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200회 종주 산꾼과 함께 오른 지리산 종주기 야생의 2박3일 유쾌한 생존 게임 칠흑같은 밤 나홀로 야간산행 갑자기 랜턴불이… 비바람 속의 노숙, 곧이어 펼쳐진 천상의 별잔치 고통과 시련, 그뒤에 만나는 대자연 그리고 감동 | ||||||||||||||||||||||||||||||||||||||||
기자가 지리산을 처음 만난 건 십수년 전 대학시절입니다. 1년을 짝사랑한 여자 후배에게 연서 하나 던져놓은 채 갓 제대한 친구를 부추겨 덜컥 찾아간 곳이 바로 지리산입니다. 왜 지리산이었을까. 아마 시련을 이겨내려 더 큰 시련과 마주하려는 아둔한 발상이었는지 모릅니다. 등산화가 없어 낡은 전투화에 텐트 하나만 둘러메고 중산리를 거쳐 대책없이 올랐던 천왕봉. 천지를 붉히던 장터목의 장엄한 석양과 까만 밤하늘에 하얗게 쏟아지는 별비도 그때 처음 맞았습니다. 곤죽처럼 몸은 퍼져도 영혼은 어린아이처럼 맑아졌던 걸로 기억합니다. '어리석은 이도 산에 들면 지혜로워진다'는 뜻의 지리산(智異山). 그렇게 인적 드문 가을 지리산 어느 기슭에 사연 하나를 묻어두었습니다.
까마득한 지리산 산길에 대체 뭐가 있기에 그를 그곳으로 불러들였을까요. 그저 "산이 좋아 오른 것 뿐"이라며 수줍게 웃는 그와 함께 2박3일간 그의 200회 종주 산행에 주말&이 따라 올랐습니다. 이번 그의 200번째 종주길은 취재기자에겐 생애 첫 지리산 종주이기도 합니다. ◆ 지리산 200회 종주 기록한 이광전 씨 - 오늘도 배낭을 꾸리는 영원한 지리산 청년
지리산 자락에서 이런 감탄사를 듣게 된다면 십중팔구 그가 주변에 있다는 뜻이다. '아리'는 '메아리'를 줄여 쓴 표현. 첫 지리산 종주 이래 일행을 찾을 때 늘상 사용해 온 그의 암구어다. 산악인 이광전(66) 씨. 대한산악연맹 부산시 자문위원이기도 한 그에게 며칠전 화려한 수식어 하나가 붙었다. '지리산을 200회 종주한 산꾼'. 국내 첫 기록임에 의심할 여지는 없다. 37년 세월동안 가없는 지리산 능선길을 밟은 그의 발자취가 켜켜이 쌓인 결과이기 때문이다. 고등학교와 대학 시절 산악부원으로 꽤 이름을 알렸던 그가 지리산 종주에 첫발을 디딘 것은 1971년 초여름이었다. 예비군 동원훈련을 간다며 둘러대고 친구와 둘이서 떠난 7일간의 지리산 종주가 시작이었다. 지루한 며칠의 산행을 마치고 칠흑의 텐트 밖에서 혼자 지켜본 지리산의 밤 풍경. 무수히 내리는 별빛, 어슴푸레 밀려오는 바람결, 나뭇잎 부딪치는 소리와 새들의 여린 울음…. 그렇게 또 다른 세상에 눈을 떴고 열병을 앓기 시작했다. 갈증을 풀듯 간간이 가던 종주는 1981년, 10여 년을 다닌 섬유회사를 그만두고 주말에 시간을 내기가 용이한 동아대학교 행정직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본격화됐다. 그가 지리산 종주를 감행하던 초창기에는 산행 장비나 여건이 턱없이 열악하고 부족한 시절이었다. 마땅한 대피소가 없어 군용텐트와 식량을 메고 능선을 타야 했고 한겨울에는 군화에 러셀과 아이젠을 묶어 눈밭을 걸었다. 마을 주민이 모는 소달구지를 얻어 타기도 하고 제대로 된 지도 한 장이 없어 산 속에서 나침반을 두드리며 길을 잡았다. 야간통금으로 경찰과 군부대의 허락을 받은 뒤 새벽 산행에 나서기도 했다.
