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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으로 가는 길/산행.여행기 모음

화왕산 편지-용선대에 올라

[관룡사 용선대 석조여래좌상]



화왕산에서 띄우는 편지② 용선대에 올라

00, 그 동안 잘 지내셨는지요

‘봄의 실종’이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들릴 정도로 요즈음은 봄과 여름의 경계를 구분 짓기가 쉽지 않습니다. 속절없이 지나가는 봄날이 안타깝거나 서러운 것은 아니지만 계절이라도 제
자리를 지켜 우리들 세상살이를 조금은 느릿한 걸음으로 이끌어 주었으면 하는 바람 간절 합니다.


어느덧 관룡사와 용선대의 이야기를 마무리 할 시간이 다가왔군요. 이번 편지는 관룡사 경내를 둘러보고 용선대에 오른 뒤, 관룡산 산줄기를 다녀오는 걸음걸음 접했던 풍경에 대해서 얘기 드리려 합니다.

[관룡사 천왕문]



관룡사 동쪽 출입구 역할을 하는 천왕문에는 ‘화왕산 관룡사’ 편액이 걸려있습니다. 현재
이곳에는 흔히 있어야 할 사천왕상이 비어 있는데, 대신 사천왕탱(그림)을 모신 감실형의 벽체가 남아있습니다. ‘관룡사 사적기’에 의하면 1713년 천왕문을 단청할 때 사천왕회상’을 봉안 하였다고 전해집니다만, 언젠가 소실되어 버렸고 이렇듯 그림()으로 모셔진 듯합니다. 천왕문은 정면 3,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1712년 대웅전과 함께 건립되었으나 1978년에 이르러 지금의 모습으로 다시 지어졌다고 합니다
.
 
절집 마당을 들어서자, 여름 햇살이 눈부시던 몇 해 전 어느 날, 이곳을 찾았을 때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한낮의 뜨거운 햇살에 터질 듯 부풀어 오른 절집 마당에는 적요함 만이 가득 내려앉아 있었는데, 마당 한 구석에서 피어난 분홍 상사화가 한줄기 그리움을 뿜어내며 모든 것이 정지된 듯한 그 적막의 공간을 물수제비 뜬 수면처럼 일렁거리게 하던 그 풍경 말입니다.


 


하지만 지금의 시절에 피어난 꽃들은 발랄하고 할미꽃마저도 윤기가 흐르는 듯합니다
또 사월초파일이 얼마 남지 않아서인지 절 마당은 많은 신도들로 붐비며, 답사를 나온

사람들도 여기저기 무리를 이루면서 절집 전체가 분주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
 

00,

관룡사에는 보물과 유형문화재 등 비교적 많은 문화유물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절집을 다
둘러보고 그 이야기들을 모두 들려드리기란 저로서는 여간 부담스러운 일이 아니군요. 그래서 관룡사 경내를 둘러보는 일은 보물 제 146호인 약사전과 그 안에 모셔져 있는 석조여래좌상(보물 제 519), 그리고 조선중후기 건축양식의 변화와 관련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하는 대웅전(보물 제 212)을 찾는 것으로 마무리 짓고, 용선대로
올라갈까 합니다. 물론 이 점 양해해주시겠지요?


관룡사 경내에 들어서면 정면에 원음각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대웅전 앞의 큰 마당이 다 드러나지 않으며, 답사의 동선(動線)은 직진 방향이나 오른쪽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예전에는 2층 누각으로 되어 있는 원음각의 아래층을 거쳐 대웅전 마당으로 올라
서게 되어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아래층의 통로를 막아 놓았습니다.


절 마당 입구 왼쪽에는 범종각이 있는데, 절집 아래에 들어설 때 높이 올려다 보이던 바로 그 건물 입니다. 범종과 법고가 모셔져 있는 범종각은 조성연도가 그리 오래되어 보이지는 않으나 비탈진 곳에 아래층을 받침으로 세워놓은 모습이 참 시원스럽습니다. 이곳을 지키고 있는 거대하면서도 맵시 있는 범종은 지금으로부터 약 10여 년 전인 1995년에 조성된 것이라고 합니다.



[관룡사 범종]


저는 원음각 앞에서 주저하지 않고 정면의 길을 걸어 약사전(보물 제 146)으로 향했습니 다.


