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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산길따라/지리산♧[역사]

[스크랩] 구례 피아골 연곡사⑤불교유적/유물

by 지리산 마실 2007. 5. 5.

연곡사의 불교 유적 / 유물

황 호 균
(전남대학교 박물관 학예연구원)

Ⅰ. 머리말

이 글은 연곡사 지표 조사의 한 분야로 불교 유적?유물에 대해 조사한 결과물이다. 연곡사는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내동리 산54-1번지에 속하며 지리산 피아골짜기 아래에 자리한다.(사진 1∼4) 사세는 인근 화엄사에 비할 바 못되지만 동부도의 정교한 조각솜씨가 알려져 피아골 단풍과 함께 찾는 이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인근 화엄사?천은사?쌍계사 등과 더불어 지리산 남쪽의 불교유적으로 선종의 종풍을 가진 도량이다. 아쉽게도 정유재란과 구한말에 일본군에 의해 자행된 두 차례의 방화로 전각이 소실되어 폐사에 직면하였으나 다행히 1980년대에 종인화상의 중창불사와 지금의 주지 스님인 고봉선사의 복원 불사로 그나마 사격을 되찾고 있다.

이번 지표조사의 대상은 연곡사 경내 지상에 드러나 있는 모든 불교 유물과 유적이다. 이들은 석탑 1기?금동불 한 분?부도 7깊비 3깊석등부쟆초석 11점?맷돌 5점?돌확 1기?석등 2기?괘불석주 1쌍?건물 4동으로 총 36개의 유물과 유적이다.(그림 1) 이 유물과 유적의 이름은 삼층 석탑?금동여래입상?동부도?북부도?소요대사 부도?보월당영탑?조선후기 부도?종인화상 부도?동부도 비?현각선사 비?고광순 순절비?석등 부재?초석?맷돌?돌확?석등?괘불석주?대적광전?요사채?선방?해우소이다.

조사방법은 모든 불교 유물과 유적을 대상으로 위치 및 현상과 양식적 특징을 살펴보고 가능한데로 제작 연대를 규명해보도록 노력하였다. 초석이나 맷돌등의 석물은 그림을 그렸지만 그 외의 유적과 유물은 크기를 자세히 기록하는 선에서 그쳤다. 여건상 정밀 실측조사를 하지 못한 점은 아쉽지만 문화재연구소에서 몇 년전에 삼층 석탑을 실측한 바 있고 연차적으로 부도등도 실측할 것으로 기대되기 때문이다. 부도의 세부 문양을 탁본하지 못한 점 또한 미련으로 남지만 여기저기에 발표된 탁본을 모아서 참고로 삼을 수 있게 하였다. 사진은 유물의 자세한 모습을 알 수 있도록 세부사진을 가급적 많이 실었다.

현지에서의 지표 조사시 군청 관계자 여러분들과 연곡사 주지 고봉스님, 그리고 평도?남산마을 주민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이 자리를 빌어 깊이 감사드린다.

Ⅱ. 조사내용

1. 석탑

(1) 삼층 석탑(사진5?6)

① 위치 및 현상
이 삼층 석탑은 연곡사 사역의 남동쪽에 위치한다. 몇 년 전만 해도 석탑의 바로 윗쪽인 북쪽에 동서로 가로지르는 비포장 길이 나 있었으나 이 길을 계곡 주변인 남쪽으로 돌려 아스팔트 포장까지 하였다. 상륜부를 잃어버린 현재의 높이는 397cm에 달하며 현재 보물 제 151호로 지정되었다.

② 양식적 특징
이 석탑은 기단이 3층인 점이 주목되며 옥개석은 전형적인 방형탑으로 각층의 기단이 여러개의 돌을 사용하여 건립되었다. 하층 기단은 마치 지대석처럼 보이며 위 아래에 하대 갑석과 하대 저석을 두고 그 사이에 낮은 하대 중석을 놓았다. 하대 중석 좌우에는 우주가, 중앙에는 탱주가 도두라졌다. 하층 기단 갑석의 윗면에는 중층 기단의 저석을 받치기 위한 낮은 단이 있다. 이들 하층 기단의 석재는 하대 면석이 8개?하대 갑석이 6개의 돌로 이루어졌다. 중층 기단은 전반적인 모습은 하층 기단과 유사하나 갑석 바깥쪽으로 완만한 경사를 보이고 중앙에는 각형과 호형의 몰딩이 있다. 중층기단의 면석은 6개?중층기단 갑석은 3개의 돌로 결구되었다. 상층 기단 역시 하층?중층 기단보다 높아진 모습이며 상층 기단 면석은 훨씬 좁아졌고 각면의 좌우에 우주가 중앙에는 탱주가 표현되었다. 상층 기단의 상대 갑석 아래에는 부연이 있고 윗면은 비스듬하게 기울며 각지게 꺾인 2단의 탑신괴임을 두었다. 상층기단 면석은 4개?상층기단 갑석은 1개의 돌을 사용하였다.

