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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산길따라/지리산♧[역사]

구례 피아골 연곡사③

by 지리산 마실 2007. 4. 26.

▣구례 연곡사지 지표조사 보고


3-연곡사의 연혁

이 계 표
(광주직할시 문화재 전문위원)


연곡사는 지리산 반야봉 법왕대 아래 연곡동에 있어 연곡사라 불리운다. 이른바 피아골 입구에 있는 유서 깊은 선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제19교구본사인 화엄사의 말사(末寺)이다.

연곡사의 초창과 창건주에 관해서 정확한 역사적 기록은 없는 실정이다. 다만 만자 정병헌이 일제시대에 편찬한 「지리산화엄사사적(智異山華嚴寺事蹟)」의 부록으로 <연곡사사적>이 실려 있어 동 사찰의 시대적 변화를 살피는데 많은 참고가 된다. 이 사적에 의하면 신라 진흥왕때 인도스님 연기조사(緣起祖師)가 창건하였으며 그의 만년에 세상을 피해 살기위한 장소로 지었다고 한다. 또 조선후기 연곡사 중창주였던 소요태능(1562∼1649)은 그의 시 <제연곡사벽상(題燕谷寺壁上)>에서 연기조사가 초창했다고 읊고 있어 연곡사의 창건주로 연기(혹은 煙起)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연기(혹은 煙起)는 화엄사를 창건한 전설적인 인물로 이해되어 왔다. 그런데 1970년대말에 신라 경덕왕대의 백지묵서화엄경 2축이 수습되었는데 이 화엄경 사경(寫經)을 조성한 원주가 연기법사였으며, 이 사경은 화엄사의 석탑에서 전래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또한 연기가 창건한 사찰은 화엄사.연곡사와 함께 흥덕 연기사.나주 운흥사.구례 천은사.비양 서봉사.산청 대원사 등이 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연기(혹은 煙起)는 조선시대 후기 및 일제시대 연곡사등의 사찰 창건주로 이해되어 오다가 1979년에 8세기 중엽 화엄사의 창건주로 새롭게 인식되면서 그 실체를 인정받기에 이르게 되었다. 따라서 화엄사와 가까운 거리에 놓여 있는 연곡사도 전해오는 기록대로 화엄사의 창건주였던 연기(혹은 煙起)가 8세기 중엽경에 창건한 사찰로 여겨진다.

연곡사 창건주인 연기는 화엄종 승려로 보여진다. 화엄종찰인 화엄사를 창건하고 754∼755년에 신역 「화엄경」을 사경하였으며, 그의 저술 가운데 「화엄경」에 관한 「개종결○」30권, 「요결(要決)」12원(혹은 6권), 「진류환원약도(眞流還源藥圖)」1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연곡사도 처음에는 화엄종에 속한 사찰이었다고 생각된다.

신라말부터 고려초기에 연곡사는 화엄종사찰에서 선종사찰로 사찰성격이 바뀌어진 것으로 보인다. 고려 경종4년(979) 왕융 권, 장신원 서의 <현각선사탑비(玄覺禪師塔碑>(보물 제152호)와 국보 제53호인 동부도.국보 제54호인 북부도?보물 제151호인 3층석탑이 모두 신라말에서 고려초기에 조성되어진 것으로 선종계통의 불교문화가 꽃을 피운 흔적이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연곡사는 고려후기 및 조선전기의 기록이 전무하여 그간의 사정이 어떠하였는지 살필 수 없어 아쉽기 그지없다. 다만 조선말기 대흥사 승려 범해각안이 편찬한 「동사열전(東師列傳)」진○국사조에 진○천책이 연곡사에 주석(住錫)했다는 단편적 기록이 있어 저간의 사정을 짐작해 볼 뿐이다. 또 조선 중종대(1530년)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40, 구례현 불우조에 연곡사가 수재(收載)되어 있어 사찰의 존재함을 확인할 수 있다.

선조대의 왜란은 사찰에 막대한 피해를 안겨 주었는데, 연곡사도 예외는 아니었다. 선조 31년 (1598) 4월 10일 왜적 사백여명이 하동악양을 거쳐 지리산의 쌍계Δ?奈?О姐?등 사찰에까지 들어와 살육을 자행하고 불을 지르는 등 갖가지 만행을 자행하였다. 왜란으로 불타버린 연곡사를 인조대 소요대사 태능(1562∼1649)이 중창하였다. 소요 태능은 연곡사를 중창하고 상당기간 동안 이곳에 머물렀던 것으로 보여진다. 그의 문집인 「소요당집(逍遙堂集)」에 연곡사와 관련된 시문으로 <제연곡사향각(題燕谷寺香閣)>과 <제연곡사벽상>이 있어 저간의 사정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또한 서부도의 문비에 "소요대사지탑(逍遙大師之塔)"이라고 새겨져 있어 소요대사와 인연이 깊은 사찰임을 느끼게 해준다.

