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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先人들의 智異山

■산중일기<상>윤4.16일~ 4.30일[3]

[현대불교/기획연재/부디엔스]

 

 

윤사월

16일 가끔 흐리고 맑았다.
아침식사 후에 석겸과 경수를 도솔암으로 먼저 보냈다. 이윽고 사철(思哲)과 삼응(三應)이 묘적암(妙寂菴)과 무주암(無主菴)으로부터 내려오고 요열도 와서 두 수좌와 함께 갔다. 요열이 작별하고 갔다. 유양현(逾兩峴)에 올라가서 바라보니 사철(思哲) 수좌가 얻은 절터가 아늑해 보이고 서 있는 돌들이 괴이한 것이 많았다. 잠시 살펴보고 나무 그늘 아래로 내려와 도솔암(兜率菴)에 이르니 의철이 먼저 와서 방을 너무 따뜻하게 해 놓았다.

저녁을 먹은 뒤에 삼응(三應)의 상좌인 상현(尙玄)이 해인사로부터 뒤따라 오면서 음식을 가지고 왔다. 그곳에서 함께 유숙하였다. 이날은 대략 20여리를 행하였다.

17일 가끔 흐리고 맑았다. 저녁에는 비가 내렸다.
아침식사 후에 의철, 상현과 작별하고, 사철 삼응 석겸 경수 등과 함께 도솔암(兜率菴)에서 출발하여 주봉으로 약 5리쯤 올라갔다. 산마루의 석벽에 길이 없는 곳으로 15여리쯤 올라가서 반야봉(般若峰) 응막(鷹幕)에 이르러 점심을 먹은 다음, 청옥채(靑玉菜) 한 묶음을 채취하였다. 제일 높은 봉우리에 올라가니 운산(雲山)과 바다가 아득하게 보였다.

동쪽 남쪽 서쪽을 바라보니 바다와 하늘이 서로 맞닿은 듯하고 운하(雲霞)가 일어났다가 사라지곤 하였다. 계룡산(鷄龍山)과 속리산(俗離山)과 가야산(伽倻山) 등 여러 산이 눈 아래에 펼쳐져 있으니 참으로 이 세상에 기이한 광경이엇다. 산 위의 수십리에 철쭉꽃이 만발하였는데 나무의 크기는 한 웅큼되고 높이는 4, 5장쯤 되었다. 붉은 꽃과 하얀 꽃이 회나무 숲 사이에 서로 비치니, 걸으면서 구경하는데 기이한 꽃과 특이한 풀은 일찍이 못보던 것들이어서 응접할 겨를이 없었다. 겸하여 고봉준령(高峰峻嶺)에 올라가서 바라보니 석각이 솟아 있고 길은 비할 데 없이 험하였으나 몸이 피곤하거나 발이 무거운 줄을 몰랐다. 해가 지려할 때에 칠불암(七佛菴)에 도착하니, 수좌승 해청(海淸)과 승당승 광삼(廣森) 등이 맞이하였다. 해청이 저녁을 차려 주었다. 사람이 명석해보여 사랑스러웠다.

암자가 무너져가는데 해청이 차례로 중건할 것이라고 하는데 다 조리가 있었으나 쉬운 일이 아닌 듯했다. 석겸과 함께 승당에서 유숙하였다. 그 방의 형태는 높낮이가 고르지 않았으나 정정방방하여 따뜻한 것이 알맞았는데 그 이유를 끝내 알지 못하였다. 사철, 삼응과 선당(禪堂)에서 유숙하였다. 이날은 대략 40여리를 행하였다.

18일 아침에 비가 내렸다. 조금 늦게 간혹 개었다가 흐렸다.
조전(祖殿)에 89세 된 수좌가 있다고 하기에 곧바로 가서 보니, 법명은 광오(廣悟)이고 혼자 방 하나에 거쳐하면서 자취를 하고 있었다. 기력은 60여세된 사람과 같은데 눈이 어둡다고 하였다. 그러나 치아는 상하지 않았고 말소리도 잘 듣는 편이었다. 아침을 먹은 뒤에 나를 맞이하여 함께 금륜암(金輪菴)으로 갔다. 사철(思哲) 대사등 세 사람과 광삼(廣森), 광오 노장과도 함께 가서 금륜암, 은암(隱菴), 통일암(通一菴) 등의 암자를 보고 이어서 칠불암(七佛菴)의 도량을 두루 살펴 보니, 회나무와 잣나무가 빙둘러 있고 산세가 끌어안은 듯하니, 헛이름을 얻은 것이 아니고 명당이라고 말하는 것도 낭설이 아니었다.