탑신부는 모든 층의 옥신에 우주가 표현되었으며 2층?3층의 옥신은 급격히 줄어 들었다. 옥개는 한 돌로 쌓았고 층급 받침은 모두 4단이다. 옥개는 곡선을 그리며 우각으로 흘러 내린 마루끝이 살짝 들렸다. 상륜부는 결실되었다. 이 석탑의 삼층 옥개석은 떨어져서 주변에 뒹굴던 것을 1967년에 올려 놓았다. 당시 보수를 위하여 해체하다가 상층 기단내 자연판 석상에서 높이 23.5m 금동여래입상 1분이 발견되었는데 현재 동국대학교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③ 제작 연대
이 탑은 기단부를 매우 정성들인 반면 탑신부는 소홀한 감이 없지 않으나 하층 기단부터 탑신부에 이르기까지 체감비율이 일정하다. 이와 같은 모든 부재의 치석과 각부의 구성 양식 등으로 미루어 보아 건립 연대는 통일신라시대말에서 고려초에 추정할 수도 있다. 하지만 삼층 석탑 상층 기단내에서 발견한 금동불의 연대가 고려초에 내려오는 점을 중시하면 이 탑은 현각선사가 활동하던 10세기 중반 어느 때쯤에 연곡사에 등장하였을 것이다.

(크기 : 현재 높이 397cm, 하층 기단 너비 276cm, 하층 기단 높이 40cm, 중층 기단 너비 190cm, 중층 기단 높이 57cm, 상층 기단 너비 144cm, 상층 기단 높이 78cm, 1층 옥신 너비 63cm, 1층 옥신 높이 61cm, 1층 옥개 너비 116cm, 1층 옥개 높이 32cm, 2층 옥신 너비 51cm, 2층 옥신 높이 51cm, 2층 옥개 너비 93cm, 2층 옥개 높이 31cm, 3층 옥신 너비 41cm, 3층 옥신 높이 18cm, 3층 옥개 너비 81cm, 3층 옥개 높이 29cm)

2. 불상

(1) 금동여래입상(사진 7)

① 위치 및 현황
이 금동불은 1967년 삼층 석탑 보수시 해체 도중 상층 기단내 자연판 석상에서 발견되었다. 현재 동국대학교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박물관측의 배려로 보고서에 사진을 실을 수 있었다. 이 불상은 팔각대좌를 갖춘 입상으로 녹이 슬어 있어 동조여래입상이라고도 하였으나 자세히 보면 몸체 일부에 금도금 흔적이 발견되었다. 푸른 녹이 전면에 퍼져 있고 파손된 곳 없이 비교적 완전한 상태이다.

② 양식적 특징
육계는 둥그렇고 이마보다 한 단 높은 머리에는 나발이 표현되지 않았다. 타원형의 상호에는 눈썹?눈?코?입의 표정이 다소 경직된 느낌을 준다. 특히 코는 주변보다 높아 오똑하다. 볼은 둥글고 원만한 곡선을 이루고, 귀는 희미한 형태의 귀바퀴와 조금 늘어진 귀볼이 양각으로 표현되었다.

목은 짧으며 목과 가슴사이에 숄같은 삼도를 표현하는 두 줄의 띠가 둘러져 있다. 법의는 통견으로 앞면 중앙이 명치께까지 늘어지며 가슴에는 내의를 사선으로 받쳐 입었다. 법의는 「U」자형으로 겹쳐지면서 무릎 부근까지 연이어져 있다. 무릎 아래는 일직선으로 내려오는 옷주름이 발목부근에서 곡선으로 모아졌다. 이러한 옷주름은 주변을 선으로 새겨 옷주름 자체를 돌출시켰다.

수인은 오른 팔과 왼 팔은 가슴께까지 들어 올렸다가 오른손바닥은 정면으로 향하게 펴보이고 왼손바닥은 아래로 내린 형태로 시무외인과 여윈인의 변형으로 보여진다. 손목 위로는 옷에 덮혀 있고 옷자락이 무릎 근처까지 냇?있다. 발은 발가락까지 묘사되었다. 대좌는 팔각이며 상하가 구분되는 모습이다. 발 받침 구실을 하는 상대는 좁은편이며 중대는 생략하고 바로 하대로 이어진다. 하대는 팔각이며 측면에는 투조된 안상과 하면에는 2단의 괴임이 있다.

③ 제작 연대
불상은 턱이 약간 들려진 모습이며 머리에 비해 어깨가 좁고 전체적으로 경직되었다. 이 금동불은 「U」자형으로 겹쳐지는 법의와 우수상 좌수하 형식의 수인, 상대 하대만 갖춘 대좌의 모습에서 통일신라 금동불 양식의 잔영을 발견할 수 있는데 경직된 상호?자세?의습으로 보아 고려초에 제작한 불상으로 추정된다.(전체높이 23.5cm, 대좌높이 5cm)

3. 부도?비

1) 부도

(1) 동부도(그림 2?사진 25)

① 위치 및 현상
이 부도는 연곡사 대적광전 북동쪽으로 10m쯤 올라가는 산 기슭에 위치한다. 높이는 350cm에 달하고 국보 제53호로 지정되었다. 연곡사에 있는 3기의 부도 중 조각 솜씨가 가장 정교하다. 동부도 비와 함께 높이 150cm의 축대위에 자리한다. 축대의 동서북쪽 외곽에는 두 줄로 네모지게 둘러진 석축이 보이는데 이는 배수를 고려한 시설물로 여겨진다.

