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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으로 가는 길/산행.여행기 모음

하늘재 편지-미륵리 가는 길②

 [미륵리 중원 미륵대원터]

 

◈하늘재 편지-미륵리 가는 길②

 

거대한 바위지대가 뒤를 두르고 있기 때문일까요? 네댓 명의 산꾼들이 둘러앉아 두런거리는 소리는 9월 중순으로 접어드는 초가을 밤 하늘재 고갯마루를 웅웅 울리며 어둠의 하늘에 부서집니다. 문득 그믐을 얼마 남겨놓지 않은 밤하늘의 별빛이 더욱 곱게 느껴집니다.

 

00,

저가 지금까지 가질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행운 중에, 산자락 노숙(露宿)으로도 행복해하는

이 있음을 잘 알고 계시지요? 이런저런 생각으로 마음이 고양되던 저는 결국 이 날 밤 세가지 이슬을 맞이하게 됩니다. 쉬이 이룰 수 없는 잠에 슬며시 끌어들인 진짜(참眞)라고 하는 이슬과 쌀쌀한 밤의 체온이 내려준 자연의 이슬, 그리고 취기와 더불어 이 아둔한 이에게 찾아온 나의 감성의 이슬이 그것들입니다.

 

꿈결에서의 기억이 너무도 생생한 아침을 맞이하였습니다. 잠에서 깨어나면 꿈의 잔상들이 흐릿해지는 여느 때와는 달리, 이날은 선명하게 머리에 남아있는 이름이 있었으니 바로 지난 번에 말씀 드렸던 고개 서쪽 아래의 미륵리라는 마을과 그곳에 터잡고 있는 옛사람들의 흔적들입니다. 먼 곳까지 달려와 도중에 백두대간 산행을 접는 일에 마음의 부담을 느끼지 않는 것은 아니었습니다만, 미륵리 절터와의 만남에 대한 기대감은 약간의 설렘마저 불어넣으며 저를 달뜨게 만들기도 합니다.

 

초가을 햇살은 마치 지난 여름의 눅눅한 기운을 모두 말려버리겠다는 듯 쨍쨍 내리쬐며, 고개 주변의 모든 공간을 눈부시게 만드는데, 치마처럼 드리워져 흰빛으로 빛나는 포암산 바위지대의 모습은 푸른 하늘과 어우러지며 참으로 아름다운 풍경으로 다가옵니다.

 

 [하늘재에서 바라본 포암산]

 

오전 열 시경, 미륵리로 내려가려던 저는 문득 고개 반대편의 문경 관음리 가는 길을 바라봅니다. 관음리 방향의 길은 숲 속의 오솔길로 이어지는 미륵리 길과는 대조적으로 하늘공간이 활짝 열려있으며, 포장이 잘 되어 있습니다. 차량 편으로 하늘재로 이동할 때 이용하는 바로 그 길입니다.

 

그런데 00,

하늘재 고갯마루를 중심으로 마주하고 있는 이 두 마을의 이름이 놀랍지 않으신가요?

불교에서 자나깨나 부르는 그 간절한 소망의 이름, 대자대비 관세음보살의 그 관음(觀音)과 다가오는 내세에서 중생을 구제해준다는 미륵보살의 미륵(彌勒)을 각각 마을 이름으로 삼다니 말입니다.

 

