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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산길따라/지리산♧[역사]

지리산 쌍계사의 역사와 문화(1)

 

 

 

                       

 

 

 

. 머리말 --------------------------------------------1

 

 

. 智異山 雙磎寺의 歷史와 文化 --------------------------3

 

1.      雙磎寺 創建說話 ----------------------------------3

2.      雙磎寺 가람배치의 특징 ----------------------------4

3.      雙磎寺의 殿閣 槪觀 ------------------------- ------4

4.      범패(梵唄)와 八詠樓 -------------------------------9

5.      眞鑑禪師大公靈塔碑 -------------------------------10

 

 

. 조선시대 士大夫들의 智異山 遊覽錄 속에 비친 雙磎寺-------12

 

1.     智異山遊覽 旅程과 雙磎寺로의 접근 방법 -------------12

2.     遊覽錄 중 雙磎寺 旅程에 나타나는 歷史.文化와 自然世界--13

 

 

. 맺는말 -------------------------------------------18

 

參考 文 獻 ------------------------------------------20

 

 

 

 

 

 

 

. 머리말

 

智異山은 頭流山 또는 方丈山으로도 불린다. 智異山은 智慧로운 異人이 사는 곳이라는 의미로, 頭流山1) 白頭山에서 시작하는 白頭大幹의 산줄기가 마지막으로 흐른다는 뜻으로 불려졌으며, 方丈山은 도교의 三神山 가운데 하나라고 指稱된 이름이다.2)

  백두대간의 산줄기를 이루는 지리산 주능선은 남녘의 강을 가르는 分水嶺의 역할을 하는데, 동쪽으로 낙동강, 서쪽으로 섬진강의 水系를 이룬다. 대체적으로 지리산의 북쪽과 동쪽 산자락에서 발원한 물줄기는 진주의 남강으로 흘러 들어간 낙동강 서쪽의 지류를 이루며, 전북 진안군에서 발원하여3) 전남 곡성으로 흘러온 섬진강은 지리산 서북쪽(남원), 서쪽(구례), 서남쪽(하동 일부) 산자락에서 흘러내린 淸流를 받아 들이며 남해로 흘러간다. 이러한 지리적.문화적 요인을 중심으로 하여 지리산의 문화권역을 남강.진주문화권, 남원.섬진강 문화권으로 세분하기도 한다.4)

연구는 지리산 남강.진주문화권에 속하는 雙磎寺(경남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 중심으로 역사와 문화에 대한 것으로, 章으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章은 쌍계사의 창건설화와 문화재를 중심으로 역사와 문화, 뒤의 章은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지리산을 유람하며 남긴 遊覽錄 쌍계사 부분을 발췌하여, 유람록에 나타난 쌍계사와 자연세계, 사대부들의 정신세계와 僧呂觀이라는 주제로 접근을 하였다.

신라 성덕왕 23(서기 724) 義湘大師의 제자인 승려 三法和尙이 중국()에서 돌아올 , 南禪宗 祖師 六祖 慧能의 머리뼈(頂相) 가져와 봉안하며 창건하였다는 창건설화를 지니고 있는 쌍계사는 116 後인 신라 문성왕 2(서기 840), 慧昭 眞鑑禪師에 의하여 크게 중창되며 伽藍의 이름을 떨치게 된다.5) 이러한 내용은 진감선사 死後, 王命을 받은 崔致遠 글을 짓고 글씨를 眞監禪師大公靈塔碑(국보47)라는 기념비적인 문화유적의 碑文에 의해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또한 쌍계사는 진감선사가 우리나라에 불교음악인 梵唄를 최초로 도입하여 가르친 곳으로도 전해지는데, 범패 연주와 교육을 하던 공간이 八詠樓로 역시 文化史的으로 귀중한 역사를 지닌 곳이라 하겠다.

조선시대 士大夫들이 남긴 遊覽錄은 70 정도 남아 있는데,6) 쌍계사를 들른 사대부 , 학문적, 정치.사상적인 면에 있어 당대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3명의 기록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았다. 연구자가 연구의 대상으로 삼은 유람록은 金馹孫의 頭流紀行錄, 曺植의 遊頭流錄, 丁時翰의 山中日記이다. 기록들은 대체적으로 頭流錄이라는 이름으로 개인문집에 들어있으나, 丁時翰의 경우 그의 586일에 걸친 기행문인 山中日記 , 1 여행(1686 3 13~1687 1 22)에서의 지리산 기록을 대상으로 하였다.