약사전은 대웅전 남쪽에 위치한 작은 전각으로 보물 제519호인 고려시대 석조여래좌상이
모셔져 있습니다. '관룡사 사적기'에 의하면 이 건물은 신라 353(흘해왕 44)에 처음으로
지어졌다가, 조선초기인 1507(중종 2)에 다시 건립되었으며 그 후 수 차례 수리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이 기록은 약사전 보수 때 발견된 상량문을 기초로 한 것인데, 우리 역사가
正史로 인정하고 있는 불교전래(고구려 소수림왕 2, 서기 372) 시기보다 22년이나 앞선 시기에 관룡사의 약사전이 지어졌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앞의 편지에서도 말씀을 드렸다시피 이런 이유로 해서 이곳의 스님들은 관룡사가 남방불교가 전래된 '가야시대에 조성된 절집'으로 믿고 있는 것입니다.


약사전은 정면 1, 측면 1칸으로 된 아주 규모가 작은 불당(佛堂)으로, 지붕을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을 하고 있습니다. 옆면 지붕이 건물의 크기에 비해 거의 두 배의 길이로 뻗어 내리는 파격적인 비례를 보이고 있습니다만, 균형을 잘 이루고 있어 안정감이 느껴지는 특이한 모습의 건물입니다. 약사전은 작은 규모임에도 불구하고 짜임새가 훌륭한 조선 전기 건축양식의 특징을 잘 보존하고 있어 건축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 받고 있다 합니다.

[약사전과 삼층석탑]


[약사전 뒷 모습]



관룡사 약사전에 봉안된 석조여래좌상은 절의 서쪽 산자락에 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용선대(龍船臺) 석조여래좌상을 본떠 만든 불상으로, 비만한 얼굴에 비해 짧고 단정한 코 등, 고려시대 불상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또 불상이 취하고 있는 수인(手印)  항마촉지인의 변형된 모습으로 오른손은 왼발 위에, 왼손은 오른발 위에 놓은 독특한 형태를 보이고 있습니다. 왼손은 지금 비어있는데, 약사전에 모셔진 부처님인 점으로 보아 약기(藥器)가 놓여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약사전 석조여래좌상]


관룡사 약사전 앞에 있는 삼층석탑은 화강암을 재료로 만들어진 장방형의 탑으로, 바위를
바닥돌 삼아 2층 기단을 만들고, 그 위에 3층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입니다. 전반적으로

양식과 수법은 신라석탑의 모습을 따르고 있으나, 규모가 약 2m 높이로 줄어들고 조성 방법이 간략해지는 등 여러 모습을 볼 때, 탑의 조성시기는 고려시대 전반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이 탑은 현재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11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

약사전 앞에는 마침 老 보살님의 인도로 예닐곱 명의 어르신들이 삼층석탑 '탑돌이'를 하고
있습니다. 색색의 연등이 둘러쳐진 탑을 돌며 그 어르신들이 간절히 구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문득 잿빛 옷을 입으시고 무시로 절집에 드나드시는 저의 어머님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약사전의 동북쪽에 관룡사의 주법당인 대웅전(보물제212)이 있습니다. 대웅전의 오른쪽
(
동쪽) 뒤 산자락으로는 관룡산의 병풍바위가 마치 이 절집을 수호하는 듯 장엄한 모습으로
드리워져 있는데, 하늘로 솟아있는 암봉의 모습에서 과연 '창녕의 금강산'이라는 말이 그리

과장된 것이 아님을 느낄 수 있습니다

[관룡사 대웅전]


[관룡사 대웅전의 목조 석가삼존상]


관룡사 대웅전은 18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정면 3, 측면 3칸의 겹처마 다포계 팔작지붕 형태를 띠고 있는 건물인데, 지붕을 잇는 방식(결구방식)에 있어 그 후기의 건축물들과 비교되는 전환기 적인 시점에 조성된 것으로, 우리나라의 목조건축 연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합니다. 건물의 외관이 아직 산뜻한 느낌이 들 정도로 깨끗하여, 저로서는 미처 알아볼 수 없었습니다만, 법당 안에 있는 '양류관음도'를 비롯한 여러 그림들과 더불어 이 대웅전이 가지는 조선후기 불교의 문화사적인 가치가 결코 적지 않은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1965 8월 대웅전 해체보수 공사 때 발견된 상량문 (上樑文)에 의하면, 1401(태종 원년)에 창건되어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17(광해군 9)에 중창하였고, 1749(영조 25)에 다시 크게 수리를 하였다고 합니다.

대웅전에 모셔져 있는 목조삼존상은 중앙의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약사불과 아미타불을 모신 석가삼존상이라고 합니다. 불상 조성의 여러 특징들을 볼 때 17세기 중반의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대웅전 옆에는 높이 66, 길이 504, 95㎝의 대형 목조(木槽)가 놓여져 있어 눈길을 끌기도 합니다.

