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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先人들의 智異山

■산중일기<상> 4.10일~ 4.29일[1]

4월 10일 맑음


정특이 아침을 준비한다기에 사양하였으나 한사코 차려내었다. 덕유산으로 가고 싶어서 행장을 꾸려 출발하려 하는데, 시숙의 병 증세가 일정하지 않아 음식맛을 잃고 정신마저도 온전하지 못하므로 부득이 절에 남아서 몸조리를 하도록 하였다. 또 경수와 여자도 머물게 하였다.

 

그리고 본사로 갔더니, 함허당에 있는 종장 담화가 와서 보고 출타하였다가 이제서야 돌아왔다고 말하고, 또 지리산 백련암에 머물고 있는 종장인 승현이 마침 왔다고 하므로 함허당을 지나가면서 들러 잠시 동안 앉아 대화를 나누었다.

 

본사의 승려인 윤일과 정익과 상헌과 승현은 문 밖에서 전송하고 담화와 윤학과 삼보승 사헌이 멀리 동구 밖까지 전송하였다. 석교를 건너 몇리를 가니, 혜원 종장과 탁린과 인현이 재 아레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말에서 내려 한동안 대화를 나누다가 아쉬운 작별을 하고 마장령을 넘어가는데 재가 매우 길어서 거의 15리쯤 되었다. 말이 점점 다리를 절며 가지 못하므로 부득이 20리쯤 갔다가 돌아왔다.

 

입이를 해인사로 보내 시숙더러 절에 남아서 노마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함께 원주로 가서 경수와 여자를 데리고 거창 땅에 있는 가조현으로 뒤따라 오도록 하였다. 그리고 혼자서 태남과 함께 병든말 및 복마를 몰고 타기도 하고 걷기도 하면서 볓리를 가니, 말이 서서 가지 않았다. 태남을 먼저 가조현으로 보내 마을에서 유복할 집을 물색해 두고 복마를 끌고 마중을 나오게 하였다. 혼자 걸어서 10여리를 가서 용산이란 마을에 이르러 서달영이란 젊은이를 만났는데, 나이는 18세였고 사서 삼경을 다 읽었다고 하였다. 사는 곳이 어디냐고 물으니 가조현에 산다고 하였다. 그와 함께 동행하였다. 태남이 말을 가지고 와서 서달영을 작별하고 주인집에 오니, 말이 누워서 일어나지 못하였다.

 

나역시 잠자리에 들었으나 몸이 몹시 피곤하였다. 잠을 깨고 나서도 정신이 어지럽고 기운이 없었다. 해인사에서 가조현에 이르는 동안 대략 40리쯤 간 듯한데 도보로는 15리쯤 걸었다. 저녁 무렵에 입이와 경수가 나귀를 타고 왔다. 저녁에는 수교반을 조금 먹었다.

11일 맑고 흐림. 저녁에 비가 올 듯함.


새벽에 일어나서 마른 목욕을 하였더니 기운이 다시 돌아왔다. 수교반을 조금 먹고 병든 말과 입이를 남겨둔 채 나귀를 타고 아침에 출발하여 거창 읍내에 도착한 다음, 아침 밥을 먹고 사근역에서 말을 먹였다. 저녁 때에 함양읍 천서서원이 있는 마을에 김후달의 집에 도착하니, 현감 심도명이 와서 보고 심민도 따라 왔다. 현감과 함께 유숙하였는데 황홀하기가 마치 꿈결처럼 기뻐서 할 말을 잃었다. 대략 100리 쯤 가서 괴산으로부터 화령에 이르러 양쪽 협곡 사이로 들어가니 개간한 들이라곤 없었다.

