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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先人들의 智異山

동유기행/박치복

◈동유기행/만성 박치복

우공의 기주(冀州) 동북의 지역을 유주(幽州)라고 하는데, 한(漢)나라가 설치한 것이다. 그 진을 의무려(醫無閭)라고 하며, 무려의 동쪽이 불함(不咸)이다. 또 그 동쪽이 장백(長白) [《광여지(廣與誌)》의 〈낙랑고(樂浪考)〉에 보인다. 《청화지(靑華誌)》에서는 한 산의 다른 이름이라고 하였다.]이니, 장백은 다른 이름으로 백두(白頭)라고 한다.
백두의 줄기가 동쪽으로 구불구불 내려오다가 북쪽으로 방향을 바꿔 마천령(磨天嶺)이 된다. 또 동쪽으로 달려 황룡산(黃龍山)이 되며, 또 동쪽으로 달려 대관령(大關嶺)이 된다. 바다와 나란히 천 리를 내려오면 추지(楸池)가 된다. 산봉우리가 높이 솟아 개골(皆骨)의 일만 이천 봉우리가 된다.
또 방향을 바꿔 조금 남쪽으로 내려가 오대산(五臺山)이 되고, 동해를 만나 방향을 바꿔 서남쪽으로 가면 태백과 소백산이 된다. 또 서쪽으로 달려 죽령(竹嶺)이 되고 또 서쪽으로 주흘산(主屹山)과 계립령(鷄立嶺)이 된다.
또 서남쪽으로 삼도봉(三道峰)이 되고 또 남쪽으로 내려와 덕유(德裕)와 금원(金猿)이 된다. 또 서남쪽으로 반야봉(般若峰)이 되고 반야봉의 골짜기를 지나 동쪽으로 가면 웅장하게 서리고 우뚝 솟아 아름다운 것이 지리산(地異山)이다.
천왕(天王)은 그 가장 높은 봉우리이다. 산맥이 백두로부터 흘러왔으므로 혹자는,
“두류(頭流)는 호남의 13개의 읍과 영남의 7개 읍을 차지하고 있다.”
라고 하였다. 그 형상이 네모지기 때문에 열어구(列禦寇)가
방호(方壺) 원교(圓嶠) 에 비교하였고, 사마천(司馬遷)의 〈시황기(始皇紀)〉와 맹견(孟堅)의 〈교사지(郊祀誌)〉에 모두 방장(方丈)으로 지칭하여 봉래(蓬萊), 영주(瀛洲) 등과 나열하였으니 대개 천하의 명산이다.

내가 거주하는 곳이 이 산과의 거리가 백 리가 되지 않아 평상시 생활하면서 마주 대하는데도 세속의 굴레에 얽매어 찾아가지 못하였다. 이번 추석에 동지들과 여행을 떠나기로 약속을 하였으니, 8월 1일이다. 그러나 집안 일 때문에 뒤에 쳐져 앞에 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니 하늘 높이 솟은 소나무처럼 실망이 그치지 않았다.
8월 17일에 한주(寒州) 여뢰(汝雷) 이진상(李震相)이 필마로 남쪽으로 놀러 왔으니, 그 뜻은 천왕봉의 정상에 있었다. 나와 뜻이 합하여 드디어 여행을 떠날 계획을 정하고, 한주와 남사(南沙)에서 25일 만나기로 약속하였다. 윤효일(尹孝一)과도 약속을 하였다.
길을 떠나는데 퇴이(退而) 허남려(許南黎)가 오리정(五里亭)까지 와서 송별하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퇴이는 곽명원(郭鳴遠), 김치수(金致受) 등과 오래 학문을 연마하고 돌아가니 조만간에 다시 만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내가 등애(鄧艾)의 음평(陰平)의 계책을 주면서,
“황매(黃梅)의 오른쪽 골짜기로부터 곧바로 산음(山陰)의 심적암(尋寂庵)으로 가서 정상을 돌아 남쪽으로 홍계(弘溪)에 도달하면 대원(大源)과의 거리가 얼마 되지 않으니 그곳에서 만날 수 있는가?”
라고 하자, 퇴이가,
“예”
라고 대답하였다. 내가 또,
“정후윤(鄭厚允)이 멀리 떠나려는 생각이 있는데, 잡아두지 못하거든 기회를 살펴 함께 올 수 있겠는가?”
라고 물으니, 퇴이가,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내가 그 용모와 침울한 소리가 마치 다른 생각이 있는 것 같음을 보고 희롱하여,
강이(剛而) 이정(李楨)은 반드시 오지 못할 것이네.”
라고 하고 마침내 이별을 하였다.
점심 때 섬계(剡溪)에 도달하였다. 인척인 유계(幼溪) 권성거(權聖擧)와 단계(端磎) 김성부(金聖夫) 등과 모두 미리 약속이 있었는데, 김대형(金臺兄)은 말을 타고 먼저 출발하였고 권척(權戚)은 집안에 근심스러운 일이 있어 머뭇거리고 결정하지 못하였다. 억지로 권한 뒤에 같이 떠나자고 동의를 하여 드디어 소매를 나란히 하고 길을 나섰다.
진태(進台)에 도달하니 날이 이미 저물었다. 재사(齋舍)에 있는 박씨를 방문하는데, 어떤 사람이 저 멀리 산허리로부터 다가오는데 보니 바로 박광원(朴光遠)이었다. 박광원의 집은 시냇가에 있어서 방문하였으나 만나지 못하였는데, 지금 갑자기 만나니 매우 기뻤다. 함께 유숙하였다.

