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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로운 글방/옛글과의 만남

공부로 인한 병(蒸室記)/최충성(崔忠成)

[고전의 향기 - 여든여덟번째 이야기]

공부로 생긴 병
[한국고전번역원]/ 2009. 11. 16. (월)
 
   
   작년 연말 호질기의(護疾忌醫)라는 낯선 말이 유행하였다. 병을 감추고 의사를 찾지 않는 것도 문제지만, 그 병을 정확하게 치료해줄 방도를 찾지 않고 서툰 아마추어의 말을 듣다가 병을 덧나게 하는 것도 큰 문제다. 찬 방에서 너무 공부를 많이 하다 병이 든 최충성(崔忠成)이라는 사람은 한증막을 만들어 병을 치료하려 하다 오히려 병이 깊어졌다.
   
   
   병이 들었으면 치료하는 것이 사람의 정이요, 치료하면 낫게 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다. 병이 들었는데도 치료할 수 없고 치료하지만 근실하지 못한 것은 부모님이 물려주신 육체를 길거리에 버리는 것이라 하겠다. 그리고 치료를 근실하게 하지만 도리어 덧나는 것은 그 또한 불행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누가 그 책임을 질 것인가? 이제 내가 그러한 예이다.

  내가 남아로 태어나 세상에 뜻을 품어 나이가 채 열둘이 안되었을 무렵, 형을 따라 서울로 공부하러 갔다. 두세 명의 벗과 사귐을 맺고 성균관에서 책을 읽었는데, 문방도구는 깔끔하였지만 서재가 차서, 틈으로 들어오는 바람과 냉기가 살갗과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장성하고 나서는 성현의 책을 읽고 제자백가의 글을 이해하여 옛사람의 원대한 의지와 도량을 알게 되었다. 비록 한 줌의 흙과 한 덩이의 돌과 같은 사소한 것이라도 이를 보고서 그 지식을 축적하고자 하면서, 발분하여 고인을 본받고자 하였다. 계묘년(1483)에는 월출산(月出山)으로, 갑진년(1484)에는 용암산(湧巖山)으로, 을사년(1485)에는 한양의 삼각산(三角山)과 백악(白嶽), 송도의 천마산(天磨山)과 성거산(聖居山)으로, 병오년(1486)에는 서석산(瑞石山, 무등산)으로, 정미년(1487)에는 두류산(頭流山, 지리산)으로, 스승을 찾고 벗을 좇아서 책상을 지고 마구 돌아다녔다. 여행의 상황이 매우 열악하여 산기운은 상쾌하였지만 안개를 쐬고 바람을 맞아 한기와 습기가 거듭 몸에 쌓였다.

  무신년(1488) 봄에는 또 방장산(方丈山, 지리산)에 있었는데 뒤늦게 김대유(金大猷, 김굉필(金宏弼)) 선생이 상을 당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의리로 보아 서둘러 허겁지겁 달려가야 마땅하겠지만 갑작스럽게 말을 구할 겨를이 없어 도보로 영남으로 달려가 곡을 하였다. 돌아올 때 발이 이미 부르트고 기운이 이미 소진하였다. 그 해 또 꾀꼬리 울어 봄이 깊어가자 전주로 갔다. 6월에는 옥천(玉川), 7월에는 설악산으로 억지로 여러 유생들을 따라 무리를 지어 갔다. 8월에는 창평(昌平)의 감시(監試)에 나아갔고, 9월에는 김제(金堤)의 과거장으로 갔다. 봄부터 가을까지 동서로 마구 다니느라 나귀 등에 자리를 깔고 지냈고 길가에다 밥 지을 솥을 걸었다.

  잠시도 쉴 겨를이 없었기에, 이 때문에 기운이 빠지고 몸이 바짝 말랐으며 얼굴빛은 새카맣게 되었다. 스스로 머물러 쉬면서 몸을 조절하여야 할 줄을 알지 못하였다. 도리어 우물 안 개구리처럼 좁은 식견으로 달나라의 계수나무를 꺾으려는 망령된 뜻을 품고, 벗 유생 김자허(金子虛),유익지(兪翼之)와 더불어 월출산의 정사(精舍)에서 학업을 익혔다. 이때 신부인(愼富仁),이가수(李可售),성방옹(成放翁) 등이 광주에서부터 연이어 왔다. 조카 의숙(義叔)이 이백원(李伯元)을 데리고 봉성(鳳城)에서부터 가장 늦게 이르렀다. 여러 벗들이 다 모이자 그 기세가 철연(鐵硯)1)을 뚫을 정도였다.

