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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先人들의 智異山

두류록/명암 정식

by 지리산 마실 2009. 1. 10.

두류록/정식

두류산 에서 제일로 치는 암자는 남대(南臺)이다. 작년 가을, 대원암(大源庵)을 찾았는데 두류산 북쪽에 있다. 그곳까지의 계곡과 돌들은 두루 유람했지만 남대 남쪽으로는 다 보지 못하고 돌아오니 마음속에 오랜 소원으로 남아 꿈까지 꾸었다.
금년 가을, 친구 한두 명과 다시 진경을 찾아 나서니 갑진년(1724년, 경종 4년, 영조 1년) 8월 초이틀이었다. 차양을 쓰고 미투리를 신고
신선산 을 바라보니 가슴 가득한 청신한 흥취와 단출한 차림새가 오롯이 마치 허물을 벗은 매미 같았고 가을 숲은 먼 하늘아래 어두워져가고 있었다.
저녁에 금운창(金雲倉)에 도착하니 흰 돌과 맑은 샘물이 두류산에서 내려와 옥빛 물결에 바닥이 투명하게 드러나 보였다. 이곳은 두류산의 바깥 자락인데도 이렇게 세속을 벗어난 경치가 있었다.
그 위에는 이른바 화장암(花藏庵)이 있는데 산꼭대기에 있다. 깎아지른 듯 높고 급한 산길을 더위잡고 올라가는데 좁은 길은 계속 구비지고 바위들이 머리를 막아서고 있어 세 걸음에 한 걸음 물러나고 다섯 걸음에 한 번 쉬면서 암자에 이르렀다.
암자에 있는 노승이 웃으며 맞이하였는데 그의 이름은 진기(震機)였다. 그는 돌아가신 형님과 평소 잘 아는 사이여서 나도 아이 적부터 아는 사이였다. 내가 기이한 경치나 오래된 유적을 묻자 그는 돌구멍 한 곳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이 구멍은 예부터 곡식이 난다고 전해지고 있는데 지금 확신할만한 증거는 없습니다. 그러나 입추 후에 안개 같은 수증기가 구멍 안에서 뿜어져 나옵니다.”
라고 하였다. 이 구멍은 항아리 주둥이만 했는데 깊이는 헤아릴 수가 없었다. 그가 또 말하기를,
“이 암자터의 모든 돌틈에서 연기 같은 수증기가 나지 않는 곳이 없으니 역시 기이합니다.”
라고 하였다.

3일. 산꼭대기에서 내려와 입덕문(入德門)에 들어갔는데, 이때 지는 해는 고갯마루에 걸려 있고 보슬비가 오락가락 하였다. 암문(巖門) 소나무 아래서 잠시 쉬었다. 산 위아래 십리 길에 인적은 전혀 없었고 어지럽게 내닫는 폭포수가 다투듯 쏟아져 내리고 그윽한 곳에서 새들이 때때로 지저귀었다. 저녁 무렵에 세심정(洗心亭)에 이르러 남명서원에서 유숙하였는데 새벽에 큰 비가 내렸다가 아침에 개었다.

4일. 계곡을 거슬러 산에 오르니 산길이 험해져서 바위가 아니면 물이었다. 맑은 샘물은 흰 눈 같고 붉게 물든 단풍나무가 절벽을 가리고 있으니 눈길 가는 곳, 걷는 곳마다 몸과 마음의 피로를 잊게 하기에 족했고 눈으로 보고 마음에 얻은 것들이 절로 무한한 즐거움을 주는데 글로 형용하거나 옆 사람이 알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보문암(普門庵)에서 유숙하였다. 이 암자는 깊은 산 가운데 좌우로 감싸인 듯이 들어 서있고 소나무와 박달나무는 해를 가려 그 그윽한 정취가 다함이 없었는데 조금 협소한 것이 흠이었다.

