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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先人들의 智異山

■산중일기<상> 7.16일 ~ 7.30일[9]

[현대불교www.buddhapia.com/기획연재/정시한의 산중일기/'부디엔스'님의 글]

 

 

7월

16일 맑았다
남암(南菴)의 승려 지한(智閑) 등 3인이 와서 일계의 물건들을 지고 갔다. 일계의 상좌 탁습(卓習)이 와서 물건들을 지고 갔다. 각담(覺湛)이 그의 상좌 정심(正心)으로 하여금 아침을 잘 마련하여 상하 모든 사람을 대접하였다. 명안이 저녁 식사를 잘 차려 상하 모두에게 대접하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발휘심경> 상하 20여 장을 보고 <독서록> 하편을 보았다. 명학이 와서 보고 갔다.
연곡사 동구에 사는 양반 선필천(宣必遷)이 쌀을 빌리려 암자에 와서 좌수 김치형(金致形)이 나의 죽관(竹冠)을 사겠다고 말하고 오는 20일까지 회답을 보내면서 죽관값을 보내겠다고 약속하고 죽관을 가지고 갔다. <황정경> 내경 3장을 보고 편지 두 장을 썼다.

17일 흐렸다
아침식사 후에 금류동 승려 희안이 와서 보고 갔다. 길상암(吉祥菴)의 노승 효이(曉 )가 와서 물건들을 지고 갔다. 대개 이 암자에서 겨우 옮겨 간 자들이다. <발휘심경> 21장을 보고 <독서록> 속선 종편과 황정 내경 6장을 보았다. 입이가 저녁을 먹은 뒤에 안국사 승통 일겸(一謙)과 첨지사(僉知寺) 승려 충간(沖侃)이 와서 함양태수의 서찰을 전하였다. 함양태수가 콩 2두, 진말(眞末) 1두 소금 1두와 베로 만든 홑바지 한 벌을 보내왔다. 두 승려가 먼 곳에서 재를 넘어 찾아왔으니 진중한 뜻을 높이 사는 바이므로 마음이 매우 편치 않았다.

18일 흐리고 안개가 끼었다
저녁부터 비로소 개소(開素)를 하였다. 아침식사 후에 입이가 실상사(實相寺)로 갔다. 대개 영기(靈機)수좌가 고향편지를 받아온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일전에 함양 관노 편에 입이로 하여금 가져 오라고 했더니 가져 오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 가서 가져왔다. 또 서책과 약간의 물건들을 무주암(無主菴)에 붙여 보낸 것은 다음달에 무주암으로 돌아가려고 그런 것이었다. 충간은 다시 가고 일겸은 유숙하였다. 편지 4장을 썼다. 저녁을 먹은 뒤에 일겸과 함께 수월암(水月菴)에 가서 보니, 암자가 무너진 곳이 많았다. 주변의 석대나 나무들도 대부분 풍우에 꺾여서 보잘 것이 없었다. 연곡사 비전(碑殿)의 승려 수확(守確)이 왔다가 바로 갔다. 한글 편지 3장을 썼다. 경천이 연곡사로 갔다.

19일 맑았다
경천이 돌아왔다. 편지와 경험방(經驗方)을 합하여 5, 6장을 썼다. 편지 7, 8장을 썼다. 입이가 실상사로부터 돌아왔다. 그러나 영기는 돌아오지 않았다고 하였다.

19일 맑고 가끔 흐렸다. 오후에 비가 조금 내렸다
지리산 금강대 암자 곁에 있는 양진암(養眞菴)의 노장 각담(覺湛)이 자주 와서 만났다. 경천 노장이 연곡사에서 돌아왔다. 암자의 승려가 표고버섯을 따가지고 왔다. 입이가 운봉(雲峰)에 있는 실상사로부터 와서 말하기를 영기와 천정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으므로 추본 가서(家書)를 얻지 못하고 그냥 돌아왔다고 하였다. 고향편지 7, 8장을 써서 봉하였다.

20일 수일 전부터 서늘해져 지금은 점점 추워지고 있다
아침에 서찰과 물건들을 입이에게 붙혀서 원주로 돌려보냈다. 또 함양태수에게 답장을 보냈다. 안국사 승통 일겸도 작별하고 떠나는데 입이와 함께 동행하였다. <발휘심경> 12장을 보고 <독서록> 수편을 보았다. 선필천이 죽관을 사지 않는다고 돌려보냈다. <황정경> 내경 3장과 외경 상편을 보았다. 경수가 얻어 온 포목 1필을 다듬이질 하였다.

