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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山 情 無 限

여원재 옛길, 철조망 유감


           [여원재. 백두대간마루금과 이순신장군 백의종군로가 교차로 지나간다. 고갯마루 곳곳에 이곳의 역사적 의미를 알리는 설치물

           들이 들어서 있다.]


 

여원재 옛길, 철조망 유감

 

남원시 이백면과 운봉읍 사이에는 백두대간 고개 여원재가 있다. 고개를 의미하는 한자어 ()‘를 사용하여 여원치로 부르기도 하고, 이곳 인근의 마을사람들은 연재라 하기도 한다. 국도24호선이 지나가는 해발고도 480m의 고갯마루에는 여원재라는 안내판이 서있고, 고개 바로 아래에 있는 마애불상 안내판에는 여원치마애불상라는 이름이 붙여져 있어 다소 혼란스럽기도 하다. 필자는 국토교통부에서 만든 이정표 상의 이름인 여원재를 쓰고는 있으나, 개인적인 견해로는 여원(女院)이 한자어이므로 고개도 한자인 를 쓰는 게 옳다고 본다



 

 

나는 오래전부터 지리산 유람록의 옛사람들이 걸었던 지리산 옛길을 공부하면서 여원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이 고개로 이어지는 길의 역사성에 주목하게 되었다. 남원-운봉-함양의 영호남이 이어지는 통로 역할을 하는 이곳으로는 서울과 통영을 잇는 조선시대 6로인 통영별로가 지나갔고, 나라에서는 이 길의 동서(東西) 쪽인 이백면에 응령역, 운봉현에 인월역의 역참을 두어 공무 등으로 여행하는 자들의 편의를 제공하였다. 이와 같이 여원재로 이르는 옛길은 옛사람들의 수많은 삶의 발자취가 고스란히 남겨져 있다.

 

이렇듯 큰 길의 큰 고갯마루인 여원재는 고려말 이성계의 황산전투, 임진왜란 7년 전쟁, 동학농민운동, 6.25전쟁을 전후한 빨치산 활동 등, 한반도를 뒤흔든 굵직한 역사적 사건의 전개에 어김없이 등장한다. 마치 우리 역사의 타임캡슐과도 같은 곳이라 하겠다.

 

그런가하면 여원재는 백두산에서 뻗어 내린 백두대간마루금이 마지막으로 거대한 산줄기를 이루는 지리산으로 들어서는 길목이다. 지리산이 두류산(頭流山, 頭留山)이라는 다른 이름을 지니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또 이 백두대간마루금과 함께하는 지리산 산줄기는 지리산을 끼고 있는 5개 시군 지역을 낙동강과 섬진강이라는 큰 강의 수계로 나누기도 한다. 그 중 남원시는 두 강의 수계를 모두 지니고 있는 자연생태적으로도 매우 의미 있는 곳이기도 하다.(구례군도 좁은 지역이지만 낙동강 수계가 있으나(심원), 남원의 지형적 특성과는 차이가 있다)

 

운봉읍에서 흐르는 람천이 낙동강으로 흘러 부산 앞바다로 흐른다구요?’

그렇다!

 

현재 이 여원재로는 국도24호선이 지나간다. 서해안 전남 신안에서 동해안 울산광역시를 잇는 이 도로의 중간 부분에 전남 담양-전북 순창-남원-경남 함양-거창-합천으로 이어진다. 이 길은 남원시 이백면에서 고도를 높이며 여원재로 구불구불 이어지는데, 이 도로의 남쪽 산자락 아래로 역사의 숨결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옛길이 있다. ‘여원재 옛길이다.

 

이 길은

고려 말, 함양을 점령한 왜구들이 운봉을 지나 남원성으로 향해 하던 길이자, 이성계 장군이 이들을 토벌하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운봉으로 향하던 길이다.

 

임진왜란 발발 이듬해 진주성을 함락한 왜군이 남원성을 기웃거리기 위하여 지나던 길이자, 경북 성주에 주둔하던 명나라장수 유정이 남원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하여 지나가던 길이다. 유정은 이 길을 지나간 사실을 옛길에 있는 거대한 바위에 1593(계사년) ‘유정과차’, 1594(갑오년) ‘유정부과를 새겨 놓았고, 함양 사근역 찰방을 하며 한양을 오고가던 정조임금 대의 이덕무도 그의 저서 청장관전서에 이러한 사실을 확인하며 남겨두었다



                                          [유정과차 각석]

 

또 정유재란이 발발하며 이순신 장군이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되어가던 길이자, 한양 의금부에서 풀려나와 합천 권율 도원수의 군진으로 백의종군하기 위하여 지나갔던 길이기도 하다.

 

그리고 운봉사람들이 남원장을 보기 위해 넘나들거니, 소를 몰고 남원과 운봉, 함양으로 오고가던 민초들의 삶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오랜 역사의 길이자 삶의 길인 것이다.

 

하지만 수십 년 전,

사람들은 이 길을 버렸고, 길은 스스로 몸을 감추어 버렸다.

 

8년 전, 방송통신대학교 문화교양학과의 역사의 현장을 찾아서’ ‘지리산편 방송교재 제작에 참여했던 나는, 촬영의 시작을 상징성이 있는 이곳 여원재에서 하였고, 작년 초 출간된 전자책 조용섭의 지리산이야기의 첫머리도 역시 여원재로 할 정도로 오랫동안 이 고개의 이야기에 빠져 있었다.

