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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산길따라/지리산♧[역사]

구례 피아골 연곡사④

by 지리산 마실 2007. 4. 30.

연곡사의 시굴 조사 -4

임 영 진
(전남대학교 인류학과 조교수)

황 호 균
(전남대학교 박물관 학예연구원)

Ⅰ. 조사 개요

연곡사의 시굴 조사는 종각을 건립하기 위한 굴토 작업 중 지하에 묻혀 있던 축대가 노출된 것이 계기가 되어 이루어진 것이다. 따라서 이번 조사는 일부가 드러난 축대의 규모와 구조 및 성격의 규명과 평탄면에 대한 시굴을 통해 건물지의 존재 여부를 파악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시굴 조사는 축대 일부 지역에 대해서만 전면 발굴을 실시하고, 건물지로 추정된 지역에 대해서는 시굴갱을 설치하여 건물지의 존재 여부와 중첩 상황만을 파악함으로써 앞으로 연곡사의 정비 복원과 본격적인 발굴 조사에 기초 자료가 될 수 있도록 하였다.

현지에서의 시굴 조사는 조사의 긴급성으로 말미암아 동절기에 진행될 수 밖에 없었으나 조우연 부군수님을 비롯한 군청 관계자와 연곡사 주지 고봉스님, 그리고 평도?남산 마을 주민들의 적극적인 협조 아래 큰 어려움 없이 끝낼 수 있었다. 조사원들과 함께 깊이 감사드린다.

조사 기간과 조사단 구성은 다음과 같다.

1)조사 기간
① 예 비 조 사: 1992년 12월 15일
② 시 굴 조 사: 1993년 1월 5일 ∼ 1월 19일
③ 자 료 정 리: 1993년 2월 1일 ∼ 3월 20일
④ 보고서 작성: 1993년 3월 21일 ∼ 4월 30일

2)조사단
자 문 위 원 : 최 협 ( 전남대학교 박물관장)
정영호 ( 한국교원대학교 박물관장·문화재위원)
조사 책임자 : 임영진 ( 전남대학교 인류학과 조교수)
조 사 위 원 : 이태호 ( 전남대학교 미술교육과 부교수)
성춘경 ( 전라남도 문화재 전문위원)

조 사 원 : 이영문 (전남대학교 박물관 학예연구사)
황호균(전남대학교 박물관 학예연구원)
이계표(광주직할시 문화재 전문위원)
최인선(전북대학교 고교인류학과 강사)
조사 보조원 : 이경화(홍익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정순옥(전남대학교 사학과 3년)
이승룡(전남대학교 인류학과 2년)

Ⅱ. 조사 내용

이번 시굴 조사는 우선 일부 노출된 삼층 석탑의 북동쪽에 위치한 축대와 북쪽의 평탄한 지역중 건물이 들어섰을 만한 세 지역을 선정하여 실시하였다. 조사 내용의 서술은 조사 과정과 유구 구조, 출토 유물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유구 구조는 시굴 조사인 관계로 건물지의 규모나 성격등을 명확히 밝히지 못한 아쉬움이 남으나 앞으로 정식 발굴 조사가 이루어지면 해명될 것으로 기대된다. 출토 유물에 있어서 도자기류나 기와류의 계량적 분석도 정식 발굴 조사가 이루어지면 자료를 보완해서 함께 발표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학술적 가치가 높은 유물에 대해서만 다루겠다.

1. 삼층 석탑 북동쪽 축대

1) 조사 과정과 유구 구조(그림3?사진3∼15)

이 축대는 삼층 석탑에서 북동쪽으로 20여m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이번 조사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 지역으로 종각터를 마련하기 위해 포크레인으로 경사면을 정리하다가 길이 15m 가량의 석렬이 노출되어 작업을 중단한 상태였다. 삼층 석탑 북쪽에서 동서 방향으로 길다란 담이 형성되어 있는데 종각 건립을 위해 이 담을 깎아내는 과정에서 담속에 묻혀 있는 석축렬이 노출됨에 따라 시굴 조사가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시굴조사에서는 공사 도중 드러난 석렬 주변에 길이 13m?너비 5m의 구획을 설정하여 종각 건립 작업으로 인하여 일부 노출된 석축의 전모를 드러내 보고자 하였다. 정리 결과 서로 다른 시기에 해당하는 3겹의 축대가 100cm∼150cm 두께로 덧붙여져서 축조되었음을 확인하였는데 포크레인 작업막?말미암아 두 번째와 세 번째의 석축 일부가 훼손되어 있었으나 가장 안쪽에 위치한 첫 번째의 석축은 대체로 잘 남아 있었다. 이에 따라 가장 안쪽에 보이는 석축의 서쪽으로 발굴 범위를 연장하여 그 끝부분을 찾도록 하였다.

이번에 실시한 시굴 조사로는 축대의 전모를 밝힐 수 없었지만 각 축대의 중첩 상황과 축대 사이 퇴적층의 층위적 해석을 통해 각 축대의 축조 상황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사진 9) 조사 결과 축대는 세차례의 축조상을 보여주고 있는데 각 축대는 모두 높이 2m∼2.5m 정도이며, 후대의 축대는 그 앞 시기의 축대에 덧붙여 축조되었는데 남쪽을 향하여 막돌을 거칠게 다듬어 허튼층 쌓기로 축조하였다. 맨 안쪽에 있는 1차 축대는 오른쪽으로는 동쪽 방향인 현재의 요사채 앞쪽까지 이어질 것으로 보이나 왼쪽으로는 더 이상 석렬이 연결되지 않는다.(사진 6) 2차 축대는 1차?3차 축대 사이에 위치하며 1차 축대보다 150cm 정도 앞으로 나와 있다.(사진 7) 3차 축대는 맨 앞쪽에 자리하며 2차 축대보다 100cm 정도 앞으로 돌출되었다.(사진 8) 이들 두 번째와 세 번째 축대 역시 첫 번째 축대와 마찬가지로 동쪽인 요사채 쪽으로 이어져 나갈 것으로 판단되는데 이번 시굴 조사에서는 전모를 밝힐 수 없었다. 그리고 서쪽으로는 일부 파괴가 되었지만 1차 축대 서쪽 끝부분의 바깥쪽까지 이어질 가능성은 없다고 판단되는데 그 이유는 1차 축대 서쪽 끝부분 외곽을 덮고 있는 퇴적토 내부에 전혀 그 흔적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 세 축대의 중첩과정은 퇴적토의 층위적인 현상을 통해 판洑?수 있고 모두 화재로 인한 기존 건물의 폐기와 후대의 신축 과정을 거쳤다고 보여진다. 즉 1차 축대와 2차 축대 사이에 와편과 소토층이 퇴적되어 있고 2차 축대는 이와편과 소토층 밖으로 축조되어 있기 때문에 1차 축대와 관련된 건물이 불에 타 무너지면서 1차 축대를 완전히 덮은 다음에 2차 축대가 축조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2차 축대와 3차 축대에 걸쳐 또 다른 소토층이 존재하고 있는 사실을 통해 2차 축대와 관련된 건물의 소실과 3차 축대는 두 번재 화재 이후에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2) 출토 유물