관세음보살은 자비와 사랑의 화신으로, 그 이름을 부르기만 해도 해탈에 이르게 해서 고난에 찬 현실을 극복하게 해주는 구원자이고, 미륵보살은 부처님보다 먼저 입멸하여 현재는 도솔천에서 천인들을 교화하며 수행을 계속하고 있는데, 567천만년이 지나면 사바세계에 내려와 화림원 용화수 아래에서 성도하여 3회의 설법으로 300억의 중생을 제도한다는 미래불(未來佛)을 말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이 곳 마을이름으로의 관음과 미륵을 헤아려보면, 이 하늘재라는 곳이 현세에서 관음보살의 가피를 입은 중생들이 미륵세상을 향해 가는 길목이거나 혹은 정점이라는 말이 되지 않습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하늘재라는 이름도 제법 그럴 듯해 보이기도 하지요? 고갯마루를 중심으로 마주하고 있는 두 마을이 이렇듯 예사롭지 않은 이름을 지니고 있는 것은 이 하늘재와 더불어 우리가 잘 모르는 어떤 이야기들을 품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미륵리 가는 길은 키 큰 나무 숲 사이로 나있습니다. 숲으로 난 길을 잠시만 내려가면 오른쪽으로는 포암산에서 발원한 계곡의 물소리가 제법 크게 들리며 마음을 상쾌하게 해주고,   울창한 숲 사이의 길을 느린 걸음으로 걸으니 마음은 한층 여유로워집니다. 가슴 가득 숲향을 들이키며 절로 흥에 겨워 가벼운 걸음으로 걷는데, 길 오른쪽에 축대를 쌓아놓은 것이 보입니다. 하늘재 길의 역사를 생각하면서 이 축대 바위 하나하나에 서려있을 수많은 옛이야기들을 떠올려봅니다. 말발굽, ,, 군화, 짚신, 봇짐, 우마차, 그리고 마의태자와 덕주공주... 두터운 이끼를 입고 있는 바위들은 제각각 할 말이 무척 많은 듯합니다.

 

 

 

 

길이 왼쪽으로 크게 굽어 도는 곳에 이르면 오른쪽 숲 속으로도 길이 하나 더 나있습니다. 역사·자연관찰로라는 팻말이 붙어 있는 이 곳으로는 떡갈나무와 신갈나무, 그리고 낙엽송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고, 물봉선과 고마리 등의 야생화들도 지천으로 피어 있습니다. 그 길을 잠시 둘러가면 제법 몸집을 불린 계곡 위로 아담한 다리가 놓여져 있는데, 다리를 건너면 다시 큰 길과 합류하게 되며, 그사이 공간은 훤히 트이며, 이름하여 미륵리 그 노천박물관 공간으로 접어들게 됩니다.

 

 

 

 

 

00,

아침부터 마치 산자락의 적막을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되겠다는 발심이라도 한 듯, 온 산자락을 흔들던 염불소리는 이곳에 이르자 더욱 크고 당당하게 들려옵니다. 쉼 없이 들려오던 그 소리에 지치고 무심해지기 시작하자, 문득 카랑카랑하면서 산자락의 소리에 묻혀 들려오던 지리산 문수암 도봉스님의 맑은 독경소리가 그리워집니다.

 

 

 

솟대가 있는 하늘재 입구를 지나자 마치 운동장 같은 너른 빈터에 커다란 바위들이 듬성듬성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공간이 보입니다. 안내판의 글을 보니 미륵대원터라고 소개되어 있습니다. 흔히 절집을 일컫는 ·이 아닌 대원(大院)이라는 이름이 조금 특별해 보입니다. 분명 절터를 먼저 떠올렸는데 말입니다.

 

 

 

고려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짐작되는 미륵대원은 하늘재라는 군사·교통 요충지의 들머리에 위치하다 보니, 군인 혹은 공무상 영남지방으로 넘나드는 사람들이 묵을 수 있는 역원 역할을 하였을 가능성이 많다고 합니다. 대원터 바로 옆, 남서쪽 산자락 아래에 미륵사지라는 절터가 별도로 조성되어 있으니 이곳의 驛院 기능은 더욱 신빙성 있어 보입니다. 여러 자료를 모아보면 미륵사와 대원사라는 이름들이 각각 나오는데, 학계에서는 절집과 院을 합하여 미륵대원이라는 거대한 사원을 이루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 절터에는 석불입상을 비롯한 고려시대 초기의 여러 유물들이 남아있어 그것으로 사찰의 창건시기를 짐작하기는 하나, 이 절의 창건과 관련된 기록은 문헌으로 전혀 남아있지 않아 구체적인 절의 연혁을 알기란 어려운 듯합니다. 다만 미륵사지의 유물발굴을 통해 발견된 명문와(銘文瓦) 중에 미륵당 대원사 등의 글씨가 확인되어 사찰의 이름을 추정할 수 있으며, 그 명문와 가운데에는 1192(고려 명종22)에 해당되는 연호가 새겨진 것이 있어, 적어도 그 무렵에 중건(重建) 또는 중수(重修)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高麗史(최이전)에도 충주 대원사에 대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대원사는 당시 손꼽는 규모의 사찰이었을 것으로 짐작을 한다는군요.

