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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山 情 無 限

10월의 쥐똥나무를 보며

 

 

 

 

날씨가 갑자기 추워졌다. 오늘 신새벽, 서늘해진 등짝에 잠을 깼다. 늘 열어놓던 나의 우거(寓居)의 창문이 방안 온기를 알싸한 먹청의 대기로 퍼 나르고 있었던 모양이다. 겨우 나의 체온 하나로 유지되는 소박한 온기를...

 

그나저나 다시 눈을 붙이기란 힘들 일이겠다는 생각이 들자, 어제부터 떠오르던 숙제 하나를 붙잡았다.

 

보름 전, 조합법인 사무실 인근에 있는 학교담장 옆 주차공간에 차를 세우고 나올 때였다. 학교담장을 두르며 서있는 녀석들에게서 문득 생글거리는 움직임이 있어 눈을 맞추었다.

 

 

 

아, 언제부터 이러고 있었을까...

 

올해 늦봄과 초여름 사이, 은은한 흰색으로 피어나 아름다운 향기를 내보내던 녀석들의 모습을 담아두고는 소개도 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오늘 이런 모습으로 나를 부르는 것이다. 마치 채근하듯. 요 윤기 나는 예쁜 녀석들이 가을을 지나면서 제 이름을 갖게 되는 모습으로 변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연록의 열매가 검은색으로 변해 마치 쥐똥처럼 보이게 된다는 사실은 별 일은 아닌 듯한데, 열매가 변한 모습을 ‘아름다움과 추함’으로 단정지어 사람의 시각으로 느낌을 형상화하는 일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생각해 본다. 쥐똥이라는 이름이 온당치 않다고 온 동네방네 마치 구명운동이라도 하는 듯 떠들고 있는 나부터 그러하다.

 

시절의 흐름과 함께 그 시절에 맞는 모습이 필요함은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그러할 진데 말이다. 우리 인간들도 시간의 흐름에 따른 자신들의 변화를 ‘추함’으로서만 받아들이지는 않지 않은가. 하기사 나무 이름 하나 가지고 괜스레 이런 이야기를 풀어놓는 나 자신도 여전히 고장관념의 틀에 박혀있고, 덜 깨어있음이리라.

 

이번에 요 녀석은 올 여름 한철 질펀하게 잘 놀다가 세상을 떠나는 여행자를 품고 있다. 미동도 않는 녀석의 몸에는 아직도 윤이 가시질 않았다. 잘 가시라!

 

 

 

그렇구나, 손발과 날개 달고 거침없이 세상을 휘돌던 것들은 이렇게 가버리고 말건만, 너네들은 다시 또, 또 다시 이곳에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겠구나.

 

그러니 쥐똥이면 어떠하랴!

 

2013. 10. 15

두류/조용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