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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山 情 無 限

[스크랩]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박정헌

[특별기고]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월간 '산'지에서]

크레바스 추락사고 이후 5박6일만에 기사회생한 박정헌의 촐라체 재방문 소고

지난 1월16일 나와 강식은 ‘신들의 어머니’라는 에베레스트의 긴 꼬리 쿰부 빙하 끝단에 자리한 촐라체(6,440m) 정상에서 강하게 불어오는 차디찬 바람을 마주하고 있었다.

나흘 동안 우리가 이 북벽을 타고 올라설 수 있도록 한 것은 걸쭉한 땅콩밀과 커피 한 잔이었다. 정상은 묵묵히 우리를 지켜볼 뿐이었다. 북벽의 하늘로 붙은 얼음기둥을 따라 정상에 도달했지만, 기둥을 되짚어 내려가기는 우리가 남긴 등반의 흔적들이 너무도 부족했다. 두 동을 합해도 겨우 110m인 로프로 북벽을 내려서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남서쪽으로 흐르는 능선을 따라 나(Na) 빙하로 내려가는 게 보다 안전하게 원점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이었다.

하산을 생각하자 마음은 따스한 로지와 시원한 맥주로 가슴을 적시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고쿄 방향으로 날아가고 싶었지만, 여러 날 계속된 비박으로 몸은 마음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등반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마음이 가는 방향으로 몸이 따라주어야 한다.

강식과 나는 로프 한 동을 사려 배낭에 넣고 남은 5mm 로프로 서로를 연결하고 능선을 살피며 내려섰다. 능선 좌측으로 타워체 북벽이 고도를 높이고, 우측으로는 날카로운 설릉들이 칼을 세우고 있었다. 빙하의 홈통을 따라 하강을 마치니 나이를 먹은 빙하의 나이테들이 깊숙한 크레바스를 그리고 있었다.

완만한 경사면에 내려서자, 이제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으로 긴장된 몸을 풀고 55m 로프를 접어 서로 20여m 거리를 두고 하산을 시작했다. 점점 빙하가 가까워지며 산을 수직과 수평의 영역으로 나뉘는 빙하의 균열(베르그슈룬트)이 산허리를 두르고 있었다. 한 발 한 발 다가서자 크레바스는 큰 입을 열고 있었다.

지난 상처를 산을 통해 치유하고 싶었다

깊고 어두운 그림자를 보고 강식에게 “큰 크레바스다!” 소리쳤다. 발을 옮겨 눈으로 연결된 스노브리지를 따라 크레바스를 통과하는 순간 “휙” 소리와 함께, “형, 떨어져요!”라고 소리치며 강식은 어두운 크레바스 속으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리곤 생환하기까지 5박6일은 몸서리쳐질 만큼 끔직스런 고통의 나날이었다.

끝도 없는 크레바스의 어둠 속으로 빠졌던 게 벌써 4개월이 지나고, 병원에서 퇴원한 지 1주일만인 지난 4월9일 당시의 흔적을 찾아 촐라체로 향했다. 재수술이 남아 있고, 치료도 마치기도 전에 다시 히말라야로 떠나는 나를 향해 많은 이들이 불안한 시선을 보냈다. 나는 지난 상처를 여전히 산을 통해 치유하고 싶었다. 20여 년간 산행 중 마지막 산행일지도 모르는 그 흔적들을 하나하나 주워 모아 새로운 산을 그리고 싶었다.

네팔 카트만두 공항에 도착하자, 빌라에베레스트의 앙 도르지 일행과 송성재 선배가 마중나와 있다. 촐라체 사고 후 4개월만에 만나는 송 선배는 지난 아픔의 흔적을 마음에서 지우려고 애를 썼지만 결국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나 역시 붉게 물든 두 눈으로 송 선배를 끌어안았다. 도르지는 죽다가 살아난 이 곳 네팔에서 편안하게 쉬다가 가라는 현수막을 가지고 나와 가타를 걸어주며 우리 가족(아내와 아들 성율)을 환영했다. 4개월만에 다시 네팔로 입성했다는 사실이 실감나지 않았다. 이런 몸으로 이곳에 다시 왔다는 생각이 믿어지지 않았지만, 나는 출발 전과 같이 카트만두 거리를 걷고 있었다.

