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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산길따라/지리산♧[역사]

지리산 쌍계사의 역사와 문화(2)

.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智異山 遊覽錄 속에 비친 雙磎寺

 

1. 지리산 遊覽 旅程과 쌍계사로의 접근 방법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산수를 유람하고 遊覽錄(遊山記) 많이 남겼는데, 연구에서는 지리산 유람록 각기 다른 여정으로 지리산 쌍계사로 접근하고, 당대에 있어서의 학문.사상적인 성취가 뚜렷한 사대부들의 遊覽錄 3편을 선정해 연구의 대상으로 삼았다. 연구자가 선정한 유람록은 金馹孫의 頭流紀行錄, 曺植의 遊頭流錄, 丁時翰의 山中日記 3편이다.

지리산 유람록은 대체적으로 두류록이라는 이름으로 개인문집에 들어 있으나 정시한의 경우 그의 문집 愚潭集 실린 578일에 걸친 유람 기록인 산중일기 무려 173 동안 지리산에 머물며 느낀 소회와 일상, 그리고 자연세계의 모습을 일기형태로 남겼다.

지리산 유람록에 나와있는 유람의 기점을 보면 보통 함양기점(방곡리), 산청기점(중산리), 하동기점, 남원기점 등을 있는데, 다음은 3 유람록의 유람 여정과 지은이의 인적사항을 간략히 정리 것이다.

 

1)      金馹孫의 頭流紀行錄37)

 

金馹孫 : (생몰년도 1464~1498) 자는 季雲, 호는 濯纓이며 본관은 金海이다. 조선 성종.연산군조의 문신. 조선 성리학의 宗祖라 있는 金宗直 문하에서 글을 배웠고, 金宗直 지은 弔義帝文을 史草에 올렸다가 35세의 젊은 나이에 무오사화의 화를 입어 세상을 떠났다. 賜暇讀書의 시기 진주에 있을 , 김종직 문하에서 동문수학한 鄭汝昌 함께 지리산 유람에 나섰다.

 

遊覽期間 : 1489(성종20) ( 4.14~4.28 15일간)  출발지: 경남 함양 제한역 

遊覽旅程 : 제한-금대암-용유담-산음.단성현-단속사-오대주산-묵계사-법계사-천왕봉-향적사-영신사-의신사-신흥사-쌍계사-불일암

 

2)      曺植의 遊頭流錄38)

 

曺植 :  (생몰연도 1501~1572) 자는 楗仲, 호는 南冥·山海 方丈山人이며 본관은 창녕이다. 퇴계 이황과 더불어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성리학자. 다만 성리학이 형이상학적 명제를 탐구하는 쪽으로 경도되는 것을 개탄하며, 실천적 수양을 강조하였다. 임금의 부름에도 불구하고 끝내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지리산 자락 덕산에 山天齋를 짓고 스스로의 수양과 후학양성에  힘썼다.

 

遊覽期間 : 1558(명종13) 4.10~4.25 16일간)  출발지: 경남 합천 뇌룡정 

遊覽旅程 : 합천-진주-사천(배편으로 남해-섬진강 뱃길 이동)-하동 섬진나루-삽암.도탄-화개- 쌍계사-불일암-쌍계사/-신응사-악양-삼가식현-횡천-정수-뇌룡사

 

3)      丁時翰의 山中日記39)

 

丁時翰 : (생몰연도 1625~1707) 자는 君翊, 호는 愚潭, 본관은 羅州이다. 서울 명문가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직계 조상 상당수가 사화에 연루되어 파직을 당한 경우가 많았으며, 이런 영향으로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탐구에만 몰두하였다. 퇴계의 학통을 이어받은 것으로 인정 받고 있으나 스승의 가르침에 의존하지 않고 공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청년기까지 서울에서 살았으나, 장년 이후로는 주로 원주에 거주하였으며 효행으로도 이름난 학자다.  모친의 3년상이 끝난 , 예순 살의 나이에 전국 산수 유람에 나섰다.