이 지역에서 조사된 유물들로는 해무리굽 청자 완?백자 잔?연화문 숫막새?서조문 암막새?「???寺 ○???」銘 암키와?「???寺 ○???」명 암키와?치미편?연화문 전?착고편?방추차를 들 수 있다.

도자기들의 출토상을 살펴보면 대체로 1차 소토층 아래에서는 청자와 분청사기가많이 보인다. 2차 소토층 아래는 청자?분청사기?백자가 뒤섞여 있고 2차 소토층 위에는 백자가 대부분이다. 이는 1?2차 소토층이 2?3차 축대의 조성과 직접적인 관련을 가지고 있는 사실을 반영해 주는 중요한 차이점이다. 청자는 해무리굽의 순청자와 문양이 음각된 것들이며 분청사기는 귀얄기법이 대부분이나 인화기법도 간혹 보인다. 백자는 조선 후기의 것들이 많고 질그릇 조각들도 함께 나오는데 고려와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것들이다. 기와의 출토상을 보면 1차 축대 맨 바닥에서 얇은 기와, 즉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지는 기와들이 몇 편 보이고 그 위로는 고려시대에 만든 것들이 대부분이다. 이것은 1차 소토층 위쪽에서 고려시대 기와가 많이 보이는 점과 같다. 2차 축대 외부는 2차 소토층 윗쪽과 마찬가지로 조선 후기의 기와들이 주류를 이룬다. 통일 신라시대 기와는 무문이며 고려시대 기와는 수지문과 무문이고 격자문도 간혼 시문되어 있다. 조선시대 기와는 주로 복합문이다. 착고는 1차 축대 맨 바닥층에서 몇 점 조사되었다. 이 착고는 "A"건물지 하층에서 조사된 것과 같은 유형이다.

(1) 1차 축대와 2차 축대 사이에서 출토된 유물

① 연화문 숫막새 (그림 4-①?사진 16)
1차 축대와 2차 축대 사이에서 출토되었다. 출토 당시의 상황은 1차 축대 상단부에서부터 200cm 정도 아래 위치에서 면이 축대를 향한 상태로 뒤집혀 있었다. 수키와와의 연결 부분 일부가 파손되었으나 막새는 완전하다. 크기는 지름 16cm?두께 1.8cm 이다.

연자방?화엽?주연으로 이루어졌다. 연자방에는 지름 2mm의 연자 5개가 마름모꼴 형태의 단 위의 네 방향과 중앙에 돌출되어 있다. 지금 4.5cm의 연자방 외곽에 연자 36개가 원형으로 촘촘하게 둘러져 있다. 화엽은 부조가 심한 편인데 가운데가 돌출된 4개 지름 0.7cm의 주문 45개가 지름 13.5cm의 원형을 그리고 있다.

막새와 수키와 접합 방법은 현재 상태로 보아 덧대기 붙임이며 접합 부분의 각도는 87°이고 수키와 배면에는 가는 포흔이 나 있다. 기와 분할은 바깥쪽에서 직각으로 2.3정도를 안쪽에서 비스듬하게 자른 흔적이 보인다. 수키와는 그 키기로 보아 2등분한 것으로 판단된다. 점토 바탕에 굵은 모래가 섞인 거친 태토로 회청색이며 경질이다. 두툼한 연화문 형태로 보아 대체로 고려시대 이른 시기에 제작된 막새로 여겨진다.

② 연화문 숫막새 A편 (그림 4-②?사진 17)
1차 축대 하단 보축 석렬 아래서 막새 면이 하늘로 향한 채 출토되었다. 막새 주연 부분이 파손되었으나 대체로 전반적인 모습은 알 수 있다. 현재 남아 있는 크기는 지름이 14cm이나 이를 복원하면 16cm이고 두께는 2.4cm이다.

이 막새는 연자방?화엽?주연으로 이루어졌다. 연자방은 3mm 정도로 돋은 단을 이루며 지름 6mm의 연자 19개가 두 줄의 원으로 돌출되어 있다. 지름 4.8cm의 연자방 외곽에 너비 2mm의 경계선이 있다. 화엽에는 16개의 연꽃잎을 가느다랗게 돋을 새김하였고 주연은 두줄의 계선 사이에 지름 4mm의 주문을 두었다.

막새와 수키와의 접합은 덧붙인 흔적이 남아 덧대기 붙임임을 알 수 있었다. 막새 배면은 빗자루로 쓴 흔적이 있다. 태토는 점토 바탕에 굵은 모래가 섞인 거친 상태로 회청색을 띠며 단단하다. 가는 연화문 형태로 보아 대체로 고려시대에 제작된 막새로 여겨진다.

③ 연화문 숫막새 B편(그림 4-③?사진 18)
막새 면이 반파된 것이다. 지금 남아 있는 크기로 미루어 직경 16cm 정도로 추정되며 두께는 2.4cm이다. 연화문 숫막새 A편과 같은 지점에서 출토된 것으로 남아 있는 연꽃잎이나 연자로 보아 동일한 막새틀에서 제작된 것으로 여겨지지만 회색을 띠며 A편보다 약간 무르다.

