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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로운 글방/옛글과의 만남

한라산 유람기/면암 최익현

▣한라산 유람기

 

고종 10년(1873) 겨울에 나는 조정에 죄를 지어 탐라(耽羅)로 귀양을 갔다. 하루는 섬사람들과 산수(山水)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였는데, 내가 말하기를,

“한라산의 명승은 온 천하가 다 아는 바인데도 읍지(邑誌)를 보거나 사람들의 말을 들어 보면 구경한 이가 아주 적으니, 갈 수 없는 것인가? 아니면 가지 않는 것인가?”

하니, 그들이 대답하기를,


 

“이 산은 4백 리에 뻗쳐 있고 하늘에 닿을 듯 높이 솟아서 5월에도 눈이 녹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정상(頂上)에 있는 백록담(白鹿潭)은 여러 선녀들이 하늘에서 내려와 노는 곳으로 아무리 맑은 날이라 할지라도 항시 흰 구름이 서려 있습니다. 이곳이 바로 세상에서 영주산(瀛洲山)이라 일컫는 곳으로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에 들어가니 어찌 범상한 사람들이 용이하게 구경할 수 있겠습니까.”
 

하므로, 나는 이 말을 듣고 자신도 모르게 놀랐다.


그후 을해년(1875, 고종12) 봄에 나라의 특별한 은전(恩典)을 입어 귀양살이에서 풀려나게 되었다. 이윽고 한라산을 탐방할 계획을 정하고, 사인(士人) 이기남(李琦男)에게 앞장서서 길을 인도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일행은 어른이 10여 명에 종 5, 6인이 따랐으며, 출발 시기는 3월 27일이었다.


일행이 남문(南門)을 출발하여 10리쯤 가니 길가에 개울이 하나 있는데, 이는 한라산 북쪽 기슭에서 흘러내리는 물들이 모여서 바다로 들어가는 것이다. 드디어 언덕 위에 말을 세우고 벼랑을 의지하여 수십 보를 내려가니, 양쪽 가에 푸른 암벽이 깎아지른 듯이 서 있고 그 가운데에 큰 돌이 문 모양으로 걸쳐 있는데, 그 길이와 너비는 수십 인을 수용할 만하며, 높이도 두 길은 되어 보였다. 그 양쪽 암벽에는 ‘방선문(訪仙門)ㆍ등영구(登瀛丘)’란 6자가 새겨져 있고 또 옛사람들의 제품(題品)들이 있었는데 바로 한라산 10경(景) 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문의 안팎과 위아래에는 맑은 모래와 흰 돌들이 잘 연마되어 그 윤기가 사람의 눈을 부시게 하였고, 수단화(水團花)ㆍ철쭉꽃이 열을 지어 좌우로 심어져 있는데 바야흐로 꽃봉오리가 탐스럽게 피어나고 있으니, 역시 비할 데 없는 기이한 풍경이었다. 한참 동안 풍경에 취해 두리번거리며 조금도 돌아갈 뜻이 없었다.


다시 언덕으로 올라와 동쪽으로 10리쯤 가니 죽성(竹城)이라는 마을이 나왔는데 꽤 즐비한 인가가 대나무에 둘러싸여 있었다. 큰 집 한 채를 얻어 숙소를 정하니 날이 저물었다. 하늘이 캄캄하고 바람이 고요한데 비가 올 기미가 있어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을 지새웠다.


새벽에 일어나 종자에게 날씨를 살펴보라고 했더니, 어제 초저녁보다 오히려 심한 편이라는 대답이었다. 그리고 바로 돌아갔다가 후일에 다시 오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는 자가 열에 칠팔은 되었다.
나는 억지로 한 잔의 홍조(紅潮 술인 듯함)를 마시고는 드디어 여러 사람의 의사를 어기고 말을 채찍질하여 앞으로 나아가니, 돌길이 꽤 험하고도 좁았다. 5리쯤 가니 큰 언덕이 있었는데 이름이 중산(中山)으로, 대개 관원들이 산을 오를 적에 말에서 내려 가마를 갈아타는 곳이었다.


