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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先人들의 智異山

유두류산록/유몽인①

◈유두류산록/유몽인


나는 벼슬살이에 종사하면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쁘게 지낸 것이 벌써 23년이다. 스스로 헤아려보니 외람되게 청현직(淸顯職)에 있으면서 임금 계신 곳에 출입한 것도 오래되었으니, 불초한 나에게는 너무 과분한 것이었다. 이제 늙은 데다 잔병이 잦아지니 물러나 유유자적하는 것이 마땅하다. 나는 평소 산과 바다를 즐겨 유람하였으며 귤?유자?매화?대나무 등이 어우러진 시골에서 살고 싶었다.

만력(萬曆) 신해년(1611년, 광해군 3년) 봄에 벼슬을 사양하고 식구들을 거느리고서 고흥(高興)의 옛날 집으로 향하려 하였는데 전부터 알고 지내던 조정의 대부들이 내가 아직 상늙은이가 아닌데도 미리 물러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용성(龍城)의 빈자리에 나를 추천하여 은혜롭게도 수령으로 임명되었다. 나는 용성은 고흥과 1백 리도 채 안되는 거리이므로, 돌아가는 길에 잠시 행장을 풀어놓고 쉬어가는 것도 무방하리라고 생각하였다.

2월 초에 임지로 부임했는데 용성은 큰 고을이라 공문을 처리하는 데 정신없이 바빴다. 게으르고 느긋한 나로서는 감당할 만한 일이 아니어서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한식(寒食)이 가까울 무렵, 승주(昇州) 수령 순지(詢之) 유영순(柳永詢) 이 용성의 목동(木洞) 선영에 성묘하러 왔는데, 나는 불초한 내가 이 고을의 수령으로 있으니 나보다 선배인 순지에게 예모를 갖추어야 겠다고 생각하였다.

나는 목동 수용암(水?巖) 근처 수석의 빼어난 경관에 꽤나 마음을 기울였다. 진사 김화(金?)가 그곳에 살고 있는데, 집의 이름을 재간당(在澗堂)이라 하였다. 재간당은 두류산 서쪽 기슭에 있어, 서너 겹으로 둘러쳐진 구름 낀 봉우리를 누대 난간에서 마주 바라볼 수 있었다.

두류산은 일명 방장산(方丈山)이라고도 하여, 두보(杜甫)의 시에, ‘방장산은 바다 건너 삼한에 있네’라는 구절이 있는데, 그 주석에 ‘방장산은 대방국(帶方國) 남쪽에 있다.’고 되어 있다. 지금 살펴보니, 용성의 옛 이름이 ‘대방’(帶方)이니 그렇다면 두류산은 곧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이다. 진시황(秦始皇)과 한 무제(漢武帝)는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삼신산을 찾게 하느라 쓸데없이 공력을 허비하였는데, 우리들은 앉아서 이를 구경할 수 있다.

술이 거나하게 취했을 때, 내가 술잔을 들고 좌중의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올 봄에 두류산을 마음껏 유람하여 오랜 소원을 풀고 싶은데 누가 나와 유람하시겠는가?”

라고 하였다. 순지가 말하기를,

“내가 영남 지방의 감사로 나왔을 적에 이 산을 대략 유람했지만 종자들이 너무 많아서 한 방면도 제대로 구경하지 못하다가 내가 승주로 부임해오게 되어 우연히 이 산과 이웃하게 되었소. 아침에 출발하여 저녁이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지만 어찌 혼자 쓸쓸히 유람을 할 수 있겠소? 그대와 유람하게 되었으니 이제는 외롭지 않을 것 같소.”

라고 하였다. 드디어 굳게 약속하고 술자리를 파하였다. 그 뒤에 여러 번 서신을 교환하며 재간당에서 만날 날을 기약하였다.


3월 27일 정묘일. 순지가 약속한 날에 도착하였다.


28일 무진일. 처음 약속했던 장소에서 다시 모여 술자리를 베풀었는데, 기생들이 노래하고 악기를 연주하여 모두들 실컷 취하고 한밤중이 되도록 술자리가 이어져 그대로 시냇가 재간당에서 잤다.


29일 기사일. 수레를 준비하도록 하여 서둘러 떠났는데, 순지는 술이 덜 깨 부축해 수레에 태웠다. 재간당 주인 김화와 순창(淳昌)에 사는 내 집안 생질 신상연(申尙淵)과 천한 몸에서 난 인척 생질 신제(申濟)도 나를 따라 동쪽으로 향했다. 요천(蓼川)을 거슬러올라 반암(磻巖)을 지났다. 온갖 꽃이 만발하는 철인 데다 밤새 내린 비가 아침에 개이니, 꽃을 찾는 흥취가 손에 잡힐 듯하였다. 정오 무렵 운봉(雲峯) 황산(荒山)의 비전(碑殿)에서 쉬었다.

