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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先人들의 智異山

남유기(南遊記)①춘주 김도수

남유기(南遊記)


춘주 김도수/춘주유고

[번역]유교넷/문화콘텐츠진흥원


(http://yusan.culturecontent.com/)


내가 일찍이 동쪽으로 설악산(雪嶽山)과 금강산(金剛山) 사이를 유람하였으며, 또한 서쪽으로 서해를 건너 마니산(摩尼山)의 정상에 올랐다. 근래에 또 남쪽으로 무등산(無等山)과 월출산(月出山)에 올랐다. 세상에서 반드시 자장(子長) 의 유람을 일컬으니 이것은 진실로 예로부터 문사의 안목을 넓혀주고 말을 웅장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람이 또한 어찌 도움이 없겠는가? 명나라가 망한 것이 한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젊어서 《시경》을 읽어서 대략 사물을 분별하고 인정에 통하였고, 《서경》을 읽어서 옛날 임금과 신하의 관계를 보았으니 만일 한번 천자의 조정에 이르러 가슴 속에 지닌 것을 토로한다면 비록 그날 바로 죽더라도 후회가 없을 것이다. 오호라, 어찌 용문(龍門)의 지주(砥柱)를 거슬러 올라가 황하의 근원을 끝까지 찾아보지 않겠는가? 내가 일찍이 범중엄(范中淹)의 ‘악양루기(岳陽樓記)’를 읽어보고 그 문장의 번거로움에 만족하지 않았다. 동정호(洞庭湖) 칠백 리에 망군산(望軍山) 한 점이면 충분하다. 그렇다면 이 남유록(南遊錄)은 어찌 언급할 필요가 있겠는가? 이 남유록은 어찌 언급할 필요가 있겠는가?

정미년(1727년, 영조 3년) 9월 내가 이미 경양(景陽)의 관직을 그만 두고, 장차 영남으로 유람을 떠나려고 인장을 겸관(兼官)인 순창 군수(淳昌郡守) 이굉(李汯)에게 보냈다. 12일 을축일에, 길을 나섰다. 종자(從者)는 김옥성(金玉聲), 양경조(梁慶祚), 김준필(金俊弼)이다. 40리를 가서 담양부(潭陽府)를 지났고, 또 40리를 가서 순창군에서 유숙하였다.


13일 병인일에, 일찍 길을 나섰다. 이방(吏房) 김성한(金聲漢)과 양치하(梁致河)가 여러 아전을 거느리고 와서 말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인사를 올렸다. 40리를 가서 중주원(中酒院)에 도달하였다. 영암 군수(靈巖郡守) 김주(金鑄)와 흥양 현감(興陽縣監) 송병보(宋炳普)를 만나 주막에 앉아 멀리 유람 가는 것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송군은 감탄을 그치지 않았다. 이윽고,

“내가 옛날에 지리산(智異山) 연곡사(燕谷寺)의 북쪽 수십 리에 이른바 만수동(萬壽洞)이 있다는 것을 들었소. 세속에서는 신라 말기에 몇 명의 고관(高官)이 계림(鷄林)이 장차 망하게 될 것을 알고 집안 식구를 거느리고 함께 숨었는데, 지금도 기와와 주춧돌의 부스러기가 남아 있으며, 골짜기 안은 깊숙하나 널찍하고 땅이 기름져서 벼를 심을 수 있다고 한다오. 지난 2월 마침 남원(南原)에 갔었는데 연곡으로 길을 나서 절의 승려에게 물으니, 승려가 ‘이곳에서 40리를 가면 골짜기가 나오는데 안은 매우 깊숙하고 어두워 별로 볼만한 것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하기에 시험 삼아 두세 명의 승려와 더불어 지팡이를 짚고 깊숙이 찾아보았는데, 여러 층의 빙설 때문에 방향을 분별할 수 없는데다, 곳곳에서 곰과 호랑이의 발자국을 보고 두려워 중도에서 돌아왔다오. 그러나 지금도 마음속에 남아 있소. 그대의 이번 여행은 응당 연곡을 지날 것이니 나를 위하여 찾아주기를 바라오.”