 

화령으로부터 상주읍내를 지나 무량동에 이르니, 산은 밝고 들은 넓어서 마치 별세계가 있는 듯했다. 또 중모현에 이르니 화령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중모를 경유하여 금산과 황간의 경계를 지나서 직지사와 쌍계사와 해인사 등 140, 150리 간에 두 협곡이 매우 좁았다. 거창에 있는 가조현에 도착하여 비로소 평야에 물을 대고 농사짓는 것을 보았다. 마을이 서로 인접해 있었다. 함양읍은 더욱 성대하고 큰 냇물이 빙 둘러 흐르고 나무들이 숲을 이루었다. 성 안팎의 마을이 서로 인접해 있었다. 최고운이 일찍이 이 고을을 맡았으므로 이 서원이 있게된 것이라고 하였다.

12일 맑음
현감이 아침에 관아로 갔다가 저녁에 다시 와서 함께 유숙하였다. 읍내에는 평소 수재가 있었으므로 해마다 냇물의 뚝을 막아야 했다. 민부와 승도들을 징발하여서 내일 처음 역사를 시작할 예정이므로 읍내가 상당히 소란스럽다고 하였다. 여러 절에서 승도들 10여명이 와서 보았다.

13일 아침에 비가 조금 내리다가 개고 바람이 불었음
아침에 서원을 배알하니, 최고운과 김점필을 함께 배양하였다. 심원록에다 이름을 적었다. 별장 심민과 이은대에 올라가니, 이대는 곧 김점필이 함양태수가 되었을 때에 대를 쌓고 정자를 지어 유람도 하고 독서도 하는 것으로 명명한 것이었다. 곧 읍사를 굽어보니 큰 들이 펼쳐져 있고 산들이 둘러 싸고 있어서 읍중에 자리가 가장 좋았다. 식사 후에 또 심민과 함께 서계로 갔는데 5리쯤 가니 반석에 폭포수가 흐르는 경치 좋은 곳이 있었다. 바위 사이에는 철쭉꽃이 만발하여 붉고 하얀 색이 서로 비추므로 피곤한 것도 있고 구경하였다. 벼랑끝 바위에 앉아서 보니 위와 아래가 몇리쯤은 될 듯했다. 발을 씻고 두건도 빨았다. 시냇물을 건너 뛰다가 신과 버선을 적시기도 하였다. 오후에 거처로 돌아오니, 태수가 약간의 찬을 보내왔다. 태수가 아침에는 역사를 감독하기 위해 가고 저녁에는 돌아와서 함께 유숙하였다.

14일
아침에 태수와 작별하고 입이와 말 2필은 남겨둔 채 관아의 말과 관노 2명을 얻어서 출발하여 삼현을 넘어서 산허리를 따라 30여리를 갔다. 오후에 안양사에 도착하였는데 길이 험하고 경사가 심하여 숨가쁘게 행하였다. 몸이 좋지 않았다. 절이 높은 산 위에 있어서 지세가 가파르고 암석 사이에 터를 잡아 놓았는데 지리산으로 안산을 하고 있었으나 볼만한 경치가 없었다. 단청도 하지 않았는데 장차 옮길 계획이 있다고 하였다. 반나절을 쉬면서 조리하였다. 절에 있는 승도가 후하게 대접하고 저녁도 정갈하게 차렸다. 경산 중흥사의 승려 신행이란 자가 있는데 나이는 31세였다. 그가 말하기를 진사 김창흡과 함께 산을 유람한 적이 있다고 하면서 그 시와 영상, 좌상, 남 판서, 최 부제학 등 여러 재신의 시를 보여 주고 또 그 집안이 대대로 청백한 가문이라고 하였다. 그는 곧 배삼익의 증손으로 문얼에 의한 변을 만나 부모와 형제를 모두 잃고 승려가 되었다고 하였다. 푹 자고 아침에 일어나니 기운이 났다. 대개 수일 전부터 감기 기운이 있었으므로 몸이 평상시와 같지 않았다. 절에 도착하였다가 곧바로 돌아와서 관마 1필과 태남을 함양 관아로 보냈다. 저녁에 내린 비가 밤이 깊을 때까지 내렸다.