② 양식적 특징
팔각원당을 기본형으로 삼은 부도로써 네모난 지대석 위에 기단부와 탑신부 상륜부를 쌓은 일반형이다. 지대석과 하대석은 한 돌이다. 하대석은 마치 이단으로 보이나 위의 것은 중대석 받침이며 팔각이다. 하대석에는 운용을, 중대석 받침에는 면마다 좌?우와 윗부분에 둥근 테를 두르고 그 안에 형태?다른 사자를 1좌씩 비교적 높게 돋을 새김하였다. 중대석 받침 윗면에는 각지게 꺾인 3단의 괴임대가 마련되어 중대석을 받쳤다. 중대석은 낮은 편이며 면마다 네모진 안상 속에 무기를 들고 있는 팔부신중을 낮게 돋을 새김하였다. 상대석은 3단의 받침대 위에 놓였는데 중대석 굄대와 대칭을 이룬다. 측면에는 홀꽃이 앞 뒤로 겹쳐진 모습의 연꽃이 위로 벌어진채 돋을 새김되었다. 연꽃은 상하 2열에 16판씩, 꽃잎 안을 다시 꽃씨로 장식하였다. 윗면의 탑신 받침은 모서리마다 소반상 다리 같이 중간에 둥근 마디가 있는 기둥을 세우고 그 안에 자세가 다른 가릉빈가 1구씩을 높은 부조로 돋을 새김하였다. 탑신 받침 윗면에는 낮은 3단의 괴임을 두고 그 위에 팔각기둥모양의 탑신석을 받쳤다. 탑신의 각면에는 문비 2개?보여(寶輿) 2개?사천왕상 이 낮게 돋을 새김되었다. 옥개석은 목조건축의 지붕을 충실히 따르고 있는데 이중의 연목과 기왓골뿐만 아니라 처마끝에는 막새까지 나타내고 있으며 지붕 아랫면에는 구름문양과 비천상을 돋을 새김하였다. 모든 지붕마루끝 측면에는 풍탁을 걸어두었던 두 개의 구멍이 있다. 그 윗부분에는 지금은 깨어졌으나 잡상 같은 것을 얹었던 흔적이 남아 있다. 상륜부는 앙화 위에 네 방향으로 날개를 활짝 편채로 선 이름을 알 수 없는 새를 조각하고 그 위에 다시 연꽃문양의 보륜을 얹었다. 네 마리 새의 머리는 모두 파손되었고 뒤쪽으로 광배같은 조각이 붙어 있다.

③ 제작 연대
통일신라시대의 다른 부도 보다 기단부가 높고 세부적인 조각수법은 치밀하다. 연곡사에 현재 남아 있는 불적 가운데에서 가장 연대가 빠른 이 동부도는 통일신라말의 양식적 특징을 잘 보여준다. 지리산 주변지역에 남아 있는 이 시기의 부도들, 예를 들자면 곡성 태안사 적인선사 부도(861년)?화순 쌍봉사 철감선사 부도(868년)?남원 실상사 증각대사(861∼893년)부도?장흥 보림사 보조선사 부도(880년)?하동 쌍계사 부도(885년)?남원 실상사 수철화상(893년)부도들을 비교해 보면 870년 이후에 등장하는 다른 부도들이 정형에서 많이 벗어나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로 미루어 적어도 연곡사의 동부도는 양식상 870년을 넘어서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주변의 동부도 비는 부도가 세워지고 나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에 건립되었을 것이다. 특히 이 동부도의 축대는 막돌 허튼층으로 쌓는 방식을 취하고 있어 삼층 석탑 북동쪽에서 노출된 축대와 분위기가 비슷하여 주목된다.

(크기 : 전체 높이 350cm, 지대석 가로 175cm, 지대석 세로 175cm, 하대석 한 면 너비 60cm, 하대석 높이 24cm, 중대석 받침 한 면 너비 54cm, 중대석 받침 높이 24cm, 중대석 한 면 너비 29cm, 중대석 높이 24cm, 상대석 한 면 너비 44cm, 상대석 높이 22cm, 탑신 받침 한 면 너비 36cm, 탑신 받침 높이 27cm, 탑신 한 면 너비 28cm, 탑신 높이 44cm, 옥개석 한 면 너비 58cm, 옥개석 높이 50cm, 상륜부 높이 90cm)

(2) 북부도(그림2?사진 26)

① 위치 및 현상
동부도에서 북쪽으로 150cm 쯤 올라가면 이 북부도를 발견할 수 있다. 높이는 306cm에 달하며 국보 제54호로 지정되었다. 이 부도 앞?뒤에는 축釉?쌓았는데 앞은 1.4m 정도의 높이이고 뒷편 산기슭에는 2.3m 정도의 높이이다. 그 사이에 가로 6m?세로 10m의 평지가 마련되어 중앙에 부도를 안치하였다. 뒷편의 축대 아래와 좌우측면에는 배수시설을 위해 작은 석축을 쌓았다.

