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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先人들의 智異山

청학동록/정식

◉청학동록/정식


[자료 출처:유교넷/문화콘텐츠닷컴]

[원문 출처:명암집]


계해년(1743년, 영조 19년) 4월 20일, 조카 상기(相琦)가 무이정사(武夷精舍)로 나를 찾아왔기에, 내가,

“네가 청학동(靑鶴洞)을 보지 못했는가?”

라고 하자 상기는,

“아직 못 보았습니다.”

라고 말했다. 내가,

“청학동의 만모(万茅)는 하나의 산수굴(山水窟)인데, 내가 이미 수십 년을 유람했지만 마음속으로 늘 잊지 못했으니, 지금 바야흐로 봄이 저물어 연록색이 산에 두루 치우쳐 있고, 철쭉꽃이 시내에 가득하니 너와 내가 짝이 되어 함께 완상함이 어떠한가?”

라고 말하니 상기는 한마디로 흔쾌히 허락했다.


다음날 서로 공경하며 신선(神仙)의 사동(使童)으로 삼으니 깃털이 신령스럽고, 몸종은 늙어 병든 말을 이끌며, 숙부와 조카 두 노인은 대나무 지팡이를 가지고 말을 탄 채, 뒤를 따르기도 하고, 걸어가기도 하는 것을 능사로 여기며 노령(蘆嶺)을 넘고 십자령(十字嶺)을 넘어 전두산(田頭山) 아래의 재실(齋室)에서 묵었다.


다음날은 공월령(公月嶺)을 넘어, 섬강(蟾江) 가에서 두타(頭陀) 하는 김퇴일(金退一)의 집에 묵었는데, 내가 지난 날 입산(入山)했을 때의 옛 주인이었다. 그 남편과 아내는 함께 썩은 고기로 악을 제거하기를 잘한다고 생각하며 일생의 경계로 삼았다. 외아들 연관(演寬)이 있었는데 불가에 귀의하고는 스스로 다른 생에서의 복을 구하며 죽어서도 환생한다고 하니, 우습고도 우습다. 불교에 깊이 빠짐이 이처럼 미혹하기만 하니, 이것이 안타깝다. 웃으면서 맞이하니 내 행차의 피로를 위로했고, 간결한 밥과 향기 좋은 푸성귀로 정성껏 잘 대접하였다.


다음날 악양(岳陽)에 들어가 일두 정 선생 이 은거하던 옛 집터를 지나니 사람에게 그리워하는 마음을 일게 하고,  덥수룩한 머리로 사이에 낀 바위 위에서 쉬는데 위에 있는 도암(道巖)에 나아가니 녹사 한유한의 유적이었다. 화개(花開)에서 점심을 먹고, 골짜기에 있는 김광서(金光瑞)의 운보산거(雲甫山居)에서 묵었는데, 푸른 소나무와 비취빛 회나무의 사이에 새로 정사(精舍)를 꾸몄으니, 대단히 맑고 시원했다. 내가 운보에게,

“내가 상기와 함께 청학동 불일암으로 가려고 하는데 자네가 아니면 어찌 다녀올 수 있겠는가?”

라고 했더니, 운보가 허락하면서,

“마땅히 내가 앞장서서 인도하겠네.”

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신선이 사는 곳인데 퉁소를 부는 손이 없어서야 되겠는가? 어찌 구할 수 있겠는가?”

라고 했더니, 운보가,

“나를 따르는 유자(遊子)에 김윤해(金潤海)라는 자가 있는데 퉁소를 아주 잘 분다네. 또 골짜기에 현덕승(玄德升)이란 자도 있는데 역시 퉁소를 잘 분다네.”

라고 하였다. 내가 즉시 기뻐하며 맞아들이기를 청했는데, 모두 연소하고 단아한 선비였다. 그들과 함께 쌍계사에 들어가 석문 아래 앉았는데, ‘쌍계석문(雙溪石門)’이라는 네 글자를 보고 기뻐하였으니 정신과 필력이 마치 고운(孤雲) 의 얼굴을 마주 보고 있는 듯하였다. 학사전(學士殿)에 묵었으니, 고운이 거처했던 곳이다.


다음날 내원암(內院庵)에 들어가니 곧 청학동으로서, 청학봉(靑鶴峯)의 아래였다. 내가 일찍이 골짜기 가운데로 누차 들어가 그 협소함을 가리키며 등한시하여 찾지 않다가 지금 비로소 들어가니 깎아 세운 듯 한 골짜기가 깊고 그윽하며 물과 바위도 예사스럽지 않아서 내가 운보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내가 만일 일찍이 이곳의 장관이 이와 같은줄 알았더라면 내 행차가 어찌 오늘에야 있었으리요? 이러한 명구(名區)에 들어서 한 마디 말이 없을 수 없으니, 그대가 운을 띄울 만하네.”