여기에 이르니 갑자기 검은 구름이 걷히고 햇빛이 새어 나와 바다의 경치와 산 모양이 차례로 드러나기에 말을 이성(二成)을 시켜 돌려보냈다. 가벼운 옷차림으로 짚신에 지팡이를 짚고서 올라가는데, 주인 윤규환(尹奎煥)은 다리가 아파서 돌아가기를 청했고 나머지는 모두 일렬로 내 뒤를 따랐다. 한줄기 작은 길이 나무꾼과 사냥꾼들의 내왕으로 조금의 형태는 있었지만, 갈수록 험준하고 좁아서 더욱 위태로웠다. 구불구불 돌아서 20리쯤 가니 짙은 안개가 모두 걷히고 날씨가 활짝 개었다. 그러자 일행 중에 당초에 가지 말자고 하던 자들이 날씨가 좋다고 하므로 나는,

“이 산을 중도에서 가고 가지 않는 것이 모두 이들의 농간에서 나왔으니 어찌 조용히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여기서 조금 앞으로 나아가니 계곡의 물이 바위 밑에서 쏟아져 나와 굽이굽이 아래로 흘러갔다. 평평한 돌 위에 잠시 앉아 갈증을 푼 뒤에 계곡의 물을 따라 서쪽으로 갔다. 돌비탈길을 몇 계단 넘고 또 돌아서 남쪽으로 가니, 고목을 덮은 푸른 등(藤)나무 덩굴과 어지럽게 우거진 숲이 하늘을 가리고 길을 막아서 앞으로 갈 수가 없었다. 이런 데를 10여 리쯤 가다가 우연히 가느다란 갈대가 숲을 이루고 있는 것을 보았는데 아름다운 기운이 사람을 엄습해 왔으며 또 앞도 확 트여서 바라볼 만하였다.


다시 서쪽으로 향하여 1리쯤 가니 우뚝 솟은 석벽이 대(臺)처럼 서 있는데, 뾰족하게 솟은 것이 수천 길은 되어 보였다. 이는 삼한(三韓) 시대의 봉수(烽燧) 터라고 이르지만 근거될 만한 것이 없고 또 날이 저물까 염려되어 가 보지 못하였다.


또 몇 보를 나아가서 가느다란 계곡의 물줄기를 하나 발견했다. 위에서 흘러내린 물의 흔적을 따라 위로 올라가니 얼음과 눈이 특출나게 빛나고 여러 잡목들이 위와 옆으로 뒤덮여 있어 머리를 숙이고 기어가느라고 몸의 위험이나 지대가 높은 것을 알지 못하였는데, 이렇게 모두 6, 7리를 나아갔다.
여기에 이르니 비로소 상봉(上峯)이 보이는데 흙과 돌이 서로 섞이고 평평하거나 비탈지지도 않으며 원만하고 풍후한 봉우리가 가까이 이마 위에 있었다. 봉우리에 초목이 나지 않았고 오직 푸른 이끼와 담쟁이 넝쿨만이 돌의 표면을 덮고 있어서 앉아 휴식을 취할 만하였다. 높고 밝은 전망이 확 넓게 트여서 해와 달을 옆에 끼고 비바람을 어거할 만할 뿐 아니라, 의연히 진세의 세상을 잊고 홍진에서 벗어난 뜻을 간직하고 있었다.


얼마 후 검은 안개가 컴컴하게 몰려오더니 서쪽에서 동쪽으로 산등성이를 휘감았다. 나는 괴이하게 여겼지만, 이곳에까지 와서 한라산의 진면목을 보지 못한다면 이는 바로 구인(九仞)의 공이 한 삼태기에서 무너지는 꼴이 되므로, 섬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마음을 굳게 먹고 곧장 수백 보를 전진해 가서 북쪽 가의 오목한 곳에 당도하여 상봉(上峯)을 바라보았다. 여기에 이르러서 갑자기 중앙이 움푹 팬 구덩이를 이루었는데 이것이 바로 백록담(白鹿潭)이었다. 주위가 1리를 넘고 수면이 담담한데 반은 물이고 반은 얼음이었다. 그리고 홍수나 가뭄에도 물이 줄거나 불지 않는데, 얕은 곳은 무릎이, 깊은 곳은 허리에 찼으며 맑고 깨끗하여 조금의 먼지 기운도 없으니 은연히 신선이 사는 듯하였다. 사방을 둘러싼 산각(山角)들도 높고 낮음이 모두 균등하였으니 참으로 천부(天府)의 성곽이었다.