② 양식적 특징
이 부도는 앞의 동부도와 마찬가지로 한 장의 돌로 된 네모난 지대석 위에 기단부와 탑신부?상륜부를 차례로 쌓은 일반형이다. 이 북부도의 하대석도 2단처럼 보이지만 엄밀히 구분하자면 위의 것은 중대석 받침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하대석에는 구름문양을, 중대석 받침에는 겹꽃 16엽의 연화문을 두른 팔각형 돌을 올려 놓았는데 중대석 받침의 여덟 귀퉁이에는 귀꽃무늬를 돌출시켰다. 중대석과의 사이에는 3단의 굄단이 중대석을 받치고 있다. 중대석은 낮고 잘룩한데 각면의 안상 안에는 무엇인가가 조각되어 있다. 상대석의 아랫면에는 3단의 받침을 중대석 굄 3단과 대칭을 이루었다. 상대석 옆면에는 홀꽃으로 3번 겹쳐진 연꽃잎이 위로 벌려져 있고 꽃잎 안에는 꽃씨 무늬 장식을 하였다. 윗면에는 높은 탑신 받침이 있는데 모서리마다 소반상 다리 처럼 둥그런 마디?있는 난간을 세우고 그 사이 안상 안에 가릉빈가를 1구씩 조각하였다. 가릉빈가의 머리는 사람이고 몸은 새인데 8개면 모두 자세가 다르다. 탑신은 팔각이며 각면은 문비 2개?보여 2개?사천왕상으로 장식되었으며 그 조식은 균형이 잡혀서 단아하다. 넓은 옥개석은 목조건축의 양식을 따라 이중의 연목과 기왓골 막새를 정성들여 새겼고 아랫면에는 비천을 조각하였다. 지붕마루끝 윗부분에는 옌琯돛?예와 같이 지금은 깨어졌으나 잡상같은 것을 얹었던 흔적이 남아 있다. 상륜부는 앙화 위에 네방향으로 날개를 활짝 편 채로 선 이름을 알 수 없는 새를 조각한 석재를 쌓고 그 위에 다시 연꽃문양의 보륜을 얹었다. 네 마리 새의 머리는 모두 파손되었고 뒤쪽으로 광배같은 조각이 붙어 있다.

③ 제작 연대
이 북부도는 앞선 시기에 만들어진 동부도를 모범으로 그 양식을 충실히 이으면서도 세부적으로는 중대석의 받침처럼 균형미를 추구하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 북부도의 축대는 앞의 동부도의 축대와는 분위기가 다른데 이는 시기의 차이와 주변 지형이 다른점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축대는 막돌 허튼층으로 쌓는 방식을 취하고 있지만 삼층석탑 북동쪽에서 노출된 축대와 동부도의 축대와 구별된다. 이 부도는 누구의 것인지 몰라서 북부도라고 하고 있으나 제작시기상 경내에 있는 현각선사의 비와 관련지어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부도와 비가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고 세워지는 예는 종종 발견되므로 그다지 억측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북부도가 동부도를 본뜨는데 너무 열중한 나머지 그 시기의 양식을 표현하는데 다소 소홀하여 연대를 추정하는데 어려움이 많다. 위의 사실을 종합해 볼 때 북부도는 현각선사 부도일 가능성과 10세기 전반에 제작된 이름을 잊어버린 승려의 묘탑 중 어느 하나일 것이다. 그런데 특기할 것은 돌의 재질이 다르다는 점이다. 한 돌로 만들어진 지대석과 하대석은 암갈색이고 중대석 받침부터 상륜부는 적갈색을 띤다. 지대석과 하대석은 동부도와, 둥재석 받침부터 상륜부까지는 현각선사 비의 재질과 유사하다.

(크기 : 전체 높이 306cm, 지대석 한 면 너비 175cm, 하대석 한 면 너비 60cm, 하대석 높이 24cm, 중대석 받침 한 면 너비 54cm, 중대석 받침 높이 24cm, 중대석 한 면 너비 29cm, 중대석 높이 24cm, 상대석 한 면 너비 44cm, 상대석 높이 50cm, 탑신 받침 한면 받침 높이 30cm, 탑신 한 면 너비 28cm, 탑신너비 36cm, 탑신 높이 44cm, 옥개석 한 면 너비 58cm, 옥개석 높이 50cm, 상륜부 높이 90cm)

(3) 소요대사 부도(다른 이름 서부도, 사진 26∼32)

① 위치 및 현상
연곡사 서북쪽에 위치한 이 부도는 높이가 308cm에 달하며 보물 제 154호로 지정되었다. 연곡사 서쪽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서부도라고 하는데 탑신에 새겨진 명문에 의해 소요대사 부도임이 밝혀졌다.