  그렇지만 사마광(司馬光)의 둥근 베개2)로 경각심을 갖지 못하고 어쩌다 손강(孫康)의 졸음3)을 면하지 못할 때도 있었다. 나는 찬 곳에서 거처하면 마음이 상쾌해질 것이요, 그렇게 되면 정신이 절로 또렷해져서 졸음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그래서 늘 찬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는데, 이른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그렇게 지내다보니, 바람을 맞고 한기를 쐬어 기운이 다시 조화롭지 못하게 되었다. 평소 쌓인 풍기가 갑자기 몸이 약해진 틈을 타고 드러났다. 처음에는 기침을 하다가 중간에는 천식이 급해져 거듭 계속되더니 끝에는 중풍을 맞게 되었다. 사지가 뻣뻣해지고 이목구비 등이 꽉 막혔으며 정신이 오락가락하여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듯하였다. 거의 대엿새가 되어 다행히 우리 형님께서 동분서주 구완하신 데 힘입어 소생하게 되어, 천지의 일월을 다시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러자 마치 만물이 겨울을 만났다가 다시 봄을 맞고 해와 달이 깜깜해졌다가 다시 밝아진 듯하였다.

  해에 사는 까마귀가 날고 달에 사는 토끼가 달려4) 어느 듯 봄이 되었다. 말이 점점 어눌해지고5) 눈이 점점 어두워졌다. 그리고 걸음걸이도 불안정하기는 하지만 지팡이를 짚으면 다닐만하게 되니, 마치 수레바퀴 자국에 고인 물에서 파닥거리던 붕어가 통쾌하게 흐르는 서강(西江)의 강물을 만난 듯이 처음엔 빌빌거리다가 차츰 활발해져서 유유히 헤엄쳐 가는 것 같을 뿐이 아니었다.6) 우리 형이 또 궁벽한 시골의 외로운 오두막에서는 의원이 서툴고 약이 부족하여 치료할 방도가 없다고 여겨, 역원의 군사들에게 부탁하여 가마에 병든 나를 태워 갔다. 형제가 회포를 풀 수 있게 되니 황홀하기가 마치 엎어놓은 동이 아래 갇혀 있다가 빠져 나와 푸른 하늘의 햇살을 보는 것과 같았다. 멀고 험한 곳을 다 거쳤는데도 몸은 오히려 건강하였으니 이 또한 족히 기쁜 일이었다. 다만 아쉬운 것은 나는 새가 오른쪽 날개를 부러뜨린 것과 같다는 점이었다. 천 가지 처방과 만 가지 약을 동원하여 온 힘을 다 들였다. 사람들은 한증을 하면 곧바로 효험을 볼 수 있을 것이라 하여, 나도 그렇게 믿었다.

  이에 2칸의 한증막을 지어 하나는 휴식하는 공간으로 삼고 하나는 온실로 만들고는 네 벽을 두껍게 발라, 송곳끝도 들어갈 틈이 없게 하였다. 바닥은 돌을 쌓아 온돌을 만들고 모래와 자갈로 틈을 메워 3-4인이 앉을 수 있게 하였다. 많은 나무를 태워 매우 뜨겁게 하고는 아궁이를 막아 온기가 빠져나가지 않게 하였다. 창포, 창이, 질경이, 생쑥 등을 아궁이 위에 쌓아놓고 동이에 물을 들이부었다. 그리고는 발가벗은 채 그 안에 들어가 거처하였다. 증기가 연기나 안개처럼 위로 피어올랐다가 엉겨 이슬이 되었다. 땀까지 빗물처럼 흘러 턱 아래로 타고 내리니, 마치 갑작스럽게 폭우가 내려 처마의 낙숫물이 떨어지는 듯하였다. 불기운이 주변으로 치성하게 번져, 호흡과 기침을 마음대로 할 수가 없어 반드시 수건으로 입을 감싸야만 숨을 쉴 수 있었다.

