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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으로 가는 길/산행.여행기 모음

화왕산 편지-관룡사에서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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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룡사 입구 언덕 위의 왼쪽 건물은 범종각. 오른쪽 계단 위의 석문]

 

◈화왕산 편지

-관룡사에 들며

 

00,

 

지난 4 중순, 봄의 걸음이 조금 빠르다는 생각이 정도로 때이른 더위가 다녀갈 즈음,

저는 경남 창녕 화왕산 자락의 관룡사로 발길을 향했습니다. 그것은 4 초순 전남 여수의

흥국사를 다녀온 후부터 머리 속을 온통 채우고 있던 반야용선이라는 이름이 주는 느낌을

조금이라도 느껴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반야용선(般若龍船) 진리를 깨달은 지혜 일컫는 般若 용의 , 용이 호위하는

배라는 의미의 龍船 합쳐진 이름입니다. 불교에서 반야용선은 차안(此岸:사바세계)에서

피안(彼岸) 극락정토로 건너갈 타고 가는 상상의 배를 말한다고 합니다.

금강경에서 피안으로 향할 타는 것을 뗏목으로 비유한 것과 같은 뜻으로 보면 되겠지요.

 

4 초순 전남 여수의 흥국사를 들렀을 , 붙들고 빌면 한가지 소원을 들어준다는 대웅

전의 문고리에 한참 눈길을 두고, 시절의 분위기에 편승하여 꽃과 눈부신 연초록의

봄빛에 정신을 놓고 있다 보니 아둔한 저는 정작 챙겨보아야 것을 놓치고 말았답니다.

 

 

부처님이 불자들을 이끌며 극락정토로 함께 가는 , 반야용선은 대웅전 절집의

큰법당 말한다고 하는데, 훗날에 듣고 보니 흥국사 대웅전이야말로 반야용선의 전형

이루는   곳으로 나라안에서도 이름난 곳이라지 뭡니까. 저가 찍어온 사진을 주의 깊게

 들여다보니 과연 대웅전 정문의 어간(御間:한복판) 양쪽에는 용두(龍頭) 자리잡고 있고,

대웅전 계단 소맷돌(계단 난간석)에도 용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대웅전 정문에

새겨진 용두가 반야용선의 船首(뱃머리) 되고, 법당은 선실(船室) 되는데, 이러한 이유

법당 뒤쪽에는 용미(龍尾) 새겨놓으며 船尾(선미) 의미한다고 합니다. 흥국사의 대웅

전은 이렇듯 완벽한 반야용선의 형태로 조영되었다고 하는군요.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지

나의 무지와 무관심에 놀라울 뿐이었습니다. 그러고는 보름 가까이 지난 이렇게 관룡

사로 걸음을 하게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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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흥국사 대웅전. 문 양 옆 위에 용두가 있다] 

 

그런데 하필이면 관룡사를 찾으셨나구요?

에두르지 않고 말해 그것은 관룡사 절집 500m 서쪽 위의 산자락에 있는 용선대(龍船

) 찾기 위해서 입니다. 화왕산의 남서쪽 산줄기 바위벼랑에 사바세계를 굽어보는

바위 부처님이 좌정하고 계신 곳이 있는데 그곳을 용선대라고 합니다. 자연이 이루어놓은

산세 자체를 반야용선으로 보는 것이데, 주위의 풍광과 불경에 나오는 상징적인 모습들을

연상하여 보면 참으로 절묘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며, 이곳에 부처님을 모신 옛사람들의

밝은 눈과 지극한 불심에 놀라울 따름입니다. 물론 그런 이유로 바위지대의 이름이 용선대

지어졌겠지요.

 

00,

하지만 용선대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으로 미룰까 합니다. 이곳은 다른 곳의 반야용선 이야

기와 함께 얘기 드리는 좋을 듯해서 말입니다. 그래서 우선은 녹록치 않은 역사를

니고 있는 관룡사 절집을 들어서며 느낀 이야기를 먼저 꺼내려 합니다.

