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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산길따라/지리산♧[기록]

[산행기]불무장등에 젖다(1)

아마도 1999년도의 늦가을 어느 토요일 저녁이었을 것이다. 홀로 잠입하듯 들어 선 전남
구례군 토지면의 피아골 초입, 연곡사 앞 마을의 풍광은 스잔했다. 여름 한 철과 가을단
풍시즌, 넘쳐나는 행락객들로 몸살을 앓던 그 수선스러운 모습은 오간데 없고 말라 비틀
어진 낙엽이 엷은 바람에 몸을 맡긴 채 좁은 포도위를 굴러다니는 을씨년스런 풍경이 나
를 맞이하고 있었다.

거리가 멀고 교통이 불편하여 쉽게 찾아오지 못하던 불무장등을 처음으로 찾아보겠노라
고 늦은 밤 이 곳으로 들어선 것이다. 불무장등으로 올라서는 들머리의 마을이름은 농평
마을이다. 이 마을은 연곡사매표소 못미친 삼거리에서 동북쪽으로 갈라지는 좁은 도로를
따라 차량으로 접근을 하거나, 아예 산행이라 생각하고 이 곳 상가가 있는 마을 뒷쪽 밤
밭을 가로질러 논두렁과 낮은 산자락을 넘어가야 닿을 수 있는, 산자락 깊숙이 들어앉아
있는 평화로운 산간오지마을이다.

너무 늦은 시간이라 낯선 농평마을로의 차량접근이 자신이 없어, 철지난 이 곳 관광지의
한적하고 쓸쓸한 모습과 맞닥드리기로 작정을 하게 된 것이다.

문이 열려있는 연곡사입구의 상가음식점으로 들어섰다. 늦은 시간의 예상치 못한 방문객
을 맞이한 인상좋은 주인아저씨는 지금은 음식준비가 안된다며 손사래를 친다. 정중하게
인사드리며 '막걸리 한사발'을 부탁하니 시커먼 산행복장의 내 모습을 훑어본 후 김치와
나물안주를 준비해 온다.

아저씨께 동석을 권하고 막걸리 몇잔을 주고받는 사이 금새 아저씨의 말문이 트인다. 주
고받은 말들을 다 기억을 할 수는 없으나,'상점 바로 위에 있는 피아골모텔은 손님이 거
의 없으니 좀 깎아 달라면 민박비 수준으로 이용할 수 있을 것'이란 따끈따끈한 정보와,
'내일 아침 6시경에 모텔 뒤의 밤밭사이길로해서 농평마을 올라가는 길 어느 정도까지는
함께 가주겠다'는 고마운 이야기를 듣게된다.

배낭을 둘러매고 비교적 규모가 큰, 아저씨가 가르쳐준 그 모텔로 들어서자 프론트 아저
씨는 이상한 듯 빤히 쳐다본다. 사람없는 시즌의 늦은 밤에 배낭을 들쳐맨 채 들어 오는
내 모습이 조금은 낯설었을 것이다. 프론트로 다가 가 조금 전 상점아저씨에게 들은대로
요금을 좀 깍아달라며 어색한 말머리를 트니 어이없다는 듯 빙긋이 웃더니 그러라고한다.
내 주변머리로 이런 일이 생길 수도 있다니 신기한 일이다.

이른 아침의 피아골, 그 처연하고 깊은 산자락으로 늦가을의 비가 소리없이 다가와 있었
다. 그 비는 어제의 약속을 지키느라 농평마을 가는 길을 동행하려 나서던 상점아저씨가
겨우 밤밭을 벗어나자마자 되돌아 갈 구실을 만들어 버리고만다.

혼자가 된 나는 산길로 들어서는 것을 포기하고 마을로 내려서서 도로를 따라 걷기로 했
다. 좁은 다랑이 논의 논두렁을 가로질러 마을로 접근하는데, 아마도 지도상의 당재마을
인 듯하다. 비를 맞으며 논에서 일을 하고 계시는 마을 어른을 만나자 괜히 미안해져 큰
소리로 인사를 건넨다. 도로를 따라 걷는 거리는 결코 만만치가 않았다. 또 다른 당치마
을을 지나며 한참을 걸어 들어가자 이윽고 능선의 잘록이인 당재앞의 모퉁이를 돌아서며
농평마을과 맞닥드리게 된다.

농평마을 동쪽, 당재가 걸쳐져있는 능선이 이른 바 불무장등능선과 황장산능선인데 북쪽
주능선방향으로 올라서는 능선이 불무장등능선이고, 당재에서 남(南)으로 달리다가 섬진강
자락으로 몸을 담그는 마루금이 황장산능선인데, 불무장등능선이 주능선에 닿으며 만나는
고스락은 바로 삼도봉(三道峰:전북,전남,경남의 경계)이다.

삼도봉은 80년대 이전만해도 추억도 아련한 날라리봉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워지다가 새롭
게 얻게 된 이름이다. 그렇게 이름지어짐은 세 지역이 만나는 봉우리이고 아울러 화합을
추구하려는 의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 불무장등능선과 황장산능선(황장산이 있
어 편의상 그리 이름지었음.)이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과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의 경
계를 이루며, 지리주능선 삼도봉 북쪽자락이 전라북도 남원군 산내면의 땅이다.

여전히 비는 조금도 주저함없이 세차게 내리고 있고 낯선 나그네의 배낭과 온 몸은 소위
방수 잘 되는 오버쟈켓을 걸쳤음에도 다 젖어버렸다. 이제 걷지않으면 한기를 느끼게 될
것이다.

마을 입구의 길 좌측에 홀로 떨어져있는 집에서 물을 담고 있으니 마침 인상좋은 주인아
저씨가 나오며 걱정스런 표정으로 말을 건넨다.

"비가 이리 오는데 이 길을 혼자서 가실겁니까? 몸도 다 젖은 것 같은데..."
"예, 부산에서 모처럼 마음먹고 나섰는데 다녀 와야겠습니다."
"고생 좀 하시겠네요. 길 중간에 통과하기 힘든 나무덩쿨 지대만 지나면 그리 어렵지는
않을겁니다. 잘 다녀오세요."
"예, 고맙습니다....."

마을의 마지막집을 가로질러 능선에 오르자 빗방울이 점점 굵어지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아예 퍼붓기 시작한다. 이 능선너머가 바로 경남 하동군 화개면의 범왕리이고 칠불사가
있다. 비가 오고 개스가 꽉 차 시계가 전혀트이지않던 그 곳 동쪽의 공간이, 순간 열리
더니 칠불사의 모습을 살짝 보여준다. 지리산신이 나이 열정에 감복하였음일까? 아뭏든
그 후로 나는 비와 개스만이 가득찬 공간을 받아들이며 걸을 수 밖에 없었다.

아침을 걸렀던 터라 과일과 비스킷 몇조각으로 아침을 떼우며 하염없이 비가 내리는 능
선에 서서 나는 무념(無念)의 시간들을 오히려 즐기고 있었던지도 모를 일이다.

홀로하는 산행은 다소 불편하긴해도 혼자이기때문에 가질 수 있는 여유로움은 훨씬 더 큰
즐거움인 기분좋은 포만감을 느낄 수 있어 좋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