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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산길따라/지리산♧[탐방]

휴천계곡, 단종애사의 새우섬도 있어

휴천계곡

한중기 기자 hana@gnnews.co.kr
2001-09-08 10:00:46


사라진 큰절 엄천사 흔적만 아스라이
"단종 哀史" 한남군 유배된 새우섬도

지리산 수많은 계곡 가운데 유독 산세가 험난하지 않은 평지에 강처럼 50여리나 이어지는 물줄기를 계곡이라고 이름한 곳이 있다. 임천 또는 엄천이라고 불리는 휴천계곡을 말한다. 아름다운 물굽이가 장장 50여 리에 걸쳐 산청군 생초면 경호강까지 이어지는 휴천계곡은 지리산자락에서 색다른 풍치를 찾아볼 수 있는 한 폭의 동양화처럼 와 닿는다. 지리 주릉 100 리 북쪽의 물줄기가 마지막으로 모여 경호강으로 흘러들어 남강을 만들 수 있도록 하는 물굽이가 바로 휴천계곡, 다시말해 임천이다.


주릉 북쪽의 물줄기는 여러 이름으로 바뀐다. 전북 남원군 일원에서 함양군 마천면 가흥까지의 물굽이를 만수천(萬壽川), 가흥(또는 산내)에서 용류담까지를 임천(臨川), 용류담서 생초면(또는 화계면)까지 50리를 엄천(嚴川)또는 휴천계곡이라 한다. 하지만 국립 지리원에서 발행하는 지도에는 이 일대를 임천으로만 부르고 있다. 이 물굽이는 생초, 산청, 원지 나루까지를 거치면서 경호강이라 불리었다가 다시 주릉 남쪽의 물굽이와 만나면서 남강이 된다. 이렇듯 우리네 선조들은 물줄기 하나 바위 하나, 이끼 하나에까지 깊은 의미를 부여하며 이름을 달리할 정도로 지리산을 사랑했고 풍류를 아는 조상임에 틀림없다.


휴천계곡을 제외하고는 이들 모든 물굽이를 따라 도로들 모든 물굽이를 따라 도로가 포장도로로 잘 연결돼 있다. 물론 휴천계곡 구간인 마천면의 의탄∼유림면 까지도 현재 도로 확장포장이 마무리 단계에 있어 연말이면 모든 길이 잘 단장돼 명실공히 지리산 순환도로 기능을 하게 될 것이다. 휴천계곡 변의 도로는 앞으로 지리산 경남권역 북부지역의 완전 개방 기능을 하게돼 새로운 지리산의 명소로 자리매김 하게 될 전망이다.


이 도로망이 완공될 경우 지리산 남부권인 산청군 시천, 삼장, 금서지구와 북부권인 함양군 휴천, 마천을 곧장 연결하고 이 도로는 다시 남원군 인월 노고단, 구례군 천은사 화엄사, 하동군 화개면 청암을 이어 산청군 시천면으로 통하는 지리산 순환도로가 탄생하는 것이다. 이 도로망 완공은 곧 휴천계곡 명소의 완전 개방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지금까지는 도로망이 부족해 백무동 등지를 가려면 함양읍에서 전북 남원군 인월을 거쳐야 했던 탓에 휴천 계곡은 고스란히 그대로 남아 있었다.


천왕봉과 중봉, 하봉 등 주릉을 앞세우고 뒤로는 금대산과 법화산 등 비교적 낮은 봉우리를 가진 휴천계곡은 우선 산세와 물굽이가 절경을 이뤄 가는 곳마다 최고의 명승지이다. 뿐만 아니라 선조들의 넋과 혼이 깃들은 흔적들이 곳곳에 그대로 남아 지리산자락 답사의 색다른 면모를 느낄 수 있다.


500년 전 함양군수로 부임한 뒤 지리산 등반에 나섰던 김종식과 김일손은 휴천계곡 주변의 경관을 찬탄했고 당대의 석학 정여창은 "바로 이런 곳이 살만한 곳이 아니겠느냐"며 은둔하기에 알맞은 선경이라 묘사하기도 했다. 덕행을 쌓고 절의를 지키던 선비들이 지리산 산행에 나서면서 주위 경관을 보고 "은둔의 명소"로 표현한 부분은 당시 예견되던 무오사화, 갑자사화 등 선비들의 대대적인 학살을 염두에 둔 표현으로 여겨진다.


고난의 길을 지리산중에서 예견했던 이들 선비들은 그러나 끝내 지리산 은둔을 실행하는 대신 선비로서 현실과의 항거를 벌이며 꿋꿋이 절의를 지켜 희생되는 삶을 택했던 사실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 매우 크다 아니할 수 없다. 당시 선조들이 은둔해 살만한 곳으로 본 곳은 아마도 휴천계곡 주변의 문정, 남호 등지로 보인다. 지금도 여유 있어 보이는 이 일대의 풍경은 가히 사람 살만 한 곳처럼 느껴진다.