이미 카트만두에는 강식과 내가 등반한 루트와 사고를 휴먼 다큐멘터리로 만들기 위해서 진주MBC의 심길보 PD와 김정근 감독, 유동훈·오두환 선배가 촐라체를 향해 가고 있었다. 촬영팀은 북벽에 베이스캠프를 설치한 다음, 다시 카트만두로 돌아와 나와 함께 촐라체 북벽으로 헬기로 이동, 우리의 지난 여정을 재현하려 했다. 우리는 루클라로 이동한 다음 헬기를 이용해 로체 남벽을 거쳐 촐라체 북벽, 촐라체 서면 베이스캠프, 야크 움막을 거쳐 배낭을 버린 크레바스 지역을 헬기로 접근해 배낭을 찾고 하루만에 다시 루클라로 돌아오는 일정으로 출발을 준비하고 있었다.

11일 아침 6시 루클라 공항을 출발해 남체를 거쳐 촐라체 북벽이 보이는 언덕배기에 있는 종글라 마을에서 촬영팀과 합류했다. 헬기에서 내리는 순간 바라본 촐라체 북벽은 겨울시즌 내가 올랐던 검은 악마의 치마를 완전히 벗어던진 채 태양을 향해 반짝이고 있었다. 365일 햇볕이 들지 않는, 태양으로부터 저주받은 악마의 벽이라 생각했는데, 완전히 은빛을 발하고 있었다. 태양이 모든 북벽 구석구석을 비추고 있었다. 겨울시즌에 비해 너무도 따스해 아직 완전하지 않은 손과 발에 대해 큰 걱정 없이 촬영을 진행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손끝이 점점 얼어가고 있었다. 20℃가 넘는 따스한 기온인데도 손과 발은 영하의 온도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일깨워준 은인과 재회

루클라에서 종글라까지 헬기로 고도를 높였기 때문에 고산증세가 나타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괜찮았다. 헬기는 다시 로체 남벽을 향해 날아갔다. 밑으로는 내가 걸었던 길과 내가 올랐던 산들이 파노라마를 그리고 있었다. 카메라맨은 문을 열고 촬영하느라 쉴새 없이 그림들을 주워 담고 있었다. 송 선배도 스틸카메라로 하늘에서 바라본 장엄한 산들을 향해 셔터를 눌러댔다.

로체 빙하를 거슬러 남벽 하단부를 돌아내려와 운동장처럼 넓은 가장 아래쪽에 위치한 베이스캠프 자리에 착륙하기로 했다. 헬기가 남벽 하단부를 돌아올 때 파일럿을 향해 “Go back!” 하고 소리쳤다. 로체샬쪽에서 엄청난 눈사태가 일어나는 위험한 자리였다. 파일럿은 그런 상황을 알 수 없었기에 안쪽까지 들어온 것이다.

하단부의 넓은 베이스캠프에 착륙한 다음 지난 20여 년간 올랐던 수많은 산들에 대한 인터뷰를 마치고 다시 고쿄쪽에 위치한 탕나를 향해 헬기는 날개를 폈다. 촐라패스를 넘어 6,000m 상공을 날며 바라본 촐라체 북벽은 훨씬 더 위협적인 고도감을 나타내고 있었다.

탕나에 도착하자 사고 때 도움을 주신 할아버지와 두 딸 밍마와 패마가 우리를 반겼다. 할아버지께서 부탁한 쌀과 못, 그리고 내가 준비한 선물들을 헬기에서 내렸다. 그는 탕나에 큰 로지를 만들고 있었다. 할아버지와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죽음의 계곡에서 생환할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주고,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를 일깨워주신 할아버지와 함께 지낸 야크 움막에서의 지난 일이 되살아나며 그 날의 아픔들이 하나하나 솟아나 점점 눈시울을 자극했다.

할아버지와 마주한 순간 할아버지도 나도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비록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서로에게 느낀 따스한 감정들이 우리 두 사람을 더욱 따스하게 감싸주었다. 뒤로는 밍마와 패마가 반갑게 맞아 주었다. 야크 움막을 출발해 촐라패스를 넘어 북벽의 베이스캠프까지 구조 요청 편지를 전달해준 히말라야의 두 딸들이 우리를 죽음에서 삶으로 변화시킨 사람들이다.

