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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先人들의 智異山

유두류산기

 

               [2007년 어느 여름날, 빗속에 대성골을 다녀오면서...]

 

◎유두류산기/박장원

내가 일찍이 듣기에 남방의 산 중에서 높이 우뚝 솟아 거대한 것이 셀 수 없이 많지만 오직 지리산(智異山)이 으뜸인데, 대개 우리나라의 산은 백두산(白頭山)이 제일이고, 백두산의 산세가 남쪽으로 흘러서〔流〕 이 산이 되었기에 그 이름을 ‘두류산(頭流山)’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두류산이 우리나라에서 명산으로 이름을 날리는 것은 믿을 만한 것이리라. 두류산은 주위로 호남과 영남의 아홉 개 군에 걸쳐 있으니, 그 맑고 깨끗한 기세와 신령스럽고 기이한 자취, 웅장한 산세와 풍부한 볼거리는 아무리 뛰어나게 손으로 꼽아보더라도 이루다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한 번 두류산 속으로 들어가 정상에 올라서 내 평소의 시야를 탁 트이게 하고 내 좁은 마음과 답답한 가슴을 씻어내려고 생각했지만, 조정에 관리로 묶여 있어서 가볼 기회를 잡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한 지 오래였다.
올해(계미년, 1643년) 봄에 나는 옥당(玉堂) 에 있다가 부모님 봉양을 위해 외직(外職)을 청하여 안음 현감(安陰縣監)으로 가게 되었다. 안음현 의 관아는 덕유산(德裕山) 의 기슭에 있는데, 산수(山水)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빼어난 명승지이다. 온통 산으로 둘러싸인 저주(滁州) 와 나부산(羅浮山) 의 세 골짜기보다 나을 뿐만 아니라, 더욱이 지리산과의 거리가 겨우 며칠이면 갈 수 있었다. 이러하니 주 부자(朱夫子)께서 여부(廬阜)의 관리 로 가신 행운과 또한 내가 비슷하여, 천년 뒤에 태어난 내가 주자를 경모하는 마음이 없을 수 없었다. 다만 금년은 고을이 가뭄과 기근으로 백성들이 죽어나가는데 위로할 방도가 없으니, 봄을 지나 여름으로 가는데 음식을 마주한들 어찌 먹을 마음이 있겠는가? 비록 두보(杜甫)의 ‘ 흥이 있어 여산(廬山)과 곽산(霍山)에 들어가노라.[有興入廬霍]’ 의 시구를 읊조려보지만, 반맹양(潘孟陽)처럼 술 마시고 산수나 유람하는 것은 꺼려졌으니, 한낱 멀리서 바라볼 뿐이었다. 가을이 되어 크게 풍년이 들어서 백성들의 기운이 조금 나아지자, 비로소 사씨(謝氏)의 나막신 은 준비하였지만, 소자(蘇子)의 객 이 없는 것이 한탄스러웠다. 사근 찰방(沙斤察訪) 인 이초로(李楚老)는 자가 도경(道卿)으로 나와는 대대로 본디부터 가까이 알고 지낸 자였다. 타향에서 만나 서로 왕래가 매우 익숙하였다. 하루는 편지를 보내 나를 초대하니, 그와 함께 두류산에 가기로 약속하였다. 또한 함께 약속한 사람은 예안(禮安)의 양원(梁榞) 으로, 자가 군실(君實)이고, 상사생(上舍生) 신찬연(申纘延)은 자가 영숙(永叔)이며 서울 사람이다. 세 사람의 동행도 오히려 예상하기 어려웠는데, 더욱이 네 사람이 가게 되었단 말인가? 운이 또한 매우 좋았다.
마침내 음력 8월 20일 신사일(辛巳日)에 길을 나섰다. 신찬연은 고현(古縣) 에 있는 교거(僑居)로부터 와서 합류하였으며, 함께 말을 타고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시냇물을 따라 내려가다 한 산봉우리에 잠시 쉬었다. 마치 허리띠처럼 이어져 대고대(大孤臺)를 휘둘러 안고 흐르는 것이 남계(藍溪)였다. 남계 옆으로 몇 리쯤 떨어진 높다란 언덕 위에 건물 하나가 우뚝한데, 이것이 일두 서원(一蠹書院) 이었다. 남계가 동서로 갈라져 흐르고 가을 벼는 구름같이 넘실대니 참으로 호시절이었다. 겨우 장부나 문서를 떠나 이미 스스로 바람처럼 속세를 벗어나고픈 생각이 있었는데, 여기에 이르러서 바로 날아가고 싶었지만 날개가 없으니 어찌할 수 있겠는가?
저물녘 사근역정(沙斤驛亭)에 도착하였다. 주인이 신발을 거꾸로 신은 채 나와 반갑게 맞아주며,
“어찌 이리도 늦은 저녁에야 도착하셨소? 양원 어른은 또한 벌써 와 계십니다.”