다음날 네 사람은 나이 순서대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여 정오에 남사에 도착하였다. 명원은 마을 입구에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상당한 시간을 서로 인사를 나눈 뒤에 마을로 들어갔다. 한주가 와서 기다린 지 이틀이 되었다. 서로 보고 웃으며 인사를 나누고 다음날 일정을 물었다. 명원이 손을 단정히 하고 앞에 나서며,
“이 고을의 여러 군자들은 훌륭한 선생이 찾아 오시고 이름난 석학이 많이 오신 것을 기회로 향음례(鄕飮禮)를 열려고 합니다. 예를 거행할 물건들이 이미 갖추어졌으니, 원컨대 하루의 여유를 주십시오.”
라고 하였다. 내가,
“훌륭한 일이다. 감히 사양하겠는가?”
라고 하였다. 드디어 방에 직분을 나누어 썼다. 한주가 손님이 되고 내가 주인이 되었으며 권척이 안내자(介)가 되고 김대형과 영공(令公) 하우석(河禹錫)이 선(?)이 되었으며, 그 밖의 세 빈(賓)과 사정(司正) 등의 여러 책임을 모두 나이 순으로 차례대로 임명하였다.

다음날 백사장에 자리를 펴고 땅에 금을 그어 문을 만들고 당비(堂碑)를 설치하였다. 사시(巳時)부터 예를 시작하여 해가 뉘엿뉘엿할 때 파하였다. 엄숙하여 떠들지 않았으며 고요하면서도 매우 훌륭하게 예를 치뤘다. 기다란 옷과 넓은 띠를 착용하고 우아하게 거행하였다. 제생(諸生)이 강좌(講座)를 청하자 두 개의 높은 선생 자리를 만들어 나와 한주를 맞이하여 나란히 앉도록 하였다. 내가 그 한 자리를 철거하고 태극도설을 강의 하는 것에 대한 문답에 참여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날이 어두워지자 드디어 파하였다. 내가 아래와 같이 시를 지었다.

倚杖臨寒水(의장임한수) 지팡이를 짚고 차가운 시내에 임해도 보고
披襟立晩風(피금입만풍) 가슴을 펴고 저녁 바람도 맞았지.
相逢數君子(상봉수군자) 여러 군자들을 만났더니
爲我說濂翁(위아설렴옹) 나를 위하여 염계를 말하더군.

다른 사람들이 운을 나누어 금(襟) 자를 얻어 시를 지었다. 그러나 여러 작품들이 모두 흩어져 거둬들이지 못하였다.

다음날 입덕문(入德門)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명원과 은거(殷巨) 하용제(河龍濟)가 따라왔다. 은거는 하우석의 아들로 또한 전번의 여행에 참여하여 발이 갈라져 낫지 않았는데 이렇게 뒤를 따르니 그 독실한 성의가 가상하다. 10여 리를 가서 고개를 넘어 왼쪽으로 큰 시내를 끼고 돌아 도구대(陶邱臺)에 올랐다. 몇 리를 가니 탁영암(濯纓巖)이 나왔다.
시냇물이 깊고 맑았으며 감청색으로 바닥이 보였다. 매우 차가워 정신을 상쾌하게 하고 마음의 때를 씻어내는 즐거움이 있었다. 옷을 풀어헤치고 이리저리 산책을 하니 해가 기우는것도 알지 못하였다. 방향을 바꿔 산천재(山天齋)로 향하였다. 조형칠(曺衡七)이 길 왼편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 용모와 거동이 바르고 옷은 단정하였으니, 그가 학문에 뜻을 둔 것을 알 수 있다.
골짜기에 들어 남명 선생의 신도비를 보았다. 글 읽기를 마치고 곧바로 종손의 고택(古宅)을 방문하여 사당에 배알하였다. 다시 산천재로 돌아와
네 성현의 유상(遺像)에 절을 올렸다. 주인이 점심을 내왔다. 진서(晉西) 지방의 여러 군자들이 소문을 듣고 찾아온 자들이 수십 명이었다. 한주와 조월고(趙月皐)가 곧바로 호서와 영남의 사칠 동이(四七同異)의 몇 가지 조목에 대하여 논하였다.

다음날 형칠의 집에서 점심을 먺었다. 명원은 등창이 나고 한율(寒栗)은 뒤에 떨어졌다. 드디어 길을 나섰는데, 대원사(大源寺)는 30리의 거리에 있었다. 걸음을 재촉하고 힘을 내서 날이 저물 때 장항령(獐項嶺)을 넘었다. 날이 컴컴해서야 상방(上方)에 도착하였는데, 퇴이와 후윤은 과연 오지 않았다.