라고 하자 운보가 즉시 운(韻)을 띄웠고, 내가 선 채로 응하기를,


淸泉亂石是仙區(청천난석시선구) 맑은 샘물 섞인 바위 신선의 구역인지라,

翠壁丹崖作畵圖(취벽단애작화도) 푸른 절벽 붉은 벼랑 한 폭의 그림이네.

白首探眞今已晩(백수탐진금이만) 흰머리로 진경을 찾으나 이제 해 저무니,

鶴倩猿怨未應無(학천원원미응무) 학이 빌고 잔나비 원망해도 응답이 없네.


라고 하니, 운보가 화답하기를,


兩峯環合白雲區(양봉환합백운구) 두 봉우리 돌며 만난 흰 구름 일대로,

半壁微茫粉墨圖(반벽미망분묵도) 반벽이 아득하니 먹을 칠한 그림일세.

吹澈玉簫人不見(취철옥소인불견) 맑게 부는 옥퉁소에 사람은 보이지 않고,

夜深靑鶴正來無(야심청학정래무) 밤 깊어도 청학은 진정 오질 않네.


라고 하였다.

저녁을 먹고 나서 향로봉 정상을 오르는데, 푸른 벼랑을 나무를 더위잡고 한 걸음에 한번 호흡하고, 다섯 걸음에 한 번씩 앉게 되니 진실로 잔나비나 학도 지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혼자서 우뚝 솟은 절벽에서 바라보니, 봉우리 정상이 보일 리 만무하나 강한 기운과 용맹한 뜻으로 촌촌이 멈추었다가 걸었다가 하고, 걸음걸음이 뒤로 가는 듯하더니, 우러르며 몹시 두려워서 숨을 죽이기도 하고 굽어보며 아찔하더니, 봉두(峰頭)에 오르자 가슴 속이 상쾌하고 시원해서 마치 하늘에 오른 듯하였다.

비단 공자가 태산(泰山)에 올라서는 천하를 작게 여겼던 뜻을 두었던 것은 추(鄒) 땅의 성인만 있는 것은 아니요, 이른바 태산을 끼고서 아득히 북해(北海)를 넘는다는 장자만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이른바 해와 달을 곁에 두고 우주를 끼고 있다고 하면 거의 그들과 대등한 것이다. 이에 속으로 혼자 말하기를,

“만일 조금 전까지의 고통스러움을 감내하지 못했다면 평지로 물러나 돌아가는 것을 면치 못했을 것이지만, 정상에 오르니 어찌 이처럼 기이한 유람의 대관이 있었겠는가?”

라고 하였다.

불일암(佛日菴)에 묶었는데, 곧 신라왕 김부(金傅)가 창건한 곳으로 중수(重修)를 겨우 마쳤는데, 붉은 흙이 뿜어져 흘러내렸다. 아마도 암자가 만 길이 되는 석봉(石峯) 위에 있는 듯한데, 천 길 폭포가 암자 앞으로 떨어지니, 이는 곧 개골산에도 존재하지 않는 승경이었다.

승려 네 사람이 그곳에 사는데 그 이름이 형찬(泂贊), 여불(侶黻), 낭우(朗遇), 두징(杜澄)이라 하였다. 모두 신선의 자태로서 하얀 승복을 입었는데, 내 성명을 알고는,

“어찌 접대의 친절함을 소홀히 하는가?”

라고 하니, 마음이 불안하여 일행은 좌우로 나누어 앉았다. 나는 옷깃을 가지런히 하고 높은 곳에 앉아서 웃으며 운보에게 말하기를,

“이제 속세에 골몰하지 않는 사람을 뽑아서 함께 천하에 들어가면, 함께 명구(名區)를 알게 될 것이니, 어찌 그것이 우연이겠으며 진실로 이른바 오늘이 아까워서 허송 세월할 수 없으니, 만일 밤새도록 잠을 자지 않는 자가 마땅히 상객(上客)이 되리니, 그대가 할 수 있겠소?”

라고 하니, 운보가 말하기를,

“나는 할 수 있네. 만일 하지 못한다면, 그에 대한 벌이 없을 수 있겠는가?”

라고 하였다. 이에 불촉(佛燭)의 빛이 엄연한데, 열을 이루고 앉아서는 달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퉁소를 부는 두 객(客)에게 시켜서 서로 번갈아가며 불게 하고, 그 사이에 시로써 화답하였는데 내가 읊조려 말하기를,


琪花影動曙河傾(기화영동서하경) 꽃 그림자 흔들리니 새벽녘 은하수 기울고,

手拓雲扃北斗平(수척운경북두평) 손수 구름 빗장 주워서 북두성을 다스리네.