지리산에서 그는 기이한 경험도 겪었다. 1999년 10월 천왕봉에 올랐을 때는 쌍무지개를 만났고 저녁 석양에 천왕봉이 덕산 쪽으로 옮겨진 것 같은 신기루도 체험했다. "지리산은 아무리 많이 가도 매순간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는 게 그가 말하는 지리산의 숨겨진 매력이다. 지리산에 뿌리를 내린 토박이보다 더 지리산을 잘 알기에 산을 향한 외경심은 남다르다. 이번 200회 종주 때 천왕봉 아래에서 미끄러져 왼쪽 팔에 굵은 상처를 남긴 그는 여태 자신이 산을 오른 게 아니라 산이 자신을 받아들였다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지난 3월 199차 종주 때는 눈길을 헤치고 치밭목을 거쳐 천왕봉 턱밑까지 올랐지만 눈밭이 여의치 않자 두말 없이 종주를 포기했다. "산이 어디가나, 다음에 오면 되지." 배낭 안에 늘 수동 필름카메라를 챙겨 다니는 그는 그간의 산행기록을 모아 얼마전 '지금도 지리산과 연애중'이란 책을 펴냈다. 200차 종주를 마치고 대원사 아래 식당에서 동료 산악인 100여 명이 모여 그의 출판기념회를 열어주기도 했다.
지난 7일 천왕봉을 오른 뒤 그와 함께 치밭목으로 내려오던 산길에서 문득 "산행은 가끔 뒤도 돌아봐야 한다"며 앞서 걷던 기자를 불러 세웠다. 그의 말대로 좀전에는 없던 거대한 운해더미가 산을 집어삼킬듯 빠르게 밀려오고 있었다. 뒤돌아 보지 않았다면 결코 알지 못할 비경이었다. ◆ 지리산 종주란 전통적인 지리산 종주는 화엄사 계곡을 통해 노고단~천왕봉~치밭목~대원사(49㎞)로 하산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주능선인 노고단~천왕봉(25.5㎞) 구간만 포함되면 지리산 종주로 인정되므로 등·하산로는 어느 루트를 선택하든 관계없다. 성삼재까지 도로가 나있어 성삼재를 출발, 천왕봉을 거쳐 중산리나 대원사로 내려 가는 길이 근래 가장 보편적인 종주 코스다. 노고단~천왕봉 주능선의 거리는 한때 50㎞ , 45㎞로 혼선되다 1990년대 후반 공원 직원들이 줄자로 실측한 결과 현재는 25.5㎞로 공인됐다. ◆ 첫날 - 성삼재~세석대피소(22.9㎞) 17시간만에 도착한 야영지그런데 잠 잘 곳이…
산행객들의 복장과 짊어진 장비를 보건대 태반이 종주에 나설 품새다. 지리산 종주가 언제부터 국민레포츠가 되었는지 놀랄 따름이다. 어깨를 무겁게 누르는 베낭을 메고 40여 분 빗속을 걸어 도착한 노고단대피소. 시끌벅적 딱 장날 시장통이다. 전날 미리 도착해 대피소에서 하룻밤을 묵은 이광전 씨와 '지리산 산길따라' 회원 10여 명과 합류했다. '지리산 산길따라'는 이 씨와 부산 출신의 산꾼들이 모여 만든 인터넷 산악동호회. 모임 명칭처럼 주로 지리산만 타는 마니아들이다. 부산 외에 전국에서 이 씨의 200차 지리산 종주를 축하하기 위해 아름다운 동행에 나섰다. 회원 가운데 두 명은 첫 종주 산행이다. 둘 다 서울에서 온 50대 주부들이다. 대충 아침을 때우고 취사장을 나오는데 등산객 한 명이 갑자기 쓰러져 응급처치를 받고 있다. 본격 종주길에 나서기 전 이 씨가 "벼락이 치면 반드시 휴대전화의 배터리를 빼 비닐로 감싸야 한다"고 주의를 줬다. 이래저래 걱정이 앞선다.
