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의 수행승
◎700명의 제자를 거느린 부휴
조선시대에도 지리산에는 많은 절이 있었다. 단속사, 쌍계사, 화엄사, 연곡사, 군자사, 영신사, 의신사, 신흥사, 법계사, 묵계사, 불일암, 향적사, 덕산사, 칠불사, 사자암 등이 그것이다. 시절 인연은 어려워도 절마다 등불을 밝혔고, 새벽이면 지리산 깊은 골짜기에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을로 내려가 동냥으로 끼니를 이어 가는 승려도 있었고, 수백 명의 제자를 거느린 고승도 있었으며, 외로운 암자에서 혼자 수행하는 승려도 있었다. 조선 중기의 불교계를 대개 “송운계(松雲系)와 부휴계(浮休系)로 구분하고, 송운의 제자 응상(應祥)은 북쪽 금강산에서, 부휴의 제자 각성(覺性)은 남쪽 지리산에서 각각 문호(門戶)를 이끌고 있다”는 평이 이미 그 당대에 있었다.
유몽인(柳夢寅)은 남원부사로 임명된 지 몇 달이 지나지 않은 때인 1611년(광해군 3)에 지리산을 유람했다. 그는 4월 2일에 영원암(靈源庵)을 방문하여 선수를 만났다.
영원암에 이르렀다. …… 이름난 승려 선수가 이 암자에 사는데, 제자들을 거느리고 불경을 연역하여 사방의 승려들이 모여든다. 그는 유순지(柳詢之)와 퍽 친한 사이였다. 우리에게 송편, 인삼떡과 팔미차탕(八味茶湯)을 대접하였다. 이 산에는 대나무 열매와 감, 밤 등이 많이 난다. 매년 가을 이런 과일을 따다가 빻아서 식량을 만든다고 한다.
순지는 유몽인과 함께 지리산을 유람하고 있던
◎왕희지의 필법, 각성
각성은 스승 부휴의 입적 뒤에 대중의 강청으로 칠불암에서 개당(開堂)했는데, 법려(法侶)들이 많이 모였다. 유몽인(柳夢寅)이 1611년(광해군 3) 4월에 의신사(義神寺)를 찾았을 때, 이 절에는 주지 옥정(玉井)과 태승암(太乘庵)에서 온 각성이 있었다. 유몽인은 이렇게 썼다.
“모두 시로 이름이 있는 승려다. 그들의 시는 모두 율격이 있어 읊조릴 만하였다. 각성은 필법이 왕희지의 체를 본받아 매우 맑고 가늘며 법도가 많았다.” 유몽인이 만났던 각성은 1600년(선조 33)부터 강석(講席)을 열어 후학을 지도하고 있었는데, 이때 그는 37세였지만, 시와 글씨로 이미 유명했던 것이다. 그의 행장에 의하면, 초서와 예서를 잘 썼는데, 그 필체가 힘차고 아름다워 우군(右軍), 즉 왕희지의 필법이 있었다고 했다. 1618년(광해군 10) 가을에 각성이 신흥사(新興寺)로 옮기자 모인 대중이 7백이나 되었다. 이해 5월,
조위한(趙緯韓. 1588-1649)도 이 해에 신흥사를 방문했는데, 각성은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당시 조위한이 만난 각성은 그 위의가 매우 깨끗하고 두 눈이 형형했으며, 경전에 능통한 식자였는데, 200명의 제자를 거느리고 강경하고 있었고, 제자들이 법당에 둘러앉은 모습은 마치 아라한과 같다고 했다. 1632년(인조 10)에는 화엄사를 중수하려 하자 돈을 내는 사람들이 거리를 메워 절은 어느새 큰 총림(叢林)을 이루었으며, 1640년(인조 18) 봄에는 쌍계사를 중수했다. 1663년(현종 4)의 병자호란 당시에는 의승군(義僧軍) 3천 명을 모으기도 했다. 그의 제자로는 수초(守初)와 처능(處能)이 유명하다.
