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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先人들의 智異山

유두류산록/유몽인②

◈유두류산록/유몽인-②

5일 갑술일. 일찍 향적암을 떠났다. 높이 솟은 고목 밑으로 나와 빙판 길을 밟으며 허공에 매달린 사다리를 타고서 곧장 남쪽으로 내려갔다. 앞서 가는 사람은 아래에 있고 뒤에 오는 사람은 위에 있어, 벼슬아치와 선비는 낮은 곳에 있고 종들은 높은 곳에 처하게 되었다. 공경할 만한 사람인데 내 신발이 그의 상투를 밟고, 업신여길 만한 자인데 내 머리가 그의 발을 떠받들고 있으니, 또한 세간의 일이 이 행차와 같구나.

길가에 지붕처럼 우뚝솟은 바위가 있는 것을 보고서 일제히 달려 올라갔다. 이 봉우리가 바로 사자봉(獅子峯)이다. 전날 아래서 바라볼 때 우뚝솟아 하늘을 찌르고 있는 것처럼 보이던 그 봉우리가 아닐까? 아래를 내려다보니 평지는 없고 온통 산비탈뿐이었다. 참으로 천왕봉에 버금가는 장관이었다. 이 봉우리를 거쳐 내려가니 무릎 정도 높이의 솜대〔綿竹〕가 언덕에 가득 널려 있었다. 이를 깔고 앉아 쉬니, 털방석을 대신할 수 있었다.

이어 만 길이나 되는 푸른 절벽을 내려가 영신암(靈神菴)에 이르렀는데, 여러 봉우리가 안쪽을 향해 빙 둘러서 있는 것이 마치 서로 마주보고 읍을 하는 형상이었다. 비로봉은 동쪽에 있고, 좌고대는 북쪽에 우뚝솟아 있고, 아리왕탑(阿里王塔)은 서쪽에 서 있고, 가섭대(迦葉臺)는 뒤에 있었다. 지팡이를 내려놓고 기다시피 비로봉 위로 올라갔지만 추워서 오래 있을 수 없었다. 암자에는 차솥, 향로 등이 있었지만 살고 있는 승려는 보이지 않았다. 흰 구름 속으로 나무를 하러 가서인가? 아니면 속세 사람을 싫어하여 수많은 봉우리 속에 자취를 감추어 버린 것인가? 청명하고 온화한 계절이어서 두견화가 반쯤 핀 것을 비로소 보았고 산 속의 기후도 천왕봉보다는 조금 따뜻하게 느껴졌다.

영신암에서 40리쯤 내려갔는데 산세가 검각(劍閣)보다 더 험하였다. 108번 굽이친 형세가 아니라 수직으로 떨어지는 비탈길이었다. 이 길을 따라 내려가는 것은 마치 푸른 하늘에서 황천으로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넝쿨을 부여잡고 끈을 잡아당기며 이른 아침부터 저녁 무렵까지 걷고 또 걸었다. 푸른 나무숲 틈새로 내려다보았는데, 어두컴컴하여 아래가 보이지 않아 이맛살을 찌푸리며 크게 한숨을 쉬었다. 손가락을 깨물며 정신을 차린 뒤에 내려가 깊은 골짜기로 들어갔다. 대나무 숲을 헤치고 의신사(義神寺)를 찾아 들어가 묵었다. 밤에 두견새 우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리고, 개울물 소리가 베갯머리에 맴돌았다. 그제야 우리의 유람이 인간 세상에 가까워졌음을 알았다.

이 절에는 의신사 주지 옥정(玉井)과 태승암(太乘菴)에서 온 각성(覺性)이 있었는데, 모두 시로 이름이 있는 승려들이었다. 그들의 시는 모두 율격이 있어 읊조릴 만하였다. 각성은 필법이 왕희지(王羲之)의 체를 본받아 매우 맑고 가늘며 법도가 많았다.