임걸령에서 수통에 식수를 가득 채웠다. 회원 중 한 명이 "능선길에 샘은 충분하니 물을 많이 담지 말라"고 충고한다. 가능한 무게를 줄이라는 의미다. 종주산행의 승패는 체력 못지않게 배낭 무게에 좌우된다는 게 산꾼들의 불문율이다. 오전 9시 30분, 삼도봉에 이르자 구름이 걷히면서 지리산의 거대한 산군이 웅자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산 너머 산, 첩첩산중은 이를 두고 나온 말 같다. 가야할 길도 눈에 들어온다. 막막하다. 화개재에 닿기 직전 나무계단이 끝도 없이 펼쳐졌다. 240m. 이 씨는 "예전에 발로 짚어 가며 세어 본 결과 모두 550개"라고 했다. 내려가는 길이라 천만다행. 곧이어 산마루에 너른 공터가 나온다. 화개재다. 경남의 소금과 해산물, 전북의 삼베와 산나물을 짊어지고 지리산을 올라 온 장사꾼들이 물물교환하던 옛 장터다. 산꼭대기에 장을 세워야 할 만큼 전라도와 경상도는 지리적으로 가깝고도 먼 사이. 화개재 말고 지리산 고개에는 이런 산상 시장이 몇 군데 더 있다. 장터목도 그 가운데 하나다. 오후 1시가 다 돼서야 점심을 먹기로 한 연하천대피소에 닿았다. 연하천 일원은 '살아서 천년, 죽어서 천년을 간다'는 주목 군락지. 특별보호구역으로 묶여 지금은 출입이 금지된다. 초반에 체력소모를 많이 해, 배가 등가죽에 달라붙었다. 요리사 출신의 회원이 모밀국수를 끓여 일행을 대접했다. 라면과 김밥으로 점심을 때우던 주위 산행객들이 부러운 시선으로 한마디씩 건넨다. "지리산에서 모밀국수를 먹는 등산객은 처음 봐요." 오후 4시30분, 또 다시 허기를 못 이겨 벽소령대피소 매점에서 간식거리를 구입했다. 낮은 기압 때문에 초코파이 봉지가 복어 배처럼 부풀어 올라 있다. 벽소령대피소에서 1㎞ 뻗은 조붓한 오솔길. 한 사람 겨우 다닐 만큼 좁아도 운치있고 평탄하다. 능선길 가운데 가장 걷기에 편하다. 이런 길만 이어지면 얼마나 좋을까. 평지가 끝나는 지점에서 일행에서 뒤처진 회원 5명을 만났다(정확히 표현하면 거북이 걸음의 기자를 기다려준 의리파들이다). 기자를 기다리면서 잠시 '술판'이 벌어진 모양이다. 기자의 출현으로 다시 활기를 띤 술자리. 국립공원 내에선 까다로운 제약이 많다. 샛길출입, 야간산행 , 흡연, 취사, 야영은 모두 과태료를 물린다. 하지만 '음주 산행'을 처벌한다는 이야기는 아직 못들어 본 것 같다. 취기가 조금 올랐지만 땀을 많이 쏟기 때문에 술이 이내 깼다. 어느덧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해. 세석대피소까지는 아직 두세 시간은 걸어야 하는데 '낮술'이 예상보다 길어졌다. 마음이 급해진다. 잔류 회원들과 함께 발걸음에 속도를 붙였다. 선비샘에서 세석대피소까지는 가장 지루하고 체력 소모가 많은 구간. 내내 조망이 없는 숲속의 바위길을 오르내려야 한다. 부지런히 걸었지만 산 속에 어둑한 밤이 찾아왔다. 보폭과 체력에 따라 일행 간에도 거리차가 벌어졌다. 랜턴 불빛만이 칠흑의 길을 밝히는 유일한 동반자다. 험한 돌무더기길을 1시간 올랐을 즈음, 갑자기 랜턴 불빛이 나가 버렸다. '어설픈 산꾼'이 배터리 용량을 미리 체크하지 않았다. 구름이 달빛마저 삼켜 버린 캄캄한 밤. 머리 속은 하얘졌다. 순간 머리 속을 스쳐간 것이 휴대전화의 조명 기능이다. 그렇게 한 시간 넘도록 임기응변으로 불을 밝혀 도착한 세석대피소. 시각은 어느덧 밤 10시. 산행을 시작한지 꼬박 16시간이 흘렀다. 대피소는 산행객들로 이미 포화상태. 