 

遊覽期間 : (1 유람 함양.지리산 체재기간 1686 4.13~9.8 173(4 1 포함) 

遊覽旅程 : 함양-휴천면-용유담-마천 군자사.금대암.무주암,남원 실상사 기거(4.15~4.29, 4.1~4.17. 32일간)-지리산 주능선(지금의 벽소령~연하천 사이의 주능선 삼각고지 부근으로 추정)-반야봉-칠불암-금류동암(4.19~30, 5.1~8.14 115 기거)-연곡사-쌍계사,불일암(8.16~8.18 4일간 기거)/-구례 화엄사-남원 여원치-함양 마천 무주암-함양 개평촌40)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김일손은 지리산 주능선의 天王峰을 거쳐, 영신봉 인근의 영신암에서 하동 화개면 대성리 義神마을로 하산하여 쌍계사를 들렀고, 曺植은 특이하게 경남 합천에서 출발, 진주를 경유하여 사천에 들른 , ()편으로 남해-섬진강 수로를 이용하여 하동나루-화개로 들어서는 여로를 택했으며, 丁時翰은 거창에서 함양에 들어와 지리산 자락 함양 마천의 군자사 등지에서 32일을 보내고 지리산 주능선으로 올라와 般若峰을 등정한 , 七佛庵 근처의 금류동암에서 무려 115일을 머물다가 유람 일정이 거의 끝날 무렵에 구례 연곡사를 거쳐 쌍계사로 오게 된다.

3인의 사대부들이 유람 기간 쌍계사에 머문 기간은 김일손 34, 조식 45, 정시한 45일간이다. 

 

2. 遊覽錄 雙磎寺(佛日庵 포함) 旅程에 나타나는 역사·문화와 자연세계

 

1) 金馹孫의 頭流紀行錄에 나타나는 雙磎寺의 모습과 士意識

 

金馹孫의 頭流紀行錄은 그의 스승 金宗直의 「遊頭流錄」에 이어 것으로, 조선시대 초기 士林으로서의 의식 성향이 드러나 있다.41) 그의 유람 동기는 산에 올라 일출을 보며 사방을 조망하는 , 孔子의 태산에 올라 천하를 작게 여긴 登泰山小天下 의식에 바탕을 것이라고 있는데, 특히 그가 지리산 天王峰에 올라 日出을 맞이할 술회한 ‘’宣尼(선니:공자)께서 東山에 오르셨을 때의 심정과 들어맞는다라고 한데서 드러나고 있다.42)

그의 思考는 철저히 유교적 현실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유람록 곳곳에 어려운 민간의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과, 백성들을 넉넉하게 해주고 교화 시킬 방도를 고민하는 經世濟民의 모습을 보이기도 하며, 또한 조선 초기 사림들이 가지고 있던 비판적 佛敎觀이 드러난다. 최치원 글을 짓고 진감선사탑비 만나면서 그는 다음과 같은 감회어린 글을 남긴다.

 

내가 고운의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그의 지팡이와 신발을 들고서 모시고 다니며 고운으로 하여금 외로이 떠돌이 불법을 배우는 자들과 어울리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고운이 오늘날 태어났더라면 반드시 중요한 자리에 앉아 나라를 빛내는 문필을 잡고서 태평성대를 찬란하게 표현했을 것이며, 또한 그의 문하에서 붓과 벼루를 받들고 가르침을 받았을 것이다. 이끼 비석을 어루만지며 感慨한 마음을 금치 못했다.다만 비문을 읽어보니 문장이 변려문으로 되어 있고, 선사나 부처를 위해 글짓기를 좋아하였다. 어째서 그랬을까? 아마도 그가 만당(晩唐) 때의 문풍을 배웠기 때문에 누습을 고치지 못한 것이 아닐까? 또한 숨어사는 사람들 속에 묻혀서 세상이 쇠퇴하는 것을 기롱하며, 시속을 따라가면서 선사나 부처에 몸을 의탁하여 자신을 숨기려 것이 아닐까? 없는 일이다.43)

 

김일손은 쌍계사의 승려들이 관청에서 은어잡이를 위하여 승려들에게 초피나무 껍질과 잎을 구해오라며 독촉 받는 모습을 보고는 안타까운 모습을 보이는데 이는 士林世界에 전반적으로 깔려있던 濟民意識의 발로인 것으로 보인다.

쌍계사를 찾은 사대부들은 대부분 동쪽에 있는 부속 암자인 佛日庵과 옆의 佛日瀑布를 답사하며 한결같이 아름다운 주변의 풍광을 묘사하는데, 이곳을 방문한 대부분의 사대부들은 불일암 주변의 너른 터를 理想鄕으로 일컫는 靑鶴洞으로 여기고 있음을 있으며, 그런 점에서는 김일손도 마찬가지이다.

김일손의 유람록 쌍계사 부분에서는 승려들과의 교류나 문화재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으며, 다만 승려 義空이 자재를 모아 팔영루 옛터에 누각을 다시 세우려 한다는 짧은 글을 남기고 있다.

