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先人들의 智異山

유두류산록/조위한

유두류산록


무오년(1618년, 광해군 10년) 2월에 나는 서울에서 식구들을 데리고 남원(南原)에 잠시 와 살게 되었다. 동생 현주공(玄洲公) 조찬한(趙纘韓) 이 또한 토포사(討捕使)로서 삼남 지방을 다스리고자 먼저 남원에 와 있어 서로 떠돌아다니는 중에 다행히 만나게 되니, 영원(鴒原) 의 아주 기이한 일이었다. 내가 현주공에게 말하기를,

“우리가 대방(帶方) 을 왕래한 것이 몇 번이 되는지 모르는데 끝내 방장산(方丈山) 을 유람하지 못한 것은 공무에 매여 있었을 뿐만 아니라, 어쩌면 세속의 인연이 끝나지 않아 요마(妖魔)가 빌미가 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하네. 진시황과 한 무제가 일생동안 힘들게 찾았어도 이 산이 어디에 있는지 끝내 알 수가 없었지. 그래서 중국인들은 오늘날까지 이 산의 존재를 아득하고 황당한 이야기로 치부하고 삼신산(三神山)이 바로 우리나라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으니, 이 어찌 여름 벌레가 얼음을 알지 못하고 하루 사는 버섯이 초하루를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지금 우리가 다행히 동방에 태어나 이 지방에 와서 날마다 방 안에서 안석에 기대어 창문으로 삼신산을 바라보고 있네만 아직도 발품을 아끼고 있으니 한 번 올라가 노닐며 실컷 자연을 느껴보지 못한다면 그 어찌 마음을 씻어내고 바라는 것을 얻을 수 있겠는가? 돌아가 지인들에게 변명할 말도 없을 것이네. 게다가 그대는 공무가 한가하고 나도 지병이 조금 나았으며 시절은 화창하고 꽃구경 하는 때도 끝나지 않았으니 지금 한가한 틈을 타 발걸음을 떼지 않는다면 뒷날을 또 어찌 기약하겠는가?”

라고 하였다. 이에 현주공이 말하기를,

“저의 뜻도 그러합니다. 그리고 마침 경상 병사(慶尙兵馬) 남이흥(南以興) 과 쌍계(雙溪)에서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 있으니 공무를 겸해서 갈 수 있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그래서 쌍계로 가기로 정하였다.


4월 11일 경자일. 맑음. 남원 부중(府中)에서 현주와 말을 타고 순자강(鶉子江)으로 오니 방원량(房元亮)이 먼저 중주원(中酒院)에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었고, 양동애(梁東崖)가 뒤따라 왔다. 이 두 사람과는 모두 약속이 되어 있었다. 마침내 배에 올라 나루를 건너 말을 타고 7, 8리 정도 가니 강가 언덕에 정자가 우뚝 서 있었다. 주변의 고목과 푸른 등나무 그리고 수석이 자못 빼어났는데 고인이 된 참판(參判) 김계(金啓) 의 이른바 수운정(水雲亭)이라는 곳이었다. 말에서 내려 정자에 올라 주변을 관람하고 되돌아서 곡성(谷城)으로 가는데, 고을 수령 최호(崔皥)가 서울에 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아 관사가 적막하게 비어 있었다. 반나절 동안 심심하게 있다가 현주가 먼저 절구 한 수를 짓고 나는 동애(東崖) 양자발(梁子發)과 함께 화답하였다.

이 고을 사는 상사(上舍) 김련(金鍊)이 자식과 조카들을 데리고 안건(安楗)에 이르렀다가 모임에 왔다. 저물녘에 담양 부사(潭陽府使) 김홍원(金弘遠)도 초대를 받고 왔다.