사철(思哲)과 삼응(三應)은 다리가 아파서 가지 못하고 암자에 머물러 있기로 하였다. 암자들이 승려가 없음으로 해서 퇴락하는 것을 면치 못하니 안타까운 일이었다.

19일 흐리다가 밤에 비가 내렸다.
아침식사 후에 사철(思哲) 등은 돌아가고 석겸, 경수 및 광삼(廣森)등 두 승려와 함께 칠불암(七佛菴)에서 출발하여 재를 하나 넘고 20리쯤 가서 금강대(金剛臺)에 이르렀다. 그곳에서 잠시 앉았다가 몇 리를 더 가서 오향대(五香臺)에 도착하니, 그곳의 승려 청언(淸彦)이 저녁을 차려 주었다. 한동안 앉았다가 쌀 3두 5승을 바꾸어 가지고 수백 보를 가서 금유동암에 도착하였다. 골짜기가 깊고 폭포수가 세차게 흐르니 맑은 기운이 감돌았다. 암자가 정교하고 유벽한 것이 심하여 왕래하는 유람객과 승려가 드물었다. 실로 바라던 곳이어서 그대로 그곳에서 오랫동안 머무를 계획을 세웠다. 광삼 등은 곧 돌아갔다.

석겸과 유겸(留謙)은 사람이 신실하고 매우 정성스러워서 사는 곳마다 손수 반찬을 준비하곤 하였다. 그에게서 친구와 같은 정을 느꼈다. 암자에 있는 승려 보정(普晶) 설종(雪宗) 근삼(勤三) 새진(璽眞) 네 사람은 모두 나이가 젊었다. 저녁을 차려 놓았으나 먹지 아니하고 반석에 나아가서 앉아 승사(僧舍)를 두루 보았다. 조전의 방에서 유숙하였다.

20일 새벽부터 비가 내렸다.
오향대(五香臺)의 승려 명학(明學)이 와서 보았다. 석겸(釋謙)이 떨어진 버선을 꿰매어 주었다.

21일 가끔 흐리다가 개었다.
석겸(釋謙)이 돌아갔다. 재차 오향대(五香臺)에 다녀왔다. 돌아오는 길에 청언(淸彦)과 잠시 대화를 나누었다. 본암의 승려 보정(普晶)과 설종(雪宗)이 상암사(上菴寺)에 있는 그의 은사에게 가고, 안음(安陰)에 있는 영각사(靈覺寺)의 승려 선휘(善徽)가 지나면서 들렸다.

명학(明學)이 와서 유숙하였다.

22일 흐렸다.
객승 두 사람이 돌아갔다. 아침식사 후에 오향대에 다녀왔다. 명학이 저녁을 차려놓고 와서 불렀다. 또 가서 저녁을 먹고 돌아왔다. 명학이 와서 유숙하였다. 이 암자에 있던 승려로 전에 나갔던 희안(希眼)이란 자가 돌아왔다. 새진(璽眞)은 돌아오면서 죽순을 캐가지고 왔다.

23일 하루종일 비가 내렸다.
희안(希眼)이 아침식사를 준비하였다. 보정(普晶)과 설종(雪宗)이 비를 무릅쓰고 돌아왔다.

24일 아침에는 흐리고 오후에는 개었다.
삼일암(三日菴)의 승려 선혜(善慧)와 오향대의 승려 명학(明學)이 와서 보고 갔다. 저녁을 먹은 뒤에 희안(希眼)과 함께 금강대(金剛臺)에 다녀오면서 오향대를 들렸다가 왔다.

25일 흐리고 가끔 맑았다.
아침식사 후에 보정(普晶)과 함께 삼일암(三日菴)으로 갔다. 삼일암은 금류동 서남쪽으로 대략 몇리쯤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으면서 백운산(白雲山)을 안산으로 하고 있었다. 두치강(頭峙江)은 백운산 안에 있었다. 운하(雲霞)가 만학천봉(萬壑千峰)의 사이에서 명멸하고 암자 주변에 회나무와 잣나무가 푸르고 꽃나무와 대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었으며, 측백나무와 노송이 사이사이 서 있어서 암자가 정초하였다. 바위에서 배회하다가 숲 사이에 있는 누대로 올라갔다. 그 곳에서 한동안 바라보다가 다시 폭포수 아래로 내려와 오랫동안 반석에 앉아 있었다. 암자에 이르러 희안(希眼)과 함께 서처사(徐處士)의 모정(茅亭) 터를 둘러보니 격세지감이 들었다. 날마다 반석에 나와 앉아서 폭포수를 바라보았다.