라고 하였다. 내가 웃으면서,

“그대의 계책은 지나치다. 군자는 충신독경(忠信篤敬)하면 오랑캐의 나라라도 행할 수가 있다고 하였는데, 하필 궁벽진 곳의 도깨비가 사는 숲이란 말인가?”

라고 하였다. 두 사람은 나의 여행 전대를 펼쳐 보고 서로 마주보며 크게 웃으면서 곡식을 담아 도와주려고 하였다. 내가 사양하고 웃으면서,

“어제 벼슬을 버렸는데, 오늘 곡식을 다른 사람에게 빌리면 너무 졸렬한 것이 아닌가?”

라고 하였다. 날이 저물어 두 읍재와 이별하였다. 순자강(鶉子江)을 건너니 비바람이 급하게 몰아쳐서 옷과 삿갓이 다 젖었다. 10리를 가서 곡성현(谷城縣)에서 유숙하였다.


14일 정묘일에, 새벽에 안개가 껴서 하늘을 덮었다. 강을 따라 30리를 가서 압록원(鴨綠院)에 도달하였다. 골짜기의 형세는 탁 트였으며 두 개의 강물은 합쳐진다. 한 무리의 물새들이 파도를 다라 조용히 날고 있다. 말을 먹이고 출발하려는데 홀연히 이유흥(李有興)이 땀을 흘리며 찾아왔다. 물으니 대답하기를,

“장부에 바로잡을 곳이 있습니다.”

라고 하기에, 지난 세속의 일이 아직도 나를 붙잡는 것에 대해 쓴 웃음을 지었다. 압록진을 넘어 30리를 가니 구례현(求禮縣)에 도달하였다. 현의 아전이 분주하게 달려와 순사가 막 도착하였다고 이야기를 하였다. 멀리서 바라보니 활을 메고 말을 탄 병사가 잘 조련되었으며 깃발과 무기가 찬란하였다. 화려한 초헌을 타고 오는 자는 날아가는 별과 같다. 아아, 우리 백성의 고통과 신음은 바로 일산을 넓게 펼친 자의 뒷발과 이빨(혹정의 비유)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저 오는 자는 과연 뒷발과 이빨이 없는 자인가?

10리를 가서 화엄사(華嚴寺)에 들어갔다. 골짜기는 서늘하고 울타리는 미약하였다. 돌 위에서 빨래를 하는 처자를 보았는데, 운문(雲門)에서 시내를 넘는 운치가 있었다. 경조(慶祚)가 계곡 옆의 작은 나무에 달려가 서리 맞은 홍시 네 개를 따왔길래 먹어보니 매우 달았다. 또한 산중에서 볼 수 있는 맛이다. 승려들이 남여를 가지고 왔는데, 남여를 놓아 두고 천천히 걸어 적묵당(寂黙堂)으로 들어갔다. 산빛을 바라보니 층첩된 비단과 같고 감색과 비취색이 섞여 있는 것이 물이 방울져 떨어질 듯 하다. 그 아래에 이층의 장륙전(丈六殿)있는데 신기할 정도로 아름다우며 높고 장엄하다. 옛날에 성능(聖能)이 지었다고 들었다. 성능은 지금 총섭(總攝)으로 북한(北漢)에 있고, 그 상좌(上佐)인 금성(錦性)이 배알하고 다과를 내왔다. 저녁에 주지인 철식(哲識)과 부도대(浮圖臺)에 올랐다. 대는 매우 높아 상쾌하였는데, 바람이 소슬하게 불었다.