다음날 바람이 갑자기 거세게 불고 하늘이 어두웠다. 이곳에서 정상까지는 아직도 60리가 남아 있다. 정상을 우러러 보고 숨을 고르는데 하늘 위를 오르는 것 같았다. 절은 산의 동쪽 기슭에 있다. 골짜기는 매우 깊고 고요한데 세상에서 알지 못하고, 깊은 곳의 경치가 매우 아름다운데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하지 않는다. 바다에 아름다운 경치를 지닌 물(水)이 되는 것과, 성인의 문하에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이 그 어려움이 이와 같다. (지리산이라는 훌륭한 산에 있으니 어지간한 경치로는 아름답다고 불리지 못한다.)
탑전(塔殿)은 꼭대기에 있는데 모두 12층이다. 비록 크고 화려하지는 않지만 매우 정치하였다. 분을 바른 담으로 둘렀으며 가는 돌을 깔아 깨끗하여 침을 뱉을 수가 없었다. 물으니, 부처의 이빨을 소장하고 있다고 했다. 내가 희롱하여,
“부처의 나라에는 이빨을 숭상하는가? 내가 들으니 그대의 부처는 사람의 온전한 신체를 헛된 것이라고 하는데, 하물며 이빨 한 개를 보관하는가?
영양의 뿔을 걸어 놓지 않은 것이 아쉽구나.”
라고 하였다.
용추(龍湫)가 몇 궁(弓)의 거리에 있는데, 시내와 큰 돌이 서로 이어져 있다. 천천히 내려가는 것은 바닥을 흘러 발이 되고, 급하게 내려가는 것은 한 곳에 모여져 폭포가 된다. 큰 웅덩이와 작은 웅덩이에 물이 차례로 차서 넘쳐흘러 내려간다. 깊은 것은 어지러워 굽어볼 수 없고 옅은 것은 남청색과 검푸른색으로 용(龍)이 살고 있는 것 같았다. 비가 내리기를 빌면 효험이 있다고 한다.
그 아래에 또 큰 돌로 된 독이 있는데, 곧게 세 개의 구멍이 뚫려 있다. 그 입구는 좁고 가운데는 넓어 충분히 두어 석(石)의 곡식을 담을 수 있었다. 절의 승려가 그곳에 김치를 담그는데 봄과 여름이 지나도 상하지 않는다고 한다.
절에 돌아와 마음의 느낌을 읊어 한주와 더불어 시를 주고받았다. 날이 저물자 바람과 흙비〔?〕가 점점 심해졌다. 승려가,
“산꼭대기에 눈이 쌓여 매우 하얗습니다.”
라고 하였다. 이에 작은 승려와 따르는 소년이 교대로 인사하고 (구경을 하자고) 요청하였다. 동행한 동료들은 모두 힘을 다해 만류하였지만, 나와 한주는 목을 꼿꼿이 하고 동요하지 않으면서,
“우리들이 마음을 가다듬고 묵묵히 기도한지 오래되었다. 일찍이 방장(方丈)이 중국의 형산(衡山)만 같지 못한다고 일렀는가?”
라고 하였다.

