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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으로 가는 길/산행.여행기 모음

하늘재 편지-미륵리 가는 길①

 


[미륵사지터 전경. 석불입상 등 유믈]


◈하늘재 편지-미륵리 가는 길

 

00,

이제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완연한 가을입니다. 올해 그 무더웠던 여름 잘 이겨내셨는지요? 때때로 사람들은 넘치거나 모자란다며 하늘을 보고 볼멘소리를 해대지만, 자연의 흐름은 이렇듯 반듯하고 어김없이 흘러 어느덧 가을걷이, 그 축복의 시간으로 우리를 인도하고 있습니다. 모쪼록 님께서도 알찬 수확이 있는 가을의 날들 맞이하시길 소망합니다.

 

저는 지난 9월 둘째 주 주말, 거의 두 달 만에 백두대간 구간답사를 다녀왔습니다. 토요일

아침, 경북 문경시 동로면의 작은차갓재를 출발하여 10시간 여의 짧지 않은 걸음 끝에 충주와 문경 사이에 있는 포암산을 넘어 하늘재까지의 산행을 잘 마쳤습니다.

 

참고로 저가 백두대간 구간종주 내려잇기를 시작한 지 벌써 햇수로 3년을 맞이합니다만, 이제 고작 17번째 구간을 지났으니 참으로 우보(牛步)산행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시간적으로 어떤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며, 또한 서두르지 않겠다는 게 저의 생각이니 님께서도 그리 이해해주셨으면 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00,

그렇게 힘겹게 짬을 낸 답사 도중, 다음 날 산행을 위하여 야영을 한 이 하늘고개라는 거창한 이름을 가진 곳에서 저는 다음 구간인 조령산-이화령까지의 산행을 접고 말았습니다. 시간이 늘어지고 교통이 불편해지는 것도 감수하며 저가 산행을 포기하게 된 이유, 궁금하지 않으신지요?

 

그것은 밤새, 아니 꿈속에서조차 끈질기게 비집고 들어오던 고개 서쪽의 미륵이라는 이름을 가진 몇몇 곳들 때문이었습니다.

 

저가 얼핏 알아보기로는 마을이름이 미륵리라고 지어졌음은 미륵대원과 미륵사지라는 큰 절집 공간이 있었다는 이유 때문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 미륵리의 이름을 역사로 남게 한 과정은 그리 간단치가 않았습니다. 발굴과정에서 출토된 기와조각 몇 점에 새겨져 있는 이름,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마치 외마디 탄식처럼 남아있는 짧은 기록, 이것들이 마치 짜 맞추듯 증거가 되어 미륵리의 절집과 하늘재가 역사의 공간으로 남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짧은 기록과 내팽개치진 듯한 유물을 수습하여 시간의 흐름과 잇고, 그 공간을 시간의 흐름 속의 자리잡게 하는 일이란 참으로 놀랍기도, 또 어떤 면에서는 감동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하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륵리에서 역사로 대접받는 것은 마치 들보와 기둥처럼 거대한 골격을 이룬 것뿐, 나머지 미륵리 時空間의 흐름과 존재는 여전히 미스터리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00,

미륵리 땅이 속해 있는 곳, 즉 충주의 옛 이름이 중원(中原)이라는 거 알고 계시는지요?

 

말의 어감에서도 잘 드러나듯, 이곳은 삼국시대 당시 남쪽의 신라가 북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점령하여 한강 수운을 위한 교두보로 삼아야 할 곳으로, 반대로 고구려로서는 백두대간을 넘어 북진하는 신라를 막거나, 혹은 영남의 땅을 넘겨다 보기 위해서는 미륵리를 거점으로 삼고 동쪽 고개인 하늘재를 반드시 차지하여야 하는, 우리 역사상 일찍부터 치열한 각축의 장이 되었던 곳이라고 합니다. 고구려 장수 온달은 빼앗긴 하늘재를 되찾기 위해 절치부심하였고, 특히 미륵사지에 진지를 마련하고 군사들을 교련하였다는 이야기는 몇 점의 유적과 함께 전해져 내려오기도 합니다.

[미륵대원터 옆, 하늘재 오름길 초입의 표시석]
 

하늘재는 아달라 이사금() 3(서기 156) 4월에 계립령 길을 열었다라는 삼국사기 신라본기에서 그 길의 유래가 언급될 정도로 유서 깊은 길입니다. 말하자면 동남쪽의 작은 나라 신라가 한강의 통로를 개척하기 위하여 개설한 첫 백두대간 관통 국도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하늘재 이야기를 하면서 뜬금없이 계립령은 왜 들먹이냐구요? 저도 사실은 같은 장소의 두 이름이 전혀 연상이 되지 않아 무척 답답해하고 있었습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마치 퍼즐을 꿰맞추듯 고문헌 기록과 발굴유물과의 역사적 線을 잇고, 또 이의 검증과 논리전개가 필요한데, 아무래도 이 부분에는 전문가의 이야기를 그대로 옮기는 게 좋을 듯 합니다.

