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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先人들의 智異山

유두류산기②박장원

-유두류산기/박장원 

-①편에 이어 계속-

제석당에 이르렀는데 당에서 정상까지는 겨우 10리 떨어져 있으니 이곳이 얼마나 높은 곳인지 알만했다. 잠깐 가마를 멈추고 쉬니 승려들이 백반(白飯)을 차려 왔는데 모두 당지기가 마련해 제공한 것이었다. 천왕봉에 이르러서도 또한 이렇게 하였다. 이 당에 이르자 안개와 구름이 모두 걷히고 하늘이 드높게 드러났는데, 바람이 매우 세차서 자못 견딜 수가 없었다. 승려들은 여기서 만약 바람을 걱정하신다면 천왕봉 정상에 오르기는 어렵다고 하였다. 이에 굽어보니 해가 지고 있었다.

가마를 재촉하고 걸어서 당 뒤에 올라 보니, 저 멀리 펼쳐진 남해가 보였다. 마치 남해군(南海郡) 과 연해군(沿海郡) 두 군현의 보루가 나열되어 있는 것을 셀 수 있을 듯했다. 주암(舟巖)을 지나가는데 승려가 이 산은 바다에 있을 때 배를 정박하던 곳이라 하였다. 문암(門巖)으로 들어가는데 바위에 석문(石門)이 있고 문에는 긴 나무가 가로질러 놓여 있었다. 사람들의 왕래는 모두 이 문을 통해 들어가 여기에 있는 사닥다리를 건넌 후에 천왕봉 정상에 오를 수 있었기 때문에 ‘문암’이라 부른다고 하였다.

끌어주며 기어서 천왕봉 정상에 바로 오르니 정상에도 또한 신사(神祠)가 있었다. 이곳 외에는 몸을 보호할만한 곳이 없었다. 천왕봉은 위로 별을 딸 수 있을 듯하고 아래로는 사해(四海)가 굽어 보였다. 바다와 하늘이 서로 맞닿았는데 다만 하나의 운기(雲氣)가 하늘과 땅 사이에 넓게 펼쳐져 있으니 마치 흰 비단을 펼쳐놓은 듯했다. 아래의 산과 강을 보니 모두 흙덩이나 실 같아서 이루(離婁) 도 물러나게 할 수 있으며, 용면(龍眠) 의 재주도 끝내게 할 수 있으니, 말이나 글로는 그 만분의 일도 형용할 수 없었다.

조금 후에 해가 바다로 잠기는 것을 보니 기괴한 자줏빛 적색 기운이 아득한 가운데 천태만상을 드러내었다. 사람들은 모두 박수를 치며 놀라 달려가 말하기를,

“이것이 무슨 경관이란 말인가? 어떻게 내가 이렇게 멋진 장관을 볼 수 있게 되었단 말인가?”

라고 감탄하였다. 이윽고 당으로 들어가서 서로를 베개 삼아 누워서 잤다. 바람이 세차게 소리를 내며 불어서 사당이 날아갈 듯하니, 당지기가 와서 말하기를,

“놀라지 마십시오. 오늘 부는 이 정도의 바람은 바람이라 할 수도 없습니다. 저는 익숙한 까닭에 두렵지도 않습니다.”

라고 하였다.

한 밤중이 되자 바람이 멎고 달이 떠올랐으며 북두성이 맑게 빛나서 촛불마냥 비추니 온통 은빛 세계가 되었다. 피리 부는 악공(樂工)이 당 뒤의 일월대(日月臺)로 나와 앉아서 즐거이 보허사(步虛詞) 한 곡을 연주하였다. 몸은 맑아지고 혼은 깨끗해져 양쪽 겨드랑이에 날개가 돋아 들썩들썩하니, 명황(明皇)이 월궁(月宮)에서 노닐었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들 놀이에 불과할 뿐이었다. 동빈(洞賓)이 악양(岳陽)에 들어가자 바람이 잦아들었다. 이에 앉은 채로 새벽까지 있으니 여명이 점점 밝아 오는데, 금빛 까마귀〔金鴉〕 가 날아오르자 온 세상이 비로소 밝아졌다. 가마를 매는 승려가 70여 명에 달했는데, 모두들 떠들썩하니 외치며 말하기를,

“저희들 중에 가마를 매고 전후로 이 봉우리에 이른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되는지도 모르오나, 이렇게 일몰(日沒), 월출(月出), 일출(日出) 세 가지를 다 볼 수 있는 자는 자못 한둘도 안 될 것입니다. 우리 공들은 신선이 되는 방법을 터득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공들은 신선이 되는 방법을 터득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시 한 수를 지었다.