④ 서조문 암막새 편(그림 4-④?사진 19)
1차 축대와 2차 축대 사缺?퇴적층에서 막새 면이 축대쪽으로 향한 채 뒤집혀진 상태로 출토되었다. 막새 좌측면 일부가 파손되었으나 중심부까지 남아 있어 복원이 가능하다. 현재 남아 있는 길이는 25cm 이나 복원해 보면 34cm 이고 너비는 9cm이며 두께는 3cm이다.

이 암막새는 도드라진 정도가 두드러지며 꽃문양이 중심과 좌우 끝에 놓였고 그 사이에 서조가 배치된 구조를 보여준다. 다리와 머리 일부가 파손된 서조는 날개를 들고서 나는 듯한 자세이다. 중앙과 가장자리에 돋을 새김된 문양은 연화문의 변형으로 보이지만 귀면과 비슷한 분위기를 풍긴다. 특히 막새 바닥면에 꽃문양의 방향이 서로 엇갈려 있다.

막새와 암키와의 접합 방법은 현재 상태로 보아 덧대기 붙임이며 접합 부분의 각도는 90°이다. 암키와 앞 뒷면에 빗자루로 쓴 흔적이 남아 있고 암키와는 그 크기로 보아 4등분한 것이다. 점토 바탕에 굵은 모래가 섞인 거친 태도로 황갈색이며 연질이다. 두툼한 연화문 형태로 보아 적어도 고려시대 초기에 제작된 막새로 여겨진다.

⑤ 연화문 전 편(그림 4-⑤?사진 20)
1차 축대와 2차 축대 사이에서 수습된 것이다. 한쪽 모서리 부분으로 1/4정도가 남아 있다. 크기는 가로 20cm?세로 15cm?두께 4cm이나 복원해 보면 가로 30cm?세로 30cm?높이 4cm이다.
전면 중앙에는 지름 8cm 정도 크기의 연화문을 선으로 새기고 있고 그 밖의 곳은 면을 다듬었다. 모서??3cm 정도로 직각이나 그 아래 1cm는 45°정도 비스듬히 깎았고 배면은 다듬지 않고 거친 상태로 두었다.

복원 형태는 정방형으로 법당 바닥에 깔던 전으로 생각된다. 제작 연대는 연화문의 모습으로 보아 고려 시대로 추정된다.

⑥ 착고 편(그림 4-⑥?사진 21)
기와마루를 설치할 때 쓰이는 착고기와로 1차 축대 하단에서 조사되었다. 한쪽 모서리가 깨졌으나 복원이 가능하다. 거창 임불리 천덕사지에서 출토된 것과 모양이 비슷하다. 이는 요즘처럼 수키와를 깨뜨려서 착고막이로 사용하지 않고 별도로 착고와 부고를 제작하여 사용하였음을 보여준다. 이 착고는 "A"건물지 하층에서 조사된 착고와 모습이 같다. 크기는 복원하여 보면 길이 28cm?너비 7cm?두께 2cm정도이다.

⑦ 방추차(그림 5-①?사진 22)
1차 축대와 2차 축대 사이에서 출토되었다. 원반형으로 가장자리 한쪽 부분만 조금 마멸되었고 가운데 구멍 주변은 닳지 않고 각을 이룬다. 고운 점토 바탕에 가는 모래가 섞인 태토에 황갈색조를 띤 연질이다. 크기는 지름 5.5cm 이고 두께 1cm 이며 구멍 지름은 1.2cm 이다.

(2) 2차 축대와 3차 축대 사이에서 출토된 유물

① 백자 잔(그림 5-②?사진 23)
2차 축대와 3차 축대 사이에서 출토된 것으로 생김새가 단아한 백자 찻잔이다. 구연부 일부만 조금 깨진 비교적 완전한 모습을 갖추었다. 잔의 모습은 굽에서 동체로 풍만하게 퍼져 오르다가 동체부와 구연부 사이쯤에서 안으로 약간 오무라드는 듯 곧추 선 모습이다. 밑바닥은 편평하게 받침 흔적이 남아 있지 않다. 크기는 바닥 지름 4cm?높이 4.3cm 이다. 유색은 담갈색이며 빙렬이 심하다. 기벽은 두터운 편이고 유층이 얇아 군데군데 유약이 벗겨졌다. 조선 시대 후기인 17세기∼18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3) 3차 축대 밖에서 출토된 유물

① 청자 완 편(그림 5-③?사진 24)
3차 축대 부근에서 조사된 것으로 넓은 굽을 가진 일명 해무리굽 청자이다. 굽 상태는 완전하나 몸체 일부만 남았다. 내화토 받침 흔적이 세 곳에서 보이고 굽 바닥이 안쪽으로 들린 모습이다. 안쪽 바닥에 지름 3cm의 원각이 보인다. 크기는 굽 지름이 5cm이고 남은 높이는 4.5cm이며 굽 너비는 1.1cm 이다. 유색은 녹갈색이며 빙렬이 심하다. 기벽은 두터운 편이고 유층은 얇다. 굽 상태로 보아 11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4) 지표채집 유물
① 「???寺○???」명 암키와 편(그림 5-④사진 25)
삼층석탑 북동쪽에 위치한 축대 부근의 지표에서 수습된 것으로 「 사」라는 명문이 새겨진 암키와이다. 현재 남아 있는 크기는 길이 13cm, 너비 7cm, 두께 2cm이다. 점토 바탕의 가는 모래가 섞인 고운 태토에 황갈색을 띤 연질이다. 기와는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5cm 크기의 시명구를 겹쳐 찍은 자국이 있다. 「사(寺)」자 아래는 명문 위 아래를 가르는 경계선이 있고 그 아래에 다시 명문의 처음으로 보이는 초두변 정도만 남아 있어 불충분 하지만 연곡瑛?연자로 유추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②「???사 ○???」명 암키와 편(그림 5-⑤?사진 26)
삼층석탑 북동쪽에 위치한 축대 부근의 지표에서 수습된 것으로 글자체로 미루어 위의 명문 암키와와 동일한 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여겨진다. 현재 남아 있는 크기는 길이 7cm, 너비 8cm, 두께 2cm 이다. 암키와의 면은 위의 것보다 오히려 작지만 초두변과 그 아래의 글자가 더 남아 있어 「연( )」자에 더욱 가까워진다. 따라서 위에 쓰인 「사」자를 종합해 보면 「연곡사( 谷寺)」라는 사명을 적은 명문 암키와인 셈이다. 정식 발굴이 이루어지면 보다 확실한 명문 기와가 발견될 것으로 기대된다.