다음날(5일). 저녁에 진주담(眞珠潭)에 닿으니
김성운(金聖運)의 은거지였다. 백주(白酒)를 마시고 곰발바닥을 안주 삼았다. 이곳의 경치는 지금까지 거쳐 온 곳 중에서 제일 뛰어났고 자못 산속 은거지로서의 예스러움이 있었다. 십여 리를 더 가니 서너 집이 모여 사는 마을이 있었다. 한 사람이 웃으며 맞이하니 예부터 알고 지내는 정태좌(鄭泰佐)였다. 돌 위를 쓸어내고 앉아 잠시 대화를 나누다가 함께 남대암에 올라갔다.
정태좌가 길 왼쪽의 큰 암석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이것이 바로 곡성암(哭聲巖)입니다. 예전에 지엄대사(智嚴大師)라는 분이 있었는데 병사(兵使)로 이곳에 유람을 왔다가 승려의 초심책(初心冊)을 보고는 벽송암(碧松庵)에 들어가 머리 깎고 승려가 되었습니다. 그의 처가 그를 찾아 암자 아래까지 왔는데 거절하여 들이지 않자 결국 이 바위에서 울었답니다. 그래서 이런 이름이 붙었습니다.”
라고 하였다. 계곡 하나를 건너고 고개 하나를 오르니 과연 벽송암 옛터가 있었고 지엄대사의 부도(浮屠)도 있었다.
남대암에서 유숙하였는데, 처마와 창문은 퇴락했고 단청은 군데군데 떨어져 있었다. 이곳 승려가 말하기를,
“계미년에 중창할 때 상량문을 살펴보니 천육백 년이 되었습니다. 골짜기가 깊고 산이 높아 살아가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에 승려들이 거처하는 날이 많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버려져 방치되었을 적에 나무가 판각 위에서 자라나 그 크기가 한 아름이나 되고 등나무와 칡은 그 위를 싸고 있습니다. 호랑이와 표범, 노루와 사슴이 새끼를 낳는데 방 가운데 이러한 것이 세 군데나 있습니다.”
라고 하였다. 내가 어째서 목판으로 기와를 대신하는지 묻자 승려가 말하기를,
“추위가 매우 심해서 기와는 부서져버립니다.”
라고 하였다. 위아래에 우물이 있는데 푸른 바위가 둘러쳐져 삼층으로 쌓여 있는 듯하였으니 하늘이 별세계(別世界)를 만들어놓은 것을 알 수 있었다. 아흔 살의 노승이 밤새도록 《금강경》을 이야기하였다.

다음날(6일). 아침에 암자 뒤편의 큰 바위 위에 올라 좌우의 여러 산들을 두루 돌아보니 읍하는 듯 두 손을 마주 잡은 듯 하고 달리다가 멈춘 듯 하며 걸터앉아 있다가 불쑥 일어나는 듯 하고 열려져 확 트인 듯하기도 하며 껴안고 꽉 막은 듯하기도 했는데 구불구불 이어져 뻗어나가 천만 가지 괴이한 형상이었다.
서너 명의 승려들과 천왕봉에 오르니 바로 두류산 제일봉이다. 높이 솟은 바위가 매우 험준해서 마치 새길〔鳥道〕을 오르는 듯해서 더운 김을 내쉬며 헐떡였는데 견딜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비로소 정상에 올라 배회하며 조망하니 사방의 산들은 개밋둑 같았고 삼면의 바다는 잔을 놓은 것 같았다.
일월대에 오르니 하늘과 바다가 아득히 맞닿은 사이에서 붉은 기운이 먼저 바다 밑을 싸고 펼쳐져 있었는데 잠시 뒤에 둥그런 태양이 떠올랐다가 다시 가라앉았다. 이와 같이 세 차례 반복하고 나서야 비로소 해가 하늘에 떠오르니 괴이하였다. 짐작컨대, 해가 하늘 끝에 떠오를 때에 그 사이에서 동해의 파도가 산처럼 일어서는 것이지 해가 떴다가 다시 가라앉는 것은 아닐 것이다. 파도가 높아지면 해가 가려지고 파도가 낮아지면 해가 드러나는 것이니 그 이치는 헤아리기 어렵다.