天王峯頂接天門(천왕봉정접천문) 천왕봉 정상은 하늘의 문과 맞닿아 있으니

頭上星辰手可捫(두상성신수가문) 머리 위의 별을 손으로 만질 것만 같네

兩眼力窮無所碍(양안력궁무소애) 두 눈으로 한없이 바라보아도 막힘이 없으니

不知何處是崑崙(부지하처시곤륜) 어느 곳이 곤륜산 인지 모르겠구나

또 한 수를 지었다.

峯上長吹太始風(봉상장취태시풍) 천왕봉 정상 위로는 태초의 바람이 부니

怪來呼吸與天通(괴래호흡여천통) 괴이하게도 내쉬고 들이마심이 하늘과 통하는구나

持杯放盡平生目(지배방진평생목) 술잔을 잡고 평소의 시야를 탁트어서 맘껏 바라보노니

九點秋烟夕照中(구점추연석조중) 아홉 개의 가을 구름 덩어리가 석양 속에 보이네

또 한 수를 지었다.

天王峯上觀日沒(천왕봉상관일몰) 천왕봉 정상에서 일몰(日沒)을 보고

月生日出三者兼(월생일출삼자겸) 월출(月出)에다 일출(日出)까지 셋을 겸했네.

僧言奇事曾無有(승언기사증무유) 일찍이 없었던 기이한 일이라 승려들도 말을 하니

天餉玆游固不廉(천향자유고불렴) 이번 유람에 하늘의 베푸심 참으로 박하지 않네.

또 한 수를 지었다.

一宿君子寺(일숙군자사) 하룻밤을 군자사에서 자고

遠上天王峯(원상천왕봉) 멀리 천왕봉에 올랐네.

月明吹玉笛(월명취옥적) 달이 밝아 옥피리를 불었더니

滄海舞羣龍(창해무군룡) 푸른 바다에서 뭇 용들이 춤을 추네.

8월 24일 을유일(乙酉日) 약간 흐림. 아침 일찍 돌아가려고 산을 내려갔다. 제석당과 백무당에서 잠시 머물렀다가 저녁에 안국사(安國寺)에 도착하여 잤다. 이날 천왕봉을 내려올 때 싸락눈이 약간 뿌렸다.

8월 25일 병술일(丙戌日) 맑음. 밥을 지어 먹고는 늦게 출발했다. 가마를 타고 금대암(金臺菴)을 들렀는데, 암자는 안국사에서 5리쯤 되는 곳에 있었다. 지세가 홀로 멀리 떨어져 있어서 두류산의 면모가 조금도 가려지거나 이지러진 데가 없이 다 보였으니, 마치 금강산이 한 눈에 보이는 정양사(正陽寺)의 남루(南樓)와 같았다. 멀리 두류산 제일봉인 천왕봉의 잠잤던 곳을 바라보는데 하나의 기둥이 하늘에 꽂혀 있고 무지개가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니 참으로 옛 사람이 말한 ‘황홀하니 한바탕 꿈에 요대(瑤臺)에서 놀다 온 나그네[怳然一夢瑶臺客]’ 였다. 시 한 편을 지었다.

靑鞋踏破萬重山(청혜답파만중산) 지팡이 하나에 짚신을 신고 첩첩 산중을 다 밟고서

更向金臺古寺還(갱향금대고사환) 다시 오랜 사찰 금대사를 향해 돌아왔네.

第一峯頭昨宿處(제일봉두작숙처) 제일봉인 천왕봉 정상 어제 자던 그곳에는

白雲靑靄有無間(백운청애유무간) 흰 구름과 푸른 안개가 생겼다 사라졌다 하는구나.