 

마산-대구를 잇는 5 국도 상의 창녕 계성 삼거리에서 동쪽의 옥천방향으로 들어서면

화왕산 군립공원 주차장이 나옵니다. 일대는 송이버섯 산지로 이름이 높은 곳입니다.

그리고 이곳은 고려시대 미완의 혁명가 승려 신돈의 고향으로 알려져 있는데, 신돈의 어머

니가 인근에 있었던 옥천사의 종이었다고 합니다. 관룡사 밑까지도 찻길이 이어져

으나 가능하면 절집 주차장에서 내려 걷는 좋겠군요. 절집 입구치고는 다소 의외의 풍경

만날 있으니까요.

 

오른쪽 계곡을 끼고 있는 길을 따라 올라서면 터인 공간의 켠에 마치 수문장처럼

목을 지키고 있는 퉁방울눈과 주먹코를 장승 2기를 만나게 됩니다. 오르는 방향 왼쪽이

 할아버지, 오른쪽이 할머니 장승이라고 하는데, 표정이 마치 나무라는 혹은 시비

거는 , 뭔가 몹시 엄한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보통 장승은 절집의 경계를 표시하며

잡귀의 출입을 막고 풍수지리적으로 허한 곳의 기운을 불어넣는 등의 기능을 한다고 하는데,

이곳의 장승은 사찰의 경계표시 수문장과 함께 마을 사람들에 의해 그곳의 수호신이 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경상도의 사찰에서는 이런 예가 드물다고 하지요. 아무튼 저로서는

몸과 마음을 단정히 하라고 채근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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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룡사 임구의 석장승] 

 

댓잎이 살강거리는 숲을 지나 절집 아래의 너른 마당에 이르면 가파른 언덕 위로 전각들

이 드러납니다. 그런데 이곳의 풍경도 조금은 특이합니다. 언덕 오른쪽의 계단을 올라,

낮고 좁은 석문을 통과하여 절집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는데, 얼른 보기에도 머리나 허리를

 숙이지 않으면 안될 듯 좁은 문입니다. 그러고 보니 절집에 이르기까지 제법 너른 공간을

지나왔는데도 이곳에는 일주문-천왕문-금강문 등으로 이어지는 통상적인 가람 배치 구조

가 생략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작은 석문이 바로 차안과 피안의 세계의 경계를 이루

일주문의 역할은 한다고 볼 수도 있겠군요. 동쪽으로 둘러 절집으로 들어가는 길도

 있는데, 입구 역할을 하는 천왕문에는 화왕산 관룡사라는 편액이 걸려있으며 무슨 이유인

사천왕상은 보이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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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룡사 석문 위 천왕문에 이르는 길] 

 

절집을 들어서기 전에 주변 산세를 둘러보니 동쪽으로 회색의 거대한 바위봉우리들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는 모습이 장관입니다. 거대한 평원을 이루는 화왕산 정상부와 참 대

조적인 모습입니다. 산길은 이곳 절 입구에서 곧장 오르는 길과, 절 마당을 지나 요사채

쪽에서 용선대로 오르는 길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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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룡사 천왕문] 

 

00님,

관룡사에는 창건과 관련된 두 가지의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고 합니다. 그 하나는 신라

 진평왕 5년(서기583년)에 증법(證法)국사가 초창하였다는 설이고, 다른 하나는 신라에 불

교가 공인되기 전인 신라 흘해왕 40년(서기349년)에 약사전이 건립되었다는 설이 그것입

니다.

후자의 경우는 약사전 보수 때 발견된 상량문에 영화(永和) 5년이라는 연호가 나왔기 때

문인데, 이는 중국 동진 목제의 연호로 우리나라 가야 이품왕 4년, 신라 흘해왕 40년에

해당되는 시기가 된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하면 관룡사는 우리나라 역사의 고구려 소수림

2년 (서기372년) 불교전래보다 22년이 빠른 시기에 창건되었으며, 신라가 불교를 공

인한 법흥왕 14년(서기527년)을 무려 178년이나 훌쩍 뛰어넘게 되는 것입니다. 이름하여

가야불교 해상전래설의 또 하나의 줄기를 이루는 가야의 사찰이 된다는 것이지요. 금관

가야 김수로왕의 부인인 허황옥의 오빠 장유화상이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는 김해 신어산