 

그러던 중, 직접 옛길을 찾아 이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수차례 시도를 하였지만, 길의 아래쪽으로는 키를 넘는 갈대를 뚫지 못했고, 위쪽으로는 서로 엉켜 빽빽이 길을 막고 있는 수림과 사정없이 몸을 긁으며 상처를 내는 가시나무를 당하지 못하고, 튕겨져 나오듯 탈출을 하여야만 했다. 혼자 힘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인터넷, 언론 등 곳곳에 여원재 옛길은 복원되어야 한다라는 내용을 넌지시 알리고는 남원시청 관광과로 향했다. 여원재 옛길을 포함한 남원권 이순신장군 백의종군로 복원 기획서를 들고 간 것이다.

 

다행히 남원시 관광과에서 옛길 복원작업과 이정표 설치에 들어가는 예산을 확보하겠으니, 길 조성에 협조를 하여달라는 회신이 왔다. 이렇게 하여 약 3개월 여 남원권 이순신 장군 백의종군로를 복원 및 조성작업에 참여하였고, 정유재란 발발 420주넌 되던 작년에 이 의미있는 작업은 잘 마무리되었다. 길의 복원조성은 이순신 연구소의 고증 이순신 장군 백의종군로를 기준으로 하였고, 특히 여원재 옛길은 길 들머리인 이백면 목가리에 살고 있는 주민들과 동행하며 길을 이었다.




 

농업용 저수지인 이백면 양가제에서 여원재에 이르는 약 3Km의 여원재 옛길은 작은 계곡과 함께하는 아름다운 길이다. 가볍게 산책하듯 걸어도 좋은 길이고, 길 곳곳에는 앞에서 언급했던 유정장군이 지나가며 바위에 새겼다는 글, ‘나주임씨삼세충의비각석, 그리고 여원치마애불상 등의 유물유적이 있어 역사를 회고하거나 교육공간으로 활용하기에도 멋진 길이다. 필자는 온오프라인을 통해 곳곳에 이 길의 복원을 알리고 있으며, 또 남원권 백의종군로 답사 손님을 맞이하고 있는 중이다. 최근 이 소식을 접한 사람들이 조금씩 찾아들기 시작하였고, 자신들의 블로그 등에 답사기록을 남기고 있는 것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2017년 11월, 남원시민 이순신백의종군로 걷기행사] 

 

그런데 지난 가을, 서울에서 이순신 장군 백의종군로 중, 여원재 옛길을 답사하기 위해 방문한 분들을 안내하기 위하여 길을 들어선 필자는 무참한 일을 당하고 말았다. 뜻밖에도 섬뜩한 철조망이 이중으로 길을 막고 있었던 것이다.

 

작년 가을부터 여원재 옛길답사 발길이 이어지자, 인근의 수목원에서 사유지라며 길의 입구에 철조망을 쳐놓았었다. 옛길은 지목이 도로로 되어있으며, 엄연히 국유지인데 무슨 일일까 하는 의구심이 일었지만, 일단은 철조망을 우회하는 길을 내어 이었는데, 이번에는 그 위의 길목에 또 철조망을 이중으로 설치하여 놓은 것이다.

 





 

몇 달 전, 시청관계자와 수목원을 방문하여 백의종군로와 여원재 옛길의 역사성을 이야기하며 철조망을 치워달라고 정중히 요청을 하였지만, 오히려 길을 더 꽁꽁 막아버린 것이다. 그런데 더 놀랄 일은 최근 정확한 길 확인을 위해 국토정보원직원, 시청관계자와 함께 옛길에 접어들었을 때 벌어졌다.

 

이제 철조망을 우회하여 놓은 길마저도 철조망으로 막아놓아 산자락을 삼중으로 봉쇄하여 놓은 것이다.

 

먼저 밝힐 것은, 이런 역사의 흔적이 서려있는 길이 사유지를 통과한다면, 답사의 편의를 위해 소유자의 양해로 길을 좀 내어달라는 것이고, 아니면 지금도 지목이 엄연히 국유지 도로로 되어있는 길을 찾아, 다소 변형되어있을 수도 있는 길을 수정해서 다시 옛길을 잇겠다는 것이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국유지인 도로를 사들였거나, 또는 수목원에서 도로를 무단 점용해서 사용하고 있었다면 누군가는 잘못된 업무처리로 곤혹스러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국유지인 도로가 들어있는 온 산자락을 흉물스러운 삼중의 철조망으로 막고 있는 수목원의 저의가 뭘까? 은밀히 산자락 전체를 그들만의 왕국으로 경영하려던 계획이 깨어질까 조바심이 난 것일까.

 

아무리 뜻이 좋은 일이라고 해도, 땅의 주인이 반대하면 무단 침범하면서까지 길을 이을 생각은 추호도 없다. 오히려 국유지인 옛길을 찾아내어 다시 길을 이으면 될 일이다. 하지만 타협이 어려운 일임을 감지한 남원시청에서 지목을 맞추고 길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이렇듯 보기에도 끔찍한 철조망을 삼중으로 쳐놓은 수목원의 처사는 참으로 유감이다. 이 수목원은 L*그룹에서 분가한, 패션을 주요업종으로 하는 대기업계열사가 주인이라고 하는데, 참으로 오만하기 짝이 없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국유지인 옛길을 찾을 때까지라도 기다려주었으면 하였던 바람이 삼중의 철조망에 걸려 갈갈이 찢어져 버렸다. 국토정보원의 유권해석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며 꾹 누르고 있던 마음이 그저께 백의종군로가 철조망에 막혀있어 갈 수가 없다는 남원시민의 제보에 북받쳐 그 유감스런 행태의 전말을 일단 이렇게 알리는 바이다.

 

 

2018. 12. 12

지리산권 마실/조용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