정오에 함허정에 도착하여 정자 뒤의 높은 누대에 오르니 산에 갈 때의 풍경과 같았다. 잠시 쉬었다가 지나갔다. 저녁에 사근역정에서 잤다.

8월 26일 정해일(丁亥日) 맑음. 이초로와 작별하고 일찍 출발하였다. 양안 어른, 신찬연과 함께 말을 나란히 타고 가다가 운고정(雲皐亭)에 차례로 올라 술에 취하고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시 한 수를 지었다.

醉上沙斤馬(취상사근마) 취하여 사근 역정에 오르는데

臨流不用扶(임류불용부) 시내를 임하여 부축해 줄 필요 없다네

平生得意處(평생득의처) 평소 득의처이니

肯羨執金吾(긍선집금오) 기꺼이 집금오(執金吾)를 부러워하랴

읊조리기를 마치고 영각(鈴閣) 으로 돌아오니, 곧 예전의 나로 돌아왔다. 쓸쓸하게 기러기 떼 행렬을 마주하니, 더러운 먼지가 마침내 이미 옷깃에 가득하였다.

아! 무릇 산을 유람하는 데에 사람들이 모두 마음이 맞아 잡스러움이 없게 하기는 어려운 것이며, 일이 모두 뜻에 맞아 흠이 없게 하기는 더욱 어려운 것이다. 우리들은 모두 남쪽으로 떨어져 나와 고향을 그리워하는 사람들로, 나이는 비록 같지 않지만 서로 매우 즐거워하였다. 함께 유람한 7일 동안 서로의 마음을 기탄없이 드러내고 형식적 구속 따위는 다 벗어버리며 농담하고 웃으며 즐김에 밤낮이 없었으니, 이는 실로 세상에서 두 번 다시없는 좋은 모임이었다. 심지어 두류산 유람은 조화아(造化兒) 의 시기를 받지 않은 경우가 거의 없는데, 우리들은 그곳에 가서 그윽하고 기괴한 경관을 다 보아 형악(衡岳) 의 구름을 열어 걷어낼 수 있었다. 또한 하늘 기둥에 걸린 달을 보았는데, 우리가 가보고 싶고 해보고 싶은 것은 조금도 남김없이 다 해보았으니, 이 또한 처음 바라보는 것이 미칠 수 있는 것이겠는가? 간재(簡齋) 진여의(陳與義) 어른은 ‘올해 나그네가 되지 않았다면, 어찌 이런 기관을 유람할 수 있었겠는가?[不作今年客, 爭成此段奇.]’ 라 하였는데, 참으로 내 마음을 얻은 것이다. 여러 공들은 모두 이번 유람의 기이함을 기록하는 한 마디 말이 없을 수 없다며, 나에게 유기(遊記)를 쓰기라고 하였다. 유기를 짓는 것은 나처럼 글을 잘 못하는 사람이 할 일은 아니지만, 짐짓 여러 공들이 말씀해 주신 나머지를 엮어서 훗날 와유(臥遊) 의 도구로 삼고자 할 뿐이다.

계미년(癸未年 1643년, 인조 21년) 음력 8월 29일 그믐 경인일(庚寅日)에 고령 박장원(朴長遠) 중구(仲久) 가 쓰다.

[끝]

[유교넷/문화콘텐츠닷컴/'조선시대유산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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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장원 [朴長遠, 1612~1671] 

 본관 고령, 자 중구(仲久), 호 구당(久堂) ·습천(隰川), 시호 문효(文孝)이다. 1627년(인조 5) 생원이 되고, 1636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그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외조부 심현(沈誢)을 따라 강화도로 피란하였다.

1639년 검열(檢閱)이 되고, 이어 정언(正言)으로 춘추관기사관(記事官)이 되어 《선조수정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653년(효종 4) 승지(承旨) 때 남인(南人)의 탄핵으로 흥해(興海)에 유배되고, 이듬해 풀려났다. 1658년 상주목사(尙州牧使) ·강원도관찰사를 거쳐, 1664년(현종 5) 이조판서가 되고 공조판서 ·대사헌 ·예조판서 ·한성부판윤 등을 역임하였다. 그뒤 자청하여 개성부유수(留守)로 나갔다가 죽었다. 문집 《구당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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