7일. 다시 남대암에서 유숙하였다.

8일. 공전촌(公田村)의 하세귀(河世龜)의 정사(精舍)를 방문했는데 매우 청신하였다. 함께 술을 조금 들고 작별하였다.

9일. 소남강(召南江)을 지나 저녁에 봉곡(鳳谷)에 돌아올 적에 거리의 아이들이 다투어 웃으며 말하기를,
“거사가 산을 유람하고 돌아가시네.”
라고 하였다.

쌍계(雙溪) 남쪽으로도 다 찾아보고자 8월 17일에 다시 길을 나섰다. 행장은 단도 하나와 지팡이 하나였다. 백 리 되는 산길을 하루 종일 계곡을 거슬러 올라 저물녘에 오대사(五臺寺)에 들었다. 절문 밖에 은행나무 두 그루가 있는데 그 크기가 대여섯 아름에서 열세 아름이나 되었다. 이곳 승려가 말하기를,
“이 나무들은 나이가 몇 천 년인지 알 수 없으니 우리나라에 이 나무들보다 큰 것은 없습니다. 한 쪽에 불에 탄 자국은 임진왜란 때 불탄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18일. 청암사(靑巖寺)에서 유숙하였다. 누대 아래에서 쉬고 있는데 한 승려가 다른 지방에서 와서 나한테 절하고는 강릉 오대산에 있다가 이곳에 산수 구경 왔는데 지금 막 쌍계사로 돌아가는 중이라고 하여 그와 동행하였다.

19일. 삼가현을 넘어서 악양 문수암(文殊庵)에서 유숙하였다.

20일. 점심 때 장흥암(長興庵)에서 잠시 쉬고서 저녁에 쌍계사에 들었다. 이 절 주위로 두 시내가 흘러서 이런 이름이 붙었는데 하나는 신흥(新興), 의신(擬神)에서부터 내려오니 서계(西溪)이고, 또 하나는 불일(佛日), 청학(靑鶴)에서 내려오니 동계(東溪)이다. 위아래 백 리에 걸쳐서 큰 시내가 세차게 흐르고 흰 바위가 평평하게 깔려서 보이는 것은 모두 흰 눈 같았고 계곡 입구에 있는 둥근 바위에 쌍계석문(雙溪石門)이라고 쓰여 있는데
최치원(崔致遠)의 필적이다. 절 뒤에 오래된 전각이 있는데 최치원이 글 읽던 곳이다. 최치원의 화상이 숙연하게 마치 살아있는 것 같았다.