사대부들의 遊覽錄은 산수유람을 통한 자연관, 정치.사회관, 그리고 유람의 목적을 고양시킨 정신세계 등을 다양하게 엿볼 있어 기록 당시의 역사와 문화 연구에 소중한 자료가 있다고 생각되어 연구의 자료로 삼았다.

智異山은 大地母神의 , 민족의 靈山 , 많은 別稱으로 불러져 오며 사람들의 삶과 함께 해온 만큼 그에 대한 연구와 저술이 적지 않았고, 신라 下代 九山禪門의 하나이자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는 쌍계사에 대한 연구 또한 적지않았으나 대체적으로 지리적·자연환경적 접근, 유람록의 문학적 가치의 연구, 불교문화재와 관련한 연구 등이 대부분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쌍계사라는 특정한 공간을 대상으로 삼아, 역사와 문화를 아우르는 전반적인 접근을 시도하는데 연구의 의의를 두고자 한다.

 

 

. 지리산 쌍계사의 역사와 문화

 

1.    쌍계사 創建說話

 

雙磎寺의 창건설화는 신라시대 義湘大師의 제자인 三法和尙이 중국 南禪宗의 祖師인 六祖 慧能大師의 頂相(머리뼈)을 중국()에서 가져와 봉안하며 세운 것으로 여러 기록들에 전해지고 있는데, 1103년 승려 釋覺訓이 쓴 것으로 전해지는 禪宗六祖 慧能大師 頂相 東來緣起 등의 기록을 취합하여 정리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삼법화상의 출생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661(문무왕 1)경에 태어나 739(효성왕 3)에 입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략) 당시 중국에는 육조 혜능이 크게 선풍을 일으키고 있었는데, 그를 찾아가서 도를 묻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714(성덕왕 13)에 입적하였다는 말을 듣고 매우 애통해 하였다. 6년이 지난 뒤 금마국 미륵사의 규정스님이 당나라에서 가지고 온 혜능대사의 설법에서 「법보단경」을 보게 되었다. 경전을 읽던 중에 스승이 이르기를 내가 입적한 뒤 5~6년이 지나서 1인이 내 머리를 취하러 올 것이다라는 대목을 읽다가, 내가 마땅히 힘껏 힘을 도모하여 우리나라에 만대의 福田을 지으리라 생각하였다. 이에 金庾信의 부인이었던 法淨비구니에게 2만금을 빌려 상선을 타고 당나라로 가서 홍주의 개원사에 머물렀다. 그곳에는 신라 栢栗寺의 승려 大悲禪伯이 있었는데, 두 사람이 서로 친하여 의논하던 중 이 절에 기거하던 장정만에게 2만금을 주고 육조의 정상을 취하여 오게 하였다. 그 뒤 귀국하여 법정비구니가 머무는 靈妙寺에서 밤마다 육조의 정상에 공양을 올렸다. 그러던 중 한 승려가 꿈에 나타나, 자신의 인연 터가 지리산 아래의 눈 속에 등나무꽃이 핀 곳이니 그곳으로 옮기도록 명하였다. 이에 大悲禪伯과 함께 눈 덮힌 지리산을 헤매던 중 12월인데도 따뜻하기가 봄과 같고 등꽃이 만발한 곳이 있었다. 이곳에 돌을 쪼아서 함을 만들고 깊이 봉안한 뒤 조그마한 암자를 세웠으며 선정을 닦기에 힘썼다. (중략) 이와 같이 쌍계사의 창건은 삼법화상이 육조 혜능대사의 정상을 안치한 것으로부터 시작된다.7)

 

