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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로운 글방/옛글과의 만남

[고전향기]소보다 귀한 나귀

◈소보다 귀한 뜻

 2009. 03. 16. (월)

    

 옛 사람들은 주변의 사물을 보고 그 이면의 진리에 대해 생각하였다. 조선 후기의 문인 권상신(權常愼)은 함부로 부리는 소와 애지중지하는 나귀를 보고 인간사의 문제를 생각하였다.    

 나귀는 소에 비하여 힘이 약한 동물이라, 무거운 것을 싣거나 멀리 갈 수가 없으며, 성질 또한 경박하고 괴팍하다. 이 때문에 고귀한 집안의 자제들을 태우는 일은 나귀가 오로지 도맡아 한다. 사람들은 경쟁적으로 나귀를 좋아하여 그 값이 늘 큰 소보다 윗자리에 있다. 민간의 비천한 백성들은 비록 돈이 있어도 감히 나귀를 사서 탈 수 없다. 그러니 나귀의 등은 귀하다 하겠다.

농부는 소의 힘이 아니면 농사를 짓지 못하고, 사람들은 곡식을 먹지 못하면 죽게 되니, 소 또한 귀하게 여길 만하다. 그러나 곡식을 수북하게 쌓아놓은 부자들은 즐겨 소를 잡아 제 몸을 살찌우는 일을 하고, 그 아들과 손자는 또 곡식을 돈으로 바꾸어 나귀를 사서 제 몸을 태운다. 그 아들과 손자 중에는 곡식을 가지고서 제 나귀를 사육하기까지 한다.


괴상하지 않은가? 사람들이 소를 천시하고 나귀를 중시하는 것이 그 외모 때문에 그러한가? 나귀는 비단이 아니면 안장에 깔지 않고, 오색실이 아니면 고삐로 쓰지 않는다. 붉은 끈을 흔들면서 부드러운 고삐를 드리운 채 의관을 잘 갖추어 입은 이가 나귀를 타니, 사람들은 모두들 “나귀가 참 아름답다.”고 한다. 소는 코를 뚫고 튼튼한 나무로 목덜미를 잡아매고 거친 새끼줄로 겹겹이 얽어맨 채, 벌겋게 살갗이 탄 사람이 재촉을 해대니, 사람들은 모두들 “소가 참 사납다.”고 한다.


아, 나귀가 아름답고 소가 사나운 것은 곧 사람이 그렇게 만든 것이요, 또 그렇게 됨에 따라 아름답게도 여기고 사납게도 여기는 것이다. 어찌 그리 생각이 짧은가? 소는 그 힘을 써먹고 그 고기를 먹는데 나귀는 그 장식을 화려하게 하고 그 외모를 사랑하니, 심히 옳지 못한 일이라 하겠다. 어떤 이는 중국 사람들은 소를 귀하게 여기고 나귀를 천하게 여긴다고 한다. 중국 사람들은 과연 귀하게 여길 것과 천하게 여길 것을 아는 것일까?      

 

 - 권상신(權常愼),〈나귀와 소에 대한 이야기(驢牛說)〉,《서어유고(西漁遺稿)》   

   

 [해설]   

 권상신(17591824)은 본관이 안동이며, 자는 경호(絅好), 호는 일홍당(日紅堂) 혹은 서어(西漁)라 하였다. 재주가 뛰어나 과거에 세 번 내리 장원을 하여 삼장장원(三場壯元)으로 불렸고, 벼슬은 판서에 이르렀다. 남공철(南公轍), 심상규(沈象奎), 김희순(金羲淳), 홍한주(洪翰周), 김조순(金祖淳), 심노숭(沈魯崇), 김이양(金履陽) 등 문사들과 교유하였다. 개성적인 문학 세계를 구축한 문인으로 아직 자세한 연구가 이루어진 바 없지만 좋은 글을 많이 남겼다.

조선시대 나귀는 위(衛) 혹은 장이(長耳)라고도 불렀다. 노새와 함께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중요하게 여긴 탈 것이었고, 천한 사람들은 타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이에 비하여 중국에서는 노새를 천하게 여겨 가난한 서생이나 하층민, 여성들이 탔으며 물건을 나르거나 수레를 끄는 데도 썼다. 《오주연문장전산고》에 이에 대한 자세한 고증이 실려 있다.


권상신은 이러한 나귀를 소와 비교하였다. 소는 거친 나무로 멍에를 씌운 채 벌겋게 살갗이 탄 농부들이 열심히 부려 먹고 또 나중에는 소를 잡아 그 고기를 먹는다. 나귀는 고운 비단과 오색실로 치장을 요란하게 한 채 권귀한 자들이 타고 다닌다. 소는 농사를 지어 곡식을 수확하는 데 없어서는 아니 될 존재이므로 사람들이 귀하게 여겨야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 부자들은 오히려 곡식을 팔아서 나귀를 사서 타고 또 비싼 곡식으로 나귀를 사육하면서 애지중지한다. 과연 소가 귀한가, 나귀가 귀한가? 권상신은 이러한 문제를 들어 실용을 천시하고 허례허식을 좋아하는 세태를 풍자하고 있다.  

   

 글쓴이 / 이종묵

* 서울대학교 국문학과 교수

* 저서(역서)

- 해동강서시파연구, 태학사, 1995.

- 한국 한시의 전통과 문예미, 태학사, 2002.

- 누워서 노니는 산수, 태학사, 2002.

- 浮休子談論, 홍익출판사, 2002.

- 조선의 문화공간(1-4), 휴머니스트, 2006.

- 우리 한시를 읽는다, 돌베개, 2008

[한국고전번역원 편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