21일. 불일암(佛日庵)에 들었다. 푸른 절벽 사이에 길 하나가 걸려 있는데 절벽이 끊어진 곳은 나무를 대어 다리를 놓았으니 그 아래로 만 길 낭떠러지인지라 정신이 아뜩해졌다. 암자 좌우는 위로 우뚝하게 솟아 마치 앞에 걸려있는 듯한 봉우리 두 개가 있는데 오른쪽은 비로(毗盧)라 하고 왼쪽은 향로(香爐)라고 한다.
옛날 청학과 백학이 바위틈에서 둥지를 틀고 살았다고 하여 어떤 이들은 청학봉, 백학봉이라고도 말한다.
봉우리 위에서 폭포가 천 길 절벽을 떨어져 내리는데 두 층으로 나뉘어져 있고 맑은 날에도 안개가 골짜기를 메우고 바람과 우레가 일어난다. 웅덩이가 패여 못을 이룬 것은 이른바 학연(鶴淵)이다. 이곳 승려가 말하기를,
“용이 아래에 서려 있으니 때때로 출몰합니다. 구름 낀 못의 벽면에 삼선동(三仙洞) 세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어느 시대 누구의 필적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라고 하였다. 왼쪽에 있는 큰 바위에 ‘완폭대(翫瀑臺)’ 세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최치원의 필적이다. 배회하며 시간을 보내니 신선의 별세계요, 세상 밖의 절경임을 깊이 느꼈다.
이 암자에는 승려 두 명이 있었으니 인사도 말도 하지 않았고 정신이 또릿하고 얼굴이 푸르러 마치 고목 같은 모습이었다. 면벽하고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는데 나도 한 쪽에 꼿꼿이 앉아 생각하기를,
“이와 같은 신선 세계는 다시 노닐기 쉽지 않으니 어찌 차마 바로 돌아갈 수 있겠는가?”
라고 하고 노복을 먼저 돌려보내 쌍계사에서 나를 기다리도록 하였다. 그리고는 머물러 두 승려와 동숙하였는데 밤새도록 자지 않고 종일토록 일어나지도 않으면서 사흘 동안을 이렇게 했다. 한 승려가 문득 문을 열고 나가 나무 바리때와 나무 숟가락을 놓고 송엽죽을 올리며 말하기를,
“어느 곳의 거사님이시기에 힘들게 공부하시며 꼿꼿이 앉아계시는 것입니까? 사흘을 굶는 것은 이곳 승려들도 견디지 못하거늘 거사님께서 어찌 견디시겠습니까? 이 죽이라도 드십시오.”라고 하였다. 죽은 솔잎을 데치고 물에 오랫동안 담가 만든 것이었는데 바리때 안에 쌀은 겨우 열 톨 정도인지라 먹을 수가 없었다. 또 하루를 머물며 승려들과 말없이 앉아 있노라니 폭포 소리가 골짜기를 가득 메우고 소나무를 스치는 바람소리가 방으로 들어와 상쾌한 기운이 사지를 휘감았다. 문을 열고 내다보니 때는 삼경이었다. 달은 향로봉에 걸려 있고 폭포는 층을 이룬 절벽에 떨어지는 것이 의연히 은하수에 들어선 것 같았고 그 가운데 만 섬의 은빛 물결이 쏟아져 내리는 소리를 들으니 이곳이 이 세상 속 어디인지 알 수가 없었다.

다음날(24일). 승려들이 나를 절벽 샛길 밖에까지 전송하며 말하기를,
“이 암자에서 유숙하는 것은 승려들도 드문 일입니다. 그런데 공은 이틀을 머무셨으니, 세속을 초탈한 선비가 아니면 가능하겠습니까? 허명진실(虛明眞實)한 도와 허무적멸(虛無寂滅)의 도라는 것이 유가와 불가가 비록 다르지만 그 근본은 하나이니 절실히 보배로 삼고 소중하게 여기기를 다할 뿐입니다.”
라고 하였다.

25일. 칠불암(七佛庵)에 들었다. 이 암자는 반야봉에 있다. 쌍계 입구로부터 거슬러 들어가는 이십여 리에 걸쳐 고운 모래와 아름다운 바위 아닌 것이 없었기에 걷거나 앉으며 차마 버리고 갈 수가 없었다. ‘아(亞)’자 모양으로 구들을 놓은 것은 이른바 고승당(高僧堂)이다. 아래쪽에 있는 불전에는 열두 층으로 된 탁자위에 날아다니는 새들을 새겨 금식(金飾)하여 걸어두었다. 이곳 승려가 말하기를,
“온갖 새들이 삼라법상(森羅法狀)의 설법을 듣는 것을 형용한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날이 저물어 내가 고승당에 머물기를 청하였는데 승려가 말하기를,
“이 당은 밤새도록 예불을 드려서 종소리가 나고 경쇠를 두들겨 숙면을 취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유람객과 지나가는 손님들은 이곳을 피해 다른 승방에서 유숙합니다.”
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신선 세계를 오랫동안 듣기만 하다가 이제야 찾아왔으니 어찌 하룻밤 편히 자지 못하는 것을 꺼리겠소?”
라고 하였다. 승려가 웃으면서 말하기를,
“공의 말씀은 과연 일찍이 이곳을 다녀갔던 유람객들과 다릅니다.”
라고 하고 함께 유숙하였다. 옛 유적에 대해 물으니 승려가 말하기를,
“이 암자의 개창 연대는 몇 천 년이 되는지 모르는데 혹은 동진(東晉) 때에 개창했다고 전하기도 합니다. 또 법당 뒤에는 옥대(玉臺)가 있습니다. 옛날 신라 경덕왕에게 아들이 여덟 명이 있었는데 문득 공중에서 나는 옥피리 소리를 듣고 소리가 나는 곳을 찾아오니 옥대 위에서 과연 한 신선이 피리를 불고 있더랍니다. 이 때문에 일곱 아들이 대를 쌓고 돌아가지 않았으니 이것이 옥대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입니다. 또 옥대 위에는 쪼개진 노송나무가 줄기가 자라나 죽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라고 하였다.