침낭 속에 몸을 웅크린 산행객들이 도처에 널려 있다. 마른 배수구 안으로 들어가 엽기 노숙을 벌이는 이들도 있다. 무슨 재해지역의 난민을 연상케 한다. 기자와 줄곧 행동을 함께 한 지각생들과 밥을 짓고 라면을 끓여 먹은 뒤 대피소에서 멀찍이 떨어진 공터에서 비부악(노숙)을 했다. 감겨오는 눈꺼풀을 부릅뜨고 올려다 본 밤하늘. 검은 천상에 별들이 꼬마전구처럼 촘촘히 박혀 있다. 평생 가장 길고 고단한 하루가 끝났다. ◆ 둘째날 - 세석~치밭목(9.7㎞) 천왕봉까지 '천하제일경' 가도가도 끝없는 하산길
오전 8시50분. 촛대봉에 오르자 산마루를 따라 저멀리 우뚝 솟은 천왕봉울 중심으로 연하봉, 제석봉, 써레봉이 손에 잡힐 듯 줄지어 섰다. 장터목대피소까지는 완만한 능선. 특히 종주길 가운데 산세와 조망이 가장 좋아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지리산 8개 대피소 가운데 장터목대피소의 풍경도 제일 좋다. 사흘 일정으로 대원사에서 출발해 화엄사로 역종주를 하는 젊은 남녀 외국인들을 만났다. 한국인도 버거워 외면하는 전통 종주코스를 밟고 있는 것. 쇠고기협상의 부당함을 알리려 촛불문화제 사진첩을 목에 걸고 백리 능선을 타는 '반정부' 산행객도 시선을 끌었다. 가족을 따라 두번째 지리산 종주에 나선 어느 초등학생의 투혼도 놀랍고 대견스럽다. 장터목에서 천왕봉까지는 줄곧 오르막길. 해발 높이가 500m 가량 차이가 난다. 그래도 눈요기는 천하제일이다. 고사목들이 늘어선 제석봉. 1950년대 도벌꾼들이 불법 벌목을 감추기 위해 불을 질러 놓은 고사목들의 묘지다. 사연은 슬퍼도 지리산을 상징하는 처연한 풍경으로 자리 잡았다. 제석봉 이외의 지역에서 만나는 고사목은 수령을 다한 구상나무들이다. 크리스마스트리처럼 생긴 구상나무는 해발 1500~2500m 아고산지대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수종. 수명은 100년 안팎으로 알려져 있다. 굽이굽이 돌길을 지나 천왕봉의 관문인 통천문에 다달았다. 뒤를 돌아보니 능선을 넘지 못한 운해가 저수지에 갇힌 물처럼 산의 한쪽 면에만 채워져 있다. 드디어 세상의 꼭대기, 천왕봉. 한반도의 등줄기를 잇는 백두대간의 시발점이다. 정상 표석에 새겨진 '한국인의 기상 여기서 발원되다'는 원래 '경남인의 기상 여기서 발원되다'였다고 이 씨가 알려준다. 논란 끝에 첫 두 글자를 지워내고 거기다 '한국인'을 새겨 넣었다. 표석을 자세히 살펴보면 표면을 긁어 글자를 지운 흔적이 남아 있다. 지리산은 전남 구례, 전북 남원, 경남 산청, 하동 함양군 등 3도 5군 15개면 걸쳐진 둘레 320㎞ 800리에 이르는 거대한 산군이다. 이 씨는 이를 확 줄여 "삼오 십오"라고 표현한다. 이제 하산길. 천왕봉을 뒤로 하고 치밭목으로 길을 잡았다. 중봉 근처에 연분홍 철쭉 군락이 뒤늦게 꽃망울을 터트리고 있다. 중봉부터 치밭목 대피소까지는 꽤 험한 구간. 말이 하산길이지 파도 타듯 급한 오르막과 비탈이 숱하게 포진하고 있다. 가파른 철계단만 16개가 놓여 있다. 대피소에 닿을 쯤 다리는 후들거리고 온 몸이 축 늘어졌다. 이틀동안 씻질 못해 온 몸에서 땀냄새가 풀풀 배어 난다. 가져온 속옷도 갈아 입지 못했다. 늦은 밤 이 씨의 200차 종주를 축하하기 위해 동호회 회원들이 민어회를 싸들고 새재마을을 통해 대피소로 올라왔다. 산 속에서 맛보는 생선회. 직접 먹어 보기 전에는 설명이 어렵다. ◆ 셋째날 - 치밭목~유평 주차장(9.7㎞) 마음까지 시원한 계곡길 비구니 도량 대원사 구경 종주 마지막날. 