② 양식적 특징
이 부도는 평면 팔각원당의 기본형이다. 지대석은 팔각으로 잘 다듬었으며 윗면에는 얕은 몰딩이 하대석을 받치고 있다. 하대석도 팔각이며 상하로 구분된다. 하단 측면은 평면이고 아무런 조식이 없다. 상단은 둥그렇게 말아올라가며 구름무늬가 새겨졌다. 상단 윗면에는 중앙에 몰딩이 있고 그 주위에는 홈이 파졌다. 이 홈은 뒤쪽과도 연결되어 배수시설로 보인다. 중대석은 납작한 팔각구형으로 상하에 홀 연꽃이 대칭으로 돋을 새김되었다. 상대석은 팔각이며 홀 연꽃 8엽이 위로 벌어지듯 조각되었고 아랫면에는 2단의 각지게 꺾인 받침이 있다. 윗면에는 높은 둥그런 괴임이 있다. 탑신도 팔각으로 한 면에 문비를 모각하고 다른면에 높게 돋을 새김한 신장상을 1구씩 배치하였다. 옥개석 역시 팔각인데 추녀끝은 얇고 넓은 편이다. 옥개석 아랫면에는 높직한 받침을 중심으로 연목이 모각되었고 낙수면은 급경사를 이루었다. 각면의 팔각에는 팔조의 우동이 뚜렷하며 추녀 끝에 이르러 큼직한 귀꽃이 솟아 있다. 상륜부는 완전하며 정상에는 팔엽의 앙련으로 된 앙화가 있고, 그 위에 납작한 구형의 복발이 있는데 횡대 위에 꽃무늬가 조각되었다. 다시 이 위에 큼직한 보개와 보주가 차례로 놓여 있다. 보개에는 4방향으로 새모양의 조각이 있는데 벼슬을 늘어뜨린 모습이다.

③ 제작 연대
이 부도 탑신석 한 면에 <소요대사지탑/순치육년경인>이라는 두 줄의 음각명문이 종으로 쓰여 있다. 소요대사는 백양사에서 계를 받고 부휴대사에게서 경전을 배웠으며 서산에게서 청○본원의 이치를 깨달았다고 한다. 소요대사는 순치 5년(1649년)에 입멸하였는데 바로 그 다음 해에 이 부도를 세웠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소요대사는 비가 금산사에 있으며 부도는 지리산 연곡사를 비롯하여 두륜산 대둔사?보개산 심원사에 있다고 하나 대흥사의 부도에서 확인되지는 않았다. 보개산 심원사도 철원지역에 위치한 것으로 보이는데 확인하지 못했다. 그리고 장성 백양사에도 소요당의 부도가 있다.

(크기 : 전체 높이 308cm, 지대석 한 면 너비 70cm, 지대석 높이 20cm, 하대석 한 면 너비 34cm, 하대석 높이 30cm, 중대석 한 면 너비 33cm, 중대석 높이 33cm, 상대석 한 면 너비 46cm, 상대석 높이 39cm, 탑신 한 면 너비 29cm, 탑신 높이 41cm, 옥개석 한 면 너비 56cm, 옥개석 높이 50cm, 상륜부 높이 95cm)

(4) 보월당영탑(사진33?34)

소요대사 부도 서쪽에 있는 이 부도는 석종형이며 자연석을 다듬어 만든 지대석 위에 올려져 있다. 지대석 뒷면에는 홈이 바깥쪽으로 나 있는데 소요대사 부도의 예에서와 같이 배수시설로 보인다. 석종 상단에 아래로 누인 연꽃 8엽이 돋을 새김되었다. 상륜은 연봉우리 모양이다. <보월당영탑( 月堂靈塔)>이라는 명문이 있고 조성연대는 조선후기로 보여진다.

(크기 : 전체 높이 150cm, 지대석 가로 120cm, 지대석 세로 140cm, 지대석 높이 10cm, 석종 높이 140cm)
(5) 조선후기 부도 A(사진 359)

이 부도는 소요대사 부도 북서쪽에 위치하며 잘 다듬은 지대석 위에 올려져 있다. 상하대석은 앙련과 복련이며 탑신은 원구형이다. 팔각지붕의 옥개석 처마끝에는 귀꽃이 장식되어있다. 옥개석 상단에 구멍이 있어 상륜의 결식을 알 수 있다. 묘 주인을 알 수 있는 명문이 없으며 조성연대는 형태로 보아 조선후기이다.

(크기 : 전체높이 137cm, 지대석 한 면 너비 112cm, 지대석 높이 2cm, 옥개석 너비 66cm)

(6) 조선후기 부도 B(사진 36)

소요대사 부도 북동쪽에 위치한 이 부도는 지대석이나 중?상대석 없이 바로 하대석 위에 건립되었다. 탑신은 납작한 팔각구형이고 지붕은 윗쪽으로 길쭉한 팔각형이다. 옥개석과 상륜부의 연봉우리는 한 돌이다. 그런데 지붕마루 끝이 연결되지 않고 끈긴 점은 동부도와 북부도를 보고 배운 듯 하다. 조성연대는 대체로 조선후기로 보여진다.