15일 비가 그침
흰구름이 동부에서 일어나더니 변화하는 형태가 만가지 형상을 연출하였다. 명멸하는 광경을 굽어보고 있노라니 때로는 처마에 두르기도 하고 옷자락을 적시기도 하였다. 조금 늦게 쩔뚝거리는 말로 장차 출발하려 하자, 승려가 남여(藍輿)를 제공하였다. 굳이 사양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신행과 작별하였다. 해상과 학명이란 승려가 걸어서 5, 6리를 내려왔다. 땀이 흘러 흠뻑 젖었다. 평평한 길에 이르러 나귀를 타고 또 6, 7리를 가니, 양쪽 산이 치솟아 있고 길이 산 허리에 있었다. 굽어보니 폭포수가 우레와 같고 맑은 못처럼 보였다. 철쭉꽃이 양쪽 언덕에 피어서 경치가 보기 좋았다.

 

나귀에서 내려 좌려암과 삼성대를 보고 용유당에 이르니, 하얀 돌이 한 골짜기 수백리 사이에 어지럽게 솟아 있었다. 물소리가 땅을 흔들어 우레소리처럼 은은하게 들리고 냇물은 검푸른 빛으로 깊어서 모래톱이 없었다. 겁이 나서 가까이 가지를 못했다. 좌우에 붉은 꽃이 가득 피어 있고 바위의 상하에는 신룡이 감고 뒹군 흔적이 있었다. 특이한 모습이었다. 화산의 용유동에 이르니 서로 장점이 있었다. 느린 걸음으로 오르내리면서 한동안 구경하였다. 관아에서 빌려온 말과 관인이 절벽으로 굴렀으나 가로놓인 나무에 걸려서 가까스로 죽음을 모면하였다.

 

두 승도를 도로 보냈다. 오후에 군자사에 이르니 승려가 꿀물과 곶감을 대접하였다. 저녁 식사를 하고 향로당 전이의 방에서 유숙하였다. 법당과 13개의 불전을 두루 보았다. 태남이 돌아와서 함양 태수의 서찰을 전하였다.

16일 흐림
몸이 좋지 않아 낮에 한동안 졸았다. 저녁을 먹은 후에 남여(藍輿)를 타고 금대암으로 종장인 대오를 찾아갔으나 만나지 못하였다. 도로 안국사 향로전 불존 일잠의 방으로 가서 유숙하였다. 군자사에서 승려 선보를 보내와서 돌아오려 하자, 승통 일겸과 원기 등이 꿀물과 맛있는 과일로 대접하였다. 진사 박세혁을 군자사에서 보았다. 아침에 관아의 말과 관노인 자천을 읍내로 돌려보냈다.

17일 가끔 흐리다가 맑음
안국사에서 유숙하였다. 아침을 먹은 뒤에 벽송암 종정인 천륜이 찾아와서 오랫 동안 대화를 나누었다. 몸이 좋지 않아 낮에 한동안 졸았다. 저녁을 먹은 뒤에 천륜 대사가 돌아갔다. 일겸과 원기와 함께 걸어서 서암으로 갔는데, 본사와의 거리는 겨우 몇리밖에 되지 않은 가까운 곳이었다. 지세가 높고 광활하여 바로 지리산을 마주하고 있는 것이 금대암과 차이가 없으나 어제 금대암에서는 구름이 잔뜩 끼어 볼 수 없었는데 오늘은 늘어선 산봉우리가 병풍처럼 둘러 있고 상봉에 눈이 녹지 않아서 보는 눈과 느끼는 마음이 모두 후련하였다. 노승 정찬이 나와서 영접하였다. 잠시 앉아 있다가 본사로 돌아왔다.

18일 흐리다가 맑고 추웠음
안국사에 머물면서 10여 장이나 되는 고향 편지를 썼다. 저녁 식사를 한 뒤에 법당에 나가서 앚아 있었더니, 두 사람의 객승이 와서 인사를 하였다. 한 사람은 천정이고 다른 한 사람은 영기였는데, 천만 뜻밖에 타향에서 이 두 사람을 만나서 매우 기뻤다. 이 두사람이 현재 상고대암에서 가사를 만들고 있었다. 함께 머물면서 여름을 지내기로 하고 바로 돌아갔다.

