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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先人들의 智異山

지리산 수정사기(水精社記)

▣지리산 수정사기[智異山 水精社記]
☞민족문화추진회의 번역글을 옮김

■권적(權適)

인류의 문명은 생긴 지가 오래다. 한없이 소박함을 상실하고 무궁한 욕심을 이루기

위하여 일생 동안 헤매며 스스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은 세상이 모두 그렇다.

어떤 사람이 만일 부귀를 거름흙처럼 생각하고 공명을 헌신짝과 같이 버리며, 홀로

있는 것을 좋아하고 고요함을 기쁘게 여겨 활기없는 마음과 메마른 모양을 하여

가지고 해탈하는 길을 찾으며 말하기를, “나만 스스로 구제되면 그만이지, 어떻게

남까지 구제할 수 있겠느냐.” 한다면, 이것은 그가 자기 자신을 위하는 것으로는

좋겠으나 크지는 못하다.

만일 천하가 그러함을 민망히 여기어, 이른바 해탈하는 길을 찾고 이미 스스로

그것을 얻게 된 뒤에는 또한 다른 사람과 이를 함께할 것을 목표로 하여 물러나지

않은 뒤에 그만둔다면, 이것은 집 밖을 나서지 않고도 두 가지의 이익에 모두 만족

것이니, 이와 같은 것은 위대한 사람만이 그럴 수 있다.

이것이 수정사(水精社)가 지어진 이유이다. 사(社)의 주장은 이름이 진억(津億)

이며 세속의 성은 이씨(李氏)다. 아버지 성(晟)은 비서감(秘書監)이었고, 어머니

전씨(全氏)는 용궁군 부인(龍宮郡夫人) 이었다.

8세부터 냄새나는 양념과 고기를 먹지 아니하였고, 11세에 중이 되어 현화사(玄化

寺) 혜덕왕사(慧德王師)에게 가서 공부하였다, 26세에 대선(大選)시험에 응시하여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하였다. 학문과 실천이 날마다 발전되어 여러 사람이 모두

그를 추대하였다.

그러나 그의 성품이 세속적인 것은 좋아하지 않았다. 일찍이 함께 공부하던 중

혜약(慧約) 등과 더불어 한탄하기를, “그 출가(出家)한 사람은 한번 해탈하는 것을

목표로 할 뿐이다. 만일 이것을 빙자하여 높은 명예나 후한 이익을 바란다면 어찌

본심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로부터 아주 떠날 생각을 가졌다. 마침내

명산(名山)에 들어가서 깨끗한 사(社)를 꾸며 옛날 동산(東湖)과 서호(西湖)의

영향을 받으려 하였으나 적당한 장소가 문제였는데,  

 

지리산(智異山)에 오대(五臺)라는 허물어진 절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대개 지리산은 우리 나라의 큰 산인데 높고 깊으며 넓고 커서 천하에 견줄 만한 것

없고 오대사는 또 산 남쪽에 있는데 그곳은 산이 솟아올랐다 내려앉았다 한 것이

 다섯 겹이나 되어 은은히 대(臺)를 포개어 놓은 것 같기 때문에 그 뜻으로 절 이름을

지은 것이다.

1천 봉우리가 둘러싸 옹호하며 모든 골짜기는 한 곳으로 모여들어 신선이나 성인이

꼭 그 안에 숨어 있는 듯하여 보는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눈이 아찔해지고 마음이

도취된다.

 

대각국사(大覺國師)가 일찍이 남쪽으로 다니다가 그곳에 이르러 머뭇거리며 두루

구경하고 이르기를, “여기는 큰 법이 머무를 곳이다.” 하였다 한다. 대사가 이 말을

듣고 용감히 갔으며, 가서는 희망하던 곳을 얻어 여기에 머물러 있으면서 터를

닦았다.

해인사(海印寺)의 주지(住持) 승통(僧統)인 익승(翼乘)과 공배사(功倍寺)의 주지

(住持) 승록(僧錄) 영석(瑩碩)이 크게 사재를 희사하여 그 경비를 원조하였고,

종실과 승상 이하 벼슬아치와  명망있는 이들, 선원(禪錄)과 강원(講院)의 명망

높은 중으로부터 일반 신도로서 사(社)에 들어오기를 희망하는 사람이 무려 3천

명이나 되었다. 중 담웅(曇雄)과 지웅(至雄)은 기부할 사람을 모집하고, 순현(順賢)

은 직접 공인(工人)을 데리고 연장을 잡고 일을 서둘러서 모두 건물 86간을 지었다.

불당과 거처방이 깨끗이 정돈되어 사람으로 하여금 초연(超然)히 정토(淨士)에서

사는 듯한 감상이 생기게 하였다. 좌수(座首)인 법연(法延)은 무량수불(無量壽佛)

주상(鑄像) 한 분을 받들어 모시고, 승통(僧統)인 익승(翼乘)은 석탑(石塔) 한

자리를 세우고, 선사(禪師) 영성(永誠)은 인쇄한 대장경을 모시었다. 모든 생활

필수품과 공부하기에 필요한 기구가 극히 작은 것까지 다 준비되었다. 늙은 이는

편히 거처할 곳이 있고 병자는 요양할 곳이 있게 되었다.

 

사(社)에 모인 모든 사람은 온화하고 엄숙해 잘못이 있으면 충고하고 잘한 일은

칭찬하여, 서로 자극을 받아 밤낮으로 노력하며 함께 서방(西方)정토에 이르기를

목표로 하였다.