 

[중원 미륵대원터] 



『하늘재는 고대시절에는 계립령(鷄立嶺)으로, 또는 마목현(麻木峴)
·마골점(麻骨岾) 등으로 불린 고개로, 삼국사기에 의하면, 일찍이 아달라왕 3(156)에 개설됐다. 계립령의 계립(鷄立)은 껍질을 벗긴 삼대를 일컫는 우리말 겨릅을 소리옮김한 것이다. 겨릅은 곧 겨릅대의 준말이다. 마목(麻木)과 마골(麻骨)은 이 겨릅, 곧 삼대를 뜻옮김한 한자말이다.()


하늘재 서쪽 아래에 있는 미륵사지는 나말여초인 10세기 초엽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는 석굴사원인 미륵대원터다.()

 

미륵대원은 1978년 충청북도에서 이곳 절터를 발굴했을 때 발견된 대원사(大院寺)라 쓴 명문기와와 고려사 최이전(崔怡傳)충주 대원사(忠州 大院寺)라 언급하고 있는 내용 등에 의하면 절 이름이 대원사였음을 알 수 있다. 또 발굴 당시에 미륵당(彌勒堂)이라 쓴 기와 명문이 발견되고, 미륵당이라 일컫던 석굴금당에 높이 10.6m의 거대한 미륵석불입상을 봉안하고 있었던 점과, 삼국유사 왕력 아달라왕조에 []립현([]立峴)은 지금의 미륵대원 동령(東嶺)이 이 고개이다라 언급한 대목에 의하면, 대원사는 일명 미륵대원이라고도 불린 것으로 보인다. 현재 미륵대원터 동쪽 고개를 하늘재, 서쪽의 고개를 지릅재라 일컫고 있는데, 신라시대에는 하나의 고개 이름으로 통칭해 계립현이라 불렀던 것으로 추측된다. 고려 초에 이곳 중간 지점의 분지에 미륵대원(대원사)이 조성되면서 이후 대원사 동쪽의 고개를 대원사고개라는 뜻으로 약칭하여 대원령, 서쪽 고개를 옛 이름 그대로 계립현, 또는 계립령으로 일컫게 되면서 후대에 두 고개 이름으로 분리되어 불리게 된 것으로 보인다.()


하늘재는 대원령이 훈과 음이 혼용되어 한원령한월령한월재하늘재로 전음되어 불려온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지리지에서는 대체로 대원령을 계립령으로도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나, 때로는 소리 나는 그대로 주관적으로 기록하여 19세기의 정혼(鄭混)은 진재집(進齋集) 한훤관방방략(寒喧關防方略)에 한훤령(寒喧嶺)으로 기록하기도 했다. 대원(大院)의 원()을 훈독하여 에운담 곧 로 읽으면 한울로 읽을 수도 있으므로 한울재하늘재로 전음된 것으로 볼 수도 있으나, 寒喧嶺·限院嶺등의 표기에 의하면, 하늘재는 전자와 같이 한원재의 전음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 같다.
[
출처: 월간 :김윤우 단국대 동양학연구소 전문위원]

 

조국 신라의 패망을 맞아 금강산으로 향하던 마의태자와 덕주공주는 절망적인 심정으로 하늘재를 넘어 미륵리로 내려섰겠지요. 이는 미륵리 미륵사는 마의태자가 세웠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며 그 아득한 옛이야기의 끈을 지금도 단단히 부여잡고 있는 모양입니다. 뿐만 아니라 고려시대 몽고침입 때는 충주산성을 무너뜨린 몽고군이 연이어 상주산성을 함락시킨 것도 하늘재 길을 통해서였고, 조선시대 임진년의 왜란에서도 이 길을 통하여 침략의 발길이 들이닥치며 파괴와 살육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한다고 합니다.

 

전략적 요충지에 자리잡은 절집의 운명을 짐작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차디찬 석조유물들만 남아있는 절터는 마치 그곳의 역사를 가두어 버리고 그 사실을 웅변하는 듯합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그렇기 때문에 이곳에 미륵불을 모신 사원이 조성된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전쟁, 죽음의 공포가 없는 복된 땅(樂土)의 세상, 즉 미륵불을 기다리며 용화세계를 꿈꾸는 그 간절한 기원을 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아득하고 포근함, 그리고 소통의 길이라는 이미지로도 하늘재라는 이름이 참 잘 어울린다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00님 생각도 그러하시지요? 하지만 이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고개의 먼 역사 속에는 이렇듯 우리 옛사람들의 험난했던 이야기와 가슴 아픈 사연들이 얼기설기 엮어져 있는 것입니다. 하늘재, 가히 恨의 고개라고도 할 만하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00,

하늘재에 대한 상념이 깊어지자, 다가오는 세상에서의 구원을 염원하며 조성했을 미륵리 미륵부처가 불현듯 보고 싶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바람은 밤새 저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제 저가 하늘재에서 걸음을 멈추고 미륵리로 향하게 된 이유를 이해하시겠지요?

-②편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