문정마을은 원래 탄촌(炭村)마을로 영산의 정기가 그대로 풍겨지는 듯 한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고 있다. 문정마을에서 유림면 방면으로 조금 더 내려가면 휴천계곡 주변에서 가장 큰 마을이 나오는데 동호, 원기, 한남 세마을을 안고있는 남호리이다. 이 일대에는 지금은 사라진 엄천사가 있던 곳으로 유명하다. 사라진 대찰, 엄천사의 흔적들이 마을 곳곳에 산재해 있다.


김일손은 "왕대 숲 속에 고색 창연한 절이 있었다. 엄천사라는 절이다. 땅이 넓고 편편해 가히 집을 짓고 살만한 곳이다"고 적고 있으나 지금은 절터의 부도 등 사찰의 흔적만 남아있다.


그리고 휴천계곡 가운데 인상적인 곳이 하나 있는데 바로 새우섬이다. 조선왕족의 숨결이 남아 있는 곳이다. 왕족이면서도 찬탈과 단종 복위운동을 주창하다 유배돼 희생됐던 한남군(漢南君). 강가의 새우섬은 이젠 섬이 아닌 강 언저리로 변해 있으나 한남군이 유배돼 살다가 생을 마감한 뜻을 기려 새우섬이 있는 곳을 한남마을이라 한다.


세종 11년(1419) 세종대왕의 열 여덟 왕자 가운데 열 두 번째로 한남군은 태어났다. 세종의 뒤를 이어 문종이 왕위를 이었으나 병약한 문종은 정사를 제대로 돌보지 못한 채 성삼문, 박팽년 등 신하들에게 아들 단종의 보위를 유언으로 남긴다. 단종 즉위 후 수양대군은 조카 단종을 대신해 세조로 등극하자 한남군은 금성대군의 단종 복위 운동에 적극 가담했으나 실패로 끝나는 바람에 죽음을 면치 못하게 된다.


한남군은 왕족으로 세조의 동생인 까닭에 참형은 피했으나 함양 당 새우섬으로 유배를 가게된다. 부왕인 세종의 유지를 받들어 장형인 문종의 유명(遺命)을 받들고 의리를 지켰던 한남군은 유배 4년 만인 세조 5조년(1459) 마음의 병이 깊었는지 몸이 쇠약했는지 새우섬에서 생을 마감했다. 왕손의 절개를 지키며 마지막 삶을 새우섬에서 보낸 한남군의 육신은 함양읍 교산리 봉강마을 뒷산에 묻혔다.


조선조 세종대왕과 단종, 그리고 한남군의 숨결이 한양 땅에서 천리길이나 되는 경남 땅에 남아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세종대왕과 단종의 태실지가 사천군 곤명면에 마주 보고 있으며 이곳 새우섬에 세종의 열두 번째 아들 한남군이 유배돼 숨졌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한남군이 유배된 새우섬은 대략 6,000여 평의 섬이었으나 지금은 섬이라 하기 힘들 정도로 변해있다. 함양 유림들은 한남군의 지조와 절개를 기려 1867년 이곳에 정자를 세우고 "한오대(漢鰲臺)"라 편액하고 추모해 왔다한다. 그러나 이 누대는 1936년 병자년 대수로 물에 휩쓸려 가고 말았다고 전해진다. 지금은 한남교란 다리로 연결된 새우섬.


한남군의 절의를 추모하고 후세에 이를 전하기 위해서는 단종의 유배지인 강원도 영월의 청령포가 사적지로 지정돼 보호하는 것처럼 보전할 필요가 있다하겠다. 더욱이 앞서 언급했듯 경남 지역에 세종과 단종 태실이 남아있는 사실을 들어 이곳 한남군의 애환이 깃들은 새우섬을 두 태실지와 연계된 사적지로 지정함이 바람직할 것으로 여겨진다.


지리산 끝자락에 서린 한남군의 혼을 담은 듯 휴천계곡은 맑고 고운 물굽이와 아름다운 경관을 간직한 채 흐르고 있다. 지리산의 체취가 묻어 나온 물줄기가 흐르는 휴천계곡 50리를 찾아가면서 한남군의 절의와 선조들의 숨결을 한번쯤 되새겨 봄직하다. 지리산은 그냥 단순한 자연이 아니라 한민족의 애환과 삶, 문화, 역사가 숨쉬는 곳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아니할 수 없다.

[경남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