내가 두 승려에게 말하기를,

“그대들은 모두 속세를 떠난 사람들인데 어찌 깊은 숲 속으로 들어가지 않소? 내가 지나온 것과 비교해볼 때 그대들은 속세를 떠난 것이 아니오. 그대들이 외진 곳에 사는 것은 사실이지만 푸른 솔을 벗하고 흰 사슴과 함께하는 것에 지나지 않소. 생각해보면 나의 발자취는 푸른 솔과 흰 사슴이 사는 세상 밖으로 나갔다가 온 것이니 내가 그대들에 비해 낫소”

라고 하자 두 승려가 손뼉을 치며 웃었다. 서로 시를 주고받으며 놀다 밤이 깊어서야 파하였다.


6일 을해일. 드디어 홍류동(紅流洞)으로 내려가 시내를 따라갔다. 시냇가에 불룩 나온 높은 언덕이 보였는데, 의신사의 승려가 ‘사정’(獅頂)이라고 하였다. 푸른 소나무 그늘이 드리워진 맑은 시냇가로 가서 초록 이끼를 깔고 앉았다. 이에 비파로 영산회상(靈山會上)과 보허사(步虛詞)를 연주하고, 범패(梵唄)로 그에 맞춰 춤을 추고, 징과 북의 소리가 그와 어우러졌다. 평생 관현악을 들어보지 못한 깊은 산 속의 승려들이 모두 모여들어 돋움 발로 구경하며 신기하게 여겼다.

기담(妓潭) 가로 옮겨 앉으니 고인 물은 쪽빛처럼 새파랗고, 옥빛 무지개가 비스듬히 드리워져 있었다. 그리고 거문고, 비파 같은 소리가 숲 너머로 울려 퍼지고 있었다. 이른바 홍류(紅流)란 사영운(謝靈運)의 시 ‘돌층계에서 붉은 샘물 쏟아지네〔石?射紅泉〕’라는 구절에서 취한 것인데, 이를 해석하는 사람들이 홍천(紅泉)은 단사(丹砂) 구멍에서 나오는 것이니 홍류라는 이름은 선가(仙家)의 책에서 유래된 것이라 한다. 지금 내가 기담 가로 옮긴 것이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진경(眞境)이 허물을 뒤집어씀이 심하구나.

이에 두 승려가 작별을 고하였다. 나와 순지는 이별을 애석해하였다. 그들을 데리고 함께 유람하고 싶었으나, 두 승려가 말하기를,

“합하를 모시고 내려가 시냇가에서 노닐고 싶지만 속세와 점점 가까워지는 것이 꺼려집니다.”

라고 하여서, 시를 소매 속에 넣고 떠났다. 고개를 돌려 그들을 바라보니 두 사람의 지팡이가 나는 듯하더니 이내 그들의 자취가 보이지 않았다.

이곳을 떠나 내려가다가 한 줄기 시냇물과 한 맑은 연못과 한 무더기 봉우리를 만나 바위에 걸터앉아 시를 읊조렸다. 신흥사(神興寺)에 이르니 동행한 사람들이 오래 전에 도착하여 누워 쉬고 있었다. 함께 시냇가 바위 위에 올랐다. 시냇물이 대일봉(大日峯), 방장봉(方丈峯) 사이에 흘러 나오는데, 우거진 숲이 하늘을 가리고 맑은 물이 돌을 굴렸다. 평평한 바위는 6, 70명이 앉을 수 있을 정도였다. 바위 위에 ‘세이암(洗耳巖)’이라는 세 글자가 크게 새겨져 있었는데 누구의 글씨인지 모르겠다. 동네 이름이 삼신동(三神洞)인데, 이는 이 고을에 영신사(靈神寺), 의신사(義神寺), 신흥사(神興寺) 세 사찰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 보아도 세속에서 귀신을 숭상하는 풍속을 알 수 있다.

비결서에 ‘근년에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이 푸른 당나귀를 타고 독목교(獨木橋)를 나는 듯이 건넜다. 강씨(姜氏) 집의 젊은이가 고삐를 잡고 만류하였지만, 채찍을 휘둘러 돌아보지도 않고 가버렸다’고 하였다. 또 ‘고운은 죽지 않고 지금도 청학동에서 노닐고 있다. 청학동의 승려가 하루에 세 번이나 고운을 보았다’라고 하였다. 이런 이야기는 믿을 수 없다. 하지만 이 세상에 참다운 신선이 있다면, 고운이 신선이 되지 않았다고 어찌 장담할 수 있겠는가? 고운이 과연 신선이 되었다면 이곳을 버리고 어느 곳에서 노닐겠는가?