26일. 신흥암(新興庵)에 들어갔다. 이곳은 쌍계가 합류하는 곳이다. 기이한 바위와 다듬어 놓은 듯한 돌들이 좌우로 평평하게 깔려 있고 눈처럼 하얀 물보라와 은빛 폭포가 잔잔한 물결 가운데로 다투어 흘러드니 곧
남명 조식(曺植) 선생이 이른바 ‘은하수가 가로지르니 뭇 별들이 시들해지고, 요지(瑤池) 에서의 연회 끝나자 수놓은 자리 낭자하네.’라는 것이었다.
그 가운데 움푹 팬 돌이 있는데 쑥 들어가 저절로 항아리 모양을 이루었으니 역시 기이한 모습이었다. 그 위에 쓰여 있는 ‘세이암(洗耳巖)’ 세 글자와 계곡 바깥 바위면에 쓰여 있는 ‘삼신동(三神洞)’ 세 글자는 모두 최치원의 필적이다.

27일. 성긴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습한 구름이 골짜기를 메웠다. 삽암(?巖)을 지나
한 록사(韓錄事)의 옛집을 방문하였다. 섬진강을 지나 백운산을 바라보고 오룡정(五龍亭)에서 유숙하였다.

아! 두류산의 산수를 곳곳마다 남김없이 유람하고 집에 돌아와 문을 닫고 홀로 앉으니 폭포 소리 귀에 쟁쟁하고 바위들 눈에 삼삼하다. 장차 다시 신선 세계의 기암을 완상하고 그곳에서 노년을 보낼 계획을 해보지만 세월은 홀연히 지나가고 세속에 얽매인 일들은 천만 가지니 혹 평소의 뜻을 저버리게 될까 염려되기에, 드디어 유람한 곳들의 인상을 대략 기록해서 들춰보고 잊지 않을 수 있는 자료로 삼고자 한다.


[유교넷/조선시대유람기 번역자료에서]


* * * * * * * * * * *

정식(鄭? ; 1683∼1746)의 자는 경보(敬甫), 호는 명암(明庵)이다. 동지중추부사 대형(大亨)의 손자이다. 일찍이 과거 보러 나가 병자호란 때 김지순(金之純)이 쓴 척화소(斥和疏)를 읽고 당세에 영리를 구하지 않기로 결심하였다. 항상 패랭이를 쓰고 명산을 유람하였고, 만년에 두류산(頭流山) 속에 암자를 짓고 여생을 마쳤다. 지평(持平)에 추증되었다. 또한 「도연유록(陶淵遊錄)」은 정식의 문집인『명암집(明庵集)』 권 4에 수록되어 있는 기록으로, 기미년(1739년) 가을에 도사(道事)때문에 호계서원에 모였다가 일을 마치고 청량산으로 가고자 했는데 소릉(少陵)이 도연을 구경하고자 하여 함께 유람하고 느낀 점을 기록한 것이다. 당시 도연 주변의 사적 위치를 조명하고 경관을 짐작할 수 있는 자료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도연에는 높은 폭포와 떨어질 듯한 절벽에, 맑고 깊은 물이 있었으며 도연정과 그 남쪽에 표은초당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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