③ 치미 편(그림 5-⑥?사진 27)
종각을 짓기 위해 기초 공사를 하던 도중 수습된 것이다. 곡선의 문양 일부와 배면에 가는 포흔만 남은 상태이다. 크기는 가로 17cm?세로 13cm?두께 4cm 정도 남아 있다. 점토에 가는 모래가 섞인 태토에 회청색을 띠며 단단하다.

2."A"건물지

(1) 조사 과정과 유구 구조(그림6?사진28∼36)

이 지역은 삼층 석탑의 북동쪽에 자리잡은 축대의 윗면과 연결되는 비교적 넓은 평지이다. 현재는 간이 시설을 마련하여 임시로 종을 매달고 타종한다. 시굴 조사에서는 임시 종각의 서편 평지에 길이17m?너비 150m의 규모로 시굴갱을 설치하여 파내려갔으며 나중에 이 시굴갱의 북쪽끝에서 동서방향으로 길이 9m?너비 150cm 규모의 교차 시굴갱을 설치하였다. 남북 방향의 시굴갱에서는 지표에서 약 100cm 정도는 성토층으로 교란이 심하며 그 아래는 불탄층을 이루고 있다. 시굴갱의 남쪽과 북쪽에서 석렬이 발견되어 석렬 주변을 중심으로 조사하였다.

남쪽 석렬은 석축면을 남쪽으로 두고 3단으로 축조되어 있었는데 석축 앞쪽을 하강하여 보니 지표 아래로 150cm 깊이에 30cm∼50cm 크기의 잡석들이 깔려 있었다. 이 잡석면 위로 3cm 두께의 갈색사질점토가 덮히고 그 위로 불탄층이 10cm∼20cm 두께로 계속된다.(사진 30) 이러한 불탄층과 그 아래 부석면의 범위는 삼층 석탑 북동쪽의 축대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 중 잡석층은 남쪽 3단 축대 중 1차 축대 윗면과 이어지는 동일시기의 건물 관련 시설물로 판단되며, 그 위로 소토층은 1차 축대와 2차 축대 사이에 걸쳐 있는 소토층과 관련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불탄층과 그 아래에 깔린 잡석들은 아마도 "A"건물지 주변의 평지즉 트렌치 북쪽에 보이는 석축의 남족으로 넓게 분포될 것이며 불탄층 아래에 보이는 부석은 지반의 다짐과 아울러 마당의 배수를 용이하게 하기 위한 시설로 보인다.

남북방향 시굴갱의 북쪽에서도 석축이 발견됨에 따라 석축렬 방향으로 시굴갱을 넣었는데 서남쪽으로 5°정도 비스듬히 쌓여진 석축열이 나타났다.(사진 31?32) 석렬앞을 하강하여 보니 남족 석축 앞 바닥의 깔린 돌과 비슷한 높이에서 배수시설로 보이는 석렬이 서로 면을 보고 있다.(사진 34) 그 동쪽에 석축을 남북방향으로 가로지르는 90cm 너비의 석렬이 있는데 남쪽으로 어느 정도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석축과의 관계는 석축 밑 배수로 위에 갈색 점토층이 20cm 가량 퇴적된 상태에서 축조되었으므로 석축과 배수구가 동시기라면 이것은 그 후대에 축조된 것이다. 이 석렬의 동쪽에도 동서 방향의 석렬들이 계속 이어지는데 이 석축은 막돌 허튼층으로 4∼5단 정도 축조하였고 그 위에 1단의 판석들이 깔려 있어 서쪽의 석렬들과 관련된 유구로 보인다. 이 석축의 바닥에도 서로 면을 마주보는 석렬들이 보인다. 이 지역의 조사에서 특기할 것은 2개의 모래층을 발견한 것이다. 하나는 지표에서 50cm 지점이고 다른 하나는 70cm 지점이다. 이 모래층의 10cm 아래에는 불탄층이 있고 지표에서 130cm 지점 즉 배수구로 보이는 석렬 사이에 기와편들이 많이 쌓여 있다.(사진 35)

이상의 시굴 조사 내용을 종합해 보면, 남북시굴갱 남쪽의 3단 석축과 동서시굴갱의 석축 사이에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간격은 남북 약 9m 정도이다. 그러나 동서 방향의 폭은 확인할 수 없었는데 동서시굴갱의 석축렬이 9m 정도 진행하고 있어서 최소한 9m 이상에 해당될 것이며 평탄면의 규모로 미루어 15m 이상일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동서 15m 이상?남북 9m 규모의 대지에 건물이 있었을 것이며 건물 북쪽에는 경사면을 따라 석축과 배수로가 축조되었다고 판단된다.

2) 출토유물

이 지역에서 조사된 유물들로는 청자 잔?백자 접시?일휘문 숫막새?서조문 암막새?암막새?착고를 들 수 있다. 도자기들의 출토상은 지표에서는 백자가 대부분이며 50cm 아래로 내려가면 청자와 분청사기도 간혹 나오고 지표에서 100cm 이하에는 청자가 많다. 청자는 대부분 순청자와 문양이 음각된 것들이며 분청사기는 귀얄과 인화기법을 쓴 것들이다. 백자는 조선 후기의 것들이고 문양은 없다. 질그릇 조각들도 보이는데 고려와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것들이다. 기와의 출토상은 고려시대에 만든 것이 대부분이나 100cm 아래에서는 간혹 두께가 얇은 통일신라 기와도 보인다. 문양은 통일신라시대의 것은 무문이며 고려시대 기와는 대부분이 수지문과 무문이나 격자문도 간혹 시문되었다. 조선시대 기와는 주로 창살문과 복합문이 많다. 지표 100m 이하에서는 착고가 몇 점 조사되었다. 이는 삼층 석탑 북동쪽 축대 조사에서 출토된 것과 동일한 것으로 "A"건물지 하층과 1차 축대의 관련을 짐작케 한다.