15일 무진일에, 일찍 일어나 골짜기 입구를 나와 20리를 가서 석주천(石柱遷)을 지났다. 산봉우리가 빙빙 돌아나가고 층층의 돌들은 우뚝 솟아 있는데, 가을 꽃이 간간이 피어 그림자가 맑은 강에 비춘다. 단풍 숲은 조락해 가는데 색은 오히려 찬란하다. 10리를 가서 연곡을 지나고 다시 10여 리를 가서 화개동(花開洞)에 들어갔다. 골짜기의 형세는 매우 웅장하였고 큰 시내가 거세게 흘러내려가 돌에 부딪히면 큰 소리를 내었다. 물을 따라 5리를 가 남여를 만났다. 또 몇 리를 가서 무릉교(武陵橋)를 건넜다. 2리 쯤 가니 큰 바위가 마주 보고 있는데, 왼쪽에는 ‘쌍계(雙溪)’라 새겨져 있고 오른쪽에는 ‘석문(石門)’이라고 새겨져 있다. 네 개의 큰 글씨는 자획이 빼어나고 옛스러워 마치 칼을 빗긴듯 하고 창을 세운 듯 하니, 바로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의 글씨이다. 푸른 등나무와 고목 때문에 햇빛을 볼 수가 없고, 물은 콸콸 두 골짜기 사이에서 솟구쳐 나온다. 절은 두 골짜기 사이에 있는데 그다지 크거나 아름답지 않았다. 금당(金堂)에는 진감(眞鑑), 혜능(惠能) 그리고 남악(南嶽) 선사의 화상을 걸어두고 있다. 당의 왼쪽에는 영주각(瀛州閣)이 있고 오른쪽에는 방장실(方丈室)이 있으며 앞에는 청학루(靑鶴樓)가 있다. 누대에서 조금 동쪽으로 수십 보 거리에 새로 대웅전을 짓고 있다. 대웅전의 앞에는 큰 돌로 만든 귀부(龜趺)가 세워져 있으니 바로 진감국사의 비이다. 당나라 광계(光啓) 3년(887년)에 세워졌는데, 고운 최치원의 글이다. 대웅전의 오른쪽에 있는 향로전(香爐殿)에는 고운의 영정을 걸어두고 있다.


16일 기사일에, 남여를 타고 불일암(佛日庵)에 올랐다. 승려가,

“산중에는 호랑이가 많습니다.”

라고 하고는 쌍각(雙角)을 불어 앞에서 인도하였다. 길이 험하여 돌비탈을 우러러 몇 리를 올라가니 조금 평평한 곳이 나왔다. 거친 밭 몇 묘가 있다. 또 몇 리를 가니 승려가,

“길이 끊어져 가마가 갈 수 없습니다.”

라고 고하여, 지팡이를 짚고 나아가니 앞에 절벽의 허리에 걸려 있는 허술한 잔교가 나왔다. 아래로 천길의 낭떠러지를 임하고 있는데 밟자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우러러 불일암을 바라보니 아득하여 구름 끝에 풍경을 매달아 놓은 듯 하였다. 암자에 도착해보니, 방 가운데 차가운 바람이 불어 마치 귀신이 휘파람을 부는 것 같았다. 암자에서 10여 보 거리에 있는 대(臺)에는 ‘완폭대(翫瀑臺)’라고 새겨져 있다. 앞에는 향로봉(香爐峰)이 있는데 우뚝 솟은 바위가 파랗다. 길다란 폭포가 오른쪽 산등성이에서 곧바로 떨어지는데, 눈발이 흩날리듯 우박이 떨어지는 듯 하며 우레가 울리고 번개가 치는 것 같다. 깊숙하고 어두워 만 길 깊이로 음침한 곳은 청학동(靑鶴洞)이라고 한다. 승려가,

“고운이 항상 이 골짜기에 머물러 청학을 타고 왕래하였기에 바위 틈에 옛날에 한 쌍의 청학이 있었습니다.”

라고 하였다. 암자에 앉아서 잠시 쉬었다. 준필이 동쪽 담으로부터 와서 똘배 다섯 개를 올렸는데, 맛이 시어 먹을 수가 없었다. 작은 병을 찾아서 거듭 몇 잔의 술을 마시고 다시 나와 바위 위에 앉으니 골짜기의 바람이 솟구쳐 일어 바위의 나무들이 모두 흔들린다. 구름 기운이 넘쳐 일렁거려 마치 거센 파도가 서로 부딪히는 것 같다. 돌아와 비탈길을 따라 내려오다가 한 무더기의 호랑이 똥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것을 보았다. 종자가 놀라 눈이 휘둥그래져서 다시 쌍각을 부니 골짜기에 소리가 진동하였다.