이 날 순지는 먼저 칠불암(七佛菴)으로 갔다. 나는 이 절의 승려에게 자세히 묻기를,

“칠불암에 기이한 봉우리가 있는가?”

라고 하니,

“없습니다.”

라고 하였다. 또.

“폭포가 있는가?”

라고 하니,

“없습니다.”

라고 하였다.

“맑은 못이 있는가?”

라고 하니. 역시,

“없습니다.”

라고 하였다. 내가 다시,

“그러면 그곳에 무엇이 있는가?”

라고 물으니,

“칠암정사(七菴精舍)가 있을 뿐입니다.”

라고 하였다. 나는 단청칠한 절은 실컷 구경했고, 녹음이 우거진 계절인지라 볼만한 기이한 경관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또한 산비탈을 오르내리는데 이미 흥이 다하여, 시냇가 길을 따라 내려가며 수석(水石)을 구경하는 것만 못하다고 생각하였다.

길을 떠나 홍류교(紅流橋)를 건너 만월암(滿月巖)을 지나 여공대(呂公臺)에 이르러 앉았다. 깊은 못 가에 나가 구경을 하고, 흐르는 개울가에 나가 물소리를 들었다. 갓끈을 풀어 씻기도 하고, 손으로 물을 움켜 입을 헹구기도 하였다.

쌍계석문에 이르렀다. 고운 최치원의 필적이 바위에 새겨져 있었는데 글자의 획이 마모되지 않았다. 그 글씨를 보니 가늘면서도 굳세어 세상의 굵고 부드러운 서체와는 사뭇 다른 참으로 기이한 필체였다.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은 이 글씨를 어린아이가 글자를 익히는 수준이라고 평하였다. 탁영은 글을 잘 짓지만 글씨에 대해서는 배우지 않은 듯하다. 이끼 낀 바위 위에 모여 앉아 맑은 물과 흰 물결을 바라보았다. 어린 종이 말하기를,

“해가 이미 서쪽으로 기울었습니다.”

라고 하여 쌍계사로 들어갔다.

쌍계사에는 오래된 비석이 있는데 이수〔龍頭〕와 귀부(龜趺)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전액(篆額)에 ‘쌍계사 고 진감선사비(雙溪寺故眞鑑禪師碑)’라고 씌어 있었는데, 전서체(篆書體)가 기이하고 괴이하여 쉽게 알아볼 수 없었다. 그 밑에 ‘전 서국 도순무관 승무랑 시어사 내공봉 사자금어대 신 최치원이 교서를 받들어 지음〔前西國都巡撫官承務郞侍御史內供奉賜紫金魚?臣崔致遠奉敎撰〕’이라고 씌어 있었다. 곧 당 희종(唐僖宗) 광계(光啓) 연간 에 세운 것이다. 손가락을 꼽아 헤아려보니 지금으로부터 700년 전이다.

여러 차례 흥망이 거듭되었지만 비석은 그대로 남아 있고 사람은 옛 사람이 아니다. 그러니 비석을 보면서 눈물을 떨구기보다 어찌 신선술을 배워 오래도록 이 세상을 바라보지 않으랴. 나는 이 비석을 보고 뒤늦게 깨달은 바가 있다. 또한 나는 어려서부터 고운의 필적이 예스럽고 굳센 것을 사랑하여 판본(板本)이나 탁본(拓本)의 글씨를 구해 감상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집도 글씨도 모두 없어져 늘 한스럽게 여겼다. 내가 금오(金吾)의 문사랑(問事郞)이 되었을 적에 문건을 해서(楷書)로 쓰는데, 곁에 있던 금오장군(金吾將軍) 윤기빙(尹起聘)이 한참 들여다보더니,

“그대는 고운의 서법을 배웠는가? 어찌 그리도 환골탈태를 잘 하시오.”