자락의 은하사나 지리산 칠불암 등과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그러고 보니 약 20여 년 전,

김해 신어산  동림사를 중창하시던 화엄스님(입적)께서 우리나라 역사 엉터리야!라며

단호하게 말씀하시던 그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물론 관룡사의 창건과 관련된 正史는

전자를 따릅니다만, 이곳의 스님들은 은근히 가야시대부터 존재하였다는 사실을 더 알리고

싶은 마음인 듯합니다. 어찌 되었든 관룡사는 1500년 세월의 무게를 지니고 있는 고찰이

라는 데는 이견이 없겠지요.

 

삼국통일 뒤에는 원효대사가 천명의 중국 승려에게 화엄경을 설법하고 대도량을 이룩하였

다고 합니다. 관룡사 이름의 유래는 원효가 제자 송파와 함께 이곳에서 백일기도를 드리는

, 갑자기 오색 채운(彩雲)이 영롱한 하늘을 향해서 화왕산 마루의 월영삼지(月影三池)로

부터 아홉 마리의 용이 등천하는 것이 보이므로 절 이름을 관룡사(觀龍寺)라 하고, 산

이름을 구룡산이라 하였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옵니다.

 

사적기에 의하면 관룡사는 신라 경덕왕 7년에 중건되기도 하였으며, 조선 선조 25년 임진

왜란 때에 약사전을 제외한 모든 전각이 화재로 소실되어 광해군 9년(서기1617)에 중건되

, 숙종 30년(1704년)에는 대홍수로 전각이 유실되면서 승려 20여명이 희생되는 참화를

입었다고 합니다. 그 때 폐허로 편한 사찰을 숙종 38년(1712) 대웅전 등을 겨우 재건하여

 재난의 상흔을 아물게 하였고, 영조 25년(1749년)에 보수를 하여 오늘날 관룡사의 면모

를 지니는 기틀을 잡게 되었다고 합니다. 신라시대에는 신라 8대 사찰 중의 하나였고, 17

세기 이전까지만 해도 10여 개의 말사를 거느린 큰 절이었다고 합니다만, 지금의 가람

규모는 그리 크지 않으며 조계종 제 15교구 본사인 통도사의 말사라고 합니다.

관룡사에는 조선시대에 작성된 사적기와 건축물들의 상량문이 남아있어 자칫 사라졌을

뻔한 역사의 끈을 단단하게 엮어놓게 되었는데,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라 하겠습니다.

 

또 이곳 관룡산 산자락은 깊고 험준한 산세를 지닌 곳이다 보니 한국전쟁을 전후하여서는

 빨치산들의 수중에 들어가 일부 전각들이 파손을 당하였으며 종전 후 보수가 이루어졌다

고 합니다. 한없는 자비를 가르치고 구원의 배 역할을 하여야 하는 聖殿이 전쟁의 아지트

로 이용되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시대와 동서양을 막론하고

 도도하게 흐르는 역사가 외치는 것이 어찌 이리도 한결같을 수가 있는지요.

 

관룡사 동쪽의 등산로, 즉 부도 있는 곳에서 병풍바위 방향으로 잠시 올라가면 시원한

대숲이 우거진 곳에 축대가 있는 집터 흔적을 여러 곳 볼 수 있습니다. 들리는 얘기로는

 이곳이 바로 원래의 절 터였는데, 1704년의 대홍수 이후 현재의 위치로 옮겨서 지었다고

 하는군요. 그래서 그때는 한참 떨어져 있었을 약사전이 지금은 대웅전 마당 한쪽의 어정

쩡한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고 합니다.

 

00님,

이제 관룡사 절집 마당으로 들어갈 때가 되었군요. 글이 너무 길어졌지요?

절집의 문화재와 용선대, 그리고 산자락의 이야기는 다음 편지로 띄우려 합니다.

다음 소식 늦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늘 즐겁고 평화롭고 마음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두류/조용섭(08.04.30)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