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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산길따라/지리산♧[기록]

[비망록]치밭목, 그 숲향을 그리며

by 지리산 마실 2003. 7. 10.
조개골 최상류 계곡을 깊게 품고 있는 치밭목 삼거리 이정표가 있는 계곡사면의 숲
은 매우 짙다. 특히 조개골로 내려서는 너른 산자락에는 수령이 오래된 이끼가 낀
거목(巨木)들의 모습도 자주 볼 수 있지만, 숲의 바닥에는 풀꽃들이 지천으로 피어
나 온 산자락을 뒤덮고 있어 숨이 막힐 듯 하다. 하지만 윤기나는 이파리들은 스스
로 빛을 발하는 듯, 숲은 밝고 청량한 기운과 함께 숲향이 짙다.

특히 늦봄과 초여름의 이 곳 산자락에는 솜대,자주솜대,애기나리,금강애기나리 등
작고 은은하고 기품있는 귀한 우리 풀꽃들이 엄청나게 많이 자리잡고 있다.

조개골, 그 아름다운 골짜기쪽으로 난 산길의 숲향은 다음에 만나기로하고 오늘은
그대로 곧장 치밭목대피소로 나아가자.

치밭목대피소의 뒷마당은 너르고 마당 주위에는 키가 엄청 크고 몸통이 굵은 신갈
나무가 많다. 그리고 호젓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통나무벤치도 설치해 놓았다.

외로움이 온 몸을 휘어감는 어느 조용한 날 저녁, 홀로 외롭게 치밭목에 올라 이
뒷마당을 서성거려보자. 숨막히듯 농밀한 숲과 밤의 정령들에 몸을 맡기고, 달과
별, 혹은 내리는 비와 눈(雪)에게까지 마음을 열고 대화를 나누어보자. 그 대화의
대상은 그 곳에 존재하는 어느 것이라도 좋겠고, '또 다른 나'라면 더욱 좋을 듯
하다.

숲과 밤, 밤의 숲에 침잠되어보자. 아마도 우리는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을 아우르
는 숲에 동화되어 대자연의 일부분이 된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는
일상에서의 묵은 때와 고단함,고독감을 떨쳐버리고 한없이 왜소해지는 자기자신을
위로하며 '바로 나'를 사랑해야겠노라고 다짐하며 손을 건네게 될 지도 모를 일이
다.

치밭목대피소는 작지만 정감이 가고 포근한 곳이다. 무뚝뚝하지만 속 깊은 민대장
은 예의 그 시큰둥한 얼굴과 시비걸듯한 말투로 인사를 건넬 것이다. 하지만 그런
다고 섭섭해할 필요는 없다. 나도 못 본듯이 외면하며 대피소 밖의 식탁에 앉아서
동쪽으로 확 트이는 공간 저 끝으로 한없이 드리워지는 산자락들을 하염없이 쳐다
보거나 아니면 취사라도 하려는 듯 배낭을 뒤적이며 미적거리고 있을 것이다.

그러면 아마 싸움이라도 걸듯 그 이는 이렇게 말을 걸어 올 것이다.
" 뭐 하능교! 빨리 안 들어오고!"

대피소의 정문 앞에서 위쪽 산자락으로 난 길은 써래봉으로 올라가는 길이고 이름
하여 '지정등산로'이다. 이리로 오르면 써래봉-중봉-천왕봉 지리주능선으로 이어
지게되는데, 산자락 사면을 따라 오르다 써래봉에서 흐르는 능선을 만나면 주능선
으로 가는 길은 우측으로 써래봉으로 진행하면된다. 지능선이 흐르는 왼쪽, 즉 동
남쪽으로 내려서는 능선길이 바로 '황금능선'이다. 황금능선은 지긋지긋한 산죽밭
으로 유명한 곳이다. 언젠가 이 곳의 숲을 찾을 때를 기약하자.

오전을 쑥밭재-하봉자락으로 올라 와 치밭목에서 정오의 얹저리 시간을 보낸 우리
는 더 이상 산자락에서 머물 수 없음을 알고는, 아쉽지만 속세로의 귀환을 서두르
게 된다.