(1) 동서 시굴갱에서 출토된 유물

① 청자 잔(그림 7-①?사진 37)
"A"건물지 동서 트렌치 석축면의 남쪽 하강 작업 중 배수시설로 보이는 석렬 모서리쪽에서 출토되었다. 여러편으로 깨진 상태이나 대체로 원형에 가깝게 복원이 되었고, 크기는 높이 5cm?입지름 7.6cm?밑지름 3.4cm 이다.

전체적으로 보통의 잔보다 몸체 아래 부분이 좁은 모습이다. 입지름에 비해 밑지름이 좁은 편으로 구연부는 곧추 선 모습이나 약간 안으로 모아졌다. 구연부 바깥쪽에는 뢰문의 변형으로 보이는 음각선문이 전면에 둘러졌다. 몸체는 아래로 갈수록 좁아진다. 굽 너비는 0.2cm∼0.3cm로 좁은편이다. 가는 모래받침 흔적이 일부 남아 있고 그릇 전면에 가는 금들이 많다. 유색은 담청색이며 유층은 얇은 편이다. 기형과 유색으로 보아 강진 용운리?계율리 가마에서 만들어진 것과 비슷하며 제작연대는 12세기∼13세기로 추정된다.

② 일휘문 숫막새 편(그림 7-②?사진 38)
"A" 건물지 동서 트렌치에서 노출된 석축의 남쪽 와적부에서 출토되었다. 1/3정도 남아 있으나 전체적?모습은 추정이 가능하다. 크기는 가로 6cm?세로 12cm?두께 3cm이며 복원해 보면 지금은 12cm 이다.

지름 4cm 정도의 반구형 일휘문이 중앙에 돌출되었고, 그 주위에는 양각 원권이 세줄 둘러졌다. 막새와 수키와의 접합부분이 조금 남았다. 고운 점토에 가는 모래가 섞인 태토에 흰색을 띤 연질이다. 일휘문이 유행하던 시기인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막새로 보인다.

③ 서조문 암막새(그림 8-①?사진 39)
"A"건물지 동서 트랜치 석축 남쪽하강 작업중 배수구로 보이는 두 줄의 석렬 사이에서 출토되었다. 막새면을 북쪽 석축면으로 향하고 엎어진 채로 불탄 흙 속에서 조사되었다. 막새는 2분되었으나 붙여보니 완전한 모습을 갖춘 상태이다. 막새와 연결된 암키와는 대부분 남아 있다. 막새의 크기는 길이 31cm?너비 8cm?두께 2.5cm 이고 암키와 크기는 길이 35cm?너비 31cm?두께 2.5cm이다.

이 막새는 장방형이 위쪽으로 굽어진 형태이며 중앙과 좌우측에 화문이, 그 사이에 서조가 돋을 새김된 구도를 보인다. 외곽에는 주문의 돌기가 촘촘하다. 막새와 암키와는 현재 상태로 보아 덧대기붙임이며 접합 부분의 각도는 90°이다. 암키와 앞뒤면은 거칠게 비로 쓴 흔적만 남았다. 기와 분할은 바깥쪽에서 직각으로 2/3정도를 안쪽에서 비스듬하게 잘랐고 절단면이 잘 남아 있다. 암키와는 그 크기로 보아 4등분한 것이다. 점토 바탕에 굵은 모래가 섞인 거친 태토로 회청색이며 경질이다. 점토 바탕에 굵은 모래가 섞인 거친 태토로 회청색이며 경질이다.

막새 앞면에 새겨진 서조는 발이 보이지 않고 모양이 물위에 떠 있는 물오리처럼 보이며 보통의 경우처럼 대칭되지 않고 좌우의 모양이 약간 달라 암수를 의미하는지도 모Ⅴ? 또 막새와 암키와의 접합 방법은 막새 윗면에 붙는 보통의 경우와는 달리 아래에 붙여진 형태로 추녀마루 끝에 붙는 곱새기와를 받치는 기와로 보인다. 암키와 중간 부분에 장타원형의 구멍이 있는 것도 곱새기와와 추녀마루 암막새와의 결합을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 암막새는 1차 축대와 2차 축대사이에서 출토된 서조문 암막새와 구도는 동일하나 화문과 서조문에서는 더 간략화된 현상을 보여주고 있어 제작 시기는 더 늦어질 것이다.

④ 착고(그림 8-②?사진 40)
기와마루를 설치할 때 쓰이는 착고 기와로 동서 시굴갱 동쪽 석축 100cm 아래 층에서 조사되었다. 완전한 모습으로 거창 임불리 천덕사지에서 출토된 것과 모양이 비슷하다. 이는 별도로 착고와 부고를 제작하여 사용하였음을 보여준다. 복원한 길이는 28cm?너비는 7cm?두께 2cm이다. 삼층석탑 북동쪽 石肉【?조사된 착고와 크기나 모양이 동일하다.

(2) 남북 시굴갱에서 출토된 유물

① 백자 접시(그림 7-③?사진 41)
"A"건물지 남북 시굴갱에서 출토되었다. 반파된 상태이나 복원이 가능하다. 크기는 높이 3.5cm?입지름 9.5cm?밑지름 6cm이다.

전체적으로 보통 잔보다 키가 작아 밑으로 주저앉은 모습이다. 구연부는 약간 안으로 모아졌다. 굽 너비는 0.5cm로 좁은편이다. 모래비짐받침 흔적이 일부 남아있다. 그릇 전면에 가는 금이 많이 있으며 유층은 얇은 편이다.

기형과 유색으로 보아 제작 연대는 조선 후기 즉 17∼18세기로 추정된다.

(3) 지표채집 유물
① 암막새 편(그림 7-④?사진 42)
"A"건물지 지표에서 수습된 것이다. 현재 남아 있는 상태로 보아 추녀마루를 장식한 막새로 추정된다. 크기는 가로 7cm?세로 7cm?두께 2cm정도의 파편으로 전체적인 모습은 알 수 없다. 앞면에는 외곽선과 돌기만 남아 있고 뒷면에는 가는 포흔이 보인다. 황갈색을 띠고 무르며 태토는 점토에 가는 모래가 섞인 상태이다.

