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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으로 가는 길/산행.여행기 모음

숲의 희망을 만나다. 양양 낙산사에서③

[양양 낙산사 홍련암 내려가는 산자락, 불에 그을린 나무와 풀섶. 나무들이 링거주머니를 차고 있다]


◈숲의
희망을 만나다. 양양 낙산사에서③

 

7.24() 흐리고 비

 

설악동을 나와 우리나라 불교의 3대 관음성지로 잘 알려진 양양 낙산사로 향했다. 관음성지란 불교에서 언제나 관음보살이 상주하는 성스러운 곳(觀音眞身住處)을 말하는데, 화엄경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인도의 보타낙가산(寶陀洛伽山)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우리나라 3대 관음성지란 남해 금산 보리암, 강화 낙가산 보문사, 그리고 양양 낙산사를 말한다. 낙산사는 이번 여행을 계획할 때 둘러볼 곳으로 가장 먼저 이름을 올려놓았다.

 

2005 4 5, 양양지방에서 발생한 큰 산불은 세찬 바람과 함께 낙산사를 덮쳐, 주 불전인 원통보전을 비롯한 건물 14동을 전소시키고 보물로 지정된 동종마저도 녹여버렸다. 자연의 재앙 앞에서 인간의 힘이 얼마나 보잘것없고 나약한 지를 느끼던 그때의 기억이 생생하다.


[2005년 산불로 폐허가 된 낙산사의 모습을 합성한 사진]

 

낙산비치호텔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절집으로 들어가자 가람의 허리쯤인 성보박물관 있는 곳으로 들어서게 된다. 박물관 앞에는 화재 당시의 처참하던 광경을 담은 생생한 보도사진들이 전시되어 있다.

 

의상대 앞 고개에 이르자 기와에 이름을 적는 곳이 있다. 부처님 모실 곳이 다시 잘 지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기와 한 장과 펜을 받아 들었다.

[의상대]

 

홍련암으로 가는 내리막길 양 옆, 바다로 내려서는 급경사 언덕과 왼쪽 산자락의 키 큰 나무들 대부분이 불에 그을린 채, 링거주머니를 차고 있다. 저 아래에 있었던 홍련암 요사채가 다 타버렸을 정도이니 이 산자락의 생명들이 맞이했을 그 위급한 상황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그러다가 풀섶을 찬찬히 들여다 보았다. 술패랭이꽃이 보이더니, 오락가락하는 비에 젖은 초록의 산자락이 눈에 들어왔다. 지독한 시련을 이겨내고 살아남은 나무들이,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난 풀섶의 어린 생명들이 참으로 고마웠다. 문득 희망이라는 말이 떠오르며 낭패스럽게도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불에 그을린 큰 나무들이 초록의 풀섶을 대견하다는 듯이 내려다보고 있다.

[낙산사 산자락의 나무와 풀섶]



[풀섶의 술패랭이꽃]

 
[홍련암 가는 길, 의상대 방향의 불에 그을린 나무들]

 

홍련암 옆 벼랑 여기저기로 복구공사가 한창이다. 갑자기 소나기를 만나, 홍련암 처마 밑의 좁은 공간으로 들어가 비를 피하자 그제서야 가족들을 잊어버리고 있음을 알았다. 지나가는 비를 피하고 있으니, 아내와 아이가 그곳에서 예불을 마치고 나온다. 홍련암은 삼국유사에 의상대사가 관음보살을 친견했다는 창건설화가 전해지는 곳으로, 동해에 面한 벼랑에 들어서 있다. 법당 아래 바다에는 관음굴이 있는데, 법당 안 마루에 있는 구멍을 통하여 굴과 바닷물이 어우러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홍련암]

 
[홍련암 앞 벼랑 위 복구공사]


 

길을 되돌아 나와 해수관음상 있는 곳으로 가다 보면 보타전(寶陀殿)이라는 큰 규모의 殿閣이 나온다. 이 곳은 산자락 바로 아래에 있으면서도 지난 화재 때에 전혀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한다. 공중사리탑에서 나온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셨다라는 안내 현수막을 무심하게 지나쳐, 홀로 해수관음상 있는 곳으로 올랐다. 최근에 심은 키가 낮은 나무와 아직도 그을음의 흔적이 남아있는 산자락을 보자, 주 법당인 원통보전을 태우고 혀를 날름거리는 듯한 모습으로 넘어왔을 불길이 연상된다.


[공중사리탑에서 나온 佛舍利를 모신 보타전]

 

해수관음상이 있는 예불공간으로 올랐다. 다행히 이곳으로는 불길이 번지지 않았나 보다, 관음상은 조성된 지 이제 약 30년 정도밖에는 되지 않지만, 낙산사를 대표하는 풍경을 지닌 곳이다. 입상의 높이는 16m, 너비는 6m에 이른다고 한다. 간간이 비가 내리는 날씨라 동해의 맑고 푸른 바다를 보기도 힘들었지만, 한심한 중생들의 삶을 제도하느라 지쳤는지 관음상의 모습도 그리 밝지 않은 듯한 느낌을 받다.

[낙산사 해수관음상]

[산불로 불타버린 숲과 해수관음상]

 

원통보전은 관음도량의 본 법당을 이루는 곳이라고 한다. 완전히 불에 타버린 모습을 차마 카메라에 담지를 못하였다. 법당 앞 마당, 오랜 세월 동안 절집을 지켜보고 있었을 거목들이 새카맣게 타버린 모습도 기괴스러울 정도이다. 원통보전은 지금까지 전란과 화재로 수 차례 새로 지어진 이력을 가지고 있는데, 가장 최근에 중건 된 때는 한국전쟁 후(1953) 이승만대통령에 의해서라고 한다.

 

[원통보전 앞 마당의 불에 탄 나무들]

보타전으로 다시 내려서자, 공중사리탑에서 나온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셔놓은 귀한 곳이니

가서 예불 하고 진신사리도 뵙고 오라는 아내의 분부가 있고 호기심도 들어 법당으로 들어

가 보았다. 지금으로부터 382년 전, 조선 숙종 대에 조성되어 홍련암 옆에 서있었던 공중사리탑 2006 4월 하순, 지난 해의 산불피해로 인한 보수를 목적으로 해체복원 작업을 하게 되었는데, 그때 사리탑에서 직경 0.6cm의 매끈하고 영롱한 유백색 사리가 나왔다고 한다. 학계에서는 신라시대부터 봉안된 佛舍利(불사리)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현재 보타전 내 중앙 오른쪽, 밀폐된 보호기구 안에 봉안된 사리는 돋보기로 볼 수 있도록 해놓았다.

 

보타전 너른 마당을 걸어 나오니 빗방울이 점점 굵어진다. 보타전 아래에 있는 연못을 바라

보며 잠시 생각에 들었다. 우리를 끊임없이 움직이게 하는 이러한 것들은 모두 어디에서 비롯되는 걸까? 폐허에 이른 가람 중창을 위하여 애쓰는 높은 스님들의 능력이 예사롭지가 않고, 세속의 흐름과 비슷한 양상을 띠며 일사불란하게 복구되어 가는 모습도 놀랍다.

[보타전 아래의 연못]

 

연못 한 켠, 그저 연못 속의 둔덕으로 보이던 곳에 관세음보살이 사자를 타고 어딘가로 향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여린 풀섶에서 만난 초록의 희망을 떠올리며 절집을 나선다.

 

두류/용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