라고 했었다. 지금 진본(眞本)을 보니 어찌 옛 사람을 위문하며 감회가 일어날 뿐이랴. 옛 일이 떠올라 슬픈 마음이 들었어서 종이와 먹을 가져오라고 하여 탁본하였다.

절에는 대장전(大藏殿)?영주각(瀛洲閣)?방장전(方丈殿)이 있었다. 예전에는 학사당(學士堂)이 있었는데 지금은 무너져버렸다. 날이 저물어 순지가 칠불사를 구경하고 돌아왔다.


7일 병자일. 순지가 작별을 고하며,

“나는 몇 년 전에 청학동을 유람하여 이제 다시 가볼 필요가 없으니, 어찌 곧장 돌아가지 않겠소?”

라고 하였다. 김화도,

“저도 전에 청학동을 실컷 구경하였습니다. 농사철이 되어 일이 있으니 먼저 돌아갈까 합니다.”

라고 하였다. 나는 두 사람을 전송한 뒤 돌아와 혼자 신상연(申尙淵)의 무리와 함께 동쪽 고개를 넘어 깊은 골짜기로 들어갔다. 이 골짜기는 황혼동(黃昏洞), 월락동(月落洞)처럼 어두컴컴 하였다. 긴 대나무가 길 양쪽에 서 있는데, 새로 나온 송아지 뿔 같은 죽순이 낙엽을 뚫고 삐쭉 나와 있었다. 종종 승려들의 신발에 채여 부러진 것이 있었는데, 북쪽에서 내려온 나그네여서인지 이를 보니 나는 애석하였다. 절벽 밑에 이르자 승려들이 나무를 베어 가로질러놓은 사다리가 여러 군데였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컴컴하여 보이지 않았다.

드디어 불일암(佛日菴)에 도착하였다. 암자 앞에 평평한 대(臺)가 있고, 벼랑에 완폭대(玩瀑臺)라고 새겨져 있었다. 폭포수가 검푸른 봉우리 푸른 절벽 사이로 쏟아져 내리는데, 그 길이가 수백 자는 되어 보였다. 여산(廬山)의 폭포의 길이가 얼마나 되는지 모르지만, 우리나라 긴 폭포로는 개성(開城)의 박연폭포(朴淵瀑布)만한 것이 없다. 그런데 이 폭포는 박연폭포와 비교해 몇 길이나 더 긴 듯하고, 물이 쏟아지는 길이도 더 긴 듯했다. 다만 걸림이 없이 곧장 떨어지는 것은 이 폭포가 박연폭포만 못한 것 같았다.

하늘의 띠가 아래로 드리운 듯한 폭포가 쏟아져 온 골짜기가 우레치는 듯 요란하고, 붉은 빛을 띤 안개와 흰 눈같은 하얀 물보라가 골짜기 안에 이리저리 흩날렸다. 사람의 귀를 놀라게 하고 눈을 번쩍 뜨게 하여, 정신이 맑아졌다. 이 날의 기이한 구경은 참으로 평생 다시 보기 어려운 광경이었다.

남쪽에는 향로봉(香爐峯)이 있고, 동쪽에는 혜일봉(慧日峯)이 있고, 서쪽에는 청학봉(靑鶴峯)이 있었다. 승려가 절벽의 구멍을 가리키며,

“저것이 학의 둥지입니다.”

라고 하였다. 옛날에는 붉은 머리 푸른 날개의 학이 그곳에 살았는데 지금은 몇 년 동안 오지 않는다고 하였다. 나는 비결서에 ‘지리산의 푸른 학이 무등산(無等山)으로 옮겨갔다’고 한 말을 들었는데, 이 설과 서로 들어맞는 것이 아니겠는가?

문득 노새만한 산양이 향로봉 꼭대기에 한가로이 누워 있는 것이 보였다. 비파와 피리〔長笛〕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두리번대면서 사람을 보고도 피하지 않았다. 아! 금화산(金華山)의 신선이 기르던 짐승으로 흰 구름 속에서 지금까지 몇 년 동안이나 한가로이 잠을 자다가, 감히 이곳에서 당돌하게 나에게 양 타는 법을 배우게 하려 한단 말인가? 채찍을 들어 꾸짖자 그 소리를 듣고 일어나 가버렸다.

