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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산길따라/지리산♧[역사]

지리산 산신을 찾아서①

지리산 산신을 찾아서①

 

한국의 산신에 대한 전통은 영속적인 고대 문화의 핵심이었으며, 결코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강력하게 존속하고 있다. 또한 새롭게 만들어지는 산신 탱화와 동상들은 더욱 더 커지고, 상세하면서 복잡해지며, 더 화려해지는 경향을 보이고 있는데, 이는 많은 지역에서 발견할 수 있으며, 또 쉽게 접근할 수 있다.


산신숭배에 관한 공식적 인정과 지원은 정부 차원에서보다는 대부분 지방자치단체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한국 문화와 관광을 촉진하기 위해 책임을 진 정부 관리들과 공립공원과 휴양림과 같은 산악지역을 관리하는 기관조차도 산신을 모시는 봉우리의 신성한 고대전통을 무시하거나 부정하고 있다. 그러나 일부 변화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 주요 대도시에서 훨씬 떨어진 지역에서 특별히 그런 모습을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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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노고단의 두 번째 정상에 있는 현대적 돌탑. 고대 제사를 지내던 돌탑 제단이 있는 곳은 제한한 반면 이곳은 등산객들에게 개방돼 있다. 2. 2004년 구례 남악제. 전통 무용복을 입고 산신제를 알리는 춤을 추고 있다. 3. 2004년 지리산 남악제에 참여한 관리와 군중. 4. 민족 번영과 통합을 기원하면서 남악제에서 참석자들과 일부 군중까지 제사를 올리고 있다. 5. 지리산 남악제를 지내면서 다양한 형태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웃간 통합과 지역공동체 자긍심 강화 등을 기원한다. 6. 천은사 대웅전 뒤쪽에 있는 고대 자연석에 한자로 산왕대신이라고 새겨져 있다.]

 

 

민족 정체성 확립을 위한 산신축제와 악운을 막고 부와 통일을 기원하는 산신축제는 불과 과거 몇 년에 걸쳐 개최되기 시작했다. 이는 한국의 유명한 산자락에 있는 소도시나 마을에서 지역문화의 중요한 상징이 됐으며, 지역주민의 역사적 정체성과 통합에 영향을 미쳤다.

과거 10년 동안 새로운 형태의 주요한 산신축제가 열리는 장면을 직접 목격했다. 충남의 계룡산, 서울의 삼각산, 대구의 팔공산, 전남의 무등산, 전북의 마이산, 태백산, 강원도의 오대산과 치악산, 그리고 지리산의 동서 양쪽에서 대규모의 산신제가 많은 사람이 모인 가운데 열렸다
.

시장을 비롯해 군수와 지방 관리 등이 산신축제에 참여해서 의식을 직접 집전하기도 했다. 그들은 지역 공동체의 통합과 주민들에게 자긍심을 불어넣는 주요한 수단으로 참여했고, 그 가치는 매우 크다고 강조했다. 또한 지역관광산업을 육성시키고, 독특한 지방문화와 지역 전통을 재창조하거나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중요시되고 있다.

 

지역의 산신제는 고대로부터 내려온 전통 관습에 따라 열렸지만 형식은 상당히 현대화된 모습을 띠고 있다. 산신제 의식 스타일은 유교와 불교, 샤머니즘 요소까지 다 포함하고 있다. 종교적 갈등이나 마찰도 없이 복장을 갖추고 연속적으로 교대해 가면서 열린다.

산신숭배에 대한 지방자치단체 차원에서의 공개적 승인과 지원은 사실상 현대 한국사회에서 혁명적인 것이다. 샤머니즘적 문화의 대중적 표출에 상당히 반대하는 입장을 견지해온 관리들이 지배적인 한국의 관료주의에서는 더욱 그렇다. 지역 공동체의 권한 상승과 그 지역에서 신성시되는 산을 가지고 있다는 자부심의 증가는 한국 관료 성향을 계속 더 변화시킬 것으로 보인다
.

그러나 이러한 현대적 현상은 지리산의 다양한 지역에서 볼 수 있듯이 고대로부터 그 뿌리를 가지고 있다. 최소한 5세기 삼국시대 이래로, 지리산은 한반도 남쪽지역에 신성시되는 많은 봉우리와 경사지를 가지고 있다. 신라왕은 지리산을 외부에 있는 오악 중 하나로 간주하거나, 왕국을 보호하는 다섯 개의 산으로 삼았다. 그래서 산신을 모시는 최초의 사원을 건립했다. 그들은 지리산에서 국가의 번영과 국민의 안위를 위해 다양한 지역에서 많은 의식을 열었다. 심지어 악천후에도 불구하고 가장 높은 봉우리에서 열기도 했다.
 

