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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산길따라/지리산♧[기록]

[비망록]풀꽃들의 아우성

by 지리산 마실 2003. 7. 4.
대원사, 한판골, 유평, 신밭골, 조개골, 새재, 윗새재, 중땀, 외고개, 비둘기봉산장....

지리영봉 천왕봉 옆, 제 2봉인 중봉에서 하봉으로 내려서며 쑥밭재, 왕등재, 밤머리재로
이어지는 능선을 지리동부능선이라 부르는데, 위에 나열한 이름들은 이 마루금의 동남쪽
산자락 아래에 있는 경남 산청군 삼장면 유평리의 골짜기와 마을 이름들이다.

이 이름들을 들먹이면 불현듯 그리로 달려가고픈 충동을 느끼게되거나 그 곳의 산자락이
머리에 떠오르게 되는데, 다소 과장된 표현인지는 모르겠으나 사무치는 그리움에 마음이
찌르르 져며온다. 이 곳의 능선과 계곡등 산자락을 들어서서 길을 걷다보면 마치 블랙홀
처럼 빨려들어가게 되는 곳이 있다.

그 곳은 다름아닌 '치밭목대피소'라는 자그마한 산장이다. 도상거리가 조금 차이가 나긴
하지만 하봉-중봉-써리봉 이렇게 삼각을 이루는 3봉우리가 비슷한 거리에서 품고 있는데
능선에서 대피소에 이르는 길은 써리봉에서 내려서는 길과, 하봉과 중봉 사이에 있는 헬
기장에서 연결되는 길이 있고, 골짜기에서 치밭목으로 올라 오는 길은 무제치기폭포쪽과
조개골에서 이르는 길이 있다.

옛날부터 취나물이 많이 나와 취밭목으로 불리우던 곳인데 현재의 이름을 얻었다고 하며
이 곳에는 나이 50을 맞이한 진주산꾼인 민병태씨가 산장을 관리하고 있다. 치밭목대피
소는 국립공원관리공단 직영이 아닌 민간위탁 관리중인 대피소이다.

盛夏의 짙은 지리산 숲향에 젖어보기 위해서는 먼저 쑥밭재에서 하봉을 오르면서 만나는
시원한 숲길과 치밭목산장 뒷쪽으로 올라오게 되는 조개골 상류의 환상적인 숲길을 걸어
볼 일이다.

조개골로 들어서려면 대원사를 지나 가랑잎분교(폐교)가 있는 유평마을에서 약 4Km 위에
있는 윗새재마을로 들어서서 비둘기봉산장(민박집) 옆으로 나있는 소로길을 따라 들어가
면 된다.

조개골의 골은 깊다. 치밭목대피소 바로 뒤쪽 하봉 헬기장과의 갈림길로 이르는 이 곳의
산길은 대부분 산허리를 둘러서 나있는 편이라 골짜기로 내려서서 진행하는 경우는 별로
없고, 고도를 높여 상류지역으로 이를 때 까지는 드문드문 본류로 흘러 들어가는 지계곡
에서 물길을 만나며 건너게 된다.

이번에는 쑥밭재로해서 하봉으로 이르는 산자락의 숲향을 느끼도록 해보자. 조개골의 지
류를 처음 만나는 곳 바로 앞에 이정표가 하나 서 있다. 우측 산자락 방향으로는 아무런
표시가 없지만 키낮은 산죽사이로 길은 잘 나있다. 조개골쪽으로의 길을 버리고 우측 길
로 들어 선다. 짙은 수림 왼쪽으로는 깨끗한 계곡이 산길과 함께 고도를 높인다.

이 길은 동부능선 상 쑥밭재로 이어지는 길인데, 뚜렷이 잘 나있는 편에 비해 아직도 때
가 덜 탄 편이다. 참나무등 활엽수의 맑은 초록 이파리에는 윤기가 자르르 흐르고, 서걱
거리는 조릿대 사이로 부서져 쏘이는 햇살이 눈부시다. 숲의 정기에 취해 발걸음을 옮기
는데 왼쪽 계곡에서 흐르는 물길은 자기가 있음을 알리기라도 하려는 듯, 시원한 소리로
귀를 열어 준다.

꽉 막힌 듯한 숲길은 바위 왼쪽으로 살짝 방향을 틀면서 이어지고, 이내 계곡의 너른 바
위를 만나게 된다. 더운 여름이 아니라하더라도 이 곳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을 것이다.
굳이 흘린 땀을 씻겠다는 생각보다는 의례적인 입산의 예를 갖추듯, 맑은 계곡물에 얼굴
울 적시거나 스카프에 물을 묻히게 된다.

이제 조금만 더 진행하면 계곡을 버리고 오른쪽으로 올라 동부능선상의 고개에 이르게되
는데 그 곳이 이름하여 윗쑥밭재이고, 왼쪽 계곡 방향으로 진행하여도 하봉 인근으로 오
르게 된다. 지리의 짙은 숲향에 흠뻑 젖어보기 위해서는 능선으로 올라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이른 바 국골사거리로 향하는 것이 좋다. 능선 우측으로 난 길은 독바위 -왕등재로
이어지는 길이다.