라고 하였다. 대개 양원이 사는 곳이 사근역에서 매우 가까웠기 때문이다. 네 사람은 좌정하여 저녁을 다 먹은 후에 또 술을 마셨다. 술자리에서의 담소는 한 밤이 돼서야 끝났다. 시 한 수를 지었다.
山驛夜留客(산역야유객) 산 속 역에 밤이 깊어 나그네가 머무는데
三更溪月明(삼경계월명) 삼경 시냇물에 비친 달이 밝기도하다.
酒杯深復淺(주배심부천) 술은 잔 속에 깊어졌다 얕아졌다 하니
斟酌異鄕情(짐작이향정) 타향에서 만난 정을 짐작하겠네.
8월 21일 임오일(壬午日) 맑음. 네 사람은 역정을 나와 앞의 시내를 건너고 몇 개의 산봉우리를 넘어서 20리쯤 가니 큰 천변(川邊)에 정자 하나가 있는데, 그 이름이 ‘함허정(涵虛亭)’이었다. 정유년(丁酉年) 진주성이 함락될 때 , 전투 중에 죽은 의병장 최변(崔忭)이 정자의 주인이었다고 한다. 정자에는 본래 노래하고 춤추는 누각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 남아 있는 것은 단지 쓰러진 풀과 황폐한 터뿐이었다. 정자 정면으로는 산세가 이어져 있고 시내와 산이 겹겹이 쌓여 있으며, 사면으로 촌락이 있는데 감나무며 밤나무가 무성하니 완연히 한 폭의 그림 속 풍경같았다. 시 한 편을 지었다.
亭子何年廢(정자하년폐) 정자는 어느 해에 폐허가 되었는지
遊人是主人(유인시주인) 유람 오는 사람이 곧 주인이어라.
山連方丈麓(산연방장록) 산은 방장산 기슭과 이어져 있고
水接剡溪津(수접섬계진) 시내는 섬계의 나루와 근접해 있네.
聽笛魚時出(청적어시출) 피리소리 듣노라니 물고기 때때로 뛰어오르고
臨筵月自新(임연월자신) 자리에 임하니 달이 절로 새롭구나.
吾曺須盡醉(오조수진취) 우리가 필시 흠뻑 취해야 하는 것은
俱是旅遊身(구시여유신) 모두 유람 온 나그네 신세이기 때문.
정자의 옆에는 늙은 서얼 조팽수(曺彭壽)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집안이 매우 부유한데다가 또한 인색하지 않아 우리들을 위해 정자 위에다가 잔치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술을 내오고 안주를 자꾸 내와 모두들 취기가 올라서 즐겁게 농담을 하며 즐기니 해가 장차 기우는 것도 몰랐다. 마침내 초당에 들어가 잤다. 초당의 들보며 서까래는 마치 우산 같이 생겼는데, 하얀 띠로 덮었고 백토로 벽을 발라 창을 낸 벽이 매우 고왔다.
8월 22일 계미일(癸未日) 맑음. 늦게 연계(㳂溪)를 출발하여 바로 올라가니, 이곳이 바로 용유담(龍遊潭)의 하류였다. 용유담과는 거리가 20리쯤인데 그 사이에 종종 몇 개의 마을이 있었고 마을에는 반드시 논이 있으니 모두 비옥하여 살 만한 곳이었다. 물은 비록 발원하는 곳이긴 하지만 또한 물고기를 기를 만하니, 참으로 두보의 시에서 이른바 ‘귤주(橘洲)의 토양은 비옥하고[橘洲田土仍膏腴]’ ‘물은 맑은데 도리어 물고기가 많다.[水淸反多魚]’ 는 것이다. 무릉도원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이 또한 이러할지는 알지 못하겠으니, 이곳이 천하의 여러 산들이 미치지 못하는 점이다. 시 한편을 지었다.
南岳名方丈(남악명방장) 남쪽에 방장산이라 하는 산이 있으니
他山摠不如(타산총불여) 다른 산들은 모두 이만 못하구나.
崚嶒雄地理(능증웅지리) 첩첩 산봉우리는 땅의 형세를 웅장하게 하고
氣色近天居(기색근천거) 기색은 상제가 거처하는 천궁에 가깝네.
田土皆宜稻(전토개의도) 논밭은 모두 벼를 심기에 좋으며
泉源亦有魚(천원역유어) 샘에는 또한 물고기가 있구나.
何當謝簪緩(하당사잠완) 어찌하면 벼슬은 이제 그만하고서
於此結茅廬(어차결모려) 여기에다 띠집을 엮고 살아볼이거나.
정오에 용유담에 이르러 잠시 말을 쉬게 했다. 용유담은 깊이를 헤아릴 수 없었고 못가는 모두 하얀 돌이었는데 돌 빛이 매끈매끈하니 어떤 것은 높고 어떤 것은 낮아 수백 사람이 앉을 만하였다. 네 사람은 바위 위에 앉아서 술 몇 잔을 따라 마시며 악사(樂士)에게 피리를 불게 하였다. 피리소리가 바위를 가르고 구름을 뚫으니 마치 깊은 소 아래에서 용이 읊조리는 것 같았다. 오래도록 있다가 출발하였다.
길옆에는 암천창(巖泉倉)이 있고 또 한 골짜기에는 무너진 성이 있었다. 노인들이 전하는 말로는 ‘방호성(防胡城)’이라 부르기도 하고 혹은 ‘박호성(朴虎城)’이라고도 하는데, 대개 초기에는 오랑캐를 방어하기 위해 쌓은 것으로 또한 박호(朴虎)가 장군이 되어 이 성을 쌓았기 때문에 두 가지 칭호가 생겼다고 하였다.