19일 맑고 추웠음
새벽에 그릇에 담아둔 물이 얼었다. 아침을 먹은 뒤에 견여를 타고 안국사에서 출발하니, 승통인 일겸이 냇가에까지 따라왔다. 군자사 승려 법안과 선보 등이 가마꾼을 데리고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냇물을 건너서 나귀를 타고 10여리를 간 다음, 비로소 가마를 타고 5리쯤 가서 두타암에 이르렀다. 노승 원혜와 그의 상좌 영인이 나와서 영접하였다.

 

한동안 앉아 있다가 남여는 보내고 걸어서 무량굴에 올라가니 수자인 의철이 나이가 을축생인데 나와서 영접하였다. 저녁을 먹은 뒤에 무주암에 올라가니 벼랑에 매달아 놓은 듯한 석벽이어서 애써 올라가야만했다. 5리 쯤 가는 동안 열 걸음마다 한 번씩 쉬어야 했다. 겨우 올라가서 동대에 앉아서 쉬었다. 돌 위가 평평하여 지리산의 여러 봉우리가 한 눈에 늘어서 있고 주산의 석봉이 기괴하여 무엇이라고 이름할 수 없었다. 서쪽에 석정과 감렬사의 터가 만길이나 높은 곳에 있는데 평온하고 양지바른 곳이어서 참으로 좋은 명당 자리였다. 이 암자에서 여름을 보내고 싶었다. 노승 호준과 여러 수좌 일곱 사람이 새로 거처할 곳을 지었다. 일겸, 법안, 선보가 돌아가고 묘적암의 수좌 사철이 찾아 왔다.

20일 맑고 바람이 차거웠다.
아침식사 후 묘적암으로 가려고 하던 차에 사철이 또 와서 함께 갔다. 암자 터가 무주암보다는 못하였으나 역시 매우 밝은 곳이었다. 그러나 초막이어서 거처할 수가 없었다. 한동안 앉아서 대화를 나누다가 돌아왔다. 길에서 천정과 영기를 만나 다시 가서 두루 보았다. 무주암으로 돌아가서 별방에다 거처를 정하였다. 내일부터 방을 수리하기로 하였다. 수자 영기는 돌아가고 천정은 남아서 일을 감독하기로 하였다. 태남이 군자사에서 짐을 지고 올라왔다. 고향으로 보내는 편지를 주어서 함양 관아로 돌아가 말을 가지고 편지를 받아 입이와 함께 원주로 돌아가도록 하였다. 저녁에 입이가 함양 태수의 서찰 및 시와 양색과의 방목을 가지고 와서 비로소 조식이 춘당대시에서 장원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놀라움과 기쁨을 표현할 길이 없었다.

21일 맑음
윤판옥을 보수하였다. 견성암의 종장 자징과 묘적암의 수좌 사철이 와서 보았다. 입이는 새벽에 군자사로 돌아갔다. 삼보승 수백이 와서 백지 한권과 진말을 조금 주고 갔다.

22일 맑음
군자사의 승통 법안이 와서 알현하였다. 천정이 정목 1필과 사서 보낸 백미 5두와 피지 3권과 10장 백지 1권을 가지고 왔다. 유람하는 객승 인호, 성철, 해신 등이 와서 만나보았다. 수좌 사철도 와서 보고 갔다.

23일 새벽에 바람이 불고 어두웠으며 비가 뿌렸다. 가끔 흐리고 맑기도 하였다.
객승은 가고 사철과 통운 수좌가 와서 보고 갔다. 덕유산 극락암의 승려 원휘는 풀 피리를 매우 잘 부는 사람이었는데 두어 곡을 불어주고 갔다. 천정은 돌아가고 금대암의 승려 자현이 왔다.

