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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산길따라/지리산♧[탐방]

잃어버린 역사 - 구형왕릉


 

 

▣잃어버린 역사를 더듬다- 구형왕릉

 

이상 기온으로 포근한 날씨를 보이던 12월 초, 겨울은 제 존재를 알리려는 듯 지리산 자락으로 매서운 추위와 눈(雪)을 내려 보냈다. 지리산 북부자락의 맑은 물길을 품은 엄천강 옆,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마을에서 올려다보는 지리산의 높은 산줄기와 산자락은 온통 흰 눈으로 뒤덮여, 가을걷이가 끝난 빈 들과 낮은 산자락의 황갈색 톤과 대비되며 더욱 외경스러운 모습이다.

 

흰 눈을 이고있는 지리산을 바라보며, 느린 걸음으로 풍경을 맞이하는 일, 눈 쌓인 숲에서의  치열한 산행이 주는 감동 못지않게 특별한 느낌을 갖게 될 것이라는 것은 아는 사람은 안다.

 

지리영봉 천왕봉 북동쪽에 지리산 동부 산자락을 멋지게 바라볼 수 있는 곳이 있으니 그곳은 바로 왕(王)의 산, 왕산이다. 지리산의 주능선도 아닌, 지능선의 고도 923m 봉우리가 이 웅장한 산줄기의 어떠한 봉우리도 갖지 못한 ‘임금’을 이름으로 삼고(물론 주봉(主峯) 천왕봉은 예외로 하겠다), 봉(峰)도 아닌 산으로 대접을 받고 있는 게 이상하지않은가?

 

이곳에는 왕의 무덤이 있다. 피라미드형의 특이한 모습으로 된 이 돌무덤의 주인은 가락국(금관가야) 마지막 왕인 제 10대 구형왕(김구해.양왕)으로 알려져 있는데, 삼국유사를 비롯한 역사서의 관련 내용을 종합해서 살펴보면 대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전해진다.

 

구형왕은 가락국의 제 10대 왕으로 서기 532년 신라의 법흥왕에게 부인과 아들 셋을 데리고 가서 나라를 넘겨주었으며, 그래서 양왕(讓王)이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강대국 신라가 끊임없이 침공을 하던 중, 법흥왕이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 오자 왕이 친히 군사를 지휘했으나 적병의 수가 너무 많아 싸울 수가 없어 양왕은 군사와 백성의 희생을 막고자 싸움을 피하고 평화적으로 나라를 넘겨주었는데, ‘사직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기지 못할 전쟁에서는 백성의 생명을 보존하는 것이 국왕의 도리’라 생각하고, ‘가야의 백성을 노예로 삼지 않고, 양민으로서 신라백성으로 받아주기로 하는 합의’를 하여 합병한 후에 방장산, 즉 지리산 동쪽 기슭의 수정궁에 기거하시다 붕어하였다는 것이다.

 

가락국 역사의 종지부를 찍은 이 비운의 왕은 나라를 넘겨준 뒤, 시조 김수로왕의 별궁이 있던 수정궁(태양궁)에 머물렀는데, 수정궁이 있던 곳이 바로 왕산 자락이고 나라를 넘겨준 뒤 5년 뒤 사망하였다고 기록은 전한다. 수정궁은 수정사,왕산사 등으로 이름이 바뀌다가 1928년 덕양전으로 이름을 고쳐 부르며, 구형왕과  왕비(계화왕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구형왕의 무덤으로 알려진 구형왕릉은 우리나라의 유일한 석릉으로, 7개의 단을 이루고 있으며 총 높이가 7.15m에 이르는데, 제 4단 째, 동쪽을 향한 면에(전면) 감실을 모으고 있는 것이 특징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 감실과 관련되어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역시 아직은 없다고 한다.

 

구형왕릉은 조선 정조 22년 산청군 좌수 민경원이 이 능에 기우제를 지내고 돌아가는 길에 능에서 1km 남짓 떨어진 절에 들러 잠시 쉬고 있다가 시렁에 얹혀있는 궤에 먼지가 수북이 쌓인 것을 보고 중에게 그 까닭을 물으니, 스님은 ‘예부터 누구든지 이 궤에 손을 대기만 하면 큰 화를 입는다’라는 이야기가 전해오므로 그대로 모시고 있다고 했다. 이 말을 듣고 민좌수는 더욱 호기심이 들어 스님의 만류를 뿌리치고 궤를 열어보니 기우제를 지낸 큰 석묘가 바로 구형왕의 능이라는 기록과 영정, 갑옷, 칼 등이 들어 있었다’라고 전해진다.

 

이 소문이 왕의 후손인 김해 김씨 문중에 알려져 이 때부터 김씨 문중에서 이를 수호하고 있다고 동국여지승람, 대동지지,한국지명총람 등 문헌들이 기록하고 있다. 또 조선 정조 때 문신 성대중은 ‘양왕심릉기’에 이르기를 “구형왕이 신라 법흥왕의 침략을 받아 백성이 상할까 두려워 하여 나라를 신라에 넘겨 주니 법흥왕은 구형왕을 금관주도독으로 임명하고 김해지역을 식읍으로 주었으나 이를 사양하고 이곳의 방장산 동쪽 기슭에 살다가 세상을 떠났으므로 그곳에 장사 지냈는데 돌을 모아 무덤을 만들었다고 했다.