만력 6년(1578년, 선조 11년) 조정에서 운봉 수령 박광옥(朴光玉)의 건의를 받아들여 비로소 비석을 세우기로 의논하였다. 그리하여 대제학 김귀영(金貴榮) 이 기문(記文)을 짓고, 여성위(礪城尉) 송인(宋寅)이 글씨를 쓰고, 판서 남응운(南應雲)이 전액(篆額)을 썼다. 지난 고려 말 왜장 아기발도(阿只拔都)가 많은 병사를 거느리고 영남 지방을 침략하였는데, 그가 향하는 곳은 모두 견디지 못하고 무너졌다. 그 나라의 참위서(讖緯書)에 “황산에 이르면 패하여 죽는다”라고 하였는데, 산음(山陰) 땅에 ‘황산(黃山)’이란 곳이 있어 그 길을 피해 사잇길로 운봉 땅에 들이닥친 것이다.

그때 우리 태조(太祖) 강헌대왕(康獻大王)께서 황산의 길목에서 기다리다 크게 무찌르셨다. 지금까지 그 고을 노인들이 돌구멍을 가리키며, ‘옛날 깃발을 꽂았던 흔적’이라고 한다. 적은 군사로 감당하기 어려운 적과 싸워 끝없는 터전을 우리에게 열어주셨으니, 어찌 단지 하늘의 명과 인간의 지모 이 둘만을 얻어서이겠는가? 그 땅의 형세를 살펴보면 바로 호남과 영남의 목을 잡는 형국이다. 길목에서 치기에 편한 것이, 바로 병가(兵家)에서 말하는 ‘적은 수로 많은 수를 대적하는 방법’이다.

지난 정유년(1597년, 선조 30년) 왜란 때, 양원(楊元) 등은 이 길을 차단할 줄 모르고 남원성을 지키려다 적에게 크게 패하고 말았다. 이 어찌 땅의 이로움을 잃어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비석 곁에 혈암(血巖)이 있었는데 이 고을 사람들이 말하기를,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이 바위에서 피가 흘렀는데, 끊이지 않고 샘처럼 솟아났다. 이 사실을 서울에 알렸는데 답변이 오기도 전에 왜적이 남쪽 변경을 침범하였다’라고 하였다. 아! 이곳은 태조대왕께서 위대한 공을 세우신 곳이니, 큰 난리가 일어나려 할 때 신이 알려준 것인가 보다.

운봉 수령 백소(伯蘇) 이복생(李復生)이 내가 온다는 말을 듣고 미리 역참(驛站)에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술을 몇 순배 돌리고 나서, 곧바로 일어나 함께 길을 떠났다. 시내를 따라 10여 리쯤 가니 모두 앉아 구경할 만한 곳이 있어 수레에서 내려 시냇가에 앉아 쉬었다. 북쪽으로부터 산세는 점점 높아지고 길은 점점 험난해져, 말이 끄는 수레에서 남녀(藍輿)로 바꾸어 타고 백장사(百丈寺)로 들어갔다. 순지는 숙취가 아직 풀리지 않아 먼저 불전(佛殿)으로 들어가 누웠는데, 코를 고는 소리가 우레처럼 들렸다.

어린아이가 꽃 두 송이를 꺾어 가지고 왔다. 하나는 불등화(佛燈花)라고 하는 꽃인데 연꽃만큼 크고 모란꽃처럼 붉었다. 그 나무는 두어 길이는 됨직하게 높았다. 다른 하나는 춘백화(春栢花)였는데 붉은 꽃받침은 산에서 나는 찻잎처럼 생겼고 크기는 손바닥만하였다. 병풍과 족자에서 본 것과 같았다. 절의 위쪽에 작은 암자가 있는데, 천왕봉을 바로 마주보고 있어 두류산의 참모습을 구경할 수 있었다.


4월 1일 경오일. 동행한 사람들은 각자 대나무 지팡이를 짚고 짚신을 신고 새끼로 동여매고서 남쪽으로 하산하였다. 물가 밭두둑을 따라 굽이굽이 난 길을 가니 큰 냇물이 앞을 가로막았다. 바로 황계(黃溪)의 하류였다. 동네가 넓게 열리고, 돌이 구를 정도로 물이 세차게 흘렀다. 북쪽은 폭포이고 아래쪽은 못인데, 못 위의 폭포수는 노하여 부르짖는 듯 쏟아져 내리며 벼락이 번갈아 치는 듯한 광경이었다. 아! 얼마나 장대한 모습인가. 길을 가다보니 푸른 소나무는 그늘을 드리우고 철쭉은 불타듯이 붉게 피어 있었다. 남여에서 내려 지팡이를 짚고 서서 쉬었다.