(크기 : 전체 높이 180cm, 옥개석 너비 88cm)

(7) 종인화상 부도(사진 37)

현각선사 비의 남서쪽으로 얼마 되지 않은 지점에 자리한다. 연곡사의 최근 불사를 주도했던 종인(宗仁)화상의 부도로 2단의 축대위에 화강암을 잘 다듬어 모셨다. 지대석을 별도로 마련하지 않고 팔각기둥모양의 대석 위에 석종형의 탑신을 올려 놓았다. 대석 상면에 연꽃을 새겼다. 탑신에 유곽을 마련하여 유두형 돌기 6개 두 줄로 배치하고 그 옆에는 비천을 역시 도두라지게 새겼다 탑신 윗면에는상륜부를 별도로 마련하지 않고 파상곡선 무늬를 선으로 새겼다

(크기 : 전체 높이 130cm, 축대 높이 50cm, 축대 너비 130cm)

2) 비

(1) 동부도 비(사진 38∼40)

① 위치 및 현상
연곡사 경내 서북편에 위치한 이 부도 비는 높이가 205cm에 달하며 현재 보물 제 152호로 지정되었다. 조선총독부 박물관 소장 옛 탁본에 의하면 979년(경종 4)에 건립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비신이 없고 귀부와 이수만 남아 있다.

② 양식적 특징
지대석과 한 돌인 귀부는 네다리를 사방으로 뻗쳐 납작히 엎드린 형상이다. 동부도비와는 반대로 왼쪽 앞발을 살짝 들고 있다. 비신 받침에 구멍이 나 있어 배수를 위한 시설로 여겨진다. 조각수법은 몸체에 비해 큰 귀두나 비좌 사면에 새긴 안상과 귀꽃이 특이하다. 이수 앞면 가운데에 <현각선사비명>이라는 전액이 음각되어 있다. 기록이나 옛탑본에 의하면 비문은 각사 왕융이 지었고 주국 장신원 썼다고 전한다. 글씨는 2cm정도의 해서로 구양순체를 바탕으로 하는 예천명(醴泉銘)체이며 자형을 바르게 하여 고박한 글체를 나타내고 있다.

③ 파손 경위와 여러 비편에 대한 고증
『대동금석서』 탑본상태로 보아 비가 파손된 흔적이 없어 아마도 현각선사 비는 그 이후 19세기 후반에 마침내 깨뜨려졌고 이때 남쪽의 산이 3일 동안 울었다고 한다. 이후 1907년 일본군에 의한 약탈과 방화시 더욱 더 많은 훼손을 입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점은 앞서 동부도 비의 경우처럼 현각선사 비는 귀부와 이수 모두 불을 맞아 돌이 적갈색이기 때문이다. 파손되어 흩어져 있던 귀부를 1970년에 한데 모아 붙였다고 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현각선사비의 귀부와 이수는 북부도 중대석 받침부터 상륜부까지의 돌과 재질이 유사하다.

현각선사의 탑비의 명문을 알 수 있는 비편은 6개이다. 이는 『조선금석총람』의 122자, 『금석유문』의 14자, 『대동금석서』의 68자, 『한국금석문대계』의 6자, 시굴 조사에서 발견된 비편에서 12자, 주지 고봉스님이 습득하신 비편에서 2자로 총 224자이다. 그리고 현각선사비의 전액에 쓰여진 6자를 포함하면 모두 230자이다. 여기서 주목되는 사실을 하나 발견 할 수 있다. 그것은 글씨체를 알 수 없는 『조선금석총람』과 『금석유문』을 제외한 4개의 자료에서 나타나는 글씨체가 모두 예천명체인 점은 같으나 글씨의 맛은 조금씩 다르다는 점이다. 물론 비의 글씨체는 2∼3가지로 쓰여질 수도 있으나 현각선사 비의 경우는 주국 장신원이 예천명체로 썼다고 하는 기록으로 보아 적어도 음기는 다른 이가 썼다고 가정해도 2가지 글씨체밖에 나올 수 없다.

이러한 점에 비추어 볼 때 이 중 두가지의 글씨체는 지금까지 알려진 바 없는 동부도 비편일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물론 『조선금석총람』을 펴낼 때 참고한 조선총독부 박물관 소장의 옛 탁본을 국립 중앙 박물관에서 찾을 수만 있다면, 또 『금석유문』의 주에 기록된대로 현각선사 비 귀부보수시 그 주변에서 맹인재선생이 발견하여 군청에 보관한 비편이나 이를 탁본한 자료만 찾아진다면 이러한 문제는 간단히 해결될 것이다. 더구나 글씨 크기도 두가지로 구별되어 위의 가능성을 뒷받침 한다. 지금 2cm 내외의 경우는 『조선금석총람』의 7분?『금석유문』의 2cm?『한국금석문대계』2cm이고, 지름 3cm 내외의 경우는 시굴조사에서 수습된 비편 3.5cm, 주지스님 습득 비편 3cm이다.
(크기 : 현재 높이 198cm, 지대석 가로 190cm, 지대석 세로 210cm, 지대석 높이 15cm, 귀부 높이 146cm, 귀부 대좌 높이 77cm, 비신 받침 너비 150cm, 비신 받침 두께 58cm, 비신 받침 높이 55cm, 비신 받침 구멍 가로 106cm, 비신 받침 구멍 세로 27.5cm, 비신 받침 구멍 깊이 16.5cm, 비신 받침 배수 구멍 지름 8cm, 이수 비신 구멍 가로 107.5cm, 이수 비신 구멍 세로 28cm, 이수 비신 구멍 깊이 12cm, 이수 너비 148cm, 이수 두께 58cm, 이수 높이 86cm, 전액 가로 22cm, 전액 세로 26cm, 전액 깊이 3cm)