위의 내용들은 ‘전통사찰종합정보’(http://www.koreatemple.net)에 나오는 설명들을 줄이고 나름대로 풀어서 쓴 것들이니 참고하셨으면 합니다.


00,


이제 드디어 용선대로 오를 시간이 되었습니다.

관룡사에서 용선대 오르는 길은 대웅전 서쪽의 명부전 앞에서 서쪽으로 이어지는 언덕길로 나있습니다. 용선대는 관룡사에서 느린 걸음으로도 20분이면 닿을 수 있는 곳에 있는데, 지난 편지에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반야용선’에서 그 이름이 연유되었다고 합니다.

관룡사 서쪽의 화왕산 지능선 끝자락에 있는 거대한 바위지대인 용선대에는 ‘반야용선’의 선장 격이라 할 수 있는 부처님, 즉 ‘용선대 석조여래좌상’이 있습니다. 이 불상은 경주 석굴암의 본존불과 흡사한 양식을 갖추고 있다 합니다. 풍만한 얼굴모습과 선명한 이목구비, 미소를 띤 표정에서 자비로운 불심(佛心)이 느껴진다고 합니다만, 제게는 근엄한 표정으로
더 다가오는 듯하였습니다.






[용선대 석조여래좌상]

부처님이 이곳 용선대에 모셔진 것은 풍수학적으로 볼 때 관룡사의 좌청룡 역할을 하는 병풍바위의 지기(地氣)에 비해 우백호 역할을 할 만한 마땅한 산줄기나 봉우리가 없어 그 기상을 능가하는 부처님을 이곳에다 모셨다고 합니다.
 

용선대 부처님의 손 모양은(手印)은 역시 항마촉지인으로 무릎에 놓인 손은 두툼해 보이 지만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습니다. 양감이 줄어든 신체 등, 불상 조성의 특징으로 보아 통일신라
하대, 9세기경의 불상양식으로, 불상 높이 181, 대좌 높이가 117㎝ 이르는 대형불상으로 현재 보물 제295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이곳의 부처님은 마치 속세를 굽어보듯 용선대 바위 위에 앉아 계시는데, 바라보는 방향은 동쪽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저가 나침반으로 측정해보니 정확히 120도 방향, 즉 남으로 약간 치우친 동향을 하고 있습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부처님은 본래 남향을 하고 있었는데, 지금으로부터 약 4~50여 년 전에 경주 석굴암의 부처님처럼 해를 정면으로 맞이하도록 하기 위해 방향을 튼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때 부처님의 목에 상처를 입었고, 지금 보이는 시멘트 자국이 바로 그 상처를 때운 흔적이라고 합니다.

[용선대 석조여래좌상이 향하고 있는 방위는 남으로 약간 처진 동쪽인 120도 방향이다]

부처님께서 앉아계신 용선대의 거대한 바위 주변으로는 사방으로 아득한 벼랑을 이루어 용선대가 반야용선의 배라는 이미지와 참으로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느낌은 용선대에 머물고 있을 때보다 주능선으로 이어지는 산줄기 조금 위 전망 좋은 곳에서 바라보면 더 잘 느낄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 용선대를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으니 그곳에 머물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마치 부처님의 인도 하에 피안의 세계로 떠나려는 사람들처럼 설레는 가슴으로 분주히 오가는 그런 느낌이 전해지기도 합니다.

[용선대와 석조여래좌상. 반야용선의 이미지가 잘 느껴진다]

00,

문득 반야용선의 느낌이 잘 받아들여지는 용선대에서, 절집을 들어서며 만났던 범종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범종의 소리 역시 중생을 착한 길로 인도하며, 해탈의 길로 승화시켜 준다고 하지요. 해가 뜰 무렵이나 해질녘, 눈부시거나 붉은 햇살을 가득 받은 용선대 부처님을 바라보면서 종소리를 듣는 일, 그 평화롭고 가슴 벅찬 정경이 느껴지는가요?


용선대를 뒤로하고 주능선을 향하여 오는 길은 마사토가 많이 깔려 있습니다. 오름길 오른쪽으로는 위풍당당한 병풍바위가 점점 가까워 지고, 그 앞으로 마치 제비집 처럼 위태롭게 들어서 있는 작은 암자인 청룡암도 잘 보이기 시작합니다. 오름길 산자락 왼쪽의 소나무 숲으로는 아마도 송이밭인 듯 금줄이 쳐져 있습니다. 고개를 들면 그 뒤 먼 곳으로 마치 초원처럼 머리를 깎은 화왕산의 모습도 인상적으로 다가옵니다.

