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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로운 글방/숲속의 글마당

화계리의 추억/강희근 시인

(3) 강희근 시인-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멱 감으러 다니던 봇도랑·물꼬 메우고 굴리던 도랑테 놀이…

유년으로 꽉 찬 '추억의 곳간'


 

 

내 고향 화계리는 천왕봉쪽에서 보면 북쪽 하봉 아래로 눈이 내려가다가 오봉리까지 내쳐 내려서 방곡리-자혜리를 훑어내리고 난 다음에 나타나는 곳이다. 적당한 산골 분지인데 왕산을 등에 짊어지고 앞에는 경호강을 안고 있는. 산골이라고 말하면 동네사람들이 섭섭해 하는 그런 150호 정도의 마을이다. 경호강은 남원 들판에서 발원하여 산내. 마천. 휴천리를 거쳐 이르는 것인데 마천 이후의 강 이름이 여러개로 넘나든다. 임천강. 동청강. 엄천강 등이 그 이름들인데 필자도 어디쯤에서 어디쯤까지가 그 이름들이 적용되는 것인지 알지 못한다. 그냥 경호강이면 두루 통하는 것으로 알면 된다.

 

이 강을 경계로 북쪽은 함양군 유림면이고 남쪽은 산청군이 된다. 필자는 이곳에서 나서 초등학교까지 다녔는데 당시의 교가는 “쳐다보니 왕산은 우리의 희망/바라보니 엄천강은 우리의 기상” 이라 한대로 희망과 기상을 세우면서 살면 되는구나 하고 생각했었다.

 

중학교부터 밖으로 나가 공부했는데 고등학교까지는 진주에서. 대학은 서울에서 다녔다. 밖으로 나가서 안을 들여다 볼 때 감정과 의미의 입자들이 일어나 하나의 덩어리로 엉기는 것이 아닌가 한다.

어느해 여름이던가.
소고삐 쥔 손의 땀만큼 씹어낸 망개열매 신물이
이 길가 산풀에 취한 내 어린 미소의 보조개에 괴어서.

해 기운 오후에 이미 하늘구름에 가 영 안오는
맘의 한 술잔에 가득 가득히 넘친 때 있었나니.

- 필자의 <산에 가서> 부분

이 인용절은 필자의 처녀작으로 1965년 서울신문에 당선된 <산에 가서>의 2연. 3연이다. 초등학교 3학년이었을 것이다. 방과후 오후에 필자는 농번기 우리집 작은 머슴을 대신하여 소를 몰고 소 먹이러 산에 가서 오후를 다 보낸 때가 있었는데 그때 소를 못찾아 울기도 했고. 동네 아이들과 더불어 짚으로 엮은 공으로 야구 비슷한 것을 했는데 무슨 뜻인지 모른 채로 그때는 그 놀이를 ‘뿌레’라 했었다. 필자의 처녀작은 그때의 체험을 그대로 옮긴 것이었다.

 

화계리의 관광 명소로는 ‘전구형 왕릉’이 있다. 가야국의 끝왕 구형왕 (구해왕. 양왕)의 능인데 왕이 신라에 합병된 뒤 망한 나라의 왕으로서 죄책감을 견디지 못한 나머지 지리산으로 향해 들어오다가 왕산 중턱에서 멈춘 것으로 추정된다. 확실한 사료가 없어 왕릉 이름 앞에 ‘전(傳)’을 붙이고 있는 것이 후손이나 마을 사람들에게는 안타까운 일이 되고 있다. 능이 돌로 쌓아 이루어진 석릉인데 따라온 군사들이 돌 하나씩 놓았다는 것이다. 필자는 모교인 금서초등학교 교가를 대학 다닐 때 작사해 주었는데 “가슴엔 저마다 가야의 빛”이라는 구절을 넣어 후배들이 애틋한 가야의 역사와 문화를 새기는 사람이 되기를 기원했다.

또 하나의 명소로는 왕산으로 오르는 왼쪽 능선에 ‘망경대’가 있다. 고려말 두문동 72인의 한 분인 민안부 선생이 이곳에 올라 고려왕을 향해 절하고 눈물 흘린 자리라 하여 특별히 ‘망경대’라고 부르면서 충신의 뜻을 기려 왔다.

최근에는 화계리 주변이 관광문화의 벨트를 이루게 되었는데 6·25때 산청. 함양 양민학살 사건으로 희생된 705위 영령들을 모신 방곡리 추모공원이 그 한 거점이고 ‘텁디재’ 너머 같은 금서면인 특리에 한방 휴양 관광단지가 조성되고 있는데 이곳이 또 하나의 거점이 되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필자에게 있어 더 소중한 것은 ‘당그래산’의 칡넝쿨과 발갛게 익는 망개열매다. 서녘 법화산 아래로 굽이쳐 돌아 엄천강 휘휘 휘파람 불며 건너오는 바람과 벌밭들에 됫박으로 풍겨나는 흙냄새와 보리 누름 누름 피는 보리밭의 밭고랑이다. 달아래 빨치산들 보급투쟁하러 왔던 간담 건드리는 길목과 고샅길. 여름 내내 멱감으로 다닌 ‘곰내보’와 ‘갯터보’의 봇도랑이다. ‘산대들’논두렁에 물꼬 메우고 굴렸던 도랑테 (굴렁쇠)놀이와 자치기. 탄피(彈皮)놀이 그것들이다.

그렇다. 화계리는 그때나 지금이나 필자에게는 유년으로 차 있다. 세월이 흐르고. 또 다시 흘러도 유년은 일렁이는 붙박이장과 같다. 사색은 여기서 발원하고 상상도 여기서 날개를 얻는다.

이곳에서 흐르는 강은 좁은 데가
미덕이라는 걸 배우지만
깨닫기도 전에 산벼랑을 만나
래프팅 같이 기웃둥거리며 간다
엄천강이라는 이름이 끝나기까지는
좁은 들녘 산벼랑이다
운명처럼 강은 제가 고를 수 있는 것
노래밖에 없다
- 필자의 <엄천강 풍경>에서

화계리의 강을 비교적 리얼하게 그렸는데 강이 제가 고를 수 있는 일은 노래밖에 없다는 표현으로 고향은 그 자체가 분복이고 운명이라는 점을 환기시킨 것이다. 유년과 그 안에 지금도 거주하고 계시는 부모님. 누나. 일가 어른들과 초등선생님들 또한 분복이고 운명일 것이다.

 

그러므로 화계리는 잘 지어진 추억의 곳간이다. 떠올리는 대로 별이 되거나 꽃이 되는 필자의 ‘문학의 성소’이다.

 

 

★강희근 시인 프로필

 

아호-하정. 1943년 산청 출생으로 진주고. 동국대 국문과. 동아대 대학원을 졸업했다. 1965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부문으로 등단했으며 공보부 신인예술상(1966). 경남도 문화상(1974). 동국문학상(2003). 경상남도 예술인상(2006) 등을 수상했다. 경상대학교 경남문화연구소장과 인문대학장. 배달말학회장. 경남문인협회 회장직을 역임했으며 현재 경상대학교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며 경남펜클럽회장. 지역문학인회 좌장을 맡고 있다. 작품집으로는 ‘산에 가서’ ‘화계리’ ‘기침이 난다’ ‘바다. 한 시간쯤’ 등 등 10권의 시집과 ‘우리 시 짓는 법’ 등 10여권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