다음날 과연 날이 환하게 개어 하늘에 바람이 없이 고요하였다. 일찍 밥을 먹고 산행을 나섰다. 그 고을의 여러 벗들은 모두 인사를 하고 돌아가고 성거는 집을 오랫동안 비웠다고 하여 돌아갔다. 명원은 병이 나서 따라오지 못하였으니, 산에 오른 자는 나와 한주, 단계, 효일, 광원, 은거, 원익(元益) 김기순(金基淳), 태극(太克) 조호래(趙鎬來), 곽성칠(郭星七)-(원문에 두 글자가 결락됨) 등이다. 식량, 기계, 두건, 옷, 대자리, 일산 등을 지고 따르는 종이 일곱 명이다.
생각해보니, 천천히 가면 이틀을 노숙해야 하고 빨리 가면 금일내로 곧바로 정상에 올라갈 수 있으니 하룻밤의 수고를 줄일 수 있다. 고개를 숙이고 발을 믿어 바퀴를 밀고 올라갔다.
단풍 숲이 끝이 없으며 시냇가 폭포는 다투어 떨어져 내린다. 10여 리 정도 가니 산골짜기가 조금 넓어졌다. 모옥 몇 십 채가 촌락을 이루고 있는데, 소와 돼지 우리는 어두운 곳에 위치하고, 어린 아이들은 울고 있어 산 아래의 마을과 같았다. 물으니 유평촌(柳坪村)이라 하니, 우리의 여정이 아직도 평지에 있는 것을 알겠다.
10여 리 정도를 가니 산속의 한줄기 시내가 숲에서 흘러나오고, 가시나무가 옷을 잡아당긴다. 바위는 뾰쪽하고 우뚝 솟아 걷기가 매우 힘들었다. 유평촌으로부터 이곳까지는 비록 험준한 고개는 없었지만 대략 한 걸음 걸을 때마다 그 전보다 한 걸음 높아졌으며, 한 걸음 전보다 위험해졌다.
말몰이꾼에게 명령하여 매단 것을 풀어놓고 점심을 준비하도록 하여, 밥을 먹고 시내를 따라 절벽을 붙잡고 올라가 애전령(艾田嶺)에 도달하였다. 고개의 밖은 호남의 지역이다.
잠시 쉬면서 서늘한 바람을 맞았다. 여러 산들이 각각의 구역에서 웅장하게 솟아 있는데, 모두 용모를 단정히 하고 기운을 엄숙히 하여 이곳을 향하여 공손함을 드러내고 있으니, 내가 위치하고 있는 곳이 상당히 높은 것임을 비로소 깨달았다.
또 10리 정도를 가서 험준한 고개를 넘었다. 절벽을 따라 서쪽으로 가니, 이제 반절은 된 듯 싶었다. 아래를 굽어보니, 많은 산줄기가 남쪽으로 뻗어 있는데 안개가 높이 끼어 아득했다. 서리 맞은 잎은 참으로 붉고, 시냇가 골짜기는 활짝 열려 밝다. 산허리에는 구름이 약간 피어올라 비가 내렸다 그쳤다 한다. (이런 경치를 바라보노라니) 마음이 상쾌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큰 돌이 우뚝 솟아 뚝 끊어졌는데 그 천 길 아래에 나무 등걸을 그을린 흔적이 있고, 가로막은 울타리가 아직도 남아 있다. 절벽의 면에는 ‘개운암(開雲巖)’ 세 글자가 쓰여 있는데, 허남려의 이름이 옆에 있다. 앞에 행차하여 머물러 유숙한 곳으로 생각된다. 다가가 만저보니 매우 기뻐 그의 얼굴을 대하는 것 같았다.
또 5리를 가서 와응(?鷹)이란 것을 보았다. 풀을 엮여 몸을 가려 (먹이를) 기다리는 것이 마치 알을 품는 닭과 같고 껍질을 벗은 매미와 같았다. 사람의 소리를 듣고 손을 흔들어 조용하게 하였다. 나는 이익과 욕심이 사람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저 또한 비릿한 피를 지녀 목숨을 가진 종류인데 달갑게 이곳에 처하여 산짐승과 더불어 살고 귀신과 더불어 이웃하다가, 발자욱 소리를 듣고 좋아 어쩔 줄을 모르다가 같은 사람인 것을 보고 나서 화를 내니, 이 어찌 하늘이 성품을 내려 종류를 다르게 한 것인가? 그렇게 된 것은 욕심의 구렁텅이에 빠져 그렇게 된 것이다.
멀리 큰 봉우리를 바라보니 우뚝 솟아 하늘을 받치고 있는데 짙은 안개가 그 중턱 아래를 감싸고 있으니, 아마 천왕봉으로 여겨진다. 물으니, 중봉(中峰)이라고 한다. 탄식하며 절구 한 수를 지었다.
일행이 배고 고파 기운이 떨어져 마른 떡을 내서 먹었다. 잠시 후에 힘이 생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힘차게 중봉에 오르니 이 몸은 이미 하늘의 중간에 있다. 하늘에는 바람이 불어 귀밑 털이 흩날린다.
숲의 나무들은 모두 옹삭이 지고 키가 작았다. 통나무만한 떡갈나무는 두께가 한 자가 되니 마치 오래된 명령(??) 나무와 같았다. 낙옆이 무릎까지 쌓였는데, 얼음이나 눈과 합쳐서 조금도 앞으로 나아가기가 아주 위험하였다. 이윽고 하늘이 맑아져서 어두운 기상(氣象)이 말끔하게 걷혔다.
저 멀리 커다란 꼭대기가 하늘에 솟아 있고 높은 바위가 거만하게 있는 것을 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몸을 굽혔다. 천왕봉이 이곳에 있는 것을 알겠다. 종일 올라와도 그 진면목을 보지 못하더니 이제 비로소 우러러 봄에 더욱 높다는 탄식이 나왔다.
5리를 가서 비탈진 길에 개미처럼 붙어 곧바로 올랐다. 그 위는 마치 대머리처럼 초목이 전혀 없고, 떨기로 모여 자란 작은 풀들은 모두 쇠잔하게 헝클어져 자라고 있었다. 돌의 겉면은 그을리고 긁혔는데, 태초의 눈으로 띠를 두른 듯 희었다. 거센 바람이 등 뒤에서 불어 신선이 날아가는 것처럼 양쪽 소매를 휘날리게 하였다. 발을 디디고 올라갔으나 바람이 거세 머물 수가 없었다. 눈 아래에 펼쳐져 있는 여러 산들이 들쭉날쭉 깎은 듯이 엎드려 있는데, 산등성이, 언덕, 돌이 모여진 곳, 만두처럼 생긴 것 등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달리 보인다. 아주 높은 곳에 도달하니 아주 미세한 차이를 다투는 형세였다.
문득 바위가 돌아 길이 끊어져 여정을 멈추었다. 눈꽃이 번뜩이며 피어나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걸음을 멈춰 생각해보니, 비로소 내가 이미 천왕봉에 올라와 있는 것을 깨달았다. 눈을 떠서 아래를 굽어 살펴보니 세상에는 텅 비어 아무것도 없었다. 그 광활함은 백사장 같고 흡사 물이 모인 것과 같아 아득하여 끝이 보이지 않는 지세(地勢)이다. 가로 세로로 아득하게 펼쳐지고 합하여 기운이 쌓여 혼원(渾圓)하니 마치 투권(套圈)과 같은 것은 유기(游氣)이다. 아래는 지축(地軸)이 자리잡고 위에는 유기가 점령하여 푸른 것이 웅숭한 삿갓과 같은 것이 천형(天形)이다. 세 경계가 모이고
육합(六合)이 고르게 둥근데, 내가 그 가운데 처하였다. 맹자가 이른바 ‘천하의 넓은 거처에 거하며 천하의 바른 자리에 서 있다.’고 말한 것이 이와 같을 것이다. 인하여 공자가 동산(東山)에 올라 노(魯)나라를 작게 여기고 태산(泰山)에 올라 천하를 작게 여긴 것을 생각하였다. 태산이 비록 높으나 그 정상은 이미 태산에 속하지 않으며, 천하는 비록 넓으나 오히려 육합의 안에 속하니, 성인의 도에 견주어보면 오히려 양이 작은 것이다. 그러므로 그 극을 찬미하여,
“하늘에 계단을 만들어 올라갈 수 없으며, 해와 달을 넘을 수 없는 것과 같다.”
라고 한 것이다. 우리들은 도를 배웠으나 이르지 못하였고 도를 찾으나 볼 수 없다. 그러므로 지금 험준한 이 산에 와서 입을 벌리고 말을 토해내면서 ‘천하의 지극히 높은 것이다.’라고 하니, 또한 큰 도를 깨우친 사람에게 비웃음을 살 것인가? 괴롭게 읊조리면서 댓구를 찾았다.
갑자기 태양이 서쪽으로 숨으니 만상(萬象)이 어둠을 향하였다. 급하게 대에서 내려와 수료리(水料理)에 들어가 밤을 지샜는데, 때가 오랫동안 가물어 젖줄 같은 물줄기가 이미 끊어졌으니,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어떤 두 사람이 우리 앞을 지나가는데, 기쁘기도 하고 괴이하기도 하였다. 누구냐고 물으니, 약초를 캐는 사람이라 하고, 날이 저물었는데 어디 가느냐고 하니, 거처하는 곳으로 간다고 하였다. 샘물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니 아래 몇 궁(弓)의 거리에 있는 어떤 바위 아래에 있다고 자세히 가르쳐 주었는데, 말을 마치자 문득 보이지 않았다. 그 말대로 하여 물을 찾으니, 일행이 기뻐하며 서로 축하하였다.
한편으론 솥을 걸고 밥을 지어야 하고 한편으론 땔나무를 주워 와야 하는데, 찍을 도끼도 없고 자를 낫도 없다. 어두운 밤 험준한 곳에서 지척도 구분하기 어려운데 바위틈은 입을 벌리고 있고 돌은 칼처럼 날카로워 발을 베고 정강이를 다친 자가 계속 나왔다. 겨우 근처의 몇 그루의 나무를 잘라 땔나무를 구해왔다. 머무는 곳은 잎이 많은 나뭇가지와 이어져 있으며 바위에 의지하여 지어져 있다. 사방에 막히는 것이 없고 오직 윗부분만 가릴 뿐이니, 바람이 점점 거세져 뼈에 한기가 스며들었다. 나와 한주와 단계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바싹 붙어 누워 거북이와 뱀처럼 오그리고 있고, 나머지 사람들은 불가에 두루 앉아 군색하게 추위를 이기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피곤하고 초췌하여 생기가 없었다. 모두들,
“독은 비고 땔나무는 떨어지는데, 밤이 깊으면 한기가 모일 것이다. 어떤 방법으로 그것을 막을지 지극히 걱정된다.”
라고 하였다. 이윽고 문득 깨어 사지(四肢)를 조금 움직여 기지개를 하고 잠에서 깨어났다. 얼굴에 덮은 천을 치우니 따뜻한 기운이 낮의 해가 비출 때와는 달랐다. 떡과 탕을 내와 먹으니 배가 불르고, 등을 두루 적실 정도로 땀이 났다. 나는 샘물이 솟아나는 듯 기뻤으며 산이 솟아 있는 것처럼 기운이 뻗쳤다. 한문공(韓文公)의 시〈배형악묘(拜衡岳廟)〉를 낭랑하게 읊었다. 큰 소리로 읊조린 소리가 저 멀리 뻗어나가 산골짜기가 울렸다. 한주와 단계가 모두 깜짝 놀라 일어나 무릎을 마주 대고 앉아 시를 지으며 기쁜 마음으로 서로 즐겼다. 성이 소(蘇)씨인 노비가 앞으로 나서서 하례하며,
“하찮은 제가 이런 여행을 모신 지가 열세 번인데, 날씨가 맑으면 혹간 불을 때지 않아도 따뜻한 날이 있으니, 오늘 저녁이 그러합니다. 이는 실로 여러 어르신들의 큰 복입니다.”
라고 하였다.(하략)