골짜기에 두세 집이 있는데 영대촌(?代村)이라 하였다. 닭이 울고 개가 짖는 마을로, 깊은 골짜기와 많은 봉우리들 사이에 있었다. 참으로 하나의 무릉도원이었다. 이 마을이 이런 이름을 갖게 된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구나.

한 곳에 이르니 높은 언덕에 가파른 협곡이 나타났다. 양쪽 언덕으로 길을 내놓았는데 협곡이 매우 깊었다. 그 협곡 안은 모두 돌이었다. 시냇가에도 큰 돌이 수없이 널려 있었다. 이곳의 이름을 흑담(黑潭)이라 하였다. 나는 웃으며 말하기를,

“세상에 단청(丹靑)의 그림을 좋아하여 자신의 솜씨를 최대한 발휘해 화려하게 꾸며놓은 사람이 있었다네. 지금 이곳을 보니, 돌이 희면 이끼가 어찌 그리 푸르며 물이 푸르면 꽃이 어찌 그리도 붉은가? 조물주도 한껏 화려함을 뽐냈으니 그 화려함을 누리는 자는 산신령인가?”

라고 하였다.

이에 산유화(山有花) 녹복(祿福)은 비파를 타게 하고, 생이(生伊)는 젓대로, 종수(從壽)와 청구(靑丘)는 태평소(太平蕭)를 불게 하였다. 음악이 산골짜기에 울려 메아리치고, 시냇물 소리와 서로 어우러지니 즐거워할 만하였다. 어린아이에게 통을 열어 먹과 붓을 준비하게 하고, 암석 위에서 시를 지었다.

황계 폭포(黃溪瀑布)를 지나 환희령(歡喜嶺)을 넘어 이어진 30리 길이 모두 푸른 노송나무와 단풍나무였으며, 비단 같은 날개를 가진 새들이 사람을 아랑곳하지 않고 날아다녔다. 내원(內院)에 이르니 두 줄기 시냇물이 합쳐지고, 꽃과 나무가 산을 이룬 곳에 절이 세워져 있었다. 마치 수를 놓은 비단 속으로 들어가는 듯하였다. 소나무 주변의 단(壇)은 숫돌처럼 평평하였고, 금빛?푸른빛의 단청이 숲 속 골짜기에 비추었다.

또 천 번이나 두드려 만든 종이에 누런 기름을 먹여 겹겹이 바른 장판은 마치 노란 유리를 깔아놓은 듯, 한 점 티끌도 보이지 않았다. 머리 허연 늙은 선사(禪師)가 승복을 입고 앉아 불경을 펴놓고 있었다. 그의 생애가 맑고 깨끗하리라 여겨졌다. 이에 머무는 대신 시를 지어놓고 떠났다.

동쪽 시내를 따라 오르니 산은 깊고 물은 세차게 흘러내렸다. 한걸음 한걸음씩 올라 정룡암(頂龍菴)에 이르렀다. 앞에 큰 시내가 가로막고 있는데 냇물이 불어 건널 수 없었다. 건장한 승려를 뽑아 그의 등에 업혀서 돌을 뛰어넘으며 건넜다. 낭떠러지에 가까이 있는 바위가 자연스럽게 대(臺)를 이루었는데 그 바위를 대암(臺巖)이라 하였다. 그 아래에 시퍼렇게 보이는 깊은 연못이 있었지만 겁이 나 내려다볼 수 없었다.

그 연못에 사는 물고기를 가사어(袈裟魚)라 부르는데, 조각조각 붙은 논 혹은 한 조각씩 기워 만든 가사(袈裟) 같은 모양의 비늘이 있다고 하였다. 이 세상에 다시없는 물고기로, 오직 이 못에서만 알을 낳고 새끼를 기른다고 한다. 이에 어부를 시켜 그물로 잡게 하였으나, 수심이 깊어 새끼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다.

이 날 저녁 백소가 하직하고 돌아가다가 내원에서 묵었다. 나는 내원이 깨끗하고 고요한 것을 사랑하여 처음에는 그곳으로 돌아가 자려고 하였다. 그러나 정룡암에 이르자 지쳐서 그럴 수 없었다. 심하구나! 나의 쇠함이여.