3. "B"건물지

(1) 조사과정과 유구 구조(그림9?사진43∼49)

"B"건물지는 대적광전 서쪽의 편평한 지역에 위치한다. 초석 1개가 노출되어 있어 이것을 포함하는 범위에 길이 16m?너비 150cm 규모의 남북시굴갱을 구획하여 조사하였다. 전체적으로 30cm∼40cm 정도 파내려 가니 북쪽에는 불탄층이 남북 10m 정도의 범위로 드러났고 그 남쪽은 잡석과 와편?비닐이 섞인 성토층이 계속되었다. 이에 따라 남쪽 부분만 성토층을 계속 제거해 나갔는데 지표에서 100∼120cm 내려가자 성토층이 끝나고 불탄층과 석축이 드?뎬? 이 남쪽의 소토층 범위는 4.5m 이고 소토층이 끝나는 남쪽 끝에 서축이 있다. 따라서 B지구 시굴갱은 전 범위에 걸쳐 소토층이 존재하되 남쪽 4.5m 범위와 북쪽 10m 범위는 약 60cm의 높이차를 둔 단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B지역 건물지를 전체적으로 볼 때 남북 약 15m 범위에 소토층이 존재하는데 그 남단에는 석축이 있으며, 이 석축에서 북쪽으로 4.5m 쯤 평탄면이 이어지다가 단이 형성되고 이 단 끝으로부터 2.5m 북쪽에 적심을 가진 초석이 있다. 따라서 이 초석이 위치한 북쪽 단에 건물이 들어서고 남쪽의 낮은 단쪽은 건물 앞면의 마당같은 기능을 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소토면 상층의 북쪽 단에는 상기 초석 북쪽으로 1m 쯤 떨어진 지점에 석축이 있고, 이 석축 남쪽 끝에서 3m 지점에 초석으로 추정되는 대형 판석이 있으며, 이 판석에서 북쪽으로 3.8m 인접한 지점에 배수시설이 있기 때문에 앞의 건물지 소실 후 후대에 축조된 다른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후대 건물의 초석으로 추정되는 대형 판석 북쪽으로 1.5m 부근 지점에는 지표에 떠 있는 초석이 1개 더 있는데 이 초석은 후대의 평탄 작업시 이동된 것으로 보이고 두 번째 건물과 관련된 것인지, 전혀 다른 제 3의 건물과 관련된 것인지 아직은 알 수 없다.

(2) 출토유물

위와 같은 현상으로 미루어 볼 때 "B" 건물지는 대체로 한차례의 화재와 적어도 두차례의 건물 중수가 있었던 것으로 보여지는데 출토 유물 역시 크게 두 시기로 구분되고 있다.

이 지역에서 조사된 유물들로는 청자 완 편?연화문 숫막새 편?비편?석제(石製) 벼루?돌끌을 들 수 있다. 한 곳의 트렌치 조사로 유물의 전체 상황을 파악하기는 곤란하나 전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상황을 보여준다. 도자기들의 출토상은 지표에서는 백자가 대부분이나 유구를 절개하면 청자와 분청사기도 간혹 나온다. 청자는 해무리굽의 순청자와 문양이 음각된 것들이며 분청사기는 귀얄 인화기법을 쓴 것들이다. 백자는 조선 후기의 것들이고 문양은 없다. 질그릇 조각들도 보이는데 고려와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것들이다. 기와의 출토상은 유구 아래?절개하면 얇은 통일신라 기와들이 보이고 유구층은 고려 기와와 조선 기와가 섞여 있다.상층은 메운 흙에서 나온 <소화십삼년보(昭和十三年補)>라는 명문이 새겨진 창살문 암키와는 화엄사 각황전 부근 와적장의 것과 동일하다. 문양이 통일신라시대의 것은 무문이며 고려시대 기와는 대부분이 수지문과 무문이나 격자문도 간혹 시문하였다. 조선시대 기와는 주로 창살문과 복합문이다. 특히 힘찬 예천명체의 해서로 쓴 면뭉 비편이 수습되었다.

(1) 하층 소토면 관련 건물지에서 출토된 유물

① 청자 완 편(그림 10-①?사진 50)
유구층 바닥에서 조사된 것으로 넓은 굽을 가진 일명 해무리굽 청자이다. 반쪽만 남은 굽에 몸체 일부가 붙어 있다. 내화토 받침 흔적이 한 곳에서 보이고 굽 바닥에 고르게 유약이 덮혔다.
안쪽 바닥에 원각이 보이는데 지름을 복원하면 3.3cm이다. 크기는 복원한 굽 지름 4.5cm?남은 높이 2.5cm? 굽 너비 1.2cm이다. 유색은 녹청색이며 빙렬이 심하고 기벽은 얇은 편이다. 11세기경에 만들어진 청자로 판단된다.

(2) 상층 건물지에서 출토된 유물

① 연화문 숫막새 편(그림 10-②?사진 51)
소토층 바로 위에서 출토 되었다. 막새면이 1/5정도만 남아 있어 전체를 추정할 수 없다. 현재 남아 있는 크기는 가로 8cm?세로 7cm?두께 1.3cm이다.

이 막새는 화엽과 주연 일부만 남아 있다. 연꽃을 사이꽃까지 묘사하였으며 외곽선을 윤곽삼아 그 부분만 도드라지게한 막새다. 점토 바탕에 굵은 모래가 섞인 거친 태토로 회청색이며 경질이다. 간략화된 연화문 형태로 보아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막새로 여겨진다.

(3) 지표 채집 유물

① 비편(그림 10-③④?사진 52)
표토층에서 수습된 가로 15cm?세로 15cm 크기의 이 비편은 자경이 2.5cm로 예천명(醴泉銘)체이며 ○서로 쓰여져 있어 현각선사비에 관한 문헌기록과 부합된다. 현재 남아 있는 글은<???생 사???위탑체염(爲塔剃染)???업용심성(業容尋聖)???상하?? >뿐이다. 이 글은 현재 알려진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이나 『대동금석서(大同金石書)』에도 보이지 않아 동부도 비편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지만 동부도 주변의 시굴갱에서 발견된 명문 없는 비편은 경도가 낮아 현각선사 비의 새로운 부분으로도 생각된다. 주지 고봉스님께서 삼층 석탑 북동쪽의 축대 윗쪽 길 주변에서 습득하신 비편은<???풍(風) 우(雨)???>로 두 글자만 남아 있다.