 

2) 曺植의 遊頭流錄에 나타나는 精神世界와 自然觀

曺植의 遊頭流錄은 조선 중기 유람록의 典範으로 손꼽힌다.44) 조식의 유람은 진주목사 김홍을 비롯하여 이공량·이희안 , 당대 진주 인근의 명사들이 대거 참석한 성대한 유람이었지만, 조식은 조금도 정신적 긴장을 늦추지 않으며 道學主義的 자세를 견지하고 있다. 그의 유람관은 한마디로 看山看水 看人看世(간수간산 간인간세) 있다. 그는 산수를 유람하며 답답한 마음을 푸는데 그치지 않고, 역사를 회고하며 인간과 세상을 생각하였다.45)

曺植은 그의 45 동안의 유람기간 동안 자잘한 일상까지도 기록하였지만, 글의 중간중간 그의 성리학적 사고를 오롯이 드러내는데, 힘들게 佛日庵을 오르내리면서 만나는 자연 속에서도 그는 內面의 省察을 기한다.

 

『승려 신욱이 앞에서 길을 안내하며 갔다. 중간에 바위가 있었는데, 이언경·홍연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오암에도 시은형제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아마도 썩지않는 돌에 이름을 새겨 억만년토록 전하려 것이랴. 대장부의 이름이 마치 푸른 하늘의 밝은 해와 같아서, 史官이 책에 기록해두고 넓은 위에 사는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려야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구차하게도 원숭이와 너구리가 사는 덤불의 돌에 이름을 새겨 영원히 썩지 않기를 바란다. 이는 나는 새의 그림자만도 못해 까마득히 잊혀질 것이니 후세 사람들이 날아가버린 새가 무슨 새인 어찌 알겠는가?46)

 

『위쪽으로 오를 적에는 걸음 걸음 내딛기도 힘들더니, 아래 쪽으로 내려올 때에는 단지 발만 들어도 몸이 저절로 쏠려 내려갔다. 그러니 善을 좇는 것은 산을 오르는 것처럼 어렵고, 惡을 따르는 것은 무너져내리는 것처럼 쉬운 일이 아니겠는가?47)

 

조식 역시 불일암 일대를 청학동으로 파악하고 있으며, 불일폭포 인근의 경관에 흠뻑 취해 산수를 감상하며 비교적 장문으로 풍광을 묘사하는 글을 남긴다.

조식은 쌍계사와 불일암에서 동행한 악사와 기생에게 악기를 연주하게 하고 노래도 부르고, 피리를 부는 당시 진주 인근의 명망 있는 사대부들이 대거 참여한 유람에 걸맞게 행락의 즐거움도 누리는 모습을 있는데, 이는 다른 편의 유람록과 아주 대조적이며,  유람의 목적지가 쌍계사였고, 비교적 기록을 남겼음에도 탑비와 팔영루의 존재만 짤막하게 언급했을 , 殿閣이나 塔碑 등에 대한 所懷나 최치원 대한 기록을 거의 찾아 없는 것도 다른 유람록과 다른 점이라 하겠다.

 

3) 丁時翰의 山中日記의 文化史的 意義 日記에 나타나는 僧呂觀

 

丁時翰은 무려 170여일 동안 지리산에 머물며 매일의 기록을 山中日記에 남겼는데,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옮길 때마다 거리 단위를 사용하여 이동 거리를 꼼꼼하게 기록하였으며, 매일의 독서량을 세세하게 밝혔고, 암자와 주변의 자연세계에 대하여 생생한 묘사뿐 아니라, 승려들의 인상과 감정까지 치밀하게 기록으로 남기는 놀라운 記錄熱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결과 정시한의 산중일기는 유람록이라는 문학사적 가치를 넘어 佛敎文化史라는 관점에서도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되고있다. 그래서 尹載昇 그의 학위 논문에서「정시한의 문화재에 대한 자세한 묘사나, 불상을 서로 비교하는 등의 안목과 자세는 그를 文化史家 평해도 좋을 정도로 매우 수준 높고 자세한 것이다.」라고 평하기도 하였다.48)

정시한은 45 동안 쌍계사와 불일암에 머무는데, 그의 文化史家的 면모와 僧呂觀이 산중일기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쌍계사에 도착하여 방장실에서 잠을 다음 , 쌍계사의 스님과 함께 먼저 금당영역의 영주각·봉래전·청학루를 둘러보고, 대웅전영역으로 옮겨 진감선사탑비와 그곳의 전각들을 일일이 둘러보는데, 예순의 나이를 넘긴 이라고는 없을 정도의 답사에 대한 열정을 보이고 있으며, 문화재에 대한 높은 안목과 애정을 가지고 있음을 느낄 있다.