정룡암 북쪽에 한 채의 집이 있었는데. 이 암자의 승려가 말하기를,

“이곳이 바로 판서(判書) 노진(盧?) 의 서재였습니다.”

라고 하였다. 옛날 옥계(玉溪) 노진(盧?) 선생이 자손들을 위해 지은 것이다. 선생도 봄날의 꽃구경과 가을날의 단풍놀이를 하러 왔으며, 흥이 나면 찾은 것이 여러 번이었다. 아! 새소리도 들리지 않는 깊은 산 속 외딴 곳에 자제들을 위해 집을 짓고 살게 했으니, 선생의 깨끗한 지취는 후학을 흥기시킬 수 있겠구나.


2일 신미일. 새벽밥을 먹고 월락동(月落洞)을 거쳐 황혼동(黃昏洞)을 지났다. 고목이 하늘에 빽빽이 치솟아 올려다봐도 해와 달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밝은 대낮일지라도 어두컴컴하기 때문에 월락동?황혼동이라고 부른다. 와곡(臥谷)으로 돌아들자 수목이 울창하고 돌길이 험하여 더욱 걷기 힘들었다.

천 년이나 됨직한 고목들이 저절로 자라났다 저절로 죽어, 가지는 꺾이고 뿌리는 뽑혀 가파른 돌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이곳을 지날 때는, 그 가지를 베어내고 문을 드나들 듯이 구부리고서 그 아래로 빠져나오기도 하고, 문지방을 넘듯이 걸터앉아 넘기도 하고, 사다리를 밟고 오르듯이 밟고서 지나기도 하였다. 그 외에 공중에 선 채로 말라죽어 반쯤 꺽이거나 썩은 것도 있고, 가느다란 줄기가 우뚝 위로 천 자나 솟구쳐 다른 나무에 기대어 쓰러지지 않은 것도 있고, 푸른 등나무가 오랜 세월 뻗어나가 가지를 드리우고 잎을 늘어뜨리고서 장막처럼 펼쳐져 있는 것도 있었다. 수십 리에 걸쳐 굽이굽이 뻗은 시내는 높은 언덕이 없어 맑은 바람이 항상 가득하고 상쾌한 기운이 흩어지지 않았다. 함께 유람온 사람들이 봄옷을 입은 지 한 달 남짓 되는데, 이곳에 이르러 모두 두터운 솜옷을 껴입었다.

해가 뜰 때부터 등산을 시작하여 정오 무렵에 비로소 갈월령(葛越嶺)을 넘었다. 갈월령은 반야봉(般若峯)의 세번째 기슭이다. 가느다란 대나무가 밭을 이루고 몇 리나 펼쳐져 있었지만, 그 사이에 다른 나무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 사람이 개간하여 대나무를 심어놓은 듯하였다.

다시 지친 걸음을 옮겨 영원암(靈源菴)에 이르렀는데 영원암은 고요한 곳이면서 시원하게 탁 트인 높은 터에 있어서, 눈앞에 펼쳐진 나무숲을 내려다 볼 수 있었다. 왕대나무를 잘라다 샘물을 끌어왔는데, 옥 구르는 소리를 내며 나무통 속으로 흘러들었다. 물이 맑고 깨끗하여 갈증을 풀 수 있었다. 암자는 자그마하여 기둥이 서너 개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깨끗하고 외진 것이 사랑할 만하였다. 이곳은 남쪽으로는 마이봉(馬耳峯)을 마주하고, 동쪽으로는 천왕봉을 바라보고, 북쪽으로는 상무주암을 등지고 있다.

이 암자에 사는 이름난 승려 선수(善修)가 제자들을 거느리고 불경을 풀어내어 사방의 승려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그는 순지와 퍽 친한 사이여서 우리에게 송편과 인삼떡, 팔미다탕(八味茶湯)을 대접하였다. 이 산에는 대나무 열매와 감과 밤 등이 많이 나서 매년 가을 이런 과실을 따다 빻아 식량을 만든다고 한다.

해가 기울자 후덥지근한 바람이 불어오고, 앞산 봉우리에 구름이 모여들어 비가 올 징조가 보였다. 우리는 서둘러 떠나 사자항(獅子項)을 돌아 장정동(長亭洞)으로 내려갔다. 긴 넝쿨을 잡고서 가파른 돌길을 곧장 내려가 실덕리(實德里)를 지났다. 그제야 들녘의 논이 보였는데 처음으로 물을 대는 도랑에 맑은 물이 콸콸 흘러내렸다.