소요 태능은 서산대사 휴정의 제자로 그 문하 4대파 중 1파를 이룰 정도로 유명한 승려이다. 소요대사는 속성 오씨이며 담양인으로 13세에 출가하여 부휴선사에게 경전을 배우고 서산회하에서 청정본원의 이치를 깨달아 선을 중시하는 기풍을 충실히 전수하였다. 세속을 근원적으로 부정하고 오직 출가수행에 의해서만 고통을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을 지니었으며, 왜란때에는 참전하지 않고 수행자적 자세를 순수하게 지켰다. 서산과 사명 등이 대외적인 활동을 하고 있을 무렵, 소요대사는 편양언기와 함께 서산으로부터 물려받은 불법을 충실하게 발전시키는데 진력하고 있었다. 소요대사의 법맥은 침굉현변, 해운경열, 제월수일 등의 제자로 이어져 조선후기 불교의 중요한 일문을 형성하게 되었다.

효종 6년(순치 12년 : 1655) 연곡사에서 「석가여래성도기(釋迦如來成道記)」(소장처 국립중앙박물관)의 목판을 개판하였는데 이것은 조선후기의 강회와 관련된 중요한 사실로 보여진다. 중관해안(1567∼?)은 그의 문집인 「중관대사유교(中觀大師遺橋)」의 <제연곡사회>에서 연곡사를 계림의 선원이었는데 지금은 율호와 의용이 사는 사찰로 묘사하고 있다.

17세기초에 소요대사에 의해 중창된 연곡사가 소요 태능의 문풍을 계승하면서 엄격한 계율과 활발한 강학(講學)활동을 한 사찰이었음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영조 21년(1745) 10월 21일 봉상사에서 삼남읍의 분정 율목지예(栗木之例)를 혁파하고 연곡사를 주재봉산으로 삼아 밤나무를 잘 가꾸도록 하자는 계청(啓請)을 하자 왕이 허락하였다고 한다. 이로 말미암아 왕가의 신주목(위패목)을 봉납하게 되자 연곡사 주지가 도제조(都提調)가 되었을 뿐 아니라 지방관 향리들의 경제적 침탈에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정조 3년(1779) 동파당 정심선사가 대웅전을 중건하였다.
한편 영조 4년(1728) 소론파 이인좌가 집권 노론세력에 항거하여 반란을 일으켰을 때 호남지역을 장악하기 위해 승려출신인 술사 송하와 승려 대유(?∼1728)가 쌍계사와 연곡사를 거점으로 삼아 지리산의 산적 수천 명을 모아 태백산?덕유산?변산 일대의 명화적들과 연합하여 이인좌의 반란에 가담하여 했는데, 이인좌의 반란이 실패하자 지리산에서 종적을 감추었다고 한다.

송광사 승려 원암득원(?∼1885)은 만년에 연곡사 용수암(龍樹庵)에서 도반 취운혜오와 함께 하루 한끼만 먹으면서 수년동안 수행하였다고 한다.

19세기 후반에도 연곡사는 여전히 율목봉산지소였다. 왜란으로 피해를 입은 것으로 여겨지는 왕융소찬의 현각선사비가 왜란후에 문자의 획이 박락(剝落)되다가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마침내 깨뜨려지게 되었는데 이 때 연곡사의 남쪽 산이 3일동안 울었다고 한다. 1895년경에도 연곡사는 여전히 율목봉산지소였는데 밤나무 남용으로 연곡사가 망할 지경에 이르러 승려들이 사방으로 흩어지자 결국 절이 폐망하게 되었다.

을사조약으로 나라가 주권을 일본에게 빼앗기게 되자 각지에서 항일의병이 일어나게 되었다. 특히 호남의병의 활동은 주목할만한 것이었는데, 이 가운데 고광순은 1907년 8월 26일 지리산 피아골 연곡사에서 본영을 설치하고 적극적인 항일활동을 전개하였다. 같은 달 26일 화개에서 왜병 10여명을 죽였으며, 같은 달 27일에는 왜병 수명을 죽였으며, 9월 6일에는 왜병 수십명이 의병의 소재를 파악하느라고 연곡사에 들어오는 것을 의병 50여명을 인솔하여 적병 10여명을 죽이자 왜병이 모두 도주하였다.
고광순 의병은 고제양, 고광수, 박찬덕, 고광훈 등과 함께 여러 차례 승리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 일병의 야간기습을 받아 패전하고 고광순은 10월 11일 연곡사 옆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이때 연곡사도 의병 활동의 근거지로 왜병들에게 방화를 당했다. 이무렵 연곡사를 포함한 지리산 일대의 사찰들은 항일 의병 활동의 독립기지가 되어 항일 독립운동사의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1924년 박승봉(생물연대 미상, 불교신자로 사회사업가임. 법명은 관음)이 연곡사 경내에 700원을 들여 심우암(尋牛庵)을 창건케 했다.

6?25 한국 전쟁때 피아골 전투로 다시 폐사가 된 후 사찰 분규와 교통사정 때문에 재흥을 보지 못하다가 1965년에는 소규모의 대웅전이 요사채를 겸하여 세워지게 되었다. 1981년에 1억 3천만원의 예산을 들여 새로운 대적광전을 준공하여 오늘에 이른다.

[구례군 자료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