碧玉簫聲淸嫋嫋(벽옥소성청뇨뇨) 푸른 옥소 소리는 맑아서 아련하게 울리고,

鶴邊松月滿壇明(학변송월만단명) 학 주변에 소나무와 달은 뜰을 가득 밝히네.


라고 하니, 운보가 화답하기 이르기를,


古龕燈翳斗西傾(고감등예두서경) 옛 감실 등잔 덮개 북두성 서쪽으로 기울고,

松露冷冷宿霧平(송로냉냉숙무평) 소나무 이슬 차가우니 묵은 안개 다스리네.

寒響一聲僧報月(한향일성승보월) 추운 울림 한 소리 승려는 달을 알리고,

俯看層壁水簾明(부간층벽수렴명) 층암절벽 굽어보니 물 주렴이 선명하네.


라고 하였다.

내가 시를 지으면 운보가 화답하고, 운보가 시를 지으면 내가 화답할 때, 폭포수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하고, 바람에 흔들리는 소나무의 맑은 소리가 소슬하였다. 짝이 되어 부는 통소 소리 울림이 흐느끼며 아련하고 희미하게 끊이질 않으니 이것이 세상에 비길 곳이 없는 신선의 구역이며 이러한 문인(文人)들을 얻어서 짝으로 부는 퉁소 소리의 아름다움을 겸하여 노는 것은 진실로 신선의 분수가 아니라면 어찌 쉽사리 얻을 수 있겠는가? 마치 요지(瑤池)에서 신선의 음악을 듣는 듯하니 모든 생각들이 다 사라지고, 세간의 소식을 알지 못하면 어떤가?

이때 밤이 새벽녘이 되려는데 승려가 내게 알리기를,

“달은 벌써 청학봉(靑鶴峯)에 올랐습니다.”

라고 하였다. 내가 홀연 돌아보니 운보가 자리에 없었다. 내가 일어나서 그를 찾아가니, 운보는 방중에 들어가서 불상을 놓아둔 탁자 아래에서 엎어져 자고 있었다. 내가 발로 차서 깨우니 일어나기에, 웃으면서 김윤해(金潤海)에게 말하기를,

“운보가 먼저 약속을 깨버렸으니, 승전곡(勝戰曲)을 연주할 수 있겠네.”

라고 하니, 김윤해가 즉시 퉁소 서너 곡을 불어대었다. 이에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손바닥을 치면서 크게 웃었다.


다음날은 국사암(國師菴)에서 쉬었는데, 늙은 승려 난해(難解)가 구면이라면서 커다란 과일을 대접해 주었다. 칠불암에 묵었다. 법계(法界)는 예전 그대로인데 송월(松月)만 근심이 없구나.



다음날에는 신흥암(新興庵)으로 내려와 세이암(洗耳巖)에 오르자 대사(大師) 현간(玄侃)이 웃으면서 맞아주었다. 함께 바위 위에 앉아서 담소를 그치지 않았다. 모두 오랫동안 함께한 얼굴들이라 이별에 임하여 몹시 슬퍼하였다. 홍류교(紅流橋) 위에서 나와서 전송하는데, 상좌 조연(祖演)이 보내며,

“처사님들께서 신으신 신발이 이미 낡았으니 짚신 하나씩 드리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저녁에 다시 운보정사(雲甫精舍)에 들어서, 오랫동안 이야기하고, 여러 차례 술을 마시고, 운보(雲甫), 김해응(金潤海), 현덕승(玄德升)과 헤어졌다.

윤해는 자(字)가 덕용(德容)이고, 덕승은 자(字)가 여문(汝聞)이다. 다시 섬강의 김퇴일의 집에서 묵었는데, 그 아내가 대합탕(大蛤湯)을 준비하여 대접했다.


다음날은 전두(田頭) 재실(齋室)에 묵었고, 그 다음날 박태래(朴泰來)의 집에서 아침을 먹고, 상기와 헤어져 저녁에 무이정사로 돌아오는데, 한 쌍의 학이 계수나무 꽃을 기다리는 듯 나를 향해 웃고 있었다.