  나와 그 고통을 함께 참아낸 이가 몇 사람 되었는데, 센 사람은 겨우 밥 한 끼 먹을 정도만에 나갔고 약한 사람은 백 걸음 갈 정도에서 그쳤다. 심한 경우에는 잠시 잠깐도 참지 못하였다. 나는 고통을 참을 때 의지하는 바가 없으면 더욱 어렵다고 생각하여, 마음속으로 한유(韓愈)의〈원도(原道)〉한 편을 다 외울 때까지 있기로 정하였다. 다 외워가다가 심장이 뜨겁고 창자가 탈 정도가 되면 바로 외는 것을 서둘러 끝을 낸 다음 밖으로 나왔다. 소금물로 몸을 씻고 두꺼운 면에 솜을 넣은 옷을 입고서 입을 헹구고 죽을 마셨다. 한참 휴식을 취하다가 다시 안으로 들어가곤 하였다. 이와 같이 한 것이 하루에 너덧 차례가 되었다. 연이어 아흐레 동안 뜨거운 한증막 속에서 고생하였다.

  이로부터 날로 병이 심해지고 기운이 점점 조화를 잃어, 장차 질병을 치료하려다 오히려 질병을 더욱 심해지게 할 판이었다. 실로 무익할 뿐만 아니라 게다가 해치기까지 한다는 말7) 그대로였다. 내가 예전에 의학서를 보니, 토하고 땀을 내고 설사를 하는 세 종류의 방법은 천하에서 근원적으로 병을 치료하는 모든 방법인데, 저 한증막은 땀을 내기 위한 것이다. 땀을 내어 치료하는 것은 갑작스럽게 찬바람이나 냉기로 피부가 손상된 정도로 그다지 깊게 병이 들어가지 않은 사람을 위한 것이지, 나의 병을 두고 이른 것은 아니었다.

  아, 의원은 삼대를 가지 않으면 그 약을 복용하지 않는 법이요,8) 강자(康子)가 약을 보내었는데 공자(孔子)께서 맛을 보지 않으셨다.9) 옛사람이 이처럼 질병에 대해 신중하였다. 그런데 지금 나는 처음부터 경계하고 조심하지 못하여, 이 질병이 이렇게 되도록 만들었다. 곁에 백형이 있어 정성껏 몸소 구완을 하셨고 멀리 중형이 있어 은근하게 약을 쓰게 하셨는데, 여러 부친과 형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여, 이제 나무하는 아이나 시골 사내의 말을 가벼이 믿고서 예전 질병이 덧나도록 자초하였다. 비단 우리 형에게 책망을 받을 뿐만 아니라 선현에게도 한갓 죄인이 되었다. 후회해도 소용이 없기에, 글을 써서 기록하여, 후인 중에 나 같은 사람을 경계하는 자료로 삼는다.
 

1) 오대(五代) 진(晉)의 상유한(桑維翰)이 철연(鐵硯)을 만들어 남에게 보이면서 “이 벼루가 뚫어지면 내가 다른 길을 통해서 벼슬을 하겠다.”고 말한 고사가 있다. 의지가 견고하여 본업(本業)을 바꾸지 않는 것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2) 사마광(司馬光)은 나무를 공처럼 둥글게 깎아 만든 베개 경침(警枕)을 사용하여, 잠이 들면 목침이 머리에서 빠져나가 바로 깨도록 하였다는 고사가 있다.
3) 손강은 집에 불을 밝힐 기름이 없어 눈빛으로 책을 읽었다는 영설독서(映雪讀書)의 고사를 남긴 인물인데, 손강이 독서를 하다가 졸았다는 고사는 확인하지 못하였다.
4) 해에 금까마귀(金烏)가 있고, 달에는 옥토끼(玉兔)가 있다는 전설에서, 까마귀가 날고 토끼가 달린다는 말은 세월이 흘러가는 것을 뜻한다.
5) 기기(期期)는 ‘기필코’를 거듭하여 ‘기필코기필코’라고 한 것으로, 한 고조(漢高祖)가 만년에 태자(太子)를 폐하고 태자를 척희(戚姬)의 소생 여의(如意)로 바꿔 세우려고 할 때, 본디 어눌하여 말을 잘 더듬던 어사대부 주창(周昌)이 강력하게 간쟁하면서 말하기를, “신이 입으로 말은 잘 못하지만, 신은 기필코기필코 그것이 불가한 일인 줄은 압니다. 폐하께서 아무리 태자를 폐하려 하시더라도 신은 기필코기필코 조서를 받들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6)《맹자(孟子)》 만장상(萬章上)에 “처음 풀어줄 때는 힘을 못 쓰고 빌빌거리더니 조금 있다가는 팔팔하게 움직여 시원스럽게 가버렸다.(始舍之圉圉焉, 少則洋洋焉, 悠然而逝)”라는 말을 차용한 것이다.
7)《맹자》에 알묘조장(揠苗助長)의 고사를 들면서 “非徒無益, 而又害之.”라 한 말을 이용한 것이다.
8)《예기》「곡례(曲禮)」에 “醫不三世, 不服其藥”이 보인다.
9)《논어》「향당(鄕黨)」에 “康子饋藥, 拜而受之曰丘未達, 不敢嘗.”이라 하였다.