② 석제 벼루(그림 10-⑤?사진 53)
남쪽 성토층에서 출토된 것으로 두쪽으로 쪼개졌으나 완형으로 복원된다. 연강(硯岡)과 연제
9硯堤)를 모두 갖춘 점은 돌로 만든 소형 벼루이다. 크기는 길이 8.7cm?너비 4.5cm?두께 0.8cm이다. 연강은 가운데 부분이 마멸되었으며 연제 부분으로 이어진 곳은 턱이져 있다. 모서리 일부는 파손되었다. 이 벼루는 크기가 작아 이동이 간편하여 휴대용으로 쓰였을 것이다.

③ 돌끌(그림 10-⑥?사진 54)
지표에서 수습된 것이다. 전체적으인 모습은 장방형으로 날 부분의 단면은 삼각형이다. 크기는 길이 8cm?너비 3.3cm?두께 0.9cm로 작은 편이다. 앞면은 날 부분만 뒷면은 대부분이 잘 다듬어져 있다. 이 돌끌은 청동기시대의 유물로 판단되므로 연곡사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유물이다.

4. "C"건물지

1) 조사 과정과 유구 구조(그림 11?사진 55∼57)

"C"건물지는 현각선사비 남쪽의 평지에 위치한다. 이 지역은 20여년 전에는 밭이었고, 경작을 했던 남산마을 주민들에 의하면 8개의 초석이 노출되어 있었다고 한다. 시굴 조사 당시 2개가 지표에 반쯤 묻혀 있었다. 건물지 확인과 함께 현각선사의 비편 수습을 기대하며 눈에 보이는 2개의 돌을 기준으로 길이 750cm?너비 150cm 규모의 시굴갱을 설치하여 조사를 하였다.

지표를 50cm 정도 파내려가니 3개의 초석이 드러났다. 이 초석들의 일부는 지표상에 보였던 것이며 북쪽 초석은 300cm 간격이며 남쪽 초석은 400cm 간격이다. 지표 교란층을 걷어내니 황갈색 점토층이 시굴갱 전면에 깔려 있다. 시굴갱 북쪽에 석렬이 보여 100cm 길이로 하강하니 지표에서부터 50cm 지점에서 2열의 석렬과 불규칙한 돌들이 깔려 있다.

2개의 석렬 중 북쪽의 석렬은 불규칙하며 1단이다. 석렬면까지 황갈색 사질점토층이 이어지고 이 윗면에 와편이 섞인 사질점토층이 덮이고 다시 그 위에 남쪽의 석렬이 한단 쌓여 있다.
남쪽 석렬은 1단이며 면은 북쪽을 향한다. 그 남쪽 아래에는 80cm 너비에 불규칙한 돌들이 깔려 있는데 판석도 섞여 있어 단순한 퇴적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사실은 종합해 볼 때 "C" 건물지 역시 최소한 두 시기에 걸친 서로 다른 건물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2) 출토 유물

이 지역에서 조사된 유물들로는 청자 완, 즉 일명 해무리굽 청자와 백자 바래기 편을 들 수 있다. 한 지역의 트렌치 조사로 유물의 전체상황을 파악하기는 어려우나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은 상황을 보여준다. 도자기는 지표에서는 백자가 대부분이지만 유구를 절개하면 청자와 분청사기도 간혹 나온다. 청자는 해무리굽의 순청자와 문瑛?음각된 것들이며 분청사기는 귀얄기법을 쓰고 있다. 백자는 조선 후기의 것들이고 문양은 없다. 질그릇 조각들도 보이는데 고려와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것들이다. 기와의 출토상은 고려 기와가 대부분이다. 고려시대 기와의 문양은 대부분이 수지문과 무문들이나 격자문도 간혹 시문하였다. 특히 현각선사비와 인접한 관계로 10cm 내외의 비조각들이 20여개 출토되었다.

(1) 하층 퓜걍熾【?출토된 유물

① 청자 완 편(그림 12-①?사진 58)
하층 건물지에서 조사된 것으로 넓은 굽을 가진 일명 해무리굽 청자이다. 반파된 굽에 몸체 일부만 남았다. 모래비짐으로 굽을 받친 흔적이 세 곳에서 보여 복원하면 적어도 다섯 곳에 받침을 하였을 것이다. 굽에는 유약을 고르게 발랐으며 굽바닥이 안쪽으로 들린 모습이다. 크기는 굽 지름을 복원하면 6cm, 남은 높이는 2.5cm 이고 굽 너비는 2.2cm 이다. 유색은 녹갈색이며 빙렬이 심하다. 기벽은 두터운 편이다. 10세기 후반경에 만들어진 고급품이다.

(2) 상층 건물지에서 출토된 유물

① 백자 바래기 편(그림 12-②?사진 59)
상층 건물지에서 출토되었다. 구연부는 깨졌으나 저부는 완전하다. 크기는 현재 남아있는 높이가 4.3cm이며 밑지름은 5cm이고 굽은 6cm∼8cm이다. 굵은 모래를 굽에 깔았던 흔적이 일부 남아있다. 그릇 전면에 가는 금이 많이 나 있다. 유색은 담갈색이며 유층은 얇은 편이다. 기형과 유색으로 보아 제작 연대는 조선시대 후기 18세기경으로 추정된다.

5. 삼층 석탑 남쪽 시굴갱(사진 60?61)

삼층 석탑의 남쪽으로 2단의 축대가 일부 노출되어 있는데 삼층석탑과 축대와의 관계를 파악하기 위해 길이 200cm?너비 150cm의 크기로 구획하여 지표를 제거하였다. 50cm 정도의 지표를 제거하니 잡석을 깔아 놓은 부석면이 나타났는데 이와같은 부석면은 "A"건물지 주변의 평지 전면에서도 발견된 것으로서 배수와 관련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이 지역에서 출토된 유물은 조선 후기의 백자와 조선시대 기와 조각들이 대부분이다.