유람이 끝날 때쯤 관아의 말이 골짜기에서 울며 기다리고 있었다. 이곳을 나갈 때는 아름다운 임을 이별할 때처럼 느릿느릿 말을 몰며 빠져나왔다. 며칠 동안 내 발길이 지난 길을 되돌아보니, 천 길이나 높고 한 아름이나 되던 큰 나무들이 바늘처럼 가늘게 보였다. 동네 이름을 물어보니 화개동(花開洞)이라고 하였다. 이곳은 기후가 따뜻하기 때문에 꽃이 먼저 핀단다.

옛날 일두(一?) 정여창(鄭汝昌)이 이곳에 집을 짓고 학업을 강마하였다. 일두가 일찍이 이 산을 유람하였는데, 일두는 힘이 다하자 허리에 새끼 한 가닥을 묶고 한 승려에게 끌고 가게 하였다. 탁영이 이를 보고,

“스님은 어디서 죄인을 묶어 오는 것이오?”

라고 하였다. 그는 또 말하기를,

“이렇듯 좋은 나무들이 훌륭한 목공을 만나지 못해 동량(棟梁)의 재목으로 쓰이지 못하고 빈 산에서 말라죽는 것을 생각하니, 조물주의 입장에서는 애석히 여길 만한 일이다. 그러나 또한 이 나무들은 천수(天壽)를 다 누렸구나.”

라고 하였다.

아! 말은 마음의 소리이다. 마음은 본래 텅 비고 밝으니 말이 발하여 징험이 있게 된다. 그 뒤에 일두는 옥에 갇혔다 죽었고 탁영도 요절하였다. 그들의 천수는 모두 조물주의 입장에서는 애석하게 여길 만한 일이었으니 어찌 말에 징험이 있는 것이 아니랴.

무릇 천도(天道)와 인사(人事)는 암암리에 합치되고, 통하고 막히는 것은 시대의 운수와 서로 부합한다. 형산(衡山)에 구름이 걷히자 퇴지(退之) 한유(韓愈)는 스스로 자신의 정직함을 과시하였고, 동해에 신기루가 나타나자 소동파(蘇東坡) 또한 스스로 퇴지에 비유하였다. 이들은 천운이 열려있음을 깨닫지 못했지만 오래지 않아 등용되었으니, 길조(吉兆)가 그들을 위해 먼저 나타난 것이다.

점필재와 탁영의 지리산 유람록을 읽어보니, 그들이 천왕봉에 올라 유람하던 날 모두 비?바람, 구름, 안개를 만나 낭패를 많이 당하였다. 이 두 사람이 정직한 것은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것이지만 불길한 징조는 일이 터지기 전에 먼저 나타났으니, 산신령이 그들을 희롱한 것이다.

이번에 내가 순지와 산에 들어온 뒤로는 날씨가 맑고 온화했다. 오랜 가뭄 끝에 비가 내리고 떠돌던 운기(雲氣)도 높이 날아올라 만리나 뻗은 산과 호수가 눈에 훤히 들어왔다. 비록 신령스런 용을 건드려 한때 노여움이 있었지만 마침 다음날 개이도록 도와주었으니, 어찌 상심하랴.

정오 무렵 섬진강을 따라 서쪽으로 나아가 와룡정(臥龍亭)에서 쉬었다. 이 정자는 생원 최온(崔蘊)의 장원(庄園)이었다. 큰 둔덕이 강 속으로 뻗어 마치 물결을 갈라놓은 것 같았다. 말을 타고 반석 위로 나아가니 솜을 타놓은 듯 수백 보의 백사장이 보였다. 그 둔덕 위에 초당 서너 칸을 지어놓고 비취빛 대나무와 검푸른 소나무를 주위에 심어놓았다. 그림 같은 풍광이 둘러쳐져 초연히 속세를 떠난 기상이 있었다. 이 날 남원부의 남창(南倉)에서 묵었다.


8일 정축일. 숙성령(肅星嶺)을 넘어 용담(龍潭) 가에서 잠시 쉬었다가 관아로 돌아왔다. 서찰이 목전에 가득하고, 공문이 책상에 쌓여 있었다. 푸른 행전을 풀고 죽장을 던지고서 도로 속세의 일을 하니 부끄러울 따름이다.