[관룡산 병풍바위]


[화왕산 정상부]

각시붓꽃과 양지꽃이 산자락 곳곳에 피어있고, 개별꽃과 노랑제비꽃 무리가 간간히 보입니다만, 야생화의 개체수가 그리 많지는 않은 듯합니다. 정상 가까이에는 선홍의 진달래가 아직도 그 고운 빛을 발하고 있는데, 비교적 고도가 낮은 곳에서는 잎과 꽃을 함께 피우는 철쭉의 연분홍 꽃이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했습니다. 피고지는 일이 참 숨가쁘게 이어지는 봄날의 정경입니다


오름길 마지막 나무계단을 힘겹게 올라 헬리포트로 되어있는 관룡산 정상에 서게 됩니다.
큰 산줄기의 중앙, 꼭지를 이루는 봉우리를 너무도 너르게 평탄화 시켜놓은 것을 보면 이유야 어찌 되었던 안타까운 마음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병풍바위가 있는 오른쪽 방향의 산길로 접어들면 진달래가 만발한 평탄한 길이 잠시 이어지다가, 산줄기는 이내 좁은 암릉길로 바뀝니다. 이제 병풍바위가 지척의 거리에 있고 이곳 바위지대의 잘록이(鞍部) 에서 오른쪽의 급사면 길로 내려서며 하산을 하게 됩니다.

청룡암은 병풍바위 일대의 거대한 바위지대가 끝나는 가파른 곳의 좁은 땅에 마치 제비집처럼 자리잡고 있는 작은 암자입니다. 요사채와 법당을 겸하고 있는 건물은 몹시 수더분한 모습입니다만, 마치 허공애 매달려 있는 듯 위태롭게 자리잡고 있는 산신각은 오히려 더 멋을 낸 날렵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법당 뒤에는 거대한 절벽을 파내어 불상을 모시고 있습니다만, 주위와 부자연스럽게 보이는 것으로 보아 최근에 들여놓은 것이 아닐까 추측을 해봅니다

[청룡암 산령각]

암자 입구에 있는 감로수로 물을 축이고 청룡암을 바라보면, 암자로 통하는 가파른 길 옆에 샛노랗게 피어있는 죽단화의 모습이 참 밝습니다. 가볍고 밝게 퍼지는 듯한 노랑의 색감이 이렇게도 도드라지고 무게가 느껴지기는 참 드문 일입니다. 그런데다가 복사꽃 한 그루도 진분홍의 꽃을 피워 암갈색 톤 산중 암자의 분위기를 화려하게 장엄하고 있습니다. 이곳에 있는 모든 것들은 버려진 기와조각 하나까지도 제각각 그 곳에 없어서는 안될 존재감이 느껴진다는 생각이 그때 불현듯 들기도 하였습니다.


소나무가 많아 무척 청량한 느낌을 주는 숲길을 지나면 드문드문 왼 편으로 집터와 대숲이 나타나는데, 관룡사의 오랜 역사를 품고 있을 현장일 것이라고 추측을 해봅니다. 길 한 켠에 부도가 보이면 이내 관룡사 입구에 다다르며 오늘의 걸음을 마무리 하게 됩니다

[관룡산 솔숲]

바스락거리는 댓잎 위로 햇살이 미끄러지더니 물결이 일 듯 일렁거리기 시작합니다. 늦은 오후, 지는 햇살을 받고 계실 용선대 부처님이 다시 보고 싶어집니다. 내려가는 발길이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그런 순간입니다. 절집 앞 풀섶에서 조용히 머리 숙이고 있던 광대수염 무리의 미색 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도 그때쯤 이었습니다.





[광대수염]


00, 이제 긴 편지를 마무리 지으려 합니다.

4
월 하순에 들렀던 이야기를 달이 바뀌고, 그것도 하순에 접어 들 무렵에야 겨우 이렇게 소식으로 전하게 되니 저의 게으름이 실로 큽니다. 하지만 님의 공감으로 인해 저가 갖게 되는 보람과 위로가 적지 않으니 게으르나마 수취인 불명의 편지쓰기를 멈추기란 힘들 듯합니다. 

언젠가 해 뜰 무렵이나 해질녘, 용선대에 올라가 계실 님을 떠올려 봅니다.

모쪼록 찬란한 5월의 나날들 맞이하시길 빌며, 다시 소식 전할 때까지 평안하게 잘 지내시길 빕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두류/용섭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