저물녘에 군자사(君子寺)로 들어가 잤다. 이 절은 들판에 있는 사찰이어서 흙먼지가 마루에 가득하였고 선방(禪房) 앞에 모란꽃이 한창 탐스럽게 피어 있어 구경할 만하였다. 절 앞에 옛날 영정(靈井)이 있어 영정사(靈井寺)라 불렀다. 지금은 이름을 바꿔 군자사라 하는데, 가져온 뜻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며칠 동안 세상 밖에서 청량한 유람을 하여 신선의 세계에 오른 듯하였는데, 갑자기 하루 저녁에 속세로 떨어지니 사랑의 정신을 답답하게 하여 밤에 마귀에 시달리는 꿈을 꾸었다. 공자께서 “군자가 살면 어찌 비루함이 있겠는가?”라고 하신 말씀은 늘 가슴속에 새기기 어려운 듯하다.


3일 임신일. 아침에 출발하여 의탄촌(義呑村)을 지나는데 옛일에 대한 감개가 무량하였다. 옛날 점필재(?畢齋) 김종직(金宗直)이 길을 따라 천왕봉으로 오른 것이다. 그분은 그분의 뜻대로 간 것이고 나는 나대로 가고자 하니 내가 굳이 이 길로 갈 필요는 없을 것이다. 곧장 3, 4리를 가서 원정동(圓正洞)에 닿으니 동천(洞天)이 넓게 열려 있었으며, 갈수록 경관은 아름다웠다.

용유담(龍游潭)에 이르르니 여러 층의 봉우리가 겹겹이 둘러싸고 있는데 모두 흙이 적고 바위가 많았다. 푸른 삼나무와 붉은 소나무가 울창하게 서있고, 칡넝쿨과 담쟁이넝쿨이 이리저리 뻗어 있었다. 일자로 뻗은 거대한 바위가 양쪽 언덕으로 갈라져 큰 협곡을 만들고 모여든 강물이 그 안으로 세차게 쏟아져 흘러드는데 하얀 물결이 튀어 올랐다. 돌이 사나운 물결에 깎여 움푹 패이기도 하고, 솟구치기도 하고, 우뚝 솟아 틈이 벌어지기도 하고, 평탄한 마당처럼 되기도 하였다. 높고 낮고 일어나고 엎드린 것이 수백 보나 펼쳐져 있는데 형상이 천만 가지로 달라서 다 형용할 수 없었다.

승려들이 허탄한 말을 숭상하여, 돌이 떨어져나간 곳을 용이 할퀸 곳이라 하고, 돌이 둥글게 패인 곳을 용이 서리고 있던 곳이라 하고, 바위 속이 갈라져 뻥 뚫린 곳을 용이 뚫고 나간 곳이라 하였다. 알지 못하는 백성들이 모두 이런 말을 믿어, 이곳에 와서 아무 생각 없이 머리를 땅에 대고 절을 한다. 사인(士人)들도 ‘용이 이 바위가 아니면 변화를 부릴 수 없다.’고 한다. 나도 놀랄 만하고 경악할 만한 형상을 보고서, 신령스런 동물이 이곳에 살았을 것이라 상상해보았다. 이 어찌 항아(姮娥)나 거대한 신령이 도끼로 쪼개 만든 것이 아니겠는가?

시험삼아 시로써 증험해보기로 하고, 절구 한수를 써서 연못에 던져 희롱해 보았다. 얼마 뒤 절벽의 굴 속에서 연기 같지만 연기가 아닌 이상한 기운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여러층의 푸른 봉우리 사이로 우레 같은 소리와 번갯불 같은 빛이 번쩍하며 잠시 일어나더니 곧 사라졌다. 동행한 사람들이 옷깃을 거머쥐고 곧바로 외나무다리를 건너 허물어진 사당 안으로 뛰어들어가 기다렸다. 잠시 후 은실 같은 빗줄기가 떨어지더니. 새알만큼 큰 우박이 쏟아지고 일시에 소나기가 퍼부었다. 좌중의 젊은이들은 숟가락을 떨어뜨릴 정도로 얼굴빛이 새파랗게 변했다.

한참 뒤 하늘에 구름이 뒤엉키더니 구름 사이로 햇빛이 비추었다. 드디어 언덕을 따라가다가 길을 잃어 숲 속으로 들어갔는데 젖은 풀잎이 옷을 적시고 등나무 가지가 얼굴을 찔렀다. 밀고 당기며 가시덤불을 헤치고 산허리를 비스듬히 돌며 올라갔다. 허리를 구부리고 한 걸음씩 나아가는데, 죽순을 꺾고 고사리를 뜯느라 발걸음이 더뎠다.