26일 아침에 비가 내릴 듯하였다. 흐리고 가끔 맑았다.
아침식사 후에 1천 걸음을 걸어서 이 절로 왔다. 새벽에 일어나 마른 목욕을 하고 나서 잠명(箴銘)을 읽었다. 아침식사 후에는 반석으로 가서 폭포수를 구경하기도 하고 여러 암자를 다녀 오기도 하였다. 대략 1천여 걸음을 걸은 뒤에 잠명 10여장을 읽고<선경(仙經)>을 보다가 졸리면 두어 장의 휴지에다 글자 연습을 하였다. 저녁을 먹은 뒤에도 그렇게 하였다. 날이 갈수록 마음이 더욱 차분해지고 기운도 날이 갈수록 더욱 편해졌다.

거처하는 곳이 조용해서 오른쪽에는 폭포를 구경할만한 반석이 있고 왼쪽에는 도류(道流)를 말할만한 사찰이 있고 또 일과로 삼을 일이 있으니, 여기에서 몇 년 동안 머물면서 날마다 이렇게 한다면 사물밖에 해맑은 복이라 할 수 있겠으며, 혼탁한 마음을 말끔히 씻어 버리는 소망이 있을 것인데, 하늘이 과연 나의 소원을 이루어 줄지 모르겠다.

금강대(金剛臺)의 승려 경천(敬天)이 와서 보고 갔다. 저녁을 먹은 뒤에 금강대를 다녀왔다. 설종(雪宗)은 보리를 빌러 나갔다. 보정(普晶)은 밥을 잘 짓고 찬도 정갈하게 만들었다. 마음을 다하여 대접하기를 자기 은사와 차이가 없이 하였다. 오향대(五香臺)의 수좌 명학(明學)은 인자한 마음이 있어서 날마다 채소를 갔다 주었으며, 맛좋은 음식을 얻으면 반드시 가져와서 먹게 하였다. 금강대의 승려 경천(敬天)도 미나리 생채를 자주 가져다 주었다. 좋아하는 마음이 일반인과 달랐다.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사양하였지만, 받아주지 않으니, 도리어 민망하였다.

27일 가끔 흐리고 가끔 맑았다.
아침식사 후에 삼일암(三日菴)에 가려고 공루(空樓)로 나갔다가 바위 사이로 난 돌길을 바라보니, 태남과 입이 등이 짐을 지고 왔다. 그들을 맞아 집안 소식을 물어보고 셋째 아들 도진이 병이 점점 심하다는 것을 알고나니 마음에 걱정이 되어 아침식사도 하지 못하였다. 서신을 다 보고 곧바로 반석에 내려가 걷다가 앉아있다가 하면서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암자로 돌아왔다. 경천도 와서 보았다. 함양태수가 관리를 보내는 편에 서신을 붙이고 또 백미 3두와 마른 고기와 곶감과 반찬 등의 음식물을 보내왔다. 당황스런 마음이 들어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하루종일 멍하니 앉아 있었다. 군자사의 승려 능열이 인편을 데리고 오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화기가 올라 눈이 어두웠다. 저녁을 먹은 뒤에 삼일암에 다녀왔다.

28일 가끔 흐리고 맑았다.
하루종일 편지를 썼는데 눈이 어둡고 기운은 없었다.

29일 가끔 흐렸다.
밤에 편히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아침에 군자사의 승려 능열과 관인이 편지를 받아가지고 돌아갔다. 아침식사 후에 입이와 태남이 고향 편지를 받아가지고 함양에 들렀다가 원주로 가기로 했다. 오향대에 다녀왔다. 오후에 몸이 좋지 않아 낮잠을 잤다. 객승 종선과 희선이 왔다. 저녁을 먹고 나서 청언이 와서 보았다. 희안 및 객승 청언 등과 함께 삼일암으로 갔다. 돌아오는 길에 시냇가에서 폭포수를 구경하였다. 반석에 앉아 있었더니 기운이 조금 들었다.

30일 아침에 비가 내렸다. 흐리고 가끔 맑았다.
재차 오향대를 다녀왔다. 금강대의 노장 경천이 채소를 갖다 주고 갔다. 기운이 없어서 잠을 편히 자지 못하였다. 금류동에서 오향대까지의 거리가 353보이니 다녀온 걸음을 합하면 706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