능선길 답지않게 깊숙이 들어앉아 있는 산자락의 품은 너르고, 숲은 훤하니 시원하게 열
려있다. 그런 숲에 취해 걷다보면 갑자기 "저요! 저요!"하며 마치 재잘거리는 듯한 떠들
석한 소리가 환청으로 들려 와 놀라게 된다.

그것은 다름 아닌 '풀꽃들의 아우성' 때문이다. 애기나리가 지천인 이 숲길에는 솜대,꽃
마리 등 소박하면서도 기품을 잃지않은 아름다운 우리 꽃들과 만나게 되는데, 그 작고도
앙증스러운 풀꽃들에게서 연상되는 이미지는 노란색 옷을 입고 있는 티없이 맑고 귀여운
어린이들이다. 숲향에 흠뻑 젖으며 귀여운 아이들의 재잘거림에 미소지으며 산길을 걷는
그 기분은 분명 자연과 가까이함으로 접할 수 있는 귀하디 귀한 느낌이리라...

하지만 이 숲길도 준열한 꾸짖음으로 산꾼들에게 경고 메세지를 보낼 때가 있다. 겨울산
이 바로 그러하다. 눈덮인 산길은 긴장하지않는 산사람들에게 옆길로 비켜가게하기가 비
일비재하고, 짧은 해는 걸음이 무거운 사람들의 가슴을 애타게 한다.

국골 사거리에 이르면 우측으로 흘러내리는 또 하나의 능선을 만난다. 흔히들 '두류능선'
으로 부르는 곳으로 '두류봉'이라는 봉우리가 있기에 그리 부르고 있다. 만약 힘든 걸음
을 걸어 해질녘에 이 곳에 닿았다면 당신은 정말 행복한 사람이다.

잠시 시간을 내어 오른쪽의 바위봉우리에 올라 서보자. 마시고 마셔도 해소되지 않은 갈
증처럼, 외로움의 뒷편에서 기웃거리며 날름날름 영혼을 갉아먹는 서글픔처럼, 집요하게
나를 에워싸고 있는 '그리움'을 눈앞에서 만나게 된다.

바로 그 그리움, 지리주능선이 눈앞에서 하늘금을 그으며 달리고 있다. 저 멀리 아련히
서있는 반야봉 뒤로 내려서는 태양이 진홍색으로 물들여 놓은 황홀한 지리능선을 상상해
보시라!

'아름다워서 흘리는 눈물', 이 지극히도 여성스럽고 감상적인 단어의 집합을, 풍경에 몰
입하던 나의 무딘 감성으로도 얼떨결에 만날 수 있었다.

다시 여름의 숲향을 느끼기 위해 환한 대낮으로 돌아 와, 해질녘의 감상을 접기로 하자.
하봉으로 가기 위해서는 다시 국골 사거리로 내려서서 당초 진행방향으로 보아 왼쪽으로
방향을 잡고 꾸준히 고도를 올려야 한다. 산길 좌우의 숲에서 뿜어 나오는 짙은 숲향은
온 산을 그 진초록의 색깔과도 같은 싱그러움으로 가득 채웠다.

하봉은 우리가 생각하는 봉우리처럼 우뚝 솟아 올라 있지는 않고, 큰 바위지대로 이루어
져 있으며 그 흔한 정상석도 없다. 하지만 의외로 하봉을 좋아하는 이들도 많다. 촛대봉
으로 이어지는 초암릉길, 합수골길등, 만만치 않은 숨겨진 길들이 많아 산꾼들의 발길을
끌기 때문이다. 여전히 주능선은 오른쪽 시야에서 벗어나지 않고, 천왕봉은 아직도 우러
러본다는 표현이 적절할 정도로 우뚝 높이 서 있다.

중봉으로 이어지는 능선 길을 걷다보면 갑자기 훤해지며 트이는 공간이 나온다. 이른바
하봉헬기장이다. 아쉽지만 정면으로 난 주능선으로의 나아감을 이 곳에서 중단하고 왼쪽
으로 내려서자. 오늘 숲향 느끼기의 종착지는 치밭목대피소이기 때문이다. 이 길로 가다
보면 조개골 최상류라고 볼 수 있는 샘이 나온다. 하봉헬기장에서의 야영을 가능하게 해
주는 소중한 물길이고 수량도 풍부한 편이다. 자진해서 이 샘을 보수하는 멋진 아우들이
있기에 우리는 정말 편하고 고맙게 물을 얻는다.

걷기가 다소 불편할 정도의 너덜길이 한동안 이어지지만, 아마 이 길을 내려서는 사람들
의 얼굴에는 여유가 넘칠 것이다. 치밭목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개골 갈림길
이정표를 지나 주름진 능선을 넘어서면 늘 그렇듯이 두런거리는 소리가 반갑게 들려온다.

오늘의 지리 숲향은 여기까지 들이키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