고려 시대에도 유교, 도교, 불교 등이 혼합돼서 행운과 보호를 간청하는 의식이 왕실 지원 하에 개최됐다. 노고단 정상에서 산신제가 처음으로 열렸다. 이후에는 조금 아래로 내려와 지속됐다. 노고단은 지리산에서 세 번째로 높은 봉우리며, 거대한 지리산의 서쪽 끝에 자리 잡고 있다. 노고단의 이름은 강력한 힘을 가질 수 있다고 믿는 샤머니즘의 대모격인 할머니를 상징하는 데서 유래됐다. 그것은 현명한 늙은 여자를 위한 제단이었다.

오늘날까지 여전히 고대 의식을 지내는 노고단 제단자리에 거대한 돌탑이 있다.
  그 돌탑이 선 자리에는 나무가 없는 벌거벗은 봉우리다. 많은 등산객들이 이 곳에서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하며 사진을 찍던 곳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실제 노고단 정상은 국립공원 관리공단의 생태보존 프로젝트에 의해 거의 15년간 펜스로 막아 접근을 통제해왔다. 등산객들은 노고단의 두 번째 정상으로 이어진 탐방로를 따라 올라갔다. 그곳에는 많은 돌탑들이 쌓여 있고, 등산객들은 그 옆에서 사진을 찍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매년 이곳을 방문하고 있으며, 여전히 신성한 장소로 여기고 있다.

조선왕조는 정책적으로 왕실의 보호 하에 유교 형식으로 연 2회 산신제를 지내는 신성한 3개 산을 정했다. 북쪽의 묘향산, 중부의 계룡산, 남쪽의 지리산 등 세 봉우리가 그곳이다. 농지와 농부들의 노동력으로 사당을 유지 보수시키고, 최소 1년에 두 차례 거대한 제사를 지냈다.

 

조선 땐 묘향·계룡·지리산서 연2회 산신제 지내

 

서쪽 정상에 있는 고려시대 사원을 대체하기 위해 대규모 사원을 노고단 서쪽에 건립했다. 갈뫼봉, 지금의 고리봉 아래 산동면 좌사리에 있는 당동 사원마을에 지은 것이다. 1737년에 남원 고을 원님은 서민들이 접근하기 쉽게 화엄사 정문 인근으로 다시 옮겼다. 그것은 남악단, 즉 남쪽 봉우리의 제단(South Peak Altar)이란 이름으로 붙여졌다. 지금은 낮은 봉우리의 제단으로 알려져 있는 하악단이다.

계룡산 신원사에 있는 산신단과 같이 왕궁 건축물 형식으로 지은 드물게 큰 산신사원이다. 그곳에서 열리는 공식적 제례의식은 지리산 남악제(Southern Peak Ceremony)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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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0년 현대적 형태로 새롭게 지은 천은사 삼성각의 뛰어난 산신화. 머리 주위에 강력하고 흰 후광이 그려져 있으며, 갈고리 모양의 나무지팡이를 가진 것이 특징이다. 전형적인 유럽스타일 지도자 같이 보인다. 2 2. 가파른 경사면에 있는 상선암. 스님들이 수련하기에 좋은 장소다. 3 세 그루의 노송이 자라는 상선암 뒤 암벽. 이곳은 절에서 자연 산신제를 지내는 장소이기도 하다. 4 상선암은 노고단 아래 해발 800m 정도에 위치해 있다. 풍수지리적으로 강력한 에너지를 가진 혈이 있는 곳으로 여겨진다. 5 절벽 위에서 내려다본 상선암. 이것을 촬영하기 위해 큰 모험을 겪어야 했다. 6 상선암 주지와 친구와 함께 지리산 녹차를 마시며.]

 

당동에 있던 대규모 사원과 애초의 사원 유물은 20세기 초 일제의 한민족 정신 말살이라는 식민정책에 의해 완전 철거되었다. 남악단에는 18세기 조선왕조 사원의 크고 오래된 모습을 여전히 찾아볼 있지만 역사성은 사라지고 없다. 계단은 시멘트로 수리되어 있고, 더 이상 아무 흔적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한국전의 비극적 폐허 이후 지리산 산신제 개최는 서서히 다시 복원되고 있다. 사진에서 볼 수 있는 남악사의 조그만 산신 건물은 1964년 구례 주민의 협력으로 지었다. 유교 스타일로 고대 왕의 후원으로 열렸던 남악제가 현대적으로 재생한 것이다
.

이 제사는 1년에 한 번씩, 음력 세 번째 보름 기간 중이거나 직후인 24절기의 하나인

곡우에 열린다. 곡우는 지리산에서 녹차를 수확하는 시기와 관련된 중요한 날이다. 그 날 전에 수확하는 찻잎은 우전차로 불리는 가장 좋은 품질의 차로 여겨진다. 반면 그 날 이후 따는 찻잎은 세작차로 불리며, 조금 품질이 떨어진다. 지금 남악제는 약수제(Celebration of Medicinal Water)라 불리는 구례 축제와 함께 열린다
.