오른쪽으로 방향을 바꿔 몇 리를 가서 국사암(國師菴)에 들어갔다. 승려 초한(草閒)이 나와서 맞이하였다. 이로부터 지세가 조금 넓어지고 아래로 수전(水田)이 많다. 대나무 울타리와 띠집이 서너 채 있다. 시내를 따라 7리를 가니 소년암(少年巖)이 나왔다. 또 몇 리를 가서 신흥동(神興洞)에 들어갔다. 수석(水石)이 매우 아름다웠으며 길 옆의 바위 면에는 ‘삼신동(三神洞)’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절은 수려한 산기슭에 있는데 햇빛이 찬란하다. 누대는 큰 벼랑에 임하고 있으며 기와와 서까래는 날아갈 듯 하다. 대사 덕매(德梅)가 나와서 맞이하기에, 들어가서 점심과 차를 마시고 나와 계곡의 돌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돌 위에는 ‘세이암(洗耳嵒)’이란 세 글자가 세겨져 있다. 승려가 고운이 쓴 것이라고 하는데, 필체가 매우 속되 보이는 것이 고운의 글씨가 아니다.

이 산은 대개 흙이 많고 돌이 적으며, 수석(水石)은 더욱 적은데 오직 이 골짜기는 유명하다. 물줄기는 깊고 거세며 큰 돌은 이리저리 흩어져 몇십 리에 펼쳐져 있다. 혹은 물이 많이 고여 마음을 움직이기도 하고 혹은 소리를 내고 흘러 빙빙 돌아 내려가 서늘하게 마음을 씻어낸다. 승려가,

“봄 여름에는 돌이 떨어져 굴러 사방에서 우레소리처럼 진동합니다. 또 돛대에 바람이 불듯 기마로 진을 친듯 거세게 내달려 치솟아 올라오는 것이 사람의 마음과 눈을 모두 놀라게 하여 일일이 다 쳐다볼 수 없게 합니다.”

라고 하였다. 그 위에는 오래 자라 여러 아름이 되어 판목으로 쓸 수 있는 단풍나무, 녹나무, 노송나무, 잣나무 등이 많은데, 거센 바람이 해를 움직여 온 세상이 일제히 소리를 낸다. 덕매가 시 한 수를 지었기에 내가 읊조려 화답하였다. 탄식을 하며 덕매에게 말하기를,

“내가 옛날에 천호(天浩) 어른과 청평(淸平)의 골짜기에서 은거할 때 《남화경(南畵經)》과 《능엄경(楞嚴經)》 등을 읽었으며 날마다 한 사발의 밥과 한 표주박의 물을 마시면서 스스로 말하길 ‘이와 같이 하여야 이 생을 마칠 수 있다.’고 하였다. 한번 세상에 나가면 만사가 어그러지니 지금 비록 그대와 이 가운데서 노닐고자 한들 그렇게 할 수가 있겠는가?”

라고 하였다. 잠시 후에 종자가 가마가 준비되었다고 하였다. 덕매와 헤어져 칠불암(七佛菴)을 향하여 6, 7리를 가자 외나무다리가 나와 가마에서 내려 걸어 갔다. 지나가는 산에는 큰 나무가 울창하여 어두컴컴하였는데, 바람을 따라 가볍게 흔들리면서 서글픈 소리를 내었다. 위에는 푸른 매가 둥지를 틀고 많은 새들이 시끄럽게 지저귀고 있다. 또 6, 7리를 가서 칠불암을 바라보았다. 골짜기는 넓고 툭 트여 더욱 별다른 경치를 보여주고 있다. 가마에서 내려 벽안당(碧眼堂)에 들어갔다. 방 구들의 좌우가 우뚝 솟아 좌탑(座榻)의 형상을 하고 있다. 방 가운데는 달마의 초상을 걸어 놓았다. 8, 9명의 여윈 승려들이 면벽 참선을 하고 있다가 내가 오는 것을 보자 걸상에서 내려와 절을 하며 맞이하였다. 그 가운데 두 승려는 옛날에 내가 풍악산을 유람할 때 내원동(內圓通)에서 만났던 자들이다. 상당히 기쁜 얼굴을 지으며,

“상사(上舍)의 이번 여행은 바로 백거이(白居易)가 향산(香山)에 놀러 온 의미와 같습니다.”

라고 하여, 내가 웃으면서,

“내가 차라리 뗏목을 타고 바다를 건널 지언정 어찌 차마 빈 산의 고목이 되겠는가?”