12일 신축일. 맑음. 나는 방원량과 먼저 상사 김련의 집으로 갔고 현주는 담양부사를 전송하고 뒤따라 왔다. 술이 세 순배 돌았을 때 현주가 먼저 나가고 나는 방원량과 뒤따라갔다. 강을 따라 30리를 가니 가파른 길과 위태로운 잔도가 매우 험했다. 바람에 흔들거리고 매우 가파른 것이 단양(丹陽)의 영춘(永春)에 뒤지지 않았는데 세상 사람들은 왜 다만 사군(四郡)만을 거론하고 이 협곡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인가? 어쩌면 강산의 절경도 시대를 제대로 만나지 못함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압록진(鴨綠津)에 이르니 동애가 욕천(浴川)에서 먼저 곧바로 강가에 이르러 악사를 시켜 피리를 불게 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점심을 먹은 후에 배에 올라 술을 준비하게 하니 곡성 관아 기생 두 명이 와서 배에 올랐다. 그들에게 피리 소리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게 하고 강가를 오르내렸는데 흥이 가라앉지 않아 배 안에서 각자 율시 한 수 씩 짓고 배에서 내려 다시 협곡을 따라 30리를 갔다. 졸졸 흐르는 시냇물을 건너 구례현(求禮縣)에 들어가서 시 몇 수를 짓고 고을 수령 민대륜(閔大倫)과 조촐한 술자리를 가졌는데 밤이 깊어서야 자리를 파하였다. 이날 밤은 가랑비가 잠시 내렸다.


13일 임인일. 맑음. 아침에 아전 요간(了簡)을 광양(光陽)사는 심생(沈生)에게 보내어 산중에서 만나기로 기약하였다. 현주가 먼저 출발하고 우리 세 사람은 또 협곡을 따라 30리를 가서 바위기둥을 만나 길을 돌아가니 무너진 성돌과 허물어진 보루에 방어하는 곳이 있었는데 훌륭한 경치와 기이한 모습은 비록 수백 개의 효산(崤山)과 함곡관(函谷關)이 있더라도 이보다는 낫지 못할 것이다.

바위기둥에서 협곡을 따라 20여 리를 가서 화개동(花開洞)에 들어갔다. 대체적으로 이 협곡은 욕천에서 화개에 이르는 110리 길을 강을 따라 가거나 때로는 돌아가게 되는데 돌길과 우뚝 솟은 바위, 푸른 강과 흰 돌들이 곳곳마다 사랑스러웠고 도중에 만난 외딴 마을은 무릉도원 같아서 식구들을 데리고 들어와서 살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화개동 입구에서 악양(岳陽)으로 곧장 가는 길을 버리고 작은 지름길로 들어갔는데 큰 개천이 콸콸거리며 산중에서 흘러 내려오고 있었다. 개천을 따라 10리를 갔는데 계곡은 휘돌고 바위들은 모습을 바꾸어 비단 같은 바위와 옥 같은 꽃들이 굽이굽이 다 기이한 절경이었다. 말이 가는 대로 천천히 보면서 실컷 즐겼다.

무릉계(武陵溪)에 이르니 이곳에 사는 승려 십여 명이 나와 맞이하면서 말하기를,

“토포사께서 이미 병사(兵使) 나리와 석문(石門)에서 모여 기다리고 계십니다.”

라고 하였다. 듣자마자 가마를 타고서 시내를 건너 몇 리를 더 가서 석문에 이르렀다. 우러러 우뚝 솟은 바위들을 바라보니 나란히 서로 대치하고 있는데 오른쪽 바위에는 석문(石門)이라고 새기고 왼쪽 바위에는 쌍계(雙溪)라고 새겨놓았다. 네 글자의 필세가 마치 용과 뱀이 올라 움켜 쥘 듯하고 칼과 창이 비껴 꽂혀 있는 듯이 삼엄하였으니 최 고운(崔孤雲) 의 필적이었다. 병사와 만나 시냇가 바위 위에 앉아서 술상을 차렸는데 진주 기생 예닐곱 명이 보석들을 치장하고 각각 노래를 부르거나 가야금을 뜯거나 피리를 부니 물소리와 서로 섞여 사람의 소리로 들리지 않았다.