21일 맑았다
일계와 두 명의 어린아이가 남암으로 옮겨갔다. 근삼과 수확이 와서 보고 갔다. 길상대 승려 정안(淨眼)이 와서 보고 갔다. 거사 서경신(徐慶臣)을 만났다. 연곡사 비전의 승려 혜식(慧識)과 금선대(金仙臺) 승려 지찬(智贊)이 둘러보고 갔다. <발휘심경> 26장을 읽어서 상편을 끝마쳤다. <독서록> 중편과 <황정경> 외경 중편을 읽었다. 정심(正心)이 경수의 바지를 지어주었다. 명안이 처음으로 경수의 홑옷 장의(長衣)를 지었는데 완성하지 못하였다. 승려들이 국수를 준비하여 상하의 모두에게 대접하였다.

22일 맑았다
해송자(海松子) 2승을 쪼갰다. <발휘심경> 하권 35장을 보았다. <독서록> 하편과 <황정경> 외경의 하편을 읽고 상권을 마쳤다.

23일 맑았다
<발휘심경> 25장을 보았다. 금강대에서 양진암까지 120여 보의 거리였다. 아침 식사 후에 재차 다녀왔다. 저녁을 먹은 뒤에 세 번을 다녀왔다. <독서록> 속선 종편을 보고 <황정경> 오장도와 도장초심신론(道藏抄心神論)을 보았다. 경수가 암자의 승려 3인과 함께 표고버섯을 따가지고 왔는데 겨우 1두 남짓되었다.

24일 맑았다
버섯을 말렸다. 화엄사의 계담(戒湛), 추언(樞彦), 민련(敏聯)이 지나면서 들렸다. 암자의 승려 5인이 방목(房木)을 잘랐다. 아침식사 후에 양진암을 세 번 다녀왔다. 저녁을 먹은 뒤에도 또 세 번 다녀왔다. <발휘심경> 끝편을 보았다. 희안이 와서 보고 갔다. <독서록> 수편을 보았다.

25일 맑았다
행소(行素)를 시작하였다. 발을 씻었다. 바람이 차가웠다. 경수의 홑옷을 다 지었다. <발휘심경> 처음부터 26장을 읽었다. 잡물을 챙겨서 경천노사에게 나누어 주었다. 칠불암(七佛菴)의 승려 탁명(卓明)이 왔다가 즉시 갔다. 그는 정심의 상좌이다. 아침식사 후에 양진암을 세 번 다녀왔다. 저녁식사 후에도 세 번 다녀왔다. 각담 노장이 양미(糧米) 3승을 주었다. 승매(承梅)가 품질이 좋은 표고버섯 두어 되를 주었다.

26일 맑았다
밤에 일어나 앉아 졸기도 하면서 새벽을 지샜다. 길상대의 효이와 선혜가 와서 잡물을 운반해 갔다. 명학이 지나면서 보고 갔다. <발휘심경> 7장을 보았다. 아침식사 후에 양진암을 세 차례 다녀왔다. 경천 노장이 금선대에 갔다가 저녁에 돌아왔다.

27일 맑았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행장을 꾸렸다. 묘원(妙圓)은 양미 3승을 주었고, 명안(明眼)은 1승을 주었다. 아침식사를 마친 뒤에 암자의 승려와 서로 작별을 하였다. 각담 노장은 아쉬워하면서 차마 작별을 하지 못하고 수십 보를 따라 내려왔다. 경천 노장은 경수와 함께 짐을 나누어 지고 석등 80여 층을 내려와서 쉬었다. 10여 순을 대나무 숲 사이로 가면 시내가 있고 그곳에는 폭포수를 구경할 수 있었다.

반석에 앉아보니 해가 아직 정오가 되지 않았다. 길상대 암자의 효이, 청언, 선혜 정안, 해철은 모두 구면이어서 서로 반갑게 대하였다. 암자의 터가 산 중턱에 있어서 앞 시내를 굽어볼 수 있었다.
연곡사 조계문에 이르니, 회나무와 대나무가 숲을 이루고 암자는 넓었으며 단청이 찬란하여 참으로 화각보당(華閣寶堂)이라 할 만했다. 잠시 앉아 있노라니, 근삼이 순천(順天)에서 지나는 길에 들어와서 잠시 후에 작별하고 떠났다. 경천노사도 다시 갔다. 희안은 금류동 암자로부터 와서 보고 갔다.