동쪽으로 마적암(馬跡庵)을 지났다. 나뭇가지와 넝쿨을 잡고 겨우 올라가니 옛터가 아직 남아 있었다. 산비탈을 기어오르다 보니, 열 걸음에 아홉 번은 넘어지며 힘들게 오르락내리락 하니 얼굴은 땀으로 뒤범벅이 되었고 다리는 시큰거리고 발은 부르텄다. 강제로 끌려가 고된 일을 한다고 생각하면, 원망하고 성나는 마음을 아무리 꾸짖어 금하더라도 수그러들게 하기 어렵지만, 여럿이 길을 가거나 모여 앉아 쉴 때는 떠들고 웃는 소리가 길에 가득하니, 어찌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이 즐겁지 않겠는가?

드디어 두류암(頭流菴)에 들어갔다. 암자 북쪽에 대(臺)가 있어 그곳에 올라 정남쪽을 바라보니, 바위 사이로 폭포수가 쏟아지고 있는데 마치 옥으로 만든 발을 수십 길 매달아놓은 듯 하여 저녁 내내 구경하더라도 피곤하지 않을 것 같았다. 마침 비가 그치고 날이 활짝 개어 골짜기에서 서늘한 바람이 불어와 매우 상쾌했다. 오래 앉아 있을 수 없어 선방(禪房)으로 들어가 편히 쉬었다.


4일 계유일. 새벽에 길을 떠나 옹암(甕巖)을 지나 청이당(淸夷堂)에 들어갔다. 숲을 헤치고 돌무더기를 가로질러 영랑대(永郞臺)에 이르렀다. 그늘진 골짜기를 내려다보니 어두컴컴하였다. 머리가 멍하고 현기증이 나서 나무를 잡고 기대섰다. 놀란 마음에 눈이 휘둥그레져 굽어볼 수가 없었다. 영랑은 화랑의 우두머리로 신라시대 사람이다. 3천 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산과 바닷가를 마음껏 유람하였다. 우리나라의 명산마다 이름을 남기고 있다.

산등성이를 따라 천왕봉을 가리키며 동쪽으로 나아갔다. 세찬 바람에 나무들이 모두 구부정하였다. 나뭇가지는 산 쪽으로 휘어 있고 이끼가 나무에 덮여 있어, 더부룩한 모양이 마치 사람이 머리를 풀어헤치고 서 있는 것 같았다. 껍질과 잎만 있는 소나무?잣나무는 속이 텅 빈 채 가지가 사방으로 뻗어 있고, 가지 끝은 아래로 휘어져 땅을 찌르고 있었다. 산이 높을수록 나무는 더욱 작달막하였다. 산 아래에는 짙은 그늘이 푸른빛과 어우러져 있었다. 이곳에 오니 꽃나무 가지에 아직 잎이 나지 않고, 끝에만 쥐의 귀처럼 싹을 살짝 내밀고 있었다.

바위틈에 쌓인 눈이 한 자나 되어 한 움큼 집어먹었더니 갈증난 목을 적실 수 있었다. 겨우 싹이 난 풀이 있었는데 푸른 줄기는 ‘청옥’(靑玉)이라 하고 붉은 줄기는 ‘자옥’(紫玉)이라 하였다. 한 승려가,

“이 풀은 맛이 달고 부드러워 먹을 수 있습니다.”

라고 하고서 한 웅큼 뜯어 가지고 왔다. 내가 말하기를,

“그대가 청옥, 자옥이라고 한 것이 바로 선가(仙家)에서 먹는 요초(瑤草)일세.”

라고 하고서, 지팡이를 꽂아놓고 손수 한 아름이나 뜯었다.

앞으로 나아가 소년대(少年臺)에 올라 천왕봉을 우러러보니 구름 속에 높이 솟아 있었다. 이곳에는 잡초나 잡목이 없고 푸른 잣나무만 연이어 서 있는데, 눈보라와 비바람에 시달려 앙상한 줄기만 남은 고사목이 열 그루 중에 두세 그루는 되었다. 멀리서 바라보면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한 노인의 머리 같아 다 솎아낼 수 없을 듯하다. 소년이라고 이름이 붙은 것을 보면, 혹 영랑의 무리를 일컬은 듯도 하지만 내 생각으로는, 천왕봉은 장로(長老)이고 이 봉우리는 장로를 받들고 있는 소년처럼 생겼기 때문에 소년대라 한 것 같다. 아래로 내려다보니 수많은 봉우리와 골짜기가 주름처럼 펼쳐져 있었다. 이곳에서도 이러한대, 하물며 제일봉에 올라 내려본다면 어떻겠는가.