[원문]


  癸亥四月二十日宗侄相琦訪余于武夷精舍余曰汝見靑鶴洞否相琦曰未也余曰靑鶴洞乃第一山水窟也余已遊數十年而心常未忘方當春暮軟綠遍山躑䠱滿溪汝與余可作伴同翫否相琦一言快許


翌日以相寅爲靑童子以羽靈奴牽玄黃叔侄兩老人持竹杖以馬隨後以步行爲能事越蘆嶺越十字嶺宿田頭山下齋室

翌日越公月嶺宿蟾江上頭陀金退一家卽余昔日入山時舊主人也其夫妻俱廢肉以爲善去惡爲一生戒有一子演寬而歸之佛自以爲他生求福還生計云笑矣笑矣沈溺佛氏若是之惑是可惜也笑而迎之慰余行勞以潔飯香蔬傾心善遇

翌日入岳陽過一蠹鄭先生幽居舊址令人感慕竪髮憩于揷巖上上有就道巖卽錄事韓惟漢遺跡午炊于花開洞宿金光瑞雲甫山居蒼松翠檜之間新構精舍殊極蕭灑余謂雲甫曰余與相琦方投靑鶴洞佛日而去非君不可盍往從之雲甫諾曰當爲先導余曰仙區不可無洞簫客何以得之雲甫曰從吾遊者有金潤海者乃善簫也又洞有玄德升者亦善簫也余卽喜而請邀皆年少雅士也與之入雙溪寺坐石門下翫雙溪石門四字精神筆力如見孤雲面目宿學士殿孤雲所居云

翌日入內院庵卽靑鶴洞靑鶴峯下也余曾累入洞中謂其陜小等視不探今始入去則絶壑深幽水石非常余顧謂雲甫曰余若早知如此吾行豈今日而已乎入此名區不可無一語君可呼韻雲甫卽呼韻余立應曰


淸泉亂石是仙區

翠壁丹崖作畵圖

白首探眞今已晩

鶴倩猿怨未應無


雲甫曰


兩峯環合白雲區

半壁微茫粉墨圖

吹澈玉簫人不見

夜深靑鶴正來無


夕飯後仍上香爐峯上緣崖攀木一步一呼五步一坐眞猿鶴之所不能過也孤危壁立初則萬無上峯之意强氣勇志寸寸停步步步欲退仰而脅息俯而眩然及上峯頭則胸中快闊若登天然不但有吾夫子登泰山小天下之意而鄒聖所謂挾泰山迢北海莊叟所謂房日月挾宇宙者庶我能之矣於心自語曰向若不能耐苦未免退步於平地上則豈有此奇遊大觀宿佛日菴乃新羅金傅王所創也重修纔畢丹雘欲流蓋庵在萬仞石峯之上千丈瀑布飛下庵前此則亦皆骨山所未有之勝也首座四人居之其名浻贊侶敏朗遇杜澄云皆是仙姿白衲而知余姓名言其何晩接待款曲於心不安一行分坐左右余整襟危坐笑謂雲甫曰今我三人俱非塵世汨汲人同入於天下所共知之名區豈其偶然眞所謂此日可惜不可虛送良辰若達夜不寐者當爲上客君可能之乎雲甫曰吾能之如其不能其可無罰扵是佛燭浻浻儼然成行而坐以待月生使洞簫二客迭相吹之間以詩和之余有吟曰


琪花影動曙河傾

手拓雲扄北斗平

碧玉簫聲淸嫋嫋

鶴邊松月滿壇明


雲甫和吟曰


古龕燈翳斗西傾

松露泠泠宿霧平

寒罄一聲僧報月

俯看層壁水簾明


余賦則雲

甫和之雲甫賦則余和之時瀑布亂鳴松韻蕭瑟雙簫響咽嫋嫋不絶地是萬古仙區而得此文人遊兼以雙簫之美苟非有仙分者豈易易得之如聞瑤池仙樂而萬慮都消不知世間消息何如也時夜欲曉僧報余曰月已上靑鶴峯矣余忽顧視則雲甫不在座余起而訪之則雲甫入房中倒睡佛卓下余蹴而起笑謂金潤海曰雲甫先破盟矣可奏勝戰曲金潤海卽吹簫數曲一座皆鼓掌大笑

翌日憩于國師菴有老衲難解者卽舊面饋以恭果宿七佛菴法界依舊松月無恙

翌日下新興庵上洗耳巖大師玄侃笑而迎之同坐巖上談笑不已蓋是宿面臨別甚悵出送于紅流橋上首座祖演追到曰處士所着芒鞋已弊矣進一草屨夕又入雲甫精舍語良久酒數行與雲甫金潤海玄德升別潤海字德容德升字汝聞又宿蟾江退一家其妻備大蛤湯以饋之


翌日宿田頭齋室翌日朝炊于朴泰來家與相琦別夕還武夷精舍雙鶴如待桂花向我而笑


[자료:유교넷/문화콘텐츠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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