석벽에 매달려 내려가서 백록담을 따라 남쪽으로 가다가 털썩 주저앉아 잠깐 휴식을 취했다. 일행은 모두 지쳐서 남은 힘이 없었지만 서쪽을 향해 있는 가장 높은 봉우리가 절정이었으므로 조심스럽게 조금씩 올라갔다. 그러나 따라오는 자는 겨우 3인뿐이었다. 이 봉우리는 평평하게 퍼지고 넓어서 그리 까마득하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위로는 별자리를 핍박하고 아래로는 세상을 굽어보며, 좌로는 부상(扶桑)을 돌아보고 우로는 서양을 접했으며, 남으로는 소주(蘇州)ㆍ항주(杭州)를 가리키고 북으로는 내륙(內陸)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그리고 옹기종기 널려 있는 섬들이 큰 것은 구름만 하고 작은 것은 달걀만 하는 등 놀랍고 괴이한 것들이 천태만상이었다.


《맹자(孟子)》에 ‘바다를 본 자는 기타의 물이 물로 보이지 않으며 태산(泰山)에 오르면 천하가 작게 보인다.’ 하였는데 성현의 역량을 어찌 우리가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또 소동파(蘇東坡 소식(蘇軾))에게 당시에 이 산을 먼저 보게 하였다면 그의 이른바,


허공에 떠 바람을 어거하고 / 憑虛御風
신선이 되어 하늘에 오른다 / 羽化登仙
는 시구가 적벽(赤壁)에서만 알맞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가 회옹(晦翁 주자를 가리킴)이 읊은,
낭랑하게 읊조리며 축융봉을 내려온다 / 朗吟飛下祝融峯
라는 시구를 외며 다시 백록담 가로 되돌아오니, 종자들이 이미 밥을 정성스럽게 지어 놓았다. 곧 밥을 나누어 주고 물도 돌렸는데 물맛이 맑고도 달기에 나는 일행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이 맛은 금장 옥액(金漿玉液 신선이 먹는 선약(仙藥))이 아니냐?”

하였다.


북쪽으로 1리 지점에 혈망봉(穴望峯)에 전인들의 이름을 새긴 것이 있다고 하는데, 해가 기울어 시간이 없으므로 가 보지를 못하고 산허리에서 옆으로 걸어 동쪽으로 석벽(石壁)을 넘는데 벼랑에 개미처럼 붙어서 5리쯤 내려갔다. 그리고 산남(山南)으로부터 서지(西趾)로 돌아들다가 안개 속에서 우러러보니 백록담을 에워싸고 있는 석벽이 마치 대나무를 쪼개고 오이를 깎은 듯이 하늘에 치솟고 있는데, 기기괴괴하고 형형색색한 것이 모두 석가여래가 가사(袈裟)와 장삼(長衫)을 입은 모습이었다.
20리쯤 내려오니 이미 황혼이 되었다. 내가 말하기를,

“듣건대 여기서 인가까지는 매우 멀다 하며 밤 공기도 그리 차지 않으니 도중에 길거리에서 피곤해서 쓰러지는 것보다는 차라리 잠시 노숙하고서 내일 일을 홀가분하게 하는 것이 어떠한가?”

하니, 일행이 모두 좋다고 하였다. 드디어 바위에 의지해서 나무를 걸치고 불을 피워 따뜻하게 한 뒤에 앉아서 한잠을 자고 깨어 보니 벌써 날이 새어 있었다. 밥을 먹은 뒤에 천천히 걸어가는데 어젯밤 이슬이 마르지 않아서 옷과 버선이 다 젖었다. 얼마 후 또다시 길을 잃어 이리저리 방황하였는데 그 고달픔은 구곡양장(九曲羊腸)과 십구당(十瞿塘 양자강 상류에 있는 험한 협곡) 같았으나 아래로 내려가는 형편이어서 어제에 비하면 평지나 다름이 없었다.


또 10리를 내려와서 영실(瀛室)에 이르니 높은 봉우리와 깊은 골짜기에 우뚝우뚝한 괴석들이 웅장하게 늘어서 있는데 모두가 부처의 형태였으며 백이나 천 단위로는 헤아릴 수가 없었다. 이는 바로 천불암(千佛巖) 또는 오백장군(五百將軍)이라고도 불리는 곳으로 산남(山南)에 비교해 보면 이곳이 더욱 기이하고 웅장하였다. 그리고 산밑 길가에는 얕은 냇물이 바다로 흘러 들어가고 있었는데 다만 길가에 있었기 때문에 매우 얕게 드러나 있었다. 풀밭에 앉아서 얼마쯤 쉬다가 이윽고 출발하여 20리를 걸어 서동(西洞)의 입구를 나오니 영졸(營卒)들이 말을 끌고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인가에 들어가서 밥을 지어 요기를 하고 날이 저물어서야 성으로 돌아왔다.