(3) 고광순 순절비(사진 46)

이 비는 1907년 일본군에 의해 순절한 고광순 의병장을 기리기 위해 구례 군민 일동이 단기 四二九一年(1958년) 무술 중춘지 상완에 광산 김문옥이 글을 짓고 서흥 김규태가 글씨를 써 세웠다. 현각선사 비의 북서쪽에 위치하며 전면에 <의병장고공광순순절비(義兵將高公光洵殉節碑>, 뒷면에 행적을 적은 선새김 명문이 있다. 비신은 자연석위에 그대로 올려 邨年쨉?주변을 돌로 쌓아 축대를 만들었다. 비신은 검은 돌이고 표면은 물질까지 하여 매끄럽다.

(크기 : 현재 높이 cm, 비신 높이 141cm, 비신 너비 61cm, 비신 두께 29cm)

4. 기타 석조물

현재 연곡사 경내에는 석등부재인 간주석?연화문 하대석과 11개의 초석이 제자리를 잃고 흩어져 있다. 자연석을 다듬어 만든 맷돌도 여기저기에서 발견되는데 모두 5개이다. 이 외에 돌확 1개와 근래에 만든 석등 2개?괘불석주 2개도 조사되었다.

(1) 석등 간주석과 하대석(사진 47)

이 석등 부재는 대적광전 앞쪽 계단 오른편 화단가에 놓여 있다. 화사석?상륜?상대석은 잃어버리고 간주석과 하대석만 남은 상태이다. 간주석마저 허리부분이 잘려진채로 방치되고 있던 것을 이번 조사에서 처음으로 확인하였다.

간주석은 팔각기둥 모양이며 위 아래에 상대석과 하대석에 끼울 수 있는 돌기를 만들었으며 중간부분이 절단된 것을 올려놓았다. 하대석은 연꽃 8엽이 둘렀고 하대석 윗면 중앙에 간주석과 결구를 위해 원형의 구멍이 패여 있다.

제작연대는 현재 남아 있는 부재만을 가지고 추정하기에는 무리가 있으나 주변의 유물들과 관련이 있는 고려시대의 석등 부재이다.

(크기 : 남은 높이 93cm, 간주석 높이 73cm, 간주석 한 면 너비 10cm, 하대석 지름cm, 하대석 높이 25cm)

(2) 초석

경내 여기저기에 흩어진채로 방치된 초석은 모두 11점이다. 형식상 삼단주좌와 일단 주좌 두가지 유형으로 구분된다.

① 심단주좌 초석(그림 4-①∼⑤?사진 48∼51)
이러한 형식의 초석은 5점이 조사 되었다. 이 중 4점은 심방석을 놓았던 자리를 모각하고 있는데 모서리 초석은 1점이다. 삼단의 주좌는 중앙만 둥그렇고 상하단은 각지게 꺾인다. 초석 윗면을 잘 다듬었으며 측면이나 아랫면은 거칠다. 제작시대는 본격적인 발굴이 이루어진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단언할 수 없으나 늦어도 고려시대이고 빠르면 동부도의 건립시기인 통일신라 말까지 올라 갈 수도 있을 것이다.

② 일단주좌 초석(그림4-⑦∼⑪?사진 52∼57)
일단주좌식 초석은 6점이 남아 있다. 이 중 5점은 원형이나 1점만 방형이다. 윗면 뿐만 아니라 측면까지도 잘 다듬었으며 아랫면은 거칠다. 이러한 형식의 초석은 조선 후기부터 최근까지 흔히 볼 수 있다.

(3) 맷돌(그림 4-⑫∼⑭?사진 58∼61)

연곡사 경내 여기저기에서 5점의 맷돌이 조사되었다. 형태상 맷돌 아랫짝은 3점, 윗짝은 2점이다. 이 중 맷돌 아랫짝 3점은 거대한 자연석에 새긴 것이다. 맷돌 윗짝 2점은 아래부분이 사선으로 홈이 나 있다. 특히 대형 맷돌 아랫짝에는 화주를 밝힌 명문이 있는데 맷돌 측면에 상하 두줄로 <화주/청학>이라고 선으로 새겼다. 여기서 등장하는 청학(1570∼1654년)은 서산의 문도이며 장흥 관산인으로 13세때 보림사에서 출가했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 이 대형 맷돌은 중창주인 소요대사와 같은 서산의 문도인 청학이 화주하여 17세기 전반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4) 돌확(그림 4-⑥?사진 62)
요사채 서쪽에 위치한 이 돌확은 원형으로 움푹 패여 있다. 윗면과 원형의 함몰부는 반질반질하다. 측면은 대충 다듬고 말았다. 제작시기는 맷돌과는 일정한 거리가 있을 것이며 해방이후 종인선사 주석시 사용한 것을 보인다.

