸는데 사방 산천에 하얀 눈이 며칠 만에 다 녹았으며, 이 암자에 월초에 내린 눈이 이번에 내린 눈보다 적었다고 했다. 농사가 크게 흉년이 든 것이 경술년과 차이가 없어서 승려나 세속이 모두 보존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하니, 그 참담한 심정을 표현할 수 없었다.

두타암의 승려 공확이 왔다가 즉시 갔다. 저물녁에 도파가 온양에서 경신의 손자 혼례를 지난 21일에 치룬 뒤에 곧바로 이곳에 왔다고 하였다. 실상사에 이르러 석재를 올린 뒤에 높은 봉우리에 올라갔다. 견성암의 승려 설진과 천인암의 승려 행연 및 경복이 함께 왔는데 기력이 대단해서 인상깊었다. 행연 등은 작별하고 떠났다. 저녁 이후에 경수가 애립과 함께 와서 함양태수의 서찰을 전하고 백미 4두, 적두 5승, 마른 꿩 2수, 포 5조, 당 1과, 감장과 홍시 약간과 편지 쓸 종이 20폭을 보내왔다. 너무 많이 보내와서 마음이 매우 불편하였다. 도파와 함께 대화를 하다가 거의 한밤중이 되어서야 잠자리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