절의 승려들이 앞뒤로 삥 둘러앉았는데 그 중에 옷이 매우 깨끗하고 눈빛이 빛나는 이가 있었다. 법명은 각성(覺性)이라고 했는데 경서에 통달하고 글을 볼 줄 알아서 불가의 대승의 교리를 이해하고 있었다. 제자 이백 명을 데리고 신흥사(神興寺)에서 설법을 해 왔는데 우리들이 산에 올라온다는 말을 듣고 이곳에 와 맞이하려고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병사는 먼저 절 안으로 들어가고 우리들은 둘러 앉아 바위 위에서 시를 짓고 뒤따라 들어갔다. 고목 천여 그루가 그늘을 드리우고 몇 그루의 동백나무에는 붉은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절 앞에 돌거북이 지고 있는 오래된 비석이 있는데 길이가 한 길은 넘어 보였으며 ‘진감대사비명(眞鑑大師碑銘)’이라는 제목에 당나라 광계(光啓) 3년(887년)에 세운 것으로 글과 글씨 모두 최 고운의 자취였다. 누각에 올라 주연을 열어 기악과 노래를 실컷 하며 기생들은 앞에서 번갈아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깊은 밤 밝은 달빛 아래에서 한껏 취한 뒤에야 자리를 파하였다.


14일. 계묘일. 맑음. 병사는 진양(晉陽)으로 돌아가고 각성은 신흥사로 돌아갔다. 정오에 가마를 준비하여 불일암(佛日庵)에 올라가려고 하는데 심생이 광양에서 젊은 노새를 타고 백 리를 달려서 아침 일찍 당도하였으니 기이한 일이었다. 다섯 사람이 각자 가마를 타고 법당 뒤쪽을 따라 곧바로 올라가니 정상이 너무 험해서 부여잡고 오를 수가 없었다. 가마 메는 승려들은 풀무질하는 소리를 내면서 헐떡이고 소금기가 등에 배었다. 대여섯 걸음 가는 사이에 어깨를 바꾸고 다리를 바꾸며, 앞에서 당기고 뒤에서 미는 통에 왼쪽으로 거꾸러지고 오른쪽으로 기울어지니 가마 타는 고통이 가마 메는 것보다 뒤지지 않았다. 한 치를 나아가고 한 자를 물러나며 힘들게 팔구 리를 올라가니 벼랑이 끊어져 나무를 잘라 길을 이어 놓은 곳이 몇 군데 되었는데 굽어보면 밑바닥이 보이지 않는 계곡인지라 걸어서 건널 수 없을 듯싶었다.

가마에서 내려 착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은 채 포복으로 간신이 벼랑에 붙어 건넜다. 불일암에 도착하니 절은 오래 되었는데 승려는 없고 단청은 떨어져 나가 있으며 빈 감실(龕室)은 고요하고 창문은 영롱하였다. 오른쪽에 청학봉(靑鶴峯)을 마주하고 있는데 구름을 끼고서 푸른 절벽이 뾰족하게 서 있었다. 승려가 말하기를,

“바위틈에 청학 한 쌍이 항상 둥지를 틀고 새끼를 낳았었는데 바로 고운(孤雲) 이 말을 타고 왕래하던 곳입니다. 천백 년이 지나도록 아무 탈 없이 보존되고 있었는데 불행히 이 산에 놀러 왔던 어떤 영남 유생이 돌을 던져 상처를 입은 뒤에 날아가 버리고 돌아오지 않은지 십여 년이 되었습니다.”

라고 하였다.

그 아래에 계곡이 있는데 청학동(靑鶴洞)이라고 했다. 만 길이나 움푹 들어가 있어 그 밑바닥이 보이지 않고 소나무, 삼나무, 회나무, 잣나무가 어둑하게 가리고 있고 다만 구름과 안개가 자욱할 뿐이었다.