 

조선 중후기에(영조) ‘갑자기 왕의 무덤이 나타났다’라고 할 정도로 왕산사와 관련된 일화와 기록에 의해 전해지는 내용이 동국여지승람과 산청현 읍지에 기록으로 남아있는데, 그 기사 의 단초를 제공한 사건은 동일하다고 볼 수 있겠다. 

 

하지만 역사는 1000여년 이상 비어있는 기록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이렇게 대답할 뿐이다. ‘그렇게 전해진다(傳)’. 이렇게 해서 구형왕릉은 아직까지 ‘전 구형왕릉’을 공식 명칭으로  불리고 있는 것이다. 감쪽같이 사라져버린 제 4제국, 가야의 역사, 그 미스터리의 정점에  구형왕릉이 있는 듯 하지만 현재로서는 알 길이 막막할 뿐이다.

 

다만 현재 전해지고 있는 구형왕과 왕릉에 대한 내용 중, 다음과 같은 몇몇 의문점은 제기해 볼 수 있다 하겠다.

 

우선 무덤이 돌로써 쌓아올린 피라미드형태로, 남부지역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양식이라는 것을 첫째 의문으로 삼을 수 있겠다.

 

미스터리인 무덤의 양식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중부 경북 지방 등에 나타난 것과 같은 탑일 수도 있다는 의견도 있지만, 전해지는 대로 무덤이라고 한다면 그 형태가 북방 고구려의 적석총과 닮았다는 것이다. 가야를 창건한 세력이 북방 기마민족이라는 설을 가정한다 하더라도, 이런 형태의 무덤이 가야 멸망기에 유일하게 나타난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가야의 마지막 왕의 혈통이 수로왕계가 아니란 말인가?

둘째로는 구형왕이 나라를 넘긴 과정과 그 후 곧장 이어지는 역사의 흐름이 석연치 않다는 점이다. 과연 가락국의 왕손이 신라에서 가지게 되는 신분적 지위가 곧바로 그렇게 진골로 이어질 수 있느냐 하는 것이고, 결국 그 전제가 받아들여져야만 삼국통일의 주축을 이룬 김유신 장군, 문무왕 등의 역사적 행적과 연결된다는 것이다. 과연 신라는 피복속국인 가야의 왕족을 그렇게 대접할 수 있었고, 또 가야의 왕족은 정복국 신라를 위해서 그렇게 싸울 수 있었을까? 특히 ‘兵權’의 문제에 있어 짚어볼 문제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혹시 어떤 특정 사실을 연결시키기 위해, 일관되게 기록을 짜맞추려는 시도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또 하나 가지게 되는 의문은 구형왕릉 인근, 함양군 휴천면, 마천면 여러 지역의 지형이름과 가야왕의 항전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이다. 그 이름들은 다름아닌 ‘국골(가락국의 골짜기), 두지터(식량을 저장해두던 곳간), 왕등재(왕이 오른 고개), 빈대궐터(왕이 기거하던 곳), 추성산성(신라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축성했다고 전해지는 토성),’ 등인데, 개략적인 내용으로는 가락국의 왕이 산성을 축조하고 식량창고를 조성하며 항전을 하다가 전쟁 중에 사망했다는 이야기이다.

 

현재로서는 위 두 이야기 중, 삼국유사의 내용과 1000여년이 지난 후대(조선시대)의 기록이 서로 잘 맞추어진 구형왕의 나라 양도설이 사실상의 역사로 받아들여지는 편이나 석연치 않은 곳이 있음은 앞에서 지적하였다. 더군다나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침공에 따른 전기 가야의 궤멸적 타격, 가야 유민, 후기 가야연맹 등이 이루어진 이 5,6세기의 남녘 땅은 유사 이래 최대의 격동의 시간을 맞이한 듯하나, 안타깝게도 이러한 일들은 아직 어둠 속의 역사로 남아있을 뿐이다.

 

백성들에 대한 군주의 깊은 사랑은 ‘양왕’이라는 치욕을 택하게 했지만, 그 양왕의 후손은 역사에 길이 남을 위인으로 남는 아이러니, 승자의 역사를 이어받아 정리한 옛사람들의 기록은 대체적으로 그러한 것이다. 가야왕의 이름으로 전해 내려오는 무덤이 오히려 철저하게 무시당하고 외면당하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건 무슨 이유일까?

 

역사는 냉엄하지만, 패자의 역사란 이렇듯 허망한 것이기도 하다.

언제쯤 구형왕은 침묵을 거두고 역사 앞으로 걸어 나올까?

 

오후 햇살을 등진 무덤 위로 차가운 그늘이 진다.

허공 속을 허우적거린다는 무망의 심정으로 무덤을 바라보던 순간, 블랙홀처럼 느껴지던 까만 공간의 감실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누군가가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다.

 

두류/조용섭

 

[참고 자료: 김경렬의 지리산,가야사넷,산청군 홈피] 

 

덕양전은 화계리에서 특리-매촌리로 넘어가는 길목에 비교적 규모가 크게 자리잡고 있는 전각으로 개.보수가 끊임없이 이루어진 듯하다. 양왕과 왕비인 계화왕후의 위패를 모시고 봄(음3.16),가을(음 9.16)에 제향하고 있다. 가락국 시조 대왕인 김수로왕과 허황후의 위패를 모신 숭선전이 사액되자(조선 고종 1878), 왕산 산자락, 구형왕릉의 위에서 양왕과 왕후를 모셔오던 수정궁(사)도 덕양전이라 이름을 고쳤고 후일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고 한다.(1928)

 


         [덕양전;네이버백과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