[유교넷/문화컨텐츠닷컴/조선시대 유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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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성 박치복 [朴致馥, 1824~1894]


본관 밀양. 자 훈경(薰卿). 호 만성(晩醒). 유치명(柳致明)·허전(許傳)의 문인. 그의 학문의 목적은 존주대의(尊周大義)를 밝히고, 척사위정(斥邪衛正)하는 데 있었으므로 성리학뿐 아니라 사회개혁에도 일정한 식견이 있었다. '응지대삼정책(應旨對三政策)'은 임술민란 이후 이러한 관점에서 그가 제시한 대책문이다. 산행을 좋아하여 기행문을 남기기도 하였다. 문집에 《만성집(晩醒集)》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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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걍남일보 연재 강우유맥/강동욱 기자]


만성 박치복


황매산 가는 길목인 합천군 가회면 연동 마을 들어가는 입구에 큰 비석 한 기가 서 있는데, 바로‘晩醒朴先生遺墟碑(만성박선생유허비)’이다.

100여년 전 이곳 연동마을에서 세상을 떠난, 한말 강우지역의 대표적 학자 중 한사람인 만성 박치복(朴致馥)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비문에“近代 韓末 남쪽 고을에 큰 선비 선생이 계셨으니 晩醒 朴公 諱는 致馥이요, 자는 薰卿이시니 純祖 甲申(1824)년에 咸安 安仁里에서 탄생하셨다. (중략) 13세에 육경을 다 읽었고 겸하여 과거공부도 하여 유능하다는 명성이 있었으나 아버님 명령으로 京試에 나아가지 않았으니 대개 성년이 안된 사람으로 서울에 멀리 유학할 수 없음이었다.”라고 하여 만성이 어릴때부터 총명함이 남달랐음을 말하고 있다.