드디어 지팡이를 짚으며 천왕봉에 올랐다. 봉우리 위에 판잣집이 있었는데 바로 성모사(聖母祠)였다. 사당 안에는 흰옷을 입힌 여인석상 한 구가 있었는데 이 성모는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다. 혹자는 말하기를,

“고려 태조대왕의 어머니가 어진 왕을 낳아 길러 삼한(三韓)을 통일하였기 때문에 높여 제사를 지냈는데, 그 의식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고 한다.

영남과 호남에 사는 사람들 중에 복을 비는 자들이 이곳에 와서 떠받들고 음사(淫祠)로 삼으니 바로 옛날 초(楚)와 월(越)에서 귀신을 숭상하던 풍습이다. 원근의 무당들은 이 성모에 의지해 먹고 사는데 산꼭대기에 올라 유생이나 관원들이 오는지를 내려다보며 살피다가, 그들이 오면 토끼나 꿩처럼 흩어져 숲 속에 몸을 숨긴다. 유람하는 사람들을 엿보고 있다가 하산하면 다시 모여든다.

봉우리 밑에 벌집 같은 판잣집을 빙 둘러 지어놓았는데, 이는 기도하러 오는 자들을 맞이하여 묵게 하려는 것이다. 짐승을 잡는 것은 불가에서 금하는 것이라고 하여, 기도하러 온 사람들이 소나 가축을 산 밑의 사당에 매어놓고 가는데, 무당들이 그것을 취하여 생계의 밑천으로 삼는다. 그리하여 성모사와 백모당(白母堂), 용유담은 무당들의 3대 소굴이 되었으니, 참으로 분개할 만한 일이다.

이 날 비가 그치고 날이 개어 뿌연 대기가 사방에서 걷히니, 광활하고 까마득한 세계가 눈앞에 끝없이 펼쳐졌다. 마치 하늘이 이 봉우리를 위해 명주 장막을 만들어 병풍을 둘러 친 듯하였다. 시야를 가로막는 한 무더기의 언덕도 전혀 없었다. 단지 이리저리 얽혀 있는 푸른 것은 산이고 굽이굽이 감아도는 흰 것은 물임을 알 수 있을 뿐, 어느 곳인지 무슨 강인지 어떤 봉우리인지는 분간할 수 없었다.

시험 삼아 산에 사는 승려가 이름을 대며 가리키는 대로 따라가면서 살펴보았다. 동쪽을 바라보니 대구의 팔공산(八公山)과 현풍(玄風)의 비파산(琵琶山)과 의령의 도굴산(?堀山)과 밀양의 운문산(雲門山)과 산음(山陰)의 황산(黃山)과 덕산(德山)의 양당수(兩塘水)와 안동의 낙동강이 보였다. 서쪽을 바라보니 무등산은 광주에 있고, 월출산은 영암(靈巖)에 있고, 내장산은 정읍에 있고, 운주산(雲住山)은 태인(泰仁)에 있고, 미륵산(彌勒山)은 익산(益山)에 있고, 추월산(秋月山)은 담양(潭陽)에 있고, 변산(邊山)은 부안(扶安)에 있고, 금성산(錦城山)과 용구산(龍龜山)은 나주에 있었다.

남쪽으로 소요산(逍遙山)을 바라보니 곤양(昆陽)임을 알겠고. 백운산(白雲山)을 바라보니 광양(光陽)임을 알겠고, 조계산(曺溪山), 돌산도(突山島)를 바라보니 순천임을 알겠고, 사천 와룡산(臥龍山)을 바라보니 동 장군(董將軍)이 패한 것이 생각나고, 남해(南海) 노량(露梁)을 바라보니 이순신(李舜臣)이 순국한 것에 슬퍼졌다. 북쪽으로는 안음(安陰)의 덕유산과 전주의 모악산(母岳山)이 하나의 작은 개미집처럼 보였다. 그 사이에 큰 아이처럼 조금 솟구친 것이 성주의 가야산이었다. 삼면에 큰 바다가 둘러 있는데, 점점이 흩어진 섬들이 큰 파도 속에 출몰하고 있었다. 그리고 대마도의 여러 섬은 까마득하게 하나의 탄환처럼 작게 보일 뿐이었다.