대략 10여 리를 가서 금강대를 돌아 보니, 아득한 1만 길의 봉우리가 마치 구름사이에 있는 듯하였다. 아쉬운 생각에 슬픈 마음이 들어서 그 감정을 표현할 길이 없었다. 금강대는 볼 만한 곳이 없었으나 앉아 있는 곳에는 상쾌한 기운이 있었으며 백호변으로 곧장 100여 걸음을 올라 가면 양진암이 있었는데 그 터가 절묘하였다. 동남쪽에 맛이 좋은 샘이 있었다.
안산으로 방정산(方正山)과 백운산(白雲山)이 나열되어 있으며 눈아래 만학천봉(萬壑千峰)이 빙 둘러 있고 아침 저녁으로 구름과 안개가 1만 가지 형상으로 변화하니 시야의 광활함은 비할 곳이 없었다. 속세가 멀어서 마치 신선 세계와 같은데도 승려나 속객은 다 그 오묘한 이치를 알지 못하였다. 유독 각담 노장은 나이가 73세인데 거짓 미친 체하고 함부로 행동하니, 사람들은 그에게 도가 있는 줄을 알아 차리지 못하였다. 윤판옥을 지어놓고 혼자 거처하면서 수련한지가 이미 10여 년이나 되었는데 다리가 아프다고 하면서 가벼운 운동도 하지 않았다. 식후에 걸음도 익힐겸 하루에 4, 5번씩 찾아갔더니 오래 지난 뒤에 마음을 터 놓고 허심탄회한 토론을 하였다. 작별하기에 앞서 은근한 정이 있었고 헤어지기 아쉬워 하는 마음도 있었으니, 그 땅과 사람이 이 면내에서는 제일이었다.

<발휘심경< 6장을 보았다. 조전암에서 유숙하였다. 승려가 저녁을 준비하여 상하 모두에게 대접하였다. 식후에는 냇가에 다녀왔다.

28일 맑았다
아침식사를 한 뒤에 냇가에 다녀왔다. 절에서의 거리는 555보였다. 경수가 금선 법왕사 암자에 갔다. 연곡사의 방장 여인(如印) 노장은 갑인생이고 희감(希鑑)은 갑술생인데 두 사람이 와서 보고 곧 갔다. 경수가 돌아왔다. 저녁을 먹은 뒤에 냇가에 다녀왔다. <발휘심경> 31장을 보았다. 정안이 물건을 운반하려고 나갔다. 효의가 나와서 침굉당(枕肱堂)의 필적과 시를 보여주고 또 저의 시와 모(芼)의 시를 보여 주었다. 모는 그들 중에서 뛰어난 자였다. 침굉시 한 장을 구하여 도항(道恒)에게 보여 주고자 하였다. 희안이 와서 보고 갔다. 일명은 성도(成道)라고 하였다.

29일 맑았다
경수가 아침식사 후에 금강대로 가니 각담과 경천 노장이 갖가지 채소와 과일을 가지고 왔다. <발휘심경> 20장을 보아 상권을 마치고 또 하권 11장을 보았다. <독서록> 중편을 보았다. 저녁을 먹은 뒤에 앞 냇가에 가서 발을 씻고 돌아왔다.

30일 맑았다
군자사 승려 법안(法眼)이 와서 보고 배를 대접하였다. 저녁을 먹은 뒤에 돌아갔다. <발휘심경> 24장을 보았다. 저녁을 먹은 뒤에 연곡사에 가서 비전에 있는 선각선사(禪覺禪師)의 비문을 보았는데 빗돌이 깨진지가 지금 7년이 되었다. 사찰이 웅장하고 화려하였다. 영자전(影子殿)에는 진감국사(眞鑑國師) 이하 10여 명의 영정(影幀)이 걸려 있었다. 기이하고 고상하여 볼 만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또 여러 부도(浮屠)를 보았다. 길에서 정안을 만나 함께 돌아왔다. 또 희안을 만났는데 1명은 성도라고 하였다. 암석 위에 앉아서 잠시 대화를 나누다가 서로 작별하였다.

암자에 이르니, 명안이 또 산음(山陰)에 있는 지국사(智國寺)로 들어갔다. 승려 처인(處仁)의 나이가 28세인데 사람 됨됨이가 조용하여 대화할 만하였다. 지성(智性)의 나이는 39인데 비전에서 만나 부도가 있는 자리까지 함께 가서 오랫동안 앉았다가 갔다. 본사의 승려 학의(學儀) 노장이 중간에 대략 10여 리를 따라와서 전송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