우수한 사람이나 덕망이 높은 이로서 사원(社院)에 거처하는 이에게는, 일정한

법규에 구애되지 않고 경을 읽든가, 염불을 하든가, 공부를 하든가 간에 마음대로

자유롭게 지내도록 하였다. 모든 사(社)에 참가한 사람에게는 그가 생존했거나

사망하였거나 불문하고 나무쪽에다 이름을 새겨두었다.

15일마다 점찰업보경(占察業報經)에서 말한 바에 의하여 나무쪽을 꺼내어 바퀴에

던져서 선악(善惡)의 보응(報應)을 점쳤다. 점쳐서 나온 대로 선과 악을 두 개의 상

자에 나누어 놓고 그 악보(惡報)에 빠진 사람은 회원들이 그를 위하여 대신 참회하

다시 바퀴에 던져서 선보(善報)를 얻게 한 후 그만둔다. 또 처음에는 선보를 얻

었다가 나중에 악보로 떨어질 것을 염려하여, 마침내 다시 1년마다 한 번씩 바퀴에

던져 점을 쳐서 만일 다시 떨어져 버린다면 곧 처음과 같이 대신 참회한다.

 

이것은 구름처럼 모여든 대중과 함께 해탈을 얻어서 미래의 세계에까지  꺼지지

않는 법의 등불을 점하려 함이니, 이른바, “집 밖을 나서지 않고도 두 가지 이익에

모두 넉넉하다.” 한 것이다.

대사는 곧 수정(水精)한 개를 찾아내어 무량수 불상 앞에 걸어서 밝은 믿음을

표시하고, 그것으로 사(社)의 이름을 지었다.

 

송(宋)의 선화(宣和) 5년 계묘(癸卯)년 7월에 짓기 시작하여 건염(建炎) 3년 기유

(癸酉)년 10월에 준공하여 낙성법회(落成法會)를 3일간 베풀었다. 엄천사(嚴川寺)

수좌(首座)인 성선(性宣)을 청하여 경문을 강설하게 하였다. 임금께서는 동남해

안찰부사 기거사인 지제고(東南海按察副使起居舍人知制誥)인 윤언이(尹彦?)에게

명하여 분향을 행하고, 인하여 은 2백냥을 내리시어 이를 칭찬하였다.

이로부터 먼 곳과 가까운 곳에서 마음을 돌려 승려와 속인이 몰려 들어와서 교화가

성대히 실시되었는데 그 업적은 근세 이래로 드문 일이었다. 대사는 사(社)의 사업이

이미 이루어졌으므로, 대중과 더불어 상의하고 나라에서 명령을 내리시어 일정한

규정을 삼을 것을 청하였다. 그것은 곧 지금부터 덕을 이루어 가지고 사원(社院)에

거주하는 사람 중에서 번갈아 가면서 사주(社主)가 되는데, 기한은 3년 전후로

정하고 서로 교대하여 감히 어기지 못한다는 것이니, 이것은 오래도록 지속하기

위한 방법이다.

소흥(紹興)7년 정사(丁巳)에 대사는 사실을 기록한 것을 갖추어 가지고 청하여

아뢰기를, “중이 되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도를 행하는 것이 어려우며, 도를

행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그 때를 만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진억(津億) 등은 다행히 나라가 평화롭고 국경에 일이 없어 큰 도를 넓힐 수 있는

시대에 태어나서 편안히 살면서 깨끗한 공부를 닦았습니다. 옛적에 혜원(慧遠)이

사(社)를 세우고, 6백 년이 지난 뒤에야 성상(省常)이 있었고, 성상이 사(社)를 세운

지 1백40여 년만에 지금 수정사(水精社)가 일어났으니, 시대를 만나기 어려운 것이

이러합니다.

또한 동림(東林)의 모임에는 팽성(彭城)의 유도민(劉道民)이 맹세한 글을 지었고,

서호(西湖)의 모임에는 광평(廣平)의 송백(宋白)이 비명(碑銘)을 지었습니다. 지금

사(社)를 얽어 놓음에 있어 그 성대함이 동림과 서호와 더불어 시대는 다르나 그

내용은 같으니, 유신(儒臣)에게 명하시어 그 전말을 기록하도록 하여 영원히 없어

지지 않고 전하게 하신다면 또 거룩한 조정의 한 가지 좋은 일이 될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께서 그의 요청을 허락하시고, 순금으로 만든 탑(塔) 한자리와 양곡

1천 석을 내리시고, 특별히 친서(親書)로 비문(碑文)을 써서 내리시어 전에 없었던

영광이 되었다. 다시 중사(中使)를 보내시어 불아(佛牙)를 모셔 앉히어 높이 숭상

하는 뜻을 나타내시고, 신하 적(適)에게 명하여 “그 기(記)를 지으라.” 하였다.

 

신이 불민하나 또 한 사(社)의 객원의 한 사람으로 끼어 있는 지라, 명령을 받고

두려워 무어라 입에서 말이 나오지 않으므로, 우선 그 연월(年月)만을 기록하여

둔다.

[출처:동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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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적[權適 1094~1147]

본관 안동. 자 득정(). 청평산() 문수사(文殊)에서 당시 수재인 이자현

()과 교유하며 학문을 닦았다. 예종 때 유학생으로 송나라에 가서 태학()에

입학하여 수학하고, 송나라의 만인과()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올랐으나, 1117년

(예종 12) 귀국하였다.

벼슬은 국자좨주()·한림학사()를 거쳐, 검교태자태보()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