왼쪽에는 향로봉(香爐峯)이 청학봉과 서로 대치하고 있는데 웅장함이 서로 대등하였다. 불일암에서 동남쪽으로 백 걸음쯤 가서 향로봉에 못 미쳐 긴 폭포가 솟아 나와 허공에 거꾸로 매달려 있는데 날아다니는 물살과 이리저리 튀는 물방울이 숲을 씻어내고 계곡에 메아리치며 우르릉대는 것이 마치 수많은 우레가 이 계곡의 하늘에서 내리치는 것 같았으니 참으로 천하의 장관이었다. 송악(松岳) 의 박연폭포와 그 순위를 다툴 만한데 골짜기의 장관은 박연폭포도 미치지 못할 듯싶었다.

절 앞에 십여 명 정도 앉을 만한 누대가 있는데 바위에 ‘완폭대(翫瀑臺)’ 세 글자를 새겨놓았으니 역시 고운이 직접 쓴 것이었다. 다섯 사람이 누대 위에 둘러 앉아 잔을 씻어 술을 따르고 기생에게 노래를 부르게 하고 악공에게 피리를 불게 하니 그 소리가 구름을 뚫고 나가 골짜기에서 메아리로 화답하였다. 가슴 속이 상쾌해져서 훌쩍 세속을 떠나고픈 생각이 들었는데 어슴푸레하게 바위 구멍에서 최 고운의 기침소리가 들리는 듯하였다.

누대 앞에 고목들이 둘러 서 있는데 앞에 지나다니는 유람객들이 껍질을 벗기고 이름을 새긴 것이 매우 많았으니 심지어 30년 전의 것이 완연하게 남아 있는 것도 있었다. 심생과 방원량(房元亮) 군은 폭포수가 떨어지는 곳을 찾으려고 절벽을 따라 내려갔는데 방군은 중도에서 돌아오고 심생은 끝내 바닥까지 가서 다 보고 왔다. 함께 나지막하게 시를 읊고 경치를 감상하면서 해가 지는 줄을 알지 못했다. 시 몇 편을 짓고 왔던 길을 되짚어 가다가 한 가닥 좁은 길을 찾아내서 풀을 헤치고 덩굴을 제치며 곧장 몇 리를 내려가 옥소암(玉簫庵)에 닿았다. 암자는 깎아지른 절벽 위에 있는데 절벽을 뚫고 허공에다가 기둥을 세우고 난간을 설치해서 아득하게 허공에 떠서 새가 나래를 펴고 있는 것 같아, 마치 그림 속에 있는 듯해서 일반적인 승방이나 절과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승려가 말하기를,

“이 암자는 담양 선비 이성국(李聖國)이 이 산에 들어와 이십 년 동안 도를 닦다가 재산을 다 털어 절에 시주해서 지은 것입니다.”

라고 한다. 옷을 벗어 놓고 피곤해 누워 시를 짓고 돌아와 가마 타고 곧장 내려가니 마치 구덩이나 우물에 빠지는 느낌이었다. 수백 걸음 가서 영대암(靈臺庵)에 닿았고 수백 걸음 더 가서 불출암(佛出庵)에 이르렀다. 이 두 암자는 모두 험한 골짜기 위에 있어서 한 점 속세의 먼지가 없었으나 옥소암에 비한다면 풍격이 한참 못 미쳤다. 불출암에서 또 1 리쯤 가서 쌍계로 돌아와 묵었다.


15일. 갑진일. 맑음. 일찍 길을 나서 무릉교(武陵橋)를 건너 신흥동(神興洞)으로 들어가니 계곡이 깊어질수록 모습이 달라졌다. 옥빛 땅과 금빛 모래를 밟는 기분이 너무 좋았고 옥빛의 못물은 곳곳마다 절경이었으니 금강산 만폭동(萬瀑洞)과 서로 비슷하다 할 수 있겠으나 웅장하고 다채로운 모습은 더 나았다.