아! 나는 성품이 소탈하고 얽매임을 싫어하여 약관의 나이로부터 사방의 산수를 유람하였다. 벼슬길에 나오기 전에는 삼각산(三角山)을 집처럼 여겨 아침저녁으로 백운대(白雲臺)를 오르내렸으며, 청계산(淸溪山), 보개산(寶盖山), 천마산(天摩山), 성거산(聖居山)에서 독서하였다. 사명(使命)을 받들고 외직으로 나가서는 팔도를 두루 돌아다녔다. 청평산(淸平山)을 둘러보고 사탄동(史呑洞)으로 들어갔으며. 한계산(寒溪山), 설악산(雪嶽山)을 유람하였다. 봄, 가을에는 풍악산(楓嶽山)의 구룡연(九龍淵), 비로봉을 구경하고, 동해에 배를 띄우고 내려오며 영동(嶺東) 아홉 군의 산수를 두루 보았다.

그리고 적유령(狄踰嶺)을 넘어 압록강 상류까지 거슬러 올라가 마천령(磨天嶺), 마운령(磨雲嶺)을 지나 험난한 장백산(長白山)을 넘어 파저강(波?江), 두만강(豆滿江)에 이르렀다가 북해에서 배를 타고 돌아왔다. 또 삼수(三水), 갑산(甲山)을 다 둘러보고, 혜산(惠山)의 장령(長嶺)에 앉아서 멀리 백두산을 바라보았으며 명천(明川)의 칠보산(七寶山)을 지나 관서의 묘향산(妙香山)에 올랐으며, 발길을 돌려 서쪽으로 가서 바다를 건너 구월산(九月山)에 올랐다가 백사정(白沙汀)에 이르렀다. 중국에 세 번 다녀왔는데, 요동으로부터 북경에 이르기까지 그 사이의 아름다운 산과 물을 대략 보고 돌아왔다.

나는 일찍이 땅의 형세가 동남쪽이 낮고 서북쪽이 높으니, 남쪽 지방 산의 정상이 북쪽 지역 산의 발꿈치보다 낮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또 두류산이 아무리 명산이라도 우리나라 산을 통틀어 볼 때 풍악산으로 집대성되니, 바다를 본 사람에게 다른 강은 하찮게 보이듯 이 두류산도 단지 한주먹 돌덩이로 보였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제 천왕봉 꼭대기에 올라보니 그 웅장하고 걸출한 것이 우리나라 모든 산의 으뜸이었다.

두류산이 더욱 높고 크게 보이는 이유는 살이 많고 뼈대가 적기 때문이다. 문장에 비유하면 굴원(屈原)의 글은 애처롭고, 이사(李斯)의 글은 웅장하고, 가의(賈誼)의 글은 분명하고, 사마상여(司馬相如)의 글은 풍부하고, 자운(子雲) 의 글은 현묘한데, 사마천(司馬遷)의 글이 이를 모두 겸비한 것과 같다. 또한 맹호연(孟浩然) 의 시는 고상하고, 위응물(韋應物) 의 시는 전아하고, 마힐(摩詰) 의 시는 공교롭고, 가도(賈島) 의 시는 청아하고, 피일휴(皮日休) 의 시는 까다롭고, 이상은(李商隱) 의 시는 기이한데, 두자미(杜子美) 의 시가 이를 모두 종합한 것과 같다. 지금 살이 많고 뼈대가 적다는 것으로 두류산을 대단찮게 평한다면 이는 유 사복(劉師服)이 한 퇴지(韓退之)의 문장을 똥덩이라고 농락한 것과 같다. 이렇게 보는 것이 제대로 산을 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두류산은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면면이 4천 리나 뻗어온 아름답고 웅혼한 기상이 남해에 이르러 합하여 모이고 우뚝 솟아난 산으로, 열두 고을이 주위에 둘러 있고 사방의 둘레가 2천 리나 된다. 안음(安陰)과 장수(長水)는 그 어깨를 메고, 산음(山陰)과 함양(咸陽)은 그 등을 짊어지고, 진주(晉州)와 남원(南原)은 그 배를 맡고, 운봉(雲峯)과 곡성(谷城)은 그 허리에 달려 있고, 하동(河東)과 구례(求禮)는 그 무릎을 베고, 사천(泗川)과 곤양(昆陽)은 그 발을 물에 담근 형상이다. 그 뿌리에 서려 있는 영역이 영남과 호남의 반 이상이나 된다. 저 풍악산은 북쪽에 가깝지만 4월이 되면 눈이 녹는데, 두류산은 남쪽 끝에 있는데도 5월까지 얼음이 있다. 이를 통해 지형의 높낮이를 짐작할 수 있다.