만성은 7세 때 본격적인 공부를 시작했으며, 9세때는 부친 오려공(吾廬公)을 따라 함양으로 이주해 물재서당(勿齋書堂)에서 글을 읽기도 했다. 13세 때 함양에서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할머니인 이씨에게 ‘충효합경(忠孝合經)’을 배웠다.

21대 초반에 고령과 달성 향시에 연달아 나갔으며, 을사(1845)년 3월에 안동 대평으로 폐백을 가지고 정재(定齋) 유치명(柳致明)을 찾아가 제자의 예를 갖추었다.

이때 정재는 만성에게 그 쌓은 공부를 물어 보고 말하길 “네가 논어를 알뜰히 공부하였으나 체험하여 아는 공부를 더하여 부지런히 쉬지 않으면 진정한 사업이 여기에 있다”고 하며 중용과 대학을 읽는 법을 손수 써 주기까지 했다.

이때부터 만성은 안동으로 스승인 정재를 찾아가 몇개월 동안 서당에 머물면서 학문을 익혔는데 김흥락(金興洛), 김휘수(金徽壽), 유지호(柳止鎬) 등 당시 안동지역의 대표적인 선비들과 경서등의 요지를 토론하기도 했다.

28세 때는 외가인 의령 유곡(柳谷)으로 거처를 임시로 옮겼다. 당시 만성의 집안이 매우 빈곤하여 학업을 계속 할 수 없는 처지였다. 그래서 부친이 만성에게 가사(家事)에 신경을 쓰지 않고 오로지 학업에 전념토록 하기 위해 외가인 유곡리로 옮기게 한 것이다. 30세 때 부친상을 당해 애통함이 극진하고 슬프함이 몸을 상할 정도였으며, 곧 부친 오려공의 언행록(言行錄)을 지어 평생의 업적을 기렸다.

37세 때 황매산 남쪽 삼가 대전촌(大田村)으로 이주해 백련재(百鍊齋)를 세우고 학문하는 장소로 삼았다. 만성이 백련재에서 학문에 정진한다는 소식을 듣고 인근의 선비들이 너무 많이 찾아와 장소가 협소하게 되었다. 다음해 봄에 만성와(晩醒窩)를 세워 찾아오는 사람들을 맞이해 학문에 더욱 정진을 했다.

이때 만성은 고요히 앉아 마치 점필재 김종직 선생이 소학을 제자들에게 가르치는 마음을 간직하면서 제자들을 독려했다. 제자들에게 실생활에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학문 즉 실학(實學)을 강조했으며, 이로 말미암아 강우지역의 학풍이 크게 진작되었다.

40세 때(1863년) 가을에 김해 부사로 내려온 성재 허전 선생을 아우 매옥공(梅屋公)과 함께 뵙고 예물을 갖추어 섬기기를 청하니, 허선생이 말씀을 나누며 크게 기뻐하면서 “내가 선비들을 많이 보았지만 그대같은 사람은 아직 보지 못했네”라고 하며 곧 자기가 지은 ‘사의(士儀)’와 ‘경덕설(敬德說)’등을 보여 주었다.

1866년 성재가 남명을 모신 덕천서원과 미수를 모신 미연서원을 비롯한 도내 서원들을 두루 참배하면서 단계의 완계서원에 이르렀을때 단계 김인섭, 자전(紫川) 권인두(權仁斗) 등 지역의 많은 선비들과 함께 강론을 펼치기도 했다.

1869년 가을에는 감사 이삼현(李參鉉)이 만성을 조정에 천거하며“세상을 구제할 경륜과 나라를 빛낼 문장가 입니다”라고 했다.

이 당시 만성은 스승인 성재가 지은 ‘사의(士儀)’를 교정하는 것을 비롯해 후산 허유와 심학(心學)에 대해 토론을 벌였으며, 면우 곽종석과는 문장에 대한 토론을 벌이는 등 지역 학계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53세 때 삼가 연동으로 거처를 옮겼다. 거처를 옮기고 나서도 지역의 드러난 선비들과 서신을 주고 받으며 학문을 토론하였으며, 태극동정변(太極動靜辨) 등의 글을 지었다.

1886년(63세) 여름에 성재의 병석을 방문하니, 성재가 손을 잡으며 “성호 순암의 학통을 자네에게 부탁하니 힘써다오” 라고 하면서 평생동안 지은 원고를 맡겼다.

스승인 성재가 성호 이익, 순암 안정복의 학통을 만성에게 부탁한 것은 근기남인(近畿南人)의 학맥을 이어달라는 뜻이었다.

만성은 스승의 뜻을 저버리지 않았으며, 4년 후에는 인근의 여러 선비들과 단성의 법물리에 이택당을 건립해 ‘성재문집’을 간행했다.

64세 때는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에 제수되었다. 당시 감사가 만성의 문학(文學)이 뛰어나다는 점을 조정에 알려 벼슬이 제수되도록 한 것이다. 이듬해에는 남명선생을 문묘에 배향해야 된다는 상소를 조정에 올렸다. 이어 당시 시대 상황이 어지러운 것을 보고 ‘시폐소(時弊疏)’를 임금께 올려 바로 잡고자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고향에서 학문에만 전념하기로 했다. 고향에서 ‘명덕변(明德辨)’ ‘독서차록(讀書箚錄)’ 등의 저서를 짓기도 했다.