대피소 정면 앞으로 골이 깊게 패인 내리막길이 있다. 폭설이 내린 겨울 날 이 길
을 오르느라면 쌓인 눈과 꽝꽝 얼어붙은 빙판길,그리고 헐떡거리는 거친 숨소리가
얼어 붙은 대기와 함께 하게 되는 곳이다.

숲사이로 난 길을 내려서면 이 따금 물길도 만나고 제법 큰 계곡을 건너게도 된다.
많은 사람들이 이 곳으로 올라오거나 내려서는 것은 지정등산로라 비교적 잘 나있
는 편안한 산길이라는 이유가 있기도하지만 흔치않은 풍경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
기도 하다.

바로 무재치기폭포가 있기 때문이다.

거대한 암반 위로 얇게 막을 씌운 듯이 수량이 많지는 않지만, 폭포의 높이와 주
위와 어우러진 풍광은 이 곳만이 지닐 수 있는 아름다운 풍경이다. 길이 패여져있
어 오르내릴 때 부담스런 길이 언젠가 나무계단길로 바뀌어져 다니기가 훨씬 수월
해졌다. 그 새로이 만든 나무계단길을 내려서기 직전, 밧줄을 쳐놓은 곳으로 잠깐
들어가면 무재치기폭포 전망대다. 왼쪽에 자리하고있는 거대한 폭포의 모습을 가
장 잘 볼 수 있는 곳이다.

하지만 이 곳만 들어서면 나의 마음은 늘 콩당콩당 뛰게된다. 멋진 포즈를 취하며
사진을 찍고자 하는 이나, 찍는 사람들 때문에 수직의 벽위에 있는 모습들이 너무
나 아찔하고 불안해 보이기 때문이다. 특히 청빙(淸氷)으로 결빙된 웅장한 폭포의
모습을 보며 촬영하는 동절기에는 더욱 그러하다.

나무계단을 내려서자마자 만나는 무재치기 이정표있는 곳에서도 폭포를 올려다 볼
수 있다. 이정표를 지나 산길을 걸어 내려오면 계곡이 나오는데 몇년 전에 설치해
놓은 예쁘장한 다리가 있다. '무재치교'라는 이름이 달려있다.

산을 내려오는 길은 언제나 바쁘다. 보폭을 크게 혹은 짧게 바꾸어 걷다보면 어느
새 삼거리가 나온다. 바로 직진하면 한판골길로 유평마을로 내려서고, 왼쪽 산으
로 다시 오르듯 진행하다 우측으로 지능선을 에돌아 넘어서는 신밭골길로 가면 윗
새재마을로 내려서게 된다.

만약 차량이 대기하고 있거나, 하산시 차량지원만 가능하다면 나는 망설임없이 윗
새재마을로 나있는 신밭골길을 택할 것이다. 하산시 늘 마음이 바빠 걸음이 빨라
지는 산꾼들에게 한판골길은 지겹도록 길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신밭골길은 주름처럼 펼쳐있는 엷은 지능선을 넘어 내려설 때마다, 가끔 나무계단
으로 된 길이 나오기도하지만 그야말로 호젓하고 편한 육산길이 대부분이다. 너른
산길을 부담없이 걷다보면 어느새 아래로 윗새재마을이 보이고 조개골을 가로지르
는 철다리에 닿는다.

철다리 아래 계곡물에 풍덩 몸담고 싶으나 어찌된 건지 나는 늘 마음이 바빠 그대
로 지나치고 만다. 마음 편히 산자락을 내려서서 느긋하게 알탕을 즐기게 될 날이
언제 오게 될까?

이번에 다녀 온 길은 짙은 숲향도 만끽할 수 있을 뿐아니라, 산길도 비교적 부드
럽게 잘 열려있어 늦봄이나 초여름에 다녀오도록 가장 권하고 싶은 곳이다.

문득 이 곳의 숲향이 사방에 저며온다.
아! 가고 싶은 그 곳이여...

대구 태생으로 부산에서 詩作業을 활발하게 하고있는 원로시인 '허만하선생'은 그
의 시집에서 이렇게 읖조리며 자연에 눈 먼 우리에게 풍경으로의 다가섬을 가르치
고 있다.

"아름다운 풍경을 만나기 위해서는 길을 걸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