대개 이 산은 백두산(白頭山)을 근원으로 하여 남으로 4천 리를 달려 영암(靈巖)의 월출산(月出山)이 되고 또 남으로 달려 해남(海南)의 달마산(達摩山)이 되었으며, 달마산은 또 바다로 5백 리를 건너 추자도(楸子島)가 되었고 다시 5백 리를 건너서 이 산이 된 것이다. 이 산은 서쪽으로 대정현(大靜縣)에서 일어나 동으로 정의현(旌義縣)에서 그치고 중간이 솟아 절정(絶頂)이 되었는데, 동서의 길이가 2백 리이고 남북의 거리가 1백 리를 넘는다.


어떤 이는 산이 지극히 높아 하늘의 은하수를 잡아당길 만해서 한라산이라 이른다고 하고 어떤 이는 이 산은 성품이 욕심이 많아서 그해 농사의 풍년과 흉년을 관장(官長)의 청탁(淸濁)을 살펴보면 알 수 있으며, 외래의 선박이 여기에 정박하면 모두 패하여 돌아가므로 탐산(眈山)이라 이른다고 하며, 또 어떤 이는 이 산의 형국이 동쪽은 말, 남쪽은 부처, 서쪽은 곡식, 북쪽은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하는데 모두 근거 없는 말들이다. 그중에서 오직 형국설(形局說)만을 가지고 비슷한 점을 찾아본다면, 산세가 구부러졌다가 펴지고 높았다가 낮아지는 것이 마치 달리는 듯한 것은 말과 비슷하고, 깎아지른 바위가 층층이 쌓인 절벽이 나란히 늘어서서 두손을 부여잡고 예를 표하는 모습은 부처와 비슷하다. 평평하고 툭 터진 곳에 산만하게 활짝 핀 듯한 것은 곡식과 비슷하고, 북을 향해 껴안은 듯한 산세가 곱고 수려함은 사람과 비슷하다. 그러므로 말은 동쪽에서 생산되고 불당은 남쪽에 모였으며, 곡식은 서쪽이 잘되고 인걸은 북쪽에 많을 뿐더러 나라에 대한 충성심도 각별하다는 것이다.


이 섬은 협소한 외딴섬이지만 대해(大海)의 지주(砥柱)이며, 3천 리 우리나라의 수구(水口)며 한문(捍門)이므로 외적들이 감히 엿보지를 못한다. 그리고 산과 바다에서 생산되는 진귀한 음식 중에 임금에게 진공(進供)하는 것이 여기에서 많이 나온다. 공경대부와 백성들이 일상생활에 소요되는 물건과 경내 6, 7만 호가 경작하고 채굴하는 것도 이곳에서 자급자족이 된다. 그 이택(利澤)과 공리(功利)가 백성과 나라에 미치는 것이, 금강산이나 지리산(智異山)처럼 사람에게 관광을 제공하는 산들과 함께 놓고서 말할 수 있겠는가. 다만 이 산은 궁벽하게 바다 가운데 있어서 청고(淸高)하고 기온도 많이 차므로, 지기가 견고하고 근골이 강한 자가 아니면 결코 올라갈 수가 없다. 그리하여 산을 올라간 사람이 수백 년 동안에 관장(官長) 몇 사람에 불과했을 뿐이어서 옛날 현인들이 거필(巨筆)로는 한번도 그 진면목이 발휘된 적이 없다. 그런 까닭에 세상의 호사자들이 신산(神山)이라는 허무하고 황당한 말로 어지럽힐 뿐이고 다른 면은 조금도 소개되지 않았으니, 이것이 어찌 이 산이 지니고 있는 본연의 모습이겠는가. 우선 이 말을 써서, 구경을 가고 싶은데도 못가는 자들에게 고하는 것이다.

을해년(1875, 고종12) 5월에 최익현 찬겸(崔益鉉贊謙)은 적는다.

[주D-001]구인(九仞)의 …… 꼴 : 오랜 공을 들인 일이 한 번의 실수로 허사가 되어 버림의 비유. 높이가 9인(仞), 곧 72척의 산을 쌓는데 한 삼태기의 흙이 부족하면 완성하는 최후의 순간에 가서 실패함을 뜻한다. 《書經 旅獒》

[주D-002]바다를 …… 보인다 : 성인의 도가 큰 것을 말한다. 자신이 처하여 있는 곳이 높으면 그 아래는 더욱 작게 보이고, 자신이 본 바가 크면 작은 것은 보잘것없다는 말이다. 《孟子 盡心上 註》
[[민족문화추진회 번역/면암선생문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