저녁에 군자사(君子寺)에 도착하였는데 절의 본래 이름은 ‘영정사(靈井寺)’이다. 신라 진평왕(眞平王) 이 여기에서 아들을 낳았기 때문에 지금의 군자사로 개명하였다고 한다. 대전(大殿)과 방옥(房屋)이 모두 매우 크고 화려하였다. 절 서편에는 새로 지은 별전이 하나 있었는데 금빛과 푸른빛으로 화려하게 단청을 칠하였으며 ‘삼영당(三影堂)’이라 하였다. 당 안에는 청허(淸虛) 사명(四溟) 청매(靑梅) 세 대사의 진상(眞像)이 있었는데, 촛불을 가져다가 우러러 보니 서로들 부드러운 말을 주고받는 듯하였다. 세 명의 진상 중에 사명대사는 수염을 자르지 않았는데 수염이 길고 아름다웠으니 참으로 미남이었다. 이날 밤 네 사람은 서로 마주하여 질탕하게 술을 마시며 한껏 즐기다가 파했다.
8월 23일 갑신일(甲申日) 맑음. 밥을 지어 먹었다. 며칠 동안 비록 날이 맑았지만 앞으로 연일 비가 올 듯하다. 날씨가 매우 따뜻하고 안개가 걷히지 않았다. 이날 천왕봉에 오르려고 하였는데, 늙은 승려들은 한결같이
“저희들은 유람객들을 많이 봐 왔습니다. 비록 날씨가 청명한 날에도 중봉(中峰)까지 가지 못하였습니다. 갑자기 구름과 비가 방해를 하게 된다면 깊은 골짜기에서 진퇴양난의 어려움에 빠질 것입니다. 더욱이 오늘은 이 절을 벗어나기도 전에 구름과 안개가 이미 사방에 자욱하게 모여들었습니다. 원컨대 공들은 헛걸음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라고 하였다. 네 사람은 모두 사양하며 말하기를,
“이번 산행은 결코 중간에서 멈출 수 없다네. 우리들에게 신선의 자질과 인연이 있고 없음은 오늘로 결판날 뿐이네.”
라고 하였다. 이에 말을 달을 10리를 가서 백무당(百巫堂)에 도착하였다.
백무당은 귀신을 모시는 사당으로 무당〔巫覡〕들이 모이는 곳이다. 이른바 당지기들이 유람객이나 그 시종들에게 여러 가지를 제공하는데, 이는 용유당(龍遊堂)에서부터 또한 이미 이렇게 하고 있었다. 잠시 당에서 쉬고 말에서 내려 가마〔藍輿〕로 갈아타고 하동암(河東巖)에 이르렀다. 승려들이 말하기를, 예전에 하동군수가 여기에서 비를 만나 길을 잃었기 때문에 하동암이라 부른다고 하였다. 여기서부터 산세가 더욱 험하고 길이 좁아서 네 사람은 생선 꿰듯 한 줄로 나아가 옛날 제석당(帝錫堂) 터에 이르렀다. 비로소 좌우 멀리까지 바라보이는데 천만 봉우리와 산들에 불타듯 단풍이 붉게 물들어 있었고, 간간히 푸르고 누런 잎이 보이며 소나무와 삼나무가 섞여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구름과 안개를 뿜어내어 순식간에 풍경이 바뀌었으니, 비록 귀신과 신령스럽고 기이한 사물이 음험하게 오는 모습이라 해도 좋을 것이었다.
②편으로 이어짐

[유교넷/문화콘텐츠닷컴/'조선시대유산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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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장원 [朴長遠, 1612~1671] 
 본관 고령, 자 중구(仲久), 호 구당(久堂) •습천(隰川), 시호 문효(文孝)이다. 1627년(인조 5) 생원이 되고, 1636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그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외조부 심현(沈誢)을 따라 강화도로 피란하였다.
1639년 검열(檢閱)이 되고, 이어 정언(正言)으로 춘추관기사관(記事官)이 되어 《선조수정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653년(효종 4) 승지(承旨) 때 남인(南人)의 탄핵으로 흥해(興海)에 유배되고, 이듬해 풀려났다. 1658년 상주목사(尙州牧使) •강원도관찰사를 거쳐, 1664년(현종 5) 이조판서가 되고 공조판서 •대사헌 •예조판서 •한성부판윤 등을 역임하였다. 그뒤 자청하여 개성부유수(留守)로 나갔다가 죽었다. 문집 《구당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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