 - 최충성(崔忠成),〈증실기(蒸室記)〉《산당집(山堂集)》
 
  
 
   
 ※ 이 글의 원문은 한국고전종합DB 홈페이지에 수록된 한국문집총간 16집《산당집(山堂集)》권 2, 기(記),〈증실기(蒸室記)〉 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원문>
病焉而醫者。情也。醫之而痊者。理也。旣病而不治。治之而不勤者。以父母之遺體。棄之道路者乎。治之雖勤而反添違者。其又不幸乎。誰當其責。今余是已。
余自桑弧之初。志於四方。年未一紀。從兄而北學於長安。結友二三子。讀書于學宮。而文房瀟灑。書齋凜洌。罅風隙冷。浸入肌骨。   
旣及長也。讀聖賢之書。解諸子百家之傳。知古人志大量遠。雖拳土塊石。無不欲觀以畜其有。慨然欲效之。癸卯而月出。甲辰而湧巖。乙巳而漢都之三角,白嶽。松都之天磨,聖居。丙午而瑞石。丁未而頭流。尋師從友。負笈橫行。旅況殊惡。山氣高爽。觸霧犯風而寒濕積聚。
戊申春。又在方丈。晩聞金先生大猷丁憂。義當匍匐忙劇之至。未遑取馬。徒步往哭於嶺南。歸來。足已繭而氣已憊矣。其年。亦復鶯月而完山。季夏而玉川。孟秋而雪山。強從諸生。隨行逐隊。仲秋而昌平監試。菊秋而金堤文場。自春曁秋。橫行東西。占席驢背。卜鼎道傍。
暫無休暇。氣因困乏。形容枯槁。顏色黎黑。不知自止休養氣息。反以井蛙之見。妄意蟾宮之桂。與友生金子虛,兪翼之。鍊業于月出山精廬。愼富仁,李可售,成放翁。自光山繼至。姪子義叔。携李伯元自鳳城最後而至。諸友咸集。志穿鐵硯。 
然猶未警司馬之枕。或不免孫康之睡。余以爲於涼處處之。志氣爽塏則心自惺惺。而可以避睡鄕也。常自占冷座。而蚤暮起居。呼風逼寒。氣又不調。素積之風。忽爾乘隙。始焉咳嗽。中焉喘急。反覆相因。終焉中風。四肢不仁。五關閉塞。魄遁神返。與人世不相關。幾五六日。幸賴吾兄奔救之力而得蘇。復見天地日月。則如萬物旣冬而復春。兩曜旣晦而復明矣。
烏飛兔走。奄至于春。語漸期期。視漸䀮䀮。步雖萍梗。而倚杖則可行。不啻涸鱗得西江之決。而圉圉焉洋洋焉。悠然而逝。吾兄又以爲荒村獨廬。醫疏藥乏。治療無計。請軍于路官。擔轎載疾。得與兄弟敍盡心懷。則恍若出自覆盆之下。而覩靑天白日之光矣。涉遠歷險。身尙康勝。亦足爲喜。而所可恨者。如飛鳥折右翼矣。千方萬藥。靡有餘力。人言汗蒸。則可以立效。余以爲信然。
於是。構蒸室二間。一爲休憩之所。而一爲燠室。厚塗四壁。俾無容錐之隙。壘石作突。而以沙石塡罅。可容坐三四人矣。燃薪許多。令極熱而塞竈口。俾不泄氣。積菖蒲,蒼耳,桔梗,生艾于突上而傾注盆水。乃裎身入處其中, 則氣蒸於上。如煙如霧。凝結爲露。兼之以汗流如漿如雨而注於頤下。如卒然暴雨。而傾屋霤之水矣。焰氣外熾。而呼吸喘息尙不能自擅。必須以帨巾掩口。而後可以通吾氣也。
與余共耐其苦者數人。而強者了一飯之頃。弱者行百步之間。甚者。雖須臾之刻。尙不能堪忍也。余以爲忍苦無據則尤難。以心念原道一篇爲期。將庶幾畢念也。心熱腸爛。卽促念了則出。用以鹽湯浴洗。而重綿挾纊。漱口歠粥。良久休歇。而又還入焉。如是者日四五度矣。連九日困於炎蒸之中。    
自茲以來。日益沈痼。氣日益失和。將以愈疾。而適以資夫疾之尤甚。眞所謂非徒無益。而又害之者也。余嘗觀醫書吐,汗,下,三法。所以該盡天下治病之源也。夫蒸所以汗者也。汗而可療者。卒然傷風寒冷客於皮膚之間。而未之深入者。非若吾病之謂也。 
嗚呼。醫不三世。不服其藥。康子饋藥。孔子不敢嘗。古人之所以謹疾者如是。而今我始旣不能戒愼。而馴致此疾。傍有伯兄。款曲而手救之。遠有仲兄。慇懃而命藥之。諸父諸兄。莫不賜念。而今又輕信樵童野夫之言。自招其舊疾之復焉。非徒見責於吾兄。抑亦前修之一罪人也。噬臍莫及。書以爲記。聊以爲後人如我者之戒云。