 

『진감국사비가 있는데 최고운 지은 것이다. 그런데 전서가 불에 맞아 상한 곳이 있어 얼마 가서 떨어져나갈 같아 안타깝다. 오랫동안 만져보며 감상했다.법당은 매우 크고 화려한데 단청을 새로 입혀서 금벽이 휘황하다. 나한전을 지나 영당에 이르러 최고운 진영을 보았다. 사모를 쓰고 홍포를 입었으며 신발을 신지 않고 의자에 앉아 있는데, 구레나룻이 완연한 것이 마치 살아있는 듯하다.49)

 

조선 중후기 시대의 사대부로서 정시한은 불교와 승려에 대해 특별하다 정도로 호의적인 면을 보여주는데, 그의 산중생활의 숙소가 대부분 산자락의 寺庵이었다는 데서도 미루어 짐작할 있다. 산중일기 전반에 걸쳐 승려들에 대한 인적사항과 인상들을 상세하게 표현하고 있으며, 반듯하게 수도하는 승려들을 만났을 때는 참으로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기도 하는데, 쌍계사의 스님들과 불일암의 젊은 수도승에 대하여 그가 남긴 기록이다.

 

『의윤 노스님은 여든두 살이고 옥헌 노스님은 여든한 살이다. 또한 해민 스님은 무진생인데, 절의 연혁과 고적을 물어보니 하나하나 설명해 주었다.50

 

      방에 들어갔는데 옷과 신발은 보이건만 사람이 보이지 않아 다시 나가려 하는데 스님

와서 인사하니 바로 절의 주인이다. 말하기를 이름이 성욱이며 병술생이라

. 금강산에서 , 6월에 이곳에 도착하여 솔잎을 먹으며 발우 하나 벌로 암자를 중수하였고, 앞으로 이곳에서 겨울을 계획이라고 한다.사람 됨됨이가 바르고 맑아 사랑스러운데 용모는 스무 남짓으로 보인다.51)

 

170여일이라는 오랜 기간 동안 지리산 자락에서 시간을 보내며, 자연세계의 풍광에 경탄

해오던 정시한은 불일폭포와 주변의 경관을 만나고는 이렇게 탄식을 한다.

 

『쏟아지는 폭포를 바라보았는데, 香爐峰의 主山 靑龍의 맥에서 나오고 있다. 모습은 마치 白龍이 하늘로 오르고 은하수가 밑으로 내려온 듯하다. 오른쪽에 靑鶴峰이 있는데, 萬丈鐵壁 사이에 붉은 잎과 푸른 소나무가 가득하다. 千峰이 주위를 둘러서 있는 것이 안에 들어오는데 맑은 기운이 가득한 것이 몸이 마치 三山52) 밖에 같다. 곳을 일찍 알지 못하여 곳에서 여름을 나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 상무주암이나53) 금류동암은54) 생각해 보면 이것에 비하여서는 아이들 장난에 불과하다.55)

 

(계속)

두류/조용섭



37) 『濯纓先生文集』,「頭流紀行錄」, 최석기 외 譯, 앞의 책, 67. 동문선에는 續頭流錄이라는 제목으로 게재되어 있다.

38) 『南冥集』,「遊頭流錄 」, 최석기 외 譯, 앞의 책, 101.

39) 『愚潭輯』,「山中日記」, 신대현, 혜안, 2005.

40) 遊覽旅程 /이후는 遊覽錄 상의 歸路 旅程이다.

41) 李陸 외 7,『頭流山記 외』최석기 3명 譯, 앞의 책, 387.

42) 같은 책, 84.

43) 같은 책, 93~94.

44) 같은 , 387.

45) 같은 책, 388.

46) 같은 책, 112.

47) 같은 , 113.

48) 尹載昇,「山中日記로 朝鮮後期 佛敎狀況」,동국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4, 45`46.

49) 愚潭輯』,「山中日記」, 신대현, 앞의 책, 145~147.

50) 같은 , 147.

51) 같은 , 153.

52) 三神山. 중국에서 신선이 산다는 전설 속의 세 산. 곧 蓬萊山, 方丈山, 瀛洲山을 말한다.

53) 경남 마천 지리산 자락의 암자. 정시한이 머물렀던 곳이다.

54) 지리산 연동골(칠불암 옆)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암자. 정시한이 오랫동안 머물렀다.

55) 『우담집』,「산중일기」,신대현 , 앞의 , 150~1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