아! 이 세상에 사는 덧없는 인생이 가련하구나. 항아리 속에서 태어났다 죽는 초파리 떼는 다 긁어모아도 한 움큼도 채 되지 않는다. 사람살이도 이와 같거늘 조잘조잘 자기만을 내세우며 옳으니 그르니 기쁘니 슬프니 하며 떠벌이니, 어찌 크게 웃을 만한 일이 아니겠는가? 내가 오늘 본 것으로 치면, 천지도 하나하나 다 가리키며 알 수 있으리라. 하물며 이 봉우리는 하늘 아래 하나의 작은 물건이니. 이곳에 올라 높다고 하는 것이 어찌 거듭 슬퍼할 만한 일이 아니겠는가? 저 안기생(安期生) , 악전(?佺) 의 무리가 난새의 날개와 학의 등을 타고서 구만리 상공에 떠 아래를 바라볼 때, 이 산이 미세한 새털만도 못하리라는 것을 어떻게 알겠는가?

사당 밑에 작은 움막이 있었는데, 잣나무 잎을 엮어 비바람을 가리게 해놓았다. 승려가 말하기를,

“이 곳은 매를 잡는 사람들이 사는 움막입니다.”

라고 하였다. 매년 8, 9월이 되면 매를 잡는 자들이 봉우리 꼭대기에 그물을 쳐놓고 매가 걸려들기를 기다린다고 한다. 대체로 매 가운데 잘 나는 놈은 천왕봉까지 능히 오르기 때문에 이 봉우리에서 잡는 매는 재주가 빼어난 것들이다. 원근의 관청에서 쓰는 매가 대부분 이 봉우리에서 잡힌 것들로, 그들은 눈보라를 무릅쓰고 추위와 굶주림을 참으며 이곳에서 생을 마치니, 어찌 단지 관청의 위엄이 두려워서 그러는 것일 뿐이겠는가. 또한 대부분 이익을 꾀하여 삶을 가볍게 여기기 때문이리라. 아! 소반 위의 진귀한 음식이 한입도 안 되지만 백성의 온갖 고통이 이와 같은 줄 누가 알겠는가?

해가 기울어 향적암(香積菴)으로 내려갔다. 향적암은 천왕봉 아래 몇 리쯤 되는 곳에 있었다. 불을 피우고 술을 마셨다. 남쪽 언덕에 서서 바라보니 바위들이 우뚝우뚝하였다. 향적암은 작은 암자이지만 단청칠을 해놓았다. 북쪽으로는 천왕봉을 우러르고 동남쪽으로는 큰 바다를 바라보고 있으며, 산세가 거하고 빼어나서 주변의 산과는 다른 자태를 지니고 있었다.
[계속]

[유교넷/문화컨텐츠닷컴/조선시대유산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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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몽인 [柳夢寅, 1559~1623]

유몽인(柳夢寅)의 자는 응문(應文)이고 호는 어우당(於于堂) 또는 간제·묵호자(艮齋·默好子)이며, 본관은 고흥(高興)이다. 그는 1559년(명종 14) 柳 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찌기 성혼의 문하에 들어가 배우고 1582년(선조 15) 24세에 진사가 되였으며,1589년 증광문과에 장원하여 암행어사가 되고, 1593년 문학을 역임하였다. 그는 학문의 깊이가 있었고 문장력이 뛰어났으나 성품이 경박하여 스승의 책망을 받고, 절교를 당하자 당시 이이첨등 대북파와 교류하며 중북파의 영추가 되고 스승인 성혼이 죽자 그를 모독하는 글을 지어 주위의 비난을 받았다.

선조말년 황해도 관찰사·좌승지·도승지를 역임하고,1612년(광해군 4) 예조참판에 이어 이 조참판이 되었으나 폐모론에 휘말려 이이첨과 대립하였지만 이에 적접 가담하지 않아 1623년 인 조반정때는 화를 면했으나 유응시의 고변으로 기자헌·유경종등이 반란을 일으킨 이괄과 내통할 우 려가 있다하여 체포되자 양주서산에 도피했으나 잡힌 후 김상헌등의 문초에 모반사실을 부인했으나 끝내 아들과 함께 사형되었는데 당시에 지은 노과부사는 너무도 유명하다.

그러나 그는 조선중기의 설화문학의 대가였으며 전서·해서·초서에 능통하였다. 그가 지은 어우 야담은 현재도 조선중기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묘는 가평군 가평읍 하색리 진동 능골에 있으며 정조조 (正祖朝)에 이르러 신원(伸寃)되어 이조판서에 추중되고, 홍양에 있는 운곡사와 고산에 있는 삼현영당 에 제향되어있으며 시호는 의정(義貞)이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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