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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로운 글방/옛글과의 만남

발해고(渤海考)/유득공(柳得恭)

▣발해고(渤海考)/유득공(柳得恭)

-머 리 말

고려가『발해사』를 짓지 않았으니, 고려의 국력이 떨치지 못하였음을 알 수 있다.

옛날에 고씨가 북쪽에 거주하여 고구려라 하였고, 부여씨가 서남쪽에 거주하여 백제라
하였으며, 박·석·김씨가 동남쪽에 거주하여 신라라 하였다. 이것이 삼국으로 마땅히
『삼국사』가 있어야 했는데 고려가 이를 편찬하였으니 옳은 일이다. 부여씨가 망하고
고씨가 망하자 김씨가 그 남쪽을 영유하였고, 대씨가 그 북쪽을 영유하여 발해라 하였다.
이것이 남북국이라 부르는 것으로 마땅히『남북국사』가 있어야 했음에도 고려가 이를
편찬하지 않은 것은 잘못된 일이다.

무릇 대씨는 누구인가? 바로 고구려 사람이다. 그가 소유한 땅은 누구의 땅인가?

바로 고구려 땅으로, 동쪽과 서쪽과 북쪽을 개척하여 이보다 더 넓혔던 것이다. 김씨가
망하고 대씨가 망한 후에 왕씨가 이를 통합하여 고려라 하였는데, 그 남쪽으로 김씨의
땅을 온전히 소유하게 되었지만, 그 북쪽으로는 대씨의 땅을 모두 소유하지 못하여,
그 나머지가 여진족에 들어가기도 하고 거란족에 들어가기도 하였다.

이 때에 고려를 위하여 계책을 세우는 사람이 급히『발해사』를 써서, 이를 가지고
"왜 우리 발해 땅을 돌려 주지 않는가? 발해 땅은 바로 고구려 땅이다"고 여진족을
꾸짖은 뒤에 장군 한 명을 보내서 그 땅을 거두어 오게 하였다면, 토문강 북쪽의 땅을
소유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 이를 가지고 "왜 우리 발해 땅을 돌려 주지 않는가?
발해 땅은 바로 고구려 땅이다"고 거란족을 꾸짖은 뒤에 장군 한 명을 보내서 그 땅을
거두어 오게 하였다면, 압록강 서쪽의 땅을 소유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끝내『발해사』를 쓰지 않아서 토문강 북쪽과 압록강 서쪽이 누구의 땅인지
알지 못하게 되어, 여진족을 꾸짖으려 해도 할 말이 없고, 거란족을 꾸짖으려 해도 할
말이 없게 되었다. 고려가 마침내 약한 나라가 된 것은 발해 땅을 얻지 못하였기
때문이니, 크게 한탄할 일이다.

누가 "발해는 요나라에 멸망되었으니 고려가 무슨 수로 그 역사를 쓰겠는가?"고 말할지
모르나, 그렇지는 않다. 발해는 중국제도를 본받았으니 반드시 사관을 두었을 것이다.
또 발해 수도인 홀한성이 격파되어 고려로 도망해 온 사람들이 세자 이하 십여 만 명이나
되니, 사관이 없으면 반드시 역사서라도 있었을 것이고, 사관이 없고 역사서가 없다고
하더라도 세자에게 물어 보았다면 역대 발해왕의 사적을 알 수 있었을 것이며, 은계종에게
물어 보았다면 발해의 예법을 알 수 있었을 것이고, 십여 만 명에게 물어 보았다면 모르는
것이 없었을 것이다. 장건장은 당나라 사람이었으면서도 오히려『발해국기』를 지었는데,
고려 사람이 어찌 홀로 발해 역사를 지을 수 없었단 말인가?

아, 문헌이 흩어진 지 수백 년이 지난 뒤에 역사서를 지으려 해도 자료를 얻을 수 없구나.
내가 규장각의 관료로 있으면서 궁중의 비서를 많이 읽었으므로, 발해 역사를 편찬하여 왕,
신하, 지리, 관청 및 관직, 의식 및 복장, 물산, 국어, 국서, 후예 국가에 관해 고찰하는 아홉
목록의 글을 지었다. 이를 세가, 전, 지로 삼지 않고 고라 부른 것은, 아직 역사서로서 완성
하지 못하여 정식 역사서로 감히 자처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갑진년(1784) 윤삼월 이십오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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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고

1784년(정조 8) 유득공()이 한국 ·중국 ·일본의 사서() 24종을 참고하여 발해의
역사를 기록한 책.

1책. 내용은 군고() ·신고() ·지리고() ·직관고() ·
의장고() ·
물산고() ·국어고() ·국서고() ·속국고() 등 9고()로 나누어
정사()의 체계로 엮었다.

이 가운데 군고와 지리고 및 속국고 등은 내용에서 문제점이 있으나, 발해사()를
독립적으로 다루었다는 점과, 특히 자주적()인 입장에서 발해사를 체계화시키고
발해를 우리 국사의 영역으로 끌어들여 발해 고토()가 우리 영토라는 사료적 근거를
제공해 주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된다.

1910년
필사본으로 전해지던 것을 조선고서간행회()에서 영인 ·간행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