라고 하였다. 여러 승려들이 모두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이윽고 다과를 내왔는데, 한 승려가 신흥동과 청학동의 우열에 대하여 물었다. 내가,

“신흥의 넓고 시원함과 청학의 깊고 그윽함은 각각 장단점이 있다. 나로 하여금 바람을 맞으며 달을 히롱하여 돌아올줄 모르게 하는 것은 신흥이다. 청학은 조용함이 뼈에 사무칠 정도이니 돌 승〔石頭陀〕이 아니면 거처할 수 없다.”

라고 하였다. 또 내가 승려에게 말하기를,

“세상 사람들이 귀를 중시하고 눈을 천히 여긴다. 내가 이 산을 한 번 본 뒤로 비로소 도원이 참이 아닌 것을 알았다. 내가 일찍이 《이미수집(李眉叟集)》을 읽었는데, ‘청학동기’에 ‘늙은이가 말을 전하기를, 청학동은 길이 매우 좁아 겨우 사람이 드나드는데, 엎드려 몇 리를 가면 넓은 공간이 나온다. 대개 옛날 세상을 버린 자가 지낸 곳으로, 무너진 담과 구덩이가 아직도 가시덤풀 사이에 남아 있다. 네 모퉁이는 모두 기름진 땅, 양질의 밭이다. 청학이 그 가운데 둥지를 틀었다고 하였다. 이에 내가 (청학동을) 찾으려고 하였으나 찾지 못하고 시를 바위돌에 남겨두고 돌아왔다‘고 적혀 있다. 옛날부터 신령스러운 지역에 대하여 말하는 자는 매번 신기한 말을 많이 하니, 고해(苦海)의 인생에서 부침의 종적은 세속을 벗어나 멀리 떠나려는 마음을 쉽게 감동시킨다. 그러므로 구름을 바라보고 탄식을 일으켜 문장을 지어 감정을 발하는데 이르기도 한다. 근래에 또 이 산을 유람하는 나그네가 돌아가면서 ‘이화동(梨花洞)을 보았다.’고 말을 하였다. 그 말은 미수가 칭한 청학동과 비슷한데, 기이함은 그 보다 심하다. 울창한 산중에 만 그루의 배꽃을 보는 것은 오왕(吳王) 부차(夫差)가 월(越)나라를 칠 때에 하얀 상(常) , 하얀 깃발, 하얀 갑옷, 하얀 우(羽) 의 주살, 한 아름의 북채, 큰 북 등이 진(陣) 중에 나열한 것 같다. 아! 과연 허망한 말인 것을 알겠다. 이 산은 비록 웅장하고 넓으며 골짜기와 언덕이 이리저리 돌아나가나 전후로 이 산을 유람하는 승려와 세속의 사람들 가운데 어찌 위에서 말한 신이한 경치를 지닌 두 곳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겠는가?”

라고 하자, 여러 승려들이 또 서로 보면서 크게 웃었다. 이윽고 두세 명의 승려와 법당 뒤의 옥보대(玉寶臺)에 올랐다. 대의 형태는 누워 있는 소와 비슷하였는데, 그 위에는 오래된 회나무가 많았다. 승려가,

“옥보고는 신라 사람인데, 산에 들어와 도를 이루어 항상 이 대에서 노닐었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을 지었습니다.”

라고 하였다. 날이 저물어 쌍계사의 탐진당으로 돌아왔다. 저녁에 노승이,

“작년에는 사나운 곰이 많아 사람을 만나면 해를 입혔는데, 올해는 또 호랑이들이 많아 사람들이 왕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초여름부터 지금까지 날이 가물어 물이 말라버려 나무가 고사하였으며 토끼와 꿩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사람을 피하지 않습니다. 또 삼영(三營)의 종이를 만드는 부역은 번거롭고 힘들어 승려들이 애오라지 살 수가 없습니다.”

라고 하였다. 내가 측은하게 여기고 길게 탄식하기를,

“성스런 시대에는 덕과 인의 정치에 대한 소리가 널리 퍼지지만, 하늘이 은택을 멈추면 심지어 산속의 동물들이 사는 것조차 불안하게 하는데, 어찌 하늘 밑에 있는 사람들이 잔인하고 혹독한 정치를 행하여 하늘로 하여금 노여움을 풀어지지 않게 하는가? 또 구름과 물 같이 떠돌아 다니는 자들도 오히려 명을 감당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사방을 헤메고 다녀도 말해볼 곳조차 없는 우리 백성임에랴.”