(5) 석등(사진 63)
대적광전 임구 화단 좌우에 위치한다. 높이는 280cm 정도이며 하대석 간주석 상대석 화사석 옥개석 상륜을 모두 갖추었다. 상?하대석에는 8엽의 겹친 연꽃무늬를 돋아나게 새겼다. 화사석안에는 전구시설을 하였고 최근에 만든 것이다.

(6) 괘불석주(사진 64)
석등 앞에 있는 사각기둥모양의 괘불석주는 그 간격이 310cm이고 괘불지주 높이 133cm?너비 35cm?두께 40cm이다. 두 개의 구멍이 나 있는데 현재 경내에 괘불은 없다.

5. 건물

(1) 대적광전(사진 65∼74)
비로자나불이 주불로 모셔진 이 대적광전은 경내 중앙 윗쪽에 위치한다. 팔작지붕의 목조와가로 다포식이다. 정면 5칸에 측면 3칸인 이 건물은 1983년 종인화상이 옛 건물터에 지은 것이다. 비로자나불 본존불 좌우에 협시 보살을 두고 후불벽에 탱화, 건물 좌우 측면 벽에 신중탱?산신탱?연꽃벽화를 그렸다. 불단위에 천개를 마련하였고 단청도 입혔다.

(2) 요사채(사진 75)
현재 주지실과 공양간 대중방의 용도로 쓰이고 있는 이 요사채는 대적광전 남동쪽에 위치한다. 1985년에 건립하였으며 팔작지붕의 목조와가이다. 「┏」자형의 건물로 북쪽은 6칸ㅍ서쪽은 4칸?측면은 모두 2칸이다.

(3) 선방(사진 76)
요사채 오른편에 위치한 이 건물은 위의 요사채와 같은 해에 건립한 맛배지붕의 목조와가로 정면 3칸?측면 3칸이다. 선방의 용도로 지었으나 현재는 대중방으로 사용한다.

(4) 해우소(사진 77)
1991년에 완성한 이 건물은 맛배지붕의 목조와가이다. 정면5칸?측면 2칸이며 출입구쪽으로도 지붕을 달아내었다. 입구 지붕아랫부분의 일본식 곡선은 승주 선암사 해우소를 본 뜬 것이다.

(5) 간이 종각(사진 78)
현 대적광전 남서쪽에 위치한 평지에 임시로 스레트 지붕의 종각을 만들어 종을 타종하고 있다. 크기는 높이 250cm?종 밑지름 140cm 이며 불기 2536년 9월(서기 1992년)에 만들었다. 종 전면에 <지리산 피아골 연곡사>라는 도두라진 명문이 있다.

Ⅲ. 조사 성과


연곡사 경내에 남아 있는 불교유적?유물은 크게 통일신라 말기에서부터 조선후기까지의 옛 유물과 1983년 이후에 지어진 최근의 건물로 구분된다. 시기적으로 이어서 정리해 보자면 먼저 통일신라말인 870년 즈음에 동부도가 세워지고 일정한 기간이 경과된 후에 동부도 비가 건립된다. 이후 오랜 시간이 경과되지 않은 가까운 시기인 고려초(979년)에 현각선사비가 세워지는데 현각선사 활동시기인 10세기 중반기에 삼층 석탑도 사역에 등장한다. 삼층 석탑 안에서 발견된 금동불도 이 시기의 양식을 보여준다. 특히 북부도도 이무렵이나 아니면 이후 적어도 979년 이전에 사역에 안치된다. 간주석과 하대석만 남은 석등과 삼단주좌를 마련한 초석도 이 무렵에 만들었을 것이다. 이후 고려 중기?후기?조선 초기의 유물은 보이지 않다가 소요대사 활동기인 17세기 전반기에 청학 스님이 화주한 대형 맷돌이 제작된다. 이어 소요대사 부도가 1650년에 세워진다. 그리고 경내에 흩어져 있던 각종 석조물인 일단주좌를 마련한 초석과 돌확들은 조선후기부터 1983년 이전에 만들어진다.

위와 같이 요약된 연곡사의 불교유적 조사의 성과는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고려시대의 석등부재를 발견한 점과 북부도를 현각선사 부도로도 생각해 볼 수 있는 점, 현각선사 비의 내용은 자세히 알 수 없었으나 여기저기 흩어져 기록된 명문을 찾아내어 고증하여 본점 등을 들 수 있다.

[구례군 자료에서]
출처 : 지리산 산길따라
글쓴이 : 두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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