 

- 최충성, <증실기(蒸室記)>《산당집(山堂集)》

 
   
 [해설]
  
 
   
   최충성(崔忠成, 1458-1491)은 나주 태생으로 세종 때 집현전 직제학을 지낸 최덕지(崔德之)의 손자다. 신진사류의 한 사람으로 김굉필(金宏弼)의 문하에 출입하여 소학(小學)을 학문의 근본으로 삼은 사람이다. 훗날 조부를 따라 영암의 녹동서원(鹿洞書院)에 제향되었지만 생전에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고 벼슬에도 오르지 못하였으며 내세울 만한 저술도 남기지 못한 채 34세의 젊은 나이에 죽었다. 호를 산당서객(山堂書客)이라 하였는데 산당은 산속의 집이라는 뜻으로 젊은 시절 산사를 돌아다니면서 책을 읽었기에 스스로 호로 삼은 것이다.

  젊은 시절 최충성은 열심히 책을 읽었다. 졸음을 쫓기 위하여 겨울에도 불을 피우지 않은 산속의 방에서 기거하면서 책을 읽었다. 그러다 보니 몸이 병들었다. 기침이 심해지더니 마침내 중풍에 걸렸다. 사지가 뻣뻣하여 바깥출입이 힘들게 되었다. 그 형이 극진히 보살폈지만 병이 완쾌되지 못하였다. 그래서 고안한 것이 증실(蒸室) 곧 한증막이다.

  한증은 당시 널리 유포되어 있던 치료방법이었다. 세종 때 서민을 위해 만든 활인원(活人院)에도 한증막을 두었다. 정약용의 『목민심서』에 따르면 한증은 예맥 지역의 풍속이었는데 조선시대에는 서북 지역에 크게 유행하였다 한다. 병의 증상과 관계없이 무턱대고 한증을 하다가 죽은 사람이 많아 사회 문제가 된 적도 있었다. 최충성 역시 효험을 보지 못하였다. 오히려 형의 구완으로 조금 나은 병세가 더욱 악화되어 버렸다. 제대로 된 의사의 처방을 받지 않고 민간요법을 택하였다가 낭패를 보아 후회하는 마음에 이 글을 지었다.

  최충성은 병이 도져 더 이상 바깥출입이 어렵게 되었다. 온갖 사념이 일어 불면의 밤이 이어졌다. 사념을 떨쳐야 병에 차도가 있을 것이라 여겨 최충성은 다시 경려분각(警慮焚刻)이라는 묘한 자명종을 하나 더 만들었다. 최충성은 분각이 독서를 하는 선비들이 시각을 알게 하는 데도 유용하다고 생각하였다. 몸이 건강하여 산사를 오가면서 독서를 할 때에는 생각지 못하다가 몸이 곤궁해지고 나서야 이러한 장치를 만들게 되었다고 탄식하였다. 
  
     
 글쓴이 / 이종묵

* 서울대학교 국문학과 교수
* 저서(역서)
- 해동강서시파연구, 태학사, 1995.
- 한국 한시의 전통과 문예미, 태학사, 2002.
- 누워서 노니는 산수, 태학사, 2002.
- 浮休子談論, 홍익출판사, 2002.
- 조선의 문화공간(1-4), 휴머니스트, 2006.
- 우리 한시를 읽는다, 돌베개, 2008

 
 [한국고전번역원 편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