삼법화상이 대비스님과 함께 꿈에서의 계시대로 눈 속에 등나무 핀 곳8) 찾아 육조 혜능대사의 頂相을 봉안함으로써 쌍계사가 창건된 것으로 전해지나, 이때는 蘭若(난야)라는 조그마한 수행처에 불과했던 것으로 여겨지며, 쌍계사가 실제 큰 절로서의 모습을 드러내게 되는 것은 그로부터 약 116년이 지난 문성왕 2(840), 중국()에서 禪宗의 法脈을 잇고 귀국한 慧昭眞鑑禪師가 폐허에 이른 난야 터의 육조 정상을 모시던 곳에 殿閣을 짓고 金堂이라 하고, 玉泉寺라고 부르면서부터이다. 그로부터 약 44년 후(886) 定康王은 한 고을에 같은 이름의 두 절이 있어 혼돈스러울까 염려된다 하여 雙磎라는 호를 내리며 쌍계사로 이름을 바꾸게 하는데, 이는 절 문 앞으로 두 개의 시내가 흐르기 때문이다.9)

 

2. 쌍계사 가람배치의 특징

 

쌍계사는 舊位인 金堂領域과 新位인 大雄殿領域으로 구분되는데, 1641(인조 19) 벽암 각성 스님에 의한 중창 이후, 진감국사에 의해 이루어진 금당영역과, 벽암 각성스님에 의해 중창된 대웅전영역의 두 공간으로 분할되는 독특한 가람구성을 이루고 있다.

대웅전영역은 절의 입구, 사찰의 경계를 이루는 一柱門을 들어서서 金剛門과 天王門을 차례로 지나 八詠樓에 이르며, 계속 西에서 東으로 이어지는 軸線을 이루면서 진감선사대공령탑비가 있는 마당과 계단을 지나 大雄殿에 이르는 비교적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다. 대웅전영역의 다른 殿閣들은 대웅전과 탑비를 중심으로 한 남북방향으로 들어서 있다. 금당영역은 팔영루 북쪽, 梵鐘閣 방향의 가파른 산자락에 남북의 軸線을 이루며 三段으로 전각들이 들어서 있는 공간을 말한다.

금당영역 하단의 靑鶴樓 옆에는 북쪽 방향으로 좁은 계단 오름이 가파르게 이어지는데, 2단의 공간에는 팔상전과 영주당. 방장실, 봉래당이 있으며, 맨 위쪽 3단의 공간에는 금당과 동방장, 서방장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이와 같이 쌍계사는 남북의 軸線을 이루는 금당영역과 동서의 軸線을 이루는 대웅전영역 두 영역이 서로 직교(直交)하는 가람배치로 형성되어 있으며, 금당영역 정면에 있던 진감선사대공탑비는 그대로 南向을 하고 있는데 비하여 대웅전은 西向을 취하는 파격적인 구도를 나타내는 있는 점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쌍계사가 두 영역으로 나누어 배치하게 된 것은 舊位(금당 영역) 터가 좁다는 입지적 조건에 의한 것이다. 또한 금당영역의 배경이 되는 산봉우리는 지리산 주능선의 토끼봉·형제봉으로 이루어지는데, 특별히 주산(主山)의 의미보다는 남북의 방위개념이 두드러지며, 대웅전 영역은 三神峰을 主山으로 하여 雙磎를 끼고 있는 동시에 서로 완만한 경사를 이루어 일주문에서 시작되는 산지가람을 향성하기에 알맞다 하겠다.10)

 

2.    쌍계사의 殿閣 槪觀

 

쌍계사의 전각들은 임진왜란 이후 중창주라 할 수 있는 벽암 스님에 의해 새롭게 건축된 것들이 대부분이며, 조선 후기를 거쳐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重修가 이어졌음을 重創記 등을 통하여 확인 할 수 있다. 본 연구에서는 쌍계사 전각의 건축적인 면은 논외로 하겠고, 쌍계사의 전각에 대한 역사.문화적인 부분만 간략히 개관하도록 하겠다. 다만 쌍계사의 문화재 중 진감선사에 의하여 도입된 불교음악 梵唄 보급의 산실로 알려져 있는 팔영루와, 오늘날 역사 속의 쌍계사가 존재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 준 진감선사대공령탑비에 대하여는 머리말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별도로 기술하도록 하겠다.