옛날 사람이 일찍이 천하의 큰 강 셋을 논하면서 황하(黃河)?양자강(楊子江)?압록강(鴨綠江)을 들었다. 그러나 이제 내가 살펴보니 압록강의 크기는 한양의 한강(漢江)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직접 보지 않고 범범하게 논한 것이니, 전기(傳記)에 실려 있는 것도 주밀하지 못한 점이 있다. 나 같은 사람은 우리나라 바다와 산을 모두 두 발로 밟아보았으니, 천하를 두루 유람한 자장(子長) 에게 비할지라도 크게 뒤지지 않을 것이다.

내 발자취가 미친 모든 곳의 높낮이를 차례를 매긴다면 두류산이 우리나라 첫번째 산임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인간 세상의 영리를 마다하고 영영 떠나 돌아오지 않으려 한다면, 오직 이 산만이 편히 은거할 만한 곳이리라, 돈, 곡식, 갑옷, 무기 등을 속속들이 아는 것은 머리가 하얀 서생이 요리할 바가 아니다. 조만간 허리에 찬 긴 끈을 풀고 내가 생각한 애초의 일을 이루리라. 물소리 조용하고 바람소리 한적한 곳에 작은 방 한 칸을 빌린다면, 어찌 고흥(高興)의 옛집에서만 나의 지리지(地理志)를 쓸 수 있으랴.


만력 39년(1611년, 광해군 3년) 신해년 4월 모일에 묵호옹(?好翁)이 쓴다.

[유교넷/문화컨텐츠닷컴/조선시대유산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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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몽인(柳夢寅)의 자는 응문(應文)이고 호는 어우당(於于堂) 또는 간제·묵호자(艮齋·默好子)이며, 본관은 고흥(高興)이다. 그는 1559년(명종 14) 柳 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찌기 성혼의 문하에 들어가 배우고 1582년(선조 15) 24세에 진사가 되였으며,1589년 증광문과에 장원하여 암행어사가 되고, 1593년 문학을 역임하였다. 그는 학문의 깊이가 있었고 문장력이 뛰어났으나 성품이 경박하여 스승의 책망을 받고, 절교를 당하자 당시 이이첨등 대북파와 교류하며 중북파의 영추가 되고 스승인 성혼이 죽자 그를 모독하는 글을 지어 주위의 비난을 받았다.

선조말년 황해도 관찰사·좌승지·도승지를 역임하고,1612년(광해군 4) 예조참판에 이어 이 조참판이 되었으나 폐모론에 휘말려 이이첨과 대립하였지만 이에 적접 가담하지 않아 1623년 인 조반정때는 화를 면했으나 유응시의 고변으로 기자헌·유경종등이 반란을 일으킨 이괄과 내통할 우 려가 있다하여 체포되자 양주서산에 도피했으나 잡힌 후 김상헌등의 문초에 모반사실을 부인했으나 끝내 아들과 함께 사형되었는데 당시에 지은 노과부사는 너무도 유명하다.

그러나 그는 조선중기의 설화문학의 대가였으며 전서·해서·초서에 능통하였다. 그가 지은 어우 야담은 현재도 조선중기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묘는 가평군 가평읍 하색리 진동 능골에 있으며 정조조 (正祖朝)에 이르러 신원(伸寃)되어 이조판서에 추중되고, 홍양에 있는 운곡사와 고산에 있는 삼현영당 에 제향되어있으며 시호는 의정(義貞)이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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