70세 때는 덕산 산천재에 갔다. 이때 지역의 선비들이 ‘남명집’ 중간의 일로 만성을 청했는데, 만성은 남명집을 가볍게 손대는 것은 옳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약간의 의문이 나는 점만 지적해주고 곧 돌아왔다.

이듬해 (1894년) 연동의 병촉실(炳燭室)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 71세였다. 연동의 오른편 산기슭에 장례를 지냈으나, 20년 뒤인(1913년) 함안 용화산 선영아래에 이장을 했다.

당대 학문을 이끌었던 만성이지만, 지금 만성의 학덕을 기리는 서원이나 서당 재실 등 그 어느 곳도 찾을 수 없다. 안타까울 뿐이다. 다만 그가 말년에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살았던 삼가 연동 입구에 유허비 한 기만 외롭게 서 있을 뿐이다. 최근 그의 학덕을 기리는 사람들에 의해 ‘만성집’이 다시 발간되기도 했다.

유허비 말미에 그의 학덕을 기리는 글이 있다. 고령 관동에 살았던 진와 이헌주가 지은 글이다.

“학문은 천년토록 남을 것이요 재주는 한 때에 높았도다 그러나 가난한 선비의 집에서 평생을 마치시니 어찌 운명이 기구하셨을까 비록 야인으로 버려졌으나 충성은 잊지 못하여 상소하여 군왕께 올린 말씀 빛나고 빛난 붉은 마음이셨네 널리 스승의 자리를 열어 훌륭한 인재를 교육하시며 책을 짓고 말씀을 세워 성현의 경전을 도왔으니 이것이 큰 사업이라 來世에 전할 수 있으려니 한때의 빈궁과 현달에 어찌 충분히 기뻐하고 슬퍼하랴 이 연동 마을은 일찍 계시던 곳이라 산천초목도 완연히 향기로운데 이 비석을 새겨 남기신 발자취를 표시하노니 무릇 이곳을 지나는 사람마다 누가 공경하지 않으리오”

황매산 가는 길목, 만성 유허비는 만성의 학문을 전하고 있건만 눈길을 돌리는 사람은 많지 않다. 만성은 생전에 황매산을 바라보면서 그 기상을 닮고자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기상을 지금 알아주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고, 황매산만이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그대로인 것 같다.


만성 박치복이 본격적으로 학문의 길로 들어선 것은 16세때부터다. 부친의 명령으로 집에서 5리 정도 떨어진 ‘한천재(寒泉齋)’에서 학문을 연마한다. 이때 만성은 초하룻날 집을 떠나 월말에야 돌아올 수 있었는데, 이로부터 7년동안 논어 춘추 등을 읽기를 1만번에 이르렀다고 한다.

한천재에서의 공부를 마치고 바로 안동 대평(大坪)으로 정재 유치명을 찾아가 제자의 예를 갖추었다. 당시 퇴계학맥의 종장이라고 할 수 있는 정재는 젊은 만성을 시험해 보고 “네가 논어 공부를 알뜰히 했구나. 더욱 부지런히 정진하는 것이 마땅하다”며“중용, 대학 책 읽는 법을 손수 써서 주면서 공부에 매진하라”는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만성은 불혹의 나이가 되어 또다른 스승을 만난다. 그가 41세 때 김해도호부사로 내려온 성재 허전을 찾아간 것이다. 성재는 실학자 성호 이익의 학문을 이은 대학자였다. 성재는 만성에게 “내가 많은 선비를 보았지만, 자네같은 사람은 처음 보았네”라고 하면서 자신이 지은 ‘사의(士儀)’ ‘천민(天民)’ ‘경덕설(敬德說)’ 등을 보여주었다.

이처럼 만성은 정재와 성재를 스승으로 모시고 평생 학문에 정진을 하게 된다. 만성이 정재와 성재를 스승으로 모셨다는 사실은 우리나라 유학사에서 대단한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일찍이 창녕선비 심재(深齋) 조긍섭(曹兢燮)은 만성을 영남 학맥을 온전히 이은 선비로 평가했다.

만성의 묘갈명에 이르기를 “퇴계선생 이후에 학통(學統)을 이은 학자들이 영남과 근기(近畿)두 파가 있는데, 영남의 학문은 정엄(精嚴)하여 항상 수경반약(守經反約)을 주로 삼았고, 근기의 학문은 그 폭이 넓어 응용구시(應用救時)에 중점을 두었다. 영남의 학문은 갈암(葛菴) 이현일(李玄逸), 밀암(密菴) 이재(李栽) 부자와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을 거쳐 정재(定齋) 유치명(柳致明)에 이르렀고, 근기의 학문은 성호(星湖) 이익(李瀷)으로부터 순암(順庵) 안정복(安鼎福)을 거쳐 성재(性齋) 허전(許傳)에 이르렀다. 그 유파가 더욱 커지고 학문을 이은 자들이 점차 많아졌다. 그러나 이들이 나아가서 믿는 것이 이미 다르게 되었고 각자 가르침을 받은 것을 높이기는 하였으나, 그 어떤 사람도 이 모든 것을 정리 요약해 일목요연하게 만들지 못했는데, 오직 만성이 정재와 성재의 두 문하에서 넉넉히 배워서 모두 그 학문 요점을 계승하고 또 가르침의 요령을 얻어 마침내 영남 학맥의 영수가 되었다”라고 했다.