쌍계사의 重創과 관련해서도 여러 기록들이 전해지는데, 다음은 조선시대의 청허 휴정스님이 1549(명종 4)에 지은「지리산 쌍계사 중창기」이다. 쌍계사 중창의 역사·문화적 의의를 잘 느낄 수 있어 글이라 발췌하였다.

 

() 세월이 오래되어 두 현인11)은 죽고 이름은 남아 있으나 한 일은 지나갔도다. 사찰은 쇠잔하여 가시덤불숲이 되고 비석은 나무꾼의 손에 긁히고 깎이어 떨어졌으니, 고개의 원숭이들은 슬피 울부짖고 계곡의 새도 슬피 울 뿐이었다. 1540(중종 35) 경자년 봄 산의 도사인 仲暹이 여기에 와서 거닐다가 옛 비석을 어루만지며 크게 한숨 짓고 말하였다. (中略) 孤雲의 碑가 지극한 보배라 하지만 도리어 보배롭지 못한 물건이 된 것은 때와 적임자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리다.” 이에 重修할 일을 조정에 올렸더니 조정의 대신들이 모두 옳다 하였다. 禮曹에서 禁標를 세워 5 이내에서 불을 놓거나 나무를 베는 것을 금하였는데, 3년이 지나지 않아 거주민들이 저절로 교화되고 새들이 나쁜 울음소리를 바꾸었으며 떨어지는 꽃과 흐르는 물이 완연히 옛날과 같았다.(中略) 산의 雲水僧 惠修 또한 正法을 깊이 믿고 三寶를 받드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으니, 계묘년 여름에 진감선사의 절을 보고 개탄하여 중창할 뜻을 세우고, 시주를 모은 해가 되지 않아 大雄殿을 세운 다음 金堂과 동서의 방장을 짓고 落成會를 열었다.(中略) , 이미 숨은 달을 손으로 받든 이는 중섬대사요, 어두울 대나무칼로 때를 벗겨낸 이는 혜수대사가 아니겠는가. 불교를 배우는 이는 진감선사와 같이 후라야 儒가 儒로 이유를 알고 유교를 배우는 자는 고운과 같이 후라야 佛이 佛로 이유를 알리라. 그러므로 진감을 아는 자로서 고운 만한 이가 없고, 고운을 아는 자로서 진감 만한 이가 없다 하는 것이다. 세상에 고운은 없어졌으나 중섬이 일을 하였고, 세상에 진감이 없어졌으나 혜수가 일을 하였도다. (中略) 그러나 名이라는 것은 實相의 손님인지라12)  고운과 진감이 취한 바는 아니니 유교를 말하는 사람도 그릇되고, 불교를 말하는 사람도 그릇되며 유교와 불교를 함께 말하는 사람도 그릇되도다. 어찌하여 그러한가? 實相만을 구하기 때문이로다.13)

 

1) 대웅전 영역의 殿閣

 

①一柱門(경남 유형문화재 제86) : 일주문은 사찰의 가장 바깥에서 경계를 표시하는 것이다.14) 쌍계사 산문 입구의 石門을 지나 오르면 처음 만나는 문으로 다포계 팔작지붕 건물이다. 정확한 건립연대는 알 수 없으나 벽암스님이 중창하면서 창건한 것으로 짐작된다. 그 뒤의 기록은 자세하지 않으며 1901년 용담스님이 중창하면서 단청불사를 하고, 1977년 중수하였다. 일주문에 걸려있는 ‘三神山 雙磎寺, 禪宗大伽藍이라는 편액(扁額)의 글씨는 근대 서화가로 이름난 해강(海岡) 김규진(1868~1933)이 쓴 것이다.15)

 

②金剛門(경남 유형문화재 제127) : 金剛門은 불교의 守門神將인 金剛力士가 있는 문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된 익공계 건물이다. 역시 벽암 스님에 의해 창건된 것으로 추측되며, 1854년 성호스님, 1977년 고산스님이 중수하였다. 금강역사의 주임무는 사귀(邪鬼)들의 진입을 막거나, 문을 통과하는 참배자로 하여금 사심을 버리고 경건한 마음으로 성역에 들어서게 하는데 있다. 문의 왼쪽에는 목조로 된 밀적금강(密迹金剛)이 입을 굳게 다물고 있으며, 오른쪽에는 나라연금강(那羅延金剛)이 입을 벌리고 있다. 이는 범어의(梵語)의 첫글자인 ‘아’와 ‘훔’을 의미하며, 처음과 끝을 연결하는 영원성과 통일.완성을 상징하는 것이다. 사자를 탄 문수동자상(文殊童子像)과 코끼리를 탄 보현동자상(普賢童子像)이 있다.16)