할아버지의 둥근 뿔테안경 사이로 살며시 자란 눈물 줄기가 순수한 마음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할아버지의 새 로지에서 야크 움막에서 쉼 없이 들이켰던 따뜻한 밀크티를 마시며 양지바른 곳에 자리를 펴고 앉았다. 할아버지는 손에 끼워진 장갑을 자꾸만 벗기려했다. 동상을 치료하기위해 버터기름을 발라주던 그 손이 과연 어떻게 변했을까 궁금했던 모양이다. 검은 장갑이 벗겨지자 뭉쳐진 손가락을 어루만지며 다시 한 번 눈물을 보이셨다.

그리고는 강식이 상태를 궁금해 하신다. 병원에서 수술을 받고 있는데 동상이 심해 발가락을 절단해야 한다고 말하니 가슴이 아픈 모양이다. 걸을 수는 있는지, 언제 다시 올 수 있는지 물으신다. 1년쯤 후 올 수 있다고 말하니, 그제서야 조금 안정을 되찾으시는 것 같다. 강식이 아파하는 표정하며 다리를 주무르는 시늉을 하면서 지난 과거를 되새기고 계셨다.

밍마와 패마는 내가 선물한 가방과 지갑을 보면서 너무도 기뻐하며 북벽에서 있었던 일들과 눈 속에서 넘었던 촐라패스에 관해 많은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다. 할아버지 일가족들은 다시 만난 즐거움으로 셰르파 춤을 보여주며 가타를 목에 걸어 다시 만날 날을 약속하며 아쉬운 작별을 했다.

헬기는 다시 고도를 높여 나 빙하 상부로 날아 사고지점 아래 배낭을 버려둔 지점 가까이 선회했지만 생각보다는 경사도가 심해 착륙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사고 직후 불완전한 사고력과 시력 저하로 정확한 경사도를 인식하지 못했던 것 같다. 아쉽게도 배낭 지점에는 가보지도 못하고 헬기는 기수를 돌려 베이스캠프로 내려와 영하 20℃를 넘나드는 뼛속을 스며드는 추위 속에서 몸으로 차가운 대지와 만나야 했다. 긴 시간 동안 삶의 아우성들이 어우러졌던 대지는 겨울을 넘어 봄을 알리고 있었다.

삶이 아름다운 마음의 산을 오르고 있다

얼음 바닥 위 대지에 푸른 새싹들이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 꼬박 하루를 골절된 두 발로 기어 내려와야 했던 악몽의 계곡이 눈앞에 놓여 있었고, 부러진 갈비뼈와 앞을 분간할 수 없는 눈으로 바라보았던 많은 시간들이 이 계곡을 뒤덮고 있었다. 처음으로 도착한 야크 움막은 다시 굳게 자물쇠로 잠겨 있었지만, 밤새 우리가 남긴 향나무와 야크 똥이 재로 변한 흔적이 움막 주변에 잿더미로 쌓여 있었다.

얼마 뒤 헬기는 루클라를 향해 떠올랐다. 하늘은 조금씩 조금씩 검은 수채화를 그리며 밝고 맑은 얼굴을 찌푸리기 시작했다. 촐라체가 점점 시야에서 멀어질수록 시선은 오히려 촐라체를 향했다. 왜 살기 위해 버렸던 배낭을 다시 찾으러 왔는가? 산은 나에게 무엇이었는가? 죽기 위해 살아가는 인생의 긴 여정의 한 페이지일 뿐인가?

살아있다는 건 참 아름다운 것이다. 이제 그 날의 모든 아픔은 만년설 속에 묻고 없지만 산은 우리를 향해 말한다. 여덟 손가락과 열 발가락은 여전히 산이, 눈이 먹었다고. 산속에 머물고 있다고. 멀어져 갈수록 하얀 산은 나를 향해 손짓하며 강식과 나를 부른다.

다시 찾은 촐라체에서 결국 배낭을 찾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아마도 산은 내게 다시 돌아올 곳이 산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여전히 잃어버린 배낭을 찾아 산을 오르고,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 산에 묻고 있다. 진정 높이 올라 삶이 아름다운 마음의 산을 오르기 위하여….

글 박정헌 노스페이스클라이밍팀
사진 송성재 거인산악회





출처 : 지리산 산길따라
글쓴이 : 두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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