24일 맑음
거센 바람이 불어 나무가 꺾이고 지붕이 걷혔다. 지리산에 온통 불이 나서 연기가 하늘을 뒤덮고 저녁 때에는 절까지 태웠다. 열기가 얼굴을 뜨겁게 하고 티끌이 눈에 가득하였다. 여러 승려들이 화상을 입어가면서 정신없이 물을 뿌렸으나 살길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 다급하고 경황이 없는 상황을 말로 표현하기가 어려웠다. 불길이 계단 아래에까지 이르더니 바람을 타고 집을 덮쳤다. 사람들이 힘을 모아 물을 길어다가 뿌린 덕분에 천행으로 불길이 잡히고 겨우 회생하였으나 옷가지는 대부분 소실되었다. 바라보니 100여리 사이에 불빛이 환하였다. 참으로 내평생에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오후에 수좌 영기와 천정과 박태기가 와서 방문하였다. 함께 힘을 모아 진화작업을 벌였다. 밤중에 비가 내리고 바람이 조금 그쳤다. 새벽이 되자, 산불이 모두 꺼졌다.

25일 새벽에 비가 조금 내렸다. 흐리고 바람이 불다가 가끔 맑다.
박태기가 돌아갔다. 영기와 천정 두 승려와 함께 무주암으로 갔다가 천인암으로 들어가서 잠시 쉬었다. 또 상고대암에 도착하니 수좌인 승려 보인이 점심을 차려 주었다. 미시에 실상사에 도착하니 산길은 매우 험하였지만 철쭉꽃이 한창 피어 있었다. 구경하면서 걷다보니 피곤한 줄 몰랐다. 대략 20여리를 가서 불존 담익의 방에서 쉬고 있었는데 계오의 상좌 여건이 보러 왔기에 시를 지어 주었다. 수좌승 정행이 여러 가지 맛있는 과일과 꿀물로 대접하였다. 또 법당의 화주 일행과 와화주 계오가 모두 와서 보았다. 일행은 을축생이었다. 모두 수좌승으로 더불어 대화할 만한 자들이었다. 승려가 마을 사람과 터를 다투어 장차 보전하기 어려운 형편이라고 하였다. 사순이 와서 보았는데, 그는 일찍이 승통을 지낸 자라고 하였다.

26일 맑고 흰 기운이 감돌았다.
아침식사 후에 담익, 천정과 함께 냇물도 구경하고 법당의 오래된 철불도 두루 보았다. 절터로 보니 참으로 큰 사찰이었다. 그런데 승도들이 일제히 떠나버려서 유지할 수가 없었다고 했다. 저녁을 먹은 뒤에 천정과 견성암의 승려 혜준과 함께 걸어서 견성암으로 올라갔다. 열 걸음마다 한 번씩 쉬면서 10여 리를 가서 암자에 도착하였다. 누워서 일어나지 못하니 한가한 승려가 시를 지어 주었다.

27일 가끔 맑고 흐렸다.
태감이란 승려가 와서 인사를 하였다. 아침식사 후에 천정과 함께 시냇가 바위에 앉아서 폭포수와 바위 사이에 핀 꽃들을 감상하였다. 저녁을 먹은 뒤에 천일암으로 옮겨 갔는데 1리쯤 되었다. 함양 태수가 서찰을 보내면서 쌀과 소금을 각각 2두씩 보내왔다.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 수좌인 영기가 찾아오고 면임인 허시운과 박문간이 와서 보고 갔다. 군자사의 승려가 재올릴 때 쓸 떡쌀을 주고 갔다.

28일 아침부터 하루 종일 그리고 밤새도록 비가 내렸다.
능연이 작은 방 하나를 청소하고 창과 벽을 깨끗이 바르니 기온이 알맞아서 심신이 편안하였다. 언왕산 화주 의엄과 무주암의 승려가 왔다.

29일 아침부터 비가 오고 안개가 끼었다.
오후에 날이 개자 수좌인 영기와 천정이 실상사로 돌아가는 편에 서울로 보내는 편지를 부쳤다. 의엄과 여러 승려가 모두 가는데 전송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