매년 산신제를 지내는 관습과 축제는 점점 더 세련되어져 왔고, 더 많은 사람들이 참석해왔다. 지난 15년 동안 이 의식을 보기 위해 노력했지만 제대로 시간과 날짜를 맞춘 적은 한번도 없다. 하지만 새로이 만들어진 고속도로로 인해 접근하기는 더욱 쉬워지고 빨라졌다. 마침내 2004년과 2006년 그것을 제대로 관찰하고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

거의 2시간 정도 걸리는 제사였고, 장엄하면서 심오한 듯, 아름답기까지 한 그런 의식이었다. 그 지역에서 농부들의 사물놀이를 곁들인 춤 행사가 먼저 진행된 뒤 오전 중에 시작됐다. 모든 사람이 유교 전통 복장을 갖춰 입고, 전문 풍악대에 의해 공식적으로 열렸음은 물론이다. 구례 군수와 다른 지방 관리들도 관심을 가지고 참석했다. 화엄사 주지와 천은사 승려들도 VIP로서 자리를 같이 했지만 공식 행사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

관객 중
  많은 이들이 등산복을 입고 있었으며, 의식이 끝나자 등산하러 떠났다. 모든 공식 참가자들이 절을 하고 끝나는 모습을 보여, 이 의식이 지역주민에게 그들의 전통문화와 가치 면에 있어서 굉장히 큰 자부심을 보여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왕의 후원을 받은 옛날 산신제의 현대적 형태로의 부활과는 대조적으로 남서쪽의 지리산은 가장 오래된 한국의 산신숭배 전통이 남아있는 곳이다. 산신에 대한 동상과 그림은 실질적으로 1700년대 후반부터 나오기 시작했다. 그 이전에는 자연석이 산신각 역할을 해왔다
.

샘이 숨겨진 절(Hidden Spring Temple)이란 뜻의 천은사 대웅전 뒤쪽에 한국 고대 전통을 대표하는 굉장히 흥미로운 산신각이 하나 있다. 천은사는 828년에 세워졌다. 오랜 기간동안 산신을 나타내는 아이콘이 천은사 벽 뒤쪽에 있는 자연석의 형태로 전해왔다. 조각된 한자로
山王大臣之碑(산왕대신지비) 라고 적혀있다. 이 지역에 2개의 다른 원시적인 형태의 산신을 나타내는 아이콘이 있는데, 전국적으로 그리 흔한 예는 아니다.

2001
년 그곳을 방문했을 때 새로운 현대적 형태의 삼성각(3명의 성자를 모신 사원)이 세워져 있었다. 아주 뛰어난 현대적 산신화가 지금 그곳에 전시돼 있다. 동시에 이전의 원시적 형태의 산신각도 공존하고 있다
.

구례 남악제가 대표적 현대 산신제


많은 관광객들이 좋아하는 드라이브 코스인 노고단 도로로 조금 내려가면 삼일암이란 암자를 발견할 수 있다. 삼일암은 아마 1919년 독립운동일인 31일을 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종교적으로는 성부, 성자, 성령을 뜻하는 삼위가 하나로 되는 삼위일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삼일암에는 천은사의 오래된 바위와 비슷한 산왕대신이라 새겨진 자연석이 세워져 있다. 어느 누구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아주 오래된 것만은 분명하다.

조금 더 올라가면 지도에 표시되어 있지 않은 가파르고 위험한 길이 나온다.
  20분 정도 가파른 돌길로 올라가면 전설적으로 전해지는 상선암이 있다. 거의 사람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다. 산과 절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만 알려진 유명한 곳이다. 그 이유는 이곳의 우아하면서도 단순한 모양과 풍수지리설에 따르면 기하학적으로 에너지가 모인 곳인 혈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 절의 원래 이름이 상선암이었다. 상선은 원래 도교에서 장수와 깨달음의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선은 20세기에 명상을 의미하는 선()으로 변했으며, 더한층 불교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상선암은 매우 가파르고 경사진 곳으로 둘러싸여 있는 매우 조그만 건물이다. 방문하기도 매우 까다롭다. 해발 800m 정도 되는 지역이라 겨울엔 매우 황량하고 춥다. 다른 계절에는 지낼 만하다. 3명의 스님이 상주하며 수련하고 있다
.

이처럼 깊은 산골의 멋진 절이 화려한 산신화와 동상이 있을 법하지만 실제로 인공적으로 만든 어떠한 산신 형상도 없다. 세 그루의 노송이 자라고 있는 암봉 끝에 있으며, 마치 3개의 조그만 건물 같아 그 자체가 일종의 산신각이다. 스님들과 차를 마시며 대화하던 중 주지 스님 설명이 암벽을 향해 직접 제사를 지내며, 이곳 전 지역이 일종의 천연 산신각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한국인들의 가장 오래되고 자연적인 형태의 산신숭배의 대표적 형태다.
 [계속]

 

·사진 데이비드 메이슨 경희대 호텔관광학 교수·www.san-shin.org

[월간 山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