라고 하였다.

17일 경오일에, 해가 뜨자 말을 타고 화개동을 나왔다. 10리를 가서 삽암(鈒巖)을 지났다. 이곳은 고려 때 녹사(綠事) 한유한(韓惟漢)이 살던 곳이다. 아아, 나라가 어지러워지려 하면 현자는 반드시 먼저 세상에서 숨는다. 한유한은 최충헌(崔忠獻)이 뇌물을 탐하고 벼슬을 파는 것을 보고 권세를 농락하고 임금을 폐하는 행위가 있을 것을 알아 드디어 벼슬을 버리고 와서 이 바위 아래에 숨었으니, 그 높은 풍모와 탁월한 식견은 천고의 어리석은 사람들을 경계할 것이다.

또 10리를 가니 악양(岳陽)이 나왔다. 악양은 오래된 고을로, 옛날에 백성과 물건의 집산지였다. 강가에 있는 사촌(沙村)의 어호(漁戶)에는 귀양 온 자들이 이따금 와서 거처한다고 한다.

또 20리를 가서 섬진(蟾津)에 도달하였는데 마침 장날이었다. 이곳은 영호남이 만나는 지점으로, 질제(質劑) 가 모여들고, 장사치들의 물건 파는 소리가 시끄럽다. 산에서 나는 채소와 해산물이 구름처럼 모여들며 사람과 우마(牛馬)들이 어지러이 왕래하는데, 바라보니 마치 개미굴이 처음 무너졌을 때와 비슷하다. 하동부(河東府)에서 점심을 먹었다. 이로부터 강변 길을 따라 가지 않았다.

30리를 가서 고하동(古河東)을 지나 횡포역(橫浦驛)에서 잤다.


18일 신미일에, 일찍 출발하여 30리를 가서 봉계역(鳳溪驛)을 지났다. 시내와 산이 서로 빙 돌아나가니 매우 아름다웠다. 세상에서 산수가 아름다운 고을을 구하는 자는 매번 궁벽지고 조용한 암혈이나 깊숙하여 다람쥐가 사는 숲에서 찾는데, 사통팔달의 거리에 절로 몸을 편안하게 할 지역이 있는 것은 알지 못하니 실로 쓴웃음만 나온다.

또 40리를 가서 진양(晉陽) 에 도달하였다. 성문의 병졸이 급하게 병사(兵使) 이사주(李思周)에게 보고하여 촉석루(矗石樓)에서 만났는데, 누대의 형세가 웅장하고 컸다. 성의 아래로는 남강(南江)이 만리를 흘러간다. 정귀녕(鄭龜寧)이 나를 이끌어 서남쪽 산 기슭 아래에 있는 예전에 수사(水使)를 엮임했던 박창윤(朴昌潤)의 집을 가리켰다. 박창윤은 영남우도의 부호이다. 누대와 연못에서 음악을 연주하는 즐거움을 누리다가 때로 가동(歌童), 무녀(舞女)들과 노를 저어 푸른 강에서 유희를 즐기며, 또 많은 수의 꽃다운 청년들로 하여금 앞에서 웅위하고 뒤에서 따라오게 하여 꽃이 활짝 피고 수양버들이 드리운 곳에서 북을 치고 춤을 추게 하며 산다고 한다. 내가 비루 먹은 말 한 마리로 동남 지역을 유람하며 깊숙한 골짜기와 벼랑에서 주절거리며 낮게 읊조리는 것은 바로 박창윤에게는 한 바탕의 비웃음이 될 것이다.

누대의 동쪽에는 능허당(凌虗堂)과 함옥헌(涵玉軒)이 있다. 정군이,

“이 헌(軒)은 달 밤에 거문고를 뜯기에 안성마춤입니다.”

라고 하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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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주 김도수(생몰 ?~1742년 영조 18)

 

조선 후기 문신. 본관 청풍. 호 춘주(). 음보()로 공조정랑·통천군수를 지냈다.

문집에 《춘주집》, 저서에 《창선감의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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