◎불법은 원래 글자가 아님을 깨달은 소요
소요 태능(逍遙太能, 1562-1649)은 충휘, 응상 등과 더불어 부휴 문하 삼걸(三傑) 중의 한 고승으로 서산 대사의 법맥을 계승했다. 그는 지리산의 신흥사와 연곡사(燕谷寺)를 중건했는데, 그에 감화된 사람들의 도움으로 며칠 만에 마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의신사의 밤을 읊은 시에서 “불법이란 원래 글자가 아님을 비로소 알았다”고도 했고, 연곡사 벽에 쓴 시에서는 “연기 조사가 처음으로 지은 절, 병든 소요 늙은 이 또 경영해 왔다”고 읊기도 했다. 다음은 소요가 연곡사 향각(香閣)에 제(題)한 시다.
백천경권여표지(百千經卷如標指) 백천의 경전이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같아서,
인지당관월재천(因指當觀月在天) 손가락 따라 하늘의 달 보아야 한다.
월락지망무일사(月落指忘無一事) 달 지고 손가락도 잊으면 아무 일도 없나니,
기래끽반곤래면(飢來喫飯困來眠) 배고프면 밥 먹고 곤하면 잠자네.
지리산만큼이나 높고 푸른 선사의 모습이 어른거리는 시다. 성여신(成汝信, 1546-1632)이 1616년(광해군 8) 10월 3일에 신흥사를 방문했을 때, 신흥사 승려 태능 등 5~6명이 나와서 맞이하였다. 법당에 들어가 보니, 옛날에는 썰렁하던 불전이 온돌로 바뀌어 안온했으며, 모난 천장은 구름을 찌를 듯하고 금빛, 푸른 빛 단청은 눈이 부시게 찬란하고 법당 안은 수백 명을 수용할 만큼 넓었다고 했다.
박여량(朴汝樑)은 1610년(광해 2) 9월에 지리산을 유람하고 두류산일록을 남겼다. 박여량은 이달 4일에 도솔암(兜率庵)을 방문했는데, 이 암자에는 인오(印悟)가 있었다.
도솔암은 승려들이 수행하는 집으로 인오가 지어 살고 있는 곳이다. 인오는 우리 유가의 글을 세속의 문장으로 여겨 단지 불경만을 알고 있을 뿐이다. 여러 승려를 위하여 암자 앞에 붉은 깃발을 세워 두었고 발자취가 동구 밖으로 나간 적이 없다.
청매 인오(靑梅印悟 : 1548-1623). 그는 주로 지리산 연곡사에 있으면서 임진왜란 때, 구국과 불교 중흥에 노력했던 고승이다. 서산 대사의 제자로 임진왜란 때는 의승장이 되어 3년 동안 큰 공을 세우기도 했다. 문장가로도 유명했는데, 현재 『청매집(靑梅集)』 2권이 전하고 있다.
백암 성총이 신흥사에서 1700년 7월에 입적했다. 무용 수연이 그의 강석(講席)을 물려받아 개당했다. 이듬해 봄에 다시 칠불암으로 들어가자 선려(禪侶)와 의학(義學)들이 더욱 많이 모였다. 낮에는 강의하고 밤에는 참선하면서 남을 지도하고 자기를 다스리기에 밤낮으로 게으르지 않았다. 이렇게 남악 지리산의 법등은 밝았다. 깊은 산은 수행승의 보금자리였고, 산은 세속을 잊은 이로 해서 더욱 향기를 발했던 것이다.
*출처/불교와 문화
'▣지리산 산길따라 > 지리산♧[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리산 쌍계사의 역사와 문화(1) (0) | 2007.12.14 |
---|---|
잃어버린 가야 역사 傳구형왕릉을 찾아서 (0) | 2007.10.19 |
구례 피아골 연곡사(7)정비 및 복원을 위한 제언 (0) | 2007.05.14 |
구례 피아골 연곡사⑥주변의 불교 유적 (0) | 2007.05.09 |
[스크랩] 구례 피아골 연곡사⑤불교유적/유물 (0) | 2007.05.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