말에서 내려 돌 위에 앉아 실컷 바라보다가 진양에서 온 아이에게 물속에 들어가 헤엄치게 하니 또한 기이한 볼거리였다. 십여 리를 쉬지 않고 가서 신흥동에 도착했다. 계곡 입구에 삼신동(三神洞)이라고 새긴 돌이 서 있었고 홍류교(紅流橋)를 건너자 시내 주변에 또 세이암(洗耳嵒)이라고 새겨놓았는데 이것들은 모두 고운의 글씨가 아니었다. 시냇가에 능파대(凌波臺)의 옛터가 있었는데 누대는 없어지고 잡초가 우거져 보이지 않았다.

각성(覺性)이 제자들을 데리고 나와 맞이하여 가마를 타고 절에 들어갔다. 절 앞 높은 누대에 앉았는데 누대는 넓은 연못을 바라보고 있었으며 연못은 크기가 작은 배를 띄울 만 했다. 깎아지른 듯한 기이한 봉우리가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고 신령스런 산들바람이 솔솔 불어와 상쾌한 기운이 몸을 휩싸고 도는데 마치 찬란한 누각, 달빛 스며드는 전각에서 날개를 달고 신선이 되어 하늘로 날아오르면서 깨닫지 못하는 듯 황홀했다. 각성이 차를 대접한 뒤에 법당으로 인도하였는데 갖가지 색채가 휘황찬란하게 용 비늘을 비추고 있었다. 젊고 환한 승려들 수백 명이 나한(羅漢)처럼 둘러서 있는데 모두 각성의 제자들이었다. 승려가 밥과 나물들을 차려 주었는데 허기진 배를 채우기에 족했다. 진양 기생들을 먼저 보내고 각자 시를 한 수씩 지어 각성에게 주었다.

계곡을 나와 돌아가려는데 심생은 뒤에 남아 이곳에서 묵었다. 돌아오는 길에 사나운 바람이 계곡을 흔들어 놓아 다들 눈을 뜰 수조차 없을 지경이었다. 갓이 날리고 옷이 찢어져서 나아갈 수 없는 지경이었으니 아마도 지리산의 신령이 속된 발자취가 영험한 땅을 더럽힌 것에 분노해서 용과 바람을 시켜 그 먼지를 떨어버리게 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강가에서 말을 쉬게 하고 점심을 먹은 후에 현주를 먼저 보내고 나와 방군은 말을 타고 용두정(龍頭亭)에 이르러 말을 세우고 주변을 둘러보았는데 지세가 아주 장쾌하였으니 용두정이라는 이름이 괜한 것이 아님을 알았다.

계속해서 저물녘에도 바람이 세게 불어 곧장 구례로 가서 묵었다.


16일. 을사일. 맑음. 새벽에 출발하여 중방리(中方里)를 거쳐 성원(星院) 정랑(正郞) 최유장(崔孺長)의 우거(寓居)에 들어갔다. 시냇가 돌 위에 앉으니 주인이 술상을 차려와 오래도록 담소하다가 시를 지어 그에게 주었다. 현주는 먼저 숙성치(肅星峙)를 넘어 남원으로 가고 양자발은 율치(栗峙)를 넘어 술산(述山)으로 돌아갔다. 나는 방군과 함께 둔산령을 넘어 저물녘에 말을 달려 월파헌에 이르러 묵었다.


17일. 병오일. 맑음. 내가 남원으로 돌아오니 현주도 부중(府中)에서 와서 만났다.


18일. 정미일. 비옴. 말을 보내 동애를 맞이하였고 기행에 대하여 오언 고시 한 편씩 을 지었다.


19일. 무신일. 맑음. 산에서 지은 시의 초고들을 점검하니 칠언 율시 각 열 편, 오언 율시 각 스무 편, 칠언 절구 각 세 편, 오언 고시 각 한 편, 모두 백두 편이었는데, 모아서 책 한 권을 만들어 보기 편하게 하고 현주에게 서문을 써달라고 해서 앞에 붙였다.