6. 동부도?비전 남쪽 시굴갱(사진 60?61)

"C"건물지에서 발견된 비資?동부도 비편일 가능성이 있다는 판단 아래 동부도 주변에는 비편이 더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동부도?비전의 남쪽에 위치한 축대에 길이 300cm?너비 150cm의 크기로 시굴갱을 설치하였다. 지표를 걷어내니 현재 보이는 축대보다 약 50cm아래로 돌이 이어지고 생토가 보여 작업을 마감하였다. 지표 제거 작업 과정에서 글씨 없는 비편만 발견되었다. 이들 비편은 앞서 언급한 현각선사비 주변의 비편이나 B건물지에서 수습된 비편들과 질감은 같으나 약간 더 무른 것 같다. 이 지역은 동부도 비와 인접한 곳으로 조선 후기 백자와 고려조선 기와가 몇 조각 보이고 10여cm내외의 비 조각들도 10여 편 조사되었다.

7. 3찬 축대 북쪽 "A"시굴갱(사진 64∼76)

삼층석탑 북동쪽에 위치한 3단의 축대와 "A"건물지 남쪽과의 관계를 밝히기 위해서 가로 150cm?세로 150cm의 시굴갱을 설치하였다. 성토한 지표를 50cm 정도 걷어내니 불탄층이 노출되었는데 이 소토층은 3단의 축대 윗면과 비슷한 높이로 2차 소토층에 해당된다. 소토층을 걷어내자 "A"건물지 남쪽 석렬에서 본 20cm∼30cm 크기의 잡석을 깔아 놓은 부석면이 드러났다. 이 부석은 배수를 고려한 시설물로 보인다. 이 곳에서 백자와 옹기 및 기와 조각도 출토되었다.

8. 3단 축대 북서쪽"B"시굴갱(사진 67∼68)

삼층석탑의 뒷편 북쪽에 건물지 존재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앞의 시굴갱에서 서쪽으로 17m 지점에 가로 150cm?세로 150cm의 시굴갱을 설치하였다. 150cm의 깊이까지 성토층이며 그 아래에서 잡석과 부식토가 드러나서 작업을 마감했다. 이 지역의 조사로 3단의 축대 윗면에서 본 부석면이 이 곳까지 이어지지 않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 곳【??백자와 옹기 조각들이 보이며 비 조각도 2점이 출토되었다.


Ⅲ. 조사 성과


연곡사에 대한 시굴 조사는 8곳에 시굴갱을 넣어 적어도 3곳에 건물이 있었음을 확인하였고 삼층 석탑 북동쪽에 위치한 3단의 축대의 축조 과정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번에 실시한 간단한 시굴 조사로는 축대와 건물지의 전모를 모두 밝힐 수 없었지만 연곡사 경내의 각 평지에는 여러 가지 건물이 있었고, 축대 조사에서는 각 축대의 중첩 상황과 축대 사이 퇴적층의 층위적 해석을 통해 각 축대의 축조 상황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 세차례에 걸친 축대의 축조와 두차례의 화재를 말해주는 소토층의 존재는 문헌 기록과 관련된 것일 가능성이 높다. 즉 "난중잡록"과 "대한독립운동사"에 의하면 임진왜란시 1593년에 왜구에 의한 방화로 1차 소실이 있었고 고광순이 의병을 일으킨 1907년에도 일본군들에 의한 방화로 2차 소실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번에 조사된 2개의 소토층은 시기적으로 바로 그러한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을 종합해 볼 때 연곡사의 불사는 크게 3회에 걸쳐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초창은 연곡사 경내에 남아 현재까지 전해지는 동부도?동부도 비?삼층석탑?북부도?현각선사 비를 세운 시기와 어느 정도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는 1차 축대 사용한 통일신라 후기부터 고려 초에 해당하며 사찰의 기틀을 마련한 창건기로 추정된다. 중창은 정유재란시 북상하던 왜구에 의해 1598년의 방화로 1차 소실이 있는 후 서부도(1650년)의 주인 공인 소요대사(1649년 입적)의 활동기에 해당되며 2차?3차 축대를 만든 시기일 것이다. 그 이후 고광순이 의병을 일으킨 1907년에 일본군들의 방화로 인한 2차 소실로 사찰이 전소된 것으로 판단된다. 삼창은 1980년대 종인화상에 의해 대적광전과 요사채 및 선방이 축조되어 오늘에 이른 것이다.

이러한 추정은 건물지의 중첩상 뿐만 아니라 출토유물을 통해서도 판단할 수 있다. 출토유물은 통일신라 기와?현각선사비 편(서기 979년)?해무리굽 청자(10세기후반)?순청자?음각청자?고려기와?귀얄기법의 분청사기(16세기)?백자(조선후기)?조선기와?질그릇(고려?조선)?옹기(조선후기∼최근)등으로 구분된다.

청자는 순청자가 대부분이나 음각청자도 간혹 보인다. 소위 해무리굽 청자라고 일컫는 넓은 굽의 순청자는 강진 용운리와 계율리 가마에서 조사된 것과 비슷하며 10세기 후반에서 11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분청사기는 귀얄기법으로 유약을 발랐고 간혹 인화문도 보인다. 백자는 모두 문양이 없으며 평저에 굵은 모래받침을 한 것은 승주 송광면 후곡리요지의 출토품과 유사하다. 기와는 통일신라시대?고려시대?조선시대에 사용된 것들이 조사되었다. 우선 통일신라시대의 기와는 문양이 없으며 두께가 얇고 태토가 정선되었다. 다음으로 고려시대 기와는 수지문이 주종을 이루며 간혹 무문과 격자문도 시문하였다. 조선시대 기와는 주로 복합문이다.

이와 같은 유물들은 크게 통일신라 후기∼고려 초기의 유물과 조선 중기 이후의 유물로 세분되며, 이는 각각 연곡사의 초창?중창과 연관된 자료로 판단되는데, 정확한 초창 시기와 중창 시기 및 건물의 존재 기간 등 보다 세부적인 문제들은 본 시굴조사의 성격상 더 이상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라 하겠다.

마지막으로 연곡사에 대한 연차적인 발굴 조사를 통해 가람배치나 각 건물의 구조등을 파악한 다음 연곡사에 대한 정비계획을 수립해야 할 필요성이 높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하며, 아울러 본 조사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던 종각 건축에 있어서는 현재 계획하고 있는 삼층석탑 북동쪽 축대 주변이 역사적으로 중요한 지점이기 때문에 종각 건축지로서 적절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지적하고자 한다.

[구례군 자료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