퇴계의 학문이 영남지역과 서울 인근지역으로 퍼져 각기 다른 학문적 특성으로 발전해 나가 두 지역의 퇴계학맥을 계승한 사람이 바로 정재와 성재라고 할 수 있는데, 만성은 정재와 성재를 스승으로 모시고 학문을 익혀 퇴계의 학맥을 온전히 계승해 영남지역의 대표적인 학자로 인정받고 있다는 내용이다.

만성은 38세 되던 해 봄, 황매산 아래에 ‘만성와(晩醒窩)’라는 집을 짓는다. 이보다 1년전 만성이 삼가 대전촌으로 이주해 황매산 아래에 백련재(百鍊齋)라는 띠집을 지어 학문에 정진하던 중, 명성을 듣고 인근의 선비들이 배우고자 몰려들어 백련재가 좁아 별도로 만성와를 건립한 것이다.

만성은 ‘늦게 깨우친다’ 뜻이다. 이는 평생토록 학문에 정진하면서 문리(文理)를 터득하고자 하는 만성의 학문적 지향점을 드러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만성은 학문을 하는데 있어서도 옛 선인의 학문방법을 본받아 이를 실천하려고 했다. 만성이 만성와에서 학문을 정진하고 제자들을 가르칠 때, 자신이 마음을 침잠하게 가지고 영남학맥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점필재 김종직이 일찍이 소학(小學)을 가르치던 방식을 본받아 학생들을 독려했다. 만성이 소학을 이처럼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인간으로서의 기본 도리를 제자들에게 충실히 전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는 당시 시대상황과 무관치 않다고 볼 수 있다. 만성이 살았던 19세기는 도학(道學)이 점점 쇠퇴해가고, 외세의 침탈로 서양문물이 물밀듯이 들어오던 시기였다.

만성은 도학이 무너지는 시대를 살면서 많은 고민을 한 것으로 보인다. ‘삼정책(三政策)’‘척사문(斥邪文)’등의 글을 지어 시대의 아픔을 토로한 것이다.

‘삼정책’은 임술년(1862년) 당시 삼정(三政) 즉 전정(田政) 군정(軍政) 환곡(還穀)의 문란으로 백성들의 삶이 도탄에 빠지자 조정에서 전국의 선비들에게 그 대책을 물었는데, 만성이 그 대책을 조정에 올린 것이다.

만성은 ‘삼정문란’을 타개할 대책으로 ‘면성학(勉聖學)’ ‘정사습(正士習)’‘금사치(禁奢侈)’ ‘방회뢰(防賄賂)’등 4가지 조목을 주장했다. 임금은 옛날 성군을 본받아야 하며, 좋은 인재를 골라 등용을 시켜야 하며, 사치를 엄격하게 금하고 뇌물을 막아야 한다는 내용이다.

만성은 42세 때 성균관에서 공부를 하면서‘척양사론(斥洋邪論)’이란 글을 지었는데, 여기서도 ‘명정학(明正學)’‘정사습(正士習)’‘공선거(公選擧)’‘찰민은(察民隱)’ ‘엄무비(嚴武備)’ 등의 조목을 주장했다. 이 역시 성현의 학문을 밝히고 좋은 인재를 등용하고 백성들의 어려움을 살피고 국방을 튼튼히 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만성은 문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특히 그가 38세 때 지은 ‘대동속악부(大東續樂府)’는 작자미상의 대동악부를 읽고 그 속편을 지은 것으로 조선 건국부터 임란까지의 역사를 소재로 하였는데, 그 양이 무려 28편이나 되었다. 또 면우 곽종석과 문(文)과 도(道)의 관계에 대해 토론을 벌이는 등 문장에도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만성은 문과 도를 별개의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만성은 만년 합천 연동에 살면서 거처하는 곳을 ‘병촉실(炳燭室)’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병촉은 ‘촛불을 비춘다’는 뜻으로 ‘만학(晩學)’을 의미한다. 자신의 호 만성과 무관치 않음을 알 수 있다.

옛날 사람들은 젊어서 하는 학문은 ‘아침햇살’과 같고 만년에 하는 학문은‘촛불에 비춘 것’과 같다고 했는데, 만성이 이를 염두에 두고 이름을 지은 것이다.

만성은 67세 때 단성 법물리에서 스승인 성재 허전의 문집을 간행하면서, 또 ‘이택당(麗澤堂)’건립을 주도해 성재의 학덕을 기리고자 했다. 만성이 성재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이택당은 진주 산청 등 인근 지역 선비들의 강학장소로서 그 역할을 톡톡히 하면서 지역 학풍을 진작시키는데 큰 기여를 했다.

만성은 병세가 위독할 때도 제자들에게 글을 써주면서 경계하길 “분명하지 못하고 짜임새 없는 잡설의 그릇된 것으로써 뜻을 불안하게 하지 말아라” 라고 했다.

심재 조긍섭은 만성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기면서 “선생이 돌아가신 뒤로는 세상이 변하고 도학이 쇠퇴해 백성의 삶은 위태로운데 떨어지고 선비들은 서로 자기가 잘 낫다고 논쟁을 벌이니 유식한 선비들이 선생 생각을 하지 않은 이가 없다”라고 했다.

만성 박치복.

그는 한말 강우유맥의 거대한 봉우리였다. 황매산 만큼 높은 학덕을 지녔으면서도 성현의 도가 땅에 떨어진 지금, 그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들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 언젠가 만성의 학덕이 제대로 평가받는 날이 오기를 기다리며, 황매산을 바라보았다

[경남일보/강동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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