20일. 기유일. 현주는 완산(完山)을 향해 떠나고 동애도 술산으로 돌아가고 나만 홀로 이 외딴 남원에 남아 쓸데없는 두레박 신세 같았다.

아! 고향에서 천리나 떨어져 돌아다니다가 형제를 만난 것은 참으로 인간 세상에서 드문 일이었고, 함께 삼신산을 노닐면서 더구나 시우(詩友)가 되었으니 천년에 한 번 얻기 어려운 기이한 모임이었다. 그렇건만 유람을 다하지 못하고 공무는 일정이 있기에 이틀 동안 산 속에 있으며 고상한 감상을 흡족하게 하지 못했는데 멀리 이별하게 되어 급히 이 즐거운 모임을 떠나게 되었으니 아! 슬프지만 어쩌면 여기에도 운수가 있는 것인가? 만나고 헤어짐은 알 수가 없고 인생은 유한하니 뒷날 친밀하게 한 곳에 모이는 일은 쉽게 얻을 수 없을 듯하다. 그럭저럭 이번 유람의 앞뒤를 기록해서 뒷날 열람할 것으로 삼는다.


[유교넷/문화컨텐츠닷컴/조선시대유산기에서 옮김]

************************************************************************************

◈조위한 [趙緯韓, 1567~1649]

 본관 한양(漢陽). 자 지세(持世). 호 현곡(玄谷) ·서만(西巒) ·소옹(素翁).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덕령(金德齡)을 따라 종군하였다. 1601년(선조 34)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609년(광해군 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갑과로 급제한 뒤 지평(持平) ·수찬(修撰)을 지냈다.

1613년 계축옥사(癸丑獄事) 때 파직되었으나, 1623년 인조반정으로 사성(司成)에 기용된 뒤 장령(掌令) ·집의(執義) 등을 지내고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1624년 이괄(李适)의 난을 토벌하고,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관군과 의병을 이끌고 항전했으며, 동부승지 ·직제학을 거쳐 공조참판에 이르렀다. 명필이었으며, 저서에 《유민탄(流民嘆)》 《현곡집(玄谷集)》 등이 있다.

[네이버대백과]

-----------------

-趙緯韓/1567(명종 22)~1649(인조 27)/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지세(持世), 호는 현곡(玄谷). 참판 방언(邦彦)의 증손이며, 양정(揚庭)의 아들이다. 임진왜란 때는 김덕령을 따라 종군했다. 1601년 사마시를 거쳐 1609년(광해군 1) 증광문과에 급제한 뒤, 주부·감찰 등을 지냈고, 1613년 계축옥사 때 파직당했다. 인조반정으로 재등용되어 장령·집의 등을 지내다가, 1624년 이괄이 난을 일으키자 토벌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고, 병자호란·정묘호란 때도 항전했다. 벼슬은 공조참판·자헌대부·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광해군의 폭정과 혹독한 부세(賦稅)를 개탄하여 그 정경을 자세히 엮어놓은 가사 작품 〈유민탄 流民歎〉을 지었다고 하나 전하지는 않는다. 저서로 〈현곡집〉·〈기행록 紀行錄〉·〈최척전 崔陟傳〉이 있다. 한문소설 〈최척전〉(〈기우록 奇遇錄〉이라고도 함)은 임진왜란으로 인한 민족 수난의 현실을 한 가족의 이산과 만남을 통하여 표현.

[브리태니카 대백과]


'▣先人들의 智異山'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남유기(南遊記)①춘주 김도수  (0) 2010.10.14
청학동록/정식  (0) 2010.02.18
유두류산기②박장원  (0) 2009.06.01
유두류산기  (0) 2009.05.30
유두류산록/유몽인②  (0) 2009.0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