 

하지만 교통의 요충지에 자리잡고 있는 이 거대한 사원은 참으로 지난(至難)한 세월을 맞이하게 됩니다. 첫째 시련으로는 1254년의 몽고 침입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몽고가 고려를 침입하였을 때, 충주산성에 이어서 상주산성을 공격하였는데, 이때 하늘재를 지나던 그 무지막지한 몽고군에 의하여 이 절은 폐허에 이를 정도로 처참하게 파괴된 듯합니다. 발굴된 유물을 통해 볼 때, 고려 말~조선 초에 중창(重創)이 있었으며, 뒤이어 조선시대 초에 다시 대규모의 중수가 있었다고 합니다. 또 다른 시련 역시 전쟁으로 인한 피해로, 1592년 임진년에 북으로 밀어닥치던 왜군들에 의해 이 절은 또 다시 소실되는 운명을 맞이하게 되며, 그 후 18세기 무렵에 가서야 대규모의 중수(重修)가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하지만 대원사는 1936년에 발생한 대홍수 때에 금당터 동쪽에 산사태가 나면서 완전히 매몰되었고, 절은 폐허에 이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미륵대원터를 두르고 있는 울타리 모퉁이를 돌면 다소 의외의 풍경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맨 안쪽 산자락 방향으로 석불입상이 서있고, 석등과 탑이 도열하듯 배치되어 있는 미륵사지(사적 제 317) 절터 공간이 환하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눈부신 초가을 햇살이 내려앉아 있는 그곳을 바라보고 있으니 엷은 졸음마저 느껴지며, 정말 어디라도 드러누워 잠시 눈을 붙이고 싶은 평화로움을 느끼게 됩니다. 감당하기 힘든 시련의 역사를 지닌 폐허의 절터에서 평화로움을 느끼는 일, 空과 道에서 말하는 그 알듯 말듯한 가르침은 바로 이러한 곳에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자, 저는 그 터무니없는 생각의 끈을 황급히 자르며 저도 모르게 그냥 피식 웃고 말아버립니다.

 

미륵사의 창건설화로는 신라의 천년 사직이 고려에 넘어가자 금강산으로 향하던 마의태자와 덕주공주가 관련된 이야기가 가장 그럴듯하게 전해져 내려옵니다. 하늘재 너머 어딘가에서 하룻밤을 머물며, 잠을 자던 마의태자의 꿈에 관세음보살이 나타나, 이곳에서 서쪽 고개를 넘으면 절을 지을 만한 터가 있으니 그곳에 절을 짓고 북두칠성이 마주 보이는 영봉에 마애불을 조성하면 억조창생에 자비를 베풀 수 있으니 널리 덕을 베푸는 일을 잊지 말라고 이르고는 사라졌는데, 꿈을 깬 마의태자가 덕주공주와 상의하니 공주도 똑같은 꿈을 꾸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남매는 하늘재를 넘어와 마의태자는 미륵석불입상을, 덕주공주는 월악산 마애미륵불을 조성하였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미륵석불입상은 불상으로는 드물게 북쪽을 바라보게 되었으며, 남쪽을 바라보는 월악산 덕주 마애미륵불과 마주보게 된 것이라 합니다. 그러고 보면 이 글()의 머리부분에서 말씀 드린 관음리와 미륵리의 마을이름도 결국 이 설화에서 유래하지 않았을까 하고 나름대로 생각을 해봅니다.

 

비록 패망한 나라의 태자이긴 했지만 그때까지도 태자를 따르는 세력이 꽤 컸기 때문에 마의태자의 절 조성도 전혀 불가능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는 하나, 패망한 나라의 왕자가 그렇게 큰 절을 짓기란 어려웠을 것이라는 학계의 의견이 지배적이며, 위에서도 말씀 드렸다시피 유물들의 조성시기로 보아 이 절의 창건연대를 고려 초기로 보는데,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을 드리자면 고려왕조 창건에 큰 힘을 보탠 중원지방, 즉 충주의 호족세력에게 보답을 하기 위하여 고려왕조가 이 절을 지어주었을 것이라는 의견을 정설로 받아들이는 듯합니다.

(③편 계속)

 

[다음 ③편에서는 미륵사지 절터와 미륵석불입상을 비롯한 유물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인내력을 가지고 이 글을 읽는 00()에게 깊이 감사드립니다.]

 

두류/조용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