치밭목대피소 앞으로 동전처럼 둥근 아침해가 솟아올랐다. 고개를 돌려 천왕봉 쪽을 올려다 보니 뿌연 운해가 덮여 있다. 천왕봉 일출을 보려면 3대가 덕을 쌓아야 한다는 말이 허언은 아닌 듯싶다. 전날밤 매서운 바람 탓인지 목이 칼칼했는데 인심 좋은 옆 산행팀이 수박을 쪼개 건네준다. 사소한 것에 감동하고 행복감을 느끼는 나 자신이 조금 낯설게 다가온다. 치밭목 아래로 촘촘히 흐르던 실계곡이 밑으로 향할수록 넓고 청량한 계곡수로 변한다. 마침내 지리산 종주의 끝자락인 대원사에 닿았다. 잠시 짜투리 시간을 활용해 둘러본 사찰 안. 대원사는 548년 신라 진흥왕 시절 연기조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고찰. 수덕사, 석남사와 더불어 대표적인 비구니 참선 도량이다. 대웅전 옆 승방 문틈 사이로 비구니 승려들의 일상이 얼핏 내비친다. 첫 지리산 종주에 동행한 주부 회원은 "지난 사흘이 꿈같다"고 종주 소감을 밝혔다. "사명감 같은 것을 가지고 산을 올랐는데 정말 해낼 줄은 몰랐어요". 문명을 등진 2박3일, 집으로 돌아와 사흘만에 텔레비전 뉴스를 틀었다. 쇠고기 재협상, 촛불 시위, 물가인상 등 어지러운 세상사만 흘러나온다. 때론 모르고 지내는 게 더 행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 실감했다. 이래서 산꾼들이 산타령을 하나 보다. ◆ 이것만은 제발! 국립공원 산행에는 제약이 많이 따른다. 적발시 과태료를 무는 경우는 샛길출입(비지정탐방로) 50만 원, 야간산행(일몰후 2시간~일출 전 2시간) 50만 원, 야영 10만 원, 취사 10만 원이다. 흡연은 대피소의 지정 장소에서만 허용되며 적발시 20만 원을 물린다. 2차, 3차 추가 적발 땐 과태료가 할증돼 각각 40만 원, 60만 원을 내야 한다. 국립공원간에 위반자의 신상 정보를 공유하기 때문에 다른 국립공원에서 재적발되면 할증 과태료가 적용된다. 이밖에 식물을 채취할 경우 30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진다. ◆ 비부악 (bivouac) 국립공원 내에서는 텐트를 이용한 야영은 금지된다. 취침은 대피소를 이용하거나 침낭을 사용한 비부악(노숙)을 해야 한다. 침낭은 오리털보다 보온과 복원력이 좋은 거위털이 주로 사용되며 겨울용(1.5kg)과 여름용(1kg)으로 구분된다. 혹한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 겨울용이 여름용보다 유용하다. 가격은 30만~80만 원 선. 습기 차단을 위해 침낭 아래에 반드시 비닐과 매트리스를 깔고 비가 올 것을 대비해 플라이를 치는 것이 좋다. ◆ 교통편 - 성삼재 가는 길 부산 서부시외버스터미널(051-322-8301~2)에서 구례행 버스 승차. 배차는 오전7시부터 오후 6시까지 매 1시간마다 있다. 3시간30분 소요. 구례까지 1만3200원, 화엄사는 1만3700원. 구례버스터미널에서 성삼재행 버스료는 3000원. 대원사→부산 가는 길 유평탐방안내센터 아래 주차장에서 진주행 시외버스 타면 된다(배차간격 1시간, 4300원), 진주에서 다시 부산행 시외버스 이용한다(2~3분 마다 1대, 6000원) 문의 055)972-9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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