 

③天王門(경남 유형문화재 제126) : 천왕문은 사방에서 불법을 外護하는 신장인 四天王을 모신 전각으로 정면 3, 측면 2칸의 주심포계 맞배지붕 건물이다. 1704(숙종 30) 백봉스님이 창건하였으며, 그 후 여러 차례의 중수가 이루어졌다. 천왕상은 1880년에 개체(改替)되었고 1978년에 중수되었다. 금강문이 문지기 역할을 하는 문신(門神)을 봉안한 문이라고 하면, 천왕문에 봉안된 사천왕은 천상계의 가장 낮은 곳인 사천왕천의 동서남북 네 지역을 관장하는 존재들로, 수미산의 사방 세계를 지키며 사바세계의 중생들이 불도에 따라 올바르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살피고, 그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신적 존재다. 고대 인도의 신이었던 그들은 불교에 수용되면서부터 부처님의 교화를 받고 불법을 수호하는 호법천왕의 구실을 하게 되었으며, 동방 지국천이 검을, 북방 다문천이 비파를 서방 광목천이 탑을, 남방 증장천이 용을 쥐고 있는 무서운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17)

 

④八詠樓(경남 문화재 자료 제74) : 정면 5, 측면 3칸의 주심포 맞배지붕 건물이다. 휴정스님이 쓴 「지리산 쌍계사 중창기 」에는 1542년 무렵 중섬화상이 팔영루 5칸의 지붕을 다시 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어 이미 그 이전에 팔영루가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벽암스님에 의해 재건되었으며, 이후의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1978년에 중건되었다. 진감선사가 섬진강에 뛰노는 물고기를 보고 8음률로서 魚山(범패梵唄)를 작곡했다고 하여 八詠樓라 불리며 또한 이곳은 범패의 명인을 교육시켰던 교육장이었다고 한다.18)

 

⑤大雄殿(보물 제500) : 1641(인조 19) 벽암스님이 3불과 4보살을 모시는 대웅전을 건립하였으며 그 뒤 1695(숙종 21) 백암 성총스님이 중수하고, 1735(영조11)에 법훈스님, 1850(철종1)에 쌍운 경찰스님과 쌍월 필홍스님이 중수하였으며, 현대에 이르러서도 일부 수리와 보수공사가 이루어졌다. 최근 대웅전 건물이 기울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2007년 문화재청의 지원 하에 보수공사가 완료되었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다포계 팔작지붕 건물로서 3단의 자연석축으로 형성된 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민흘림기둥으로 세웠으며 네 귀퉁이에 활주를 두고 있다. 전각 내부의 불탑에는 중앙의 목조석가여래좌상을 중심으로, 좌측에 紙造아미타여래좌상을 우측에 약사여래불을 봉안하였으며 그 좌우로는 각각 문수.보현보살, 관음.일광 보살입상을 두어 3 4보살을 봉안하였다.19)

 

⑥冥府殿(경남 유형문화재 제123) : 정면 5, 측면 2칸의 翼工系 맞배지붕 건물이다. 벽암 스님이 冥王殿으로 창건하였으며 1687(숙종13) 성안스님이 중창하고 1710년에 도민스님이 중수하였다. 1861년에 시왕상을 改替하였고, 1898년 여름에 건물이 함몰되고 채색이 퇴락하여 건물의 중건과 시왕상 개체가 이루어졌고, 1979년에 고산스님이 중수하였다가 2002년에 완전해체 중창하였다.조선후기 익공계 맞배집의 양식적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주심포계 건축과의 관계를 비교하는 좋은 재료가 된다.20)

 

⑦羅漢殿(경남 유형문화재 제124) : 정면 3, 측면 2칸의 翼工系 맞배지붕 건물이다. 목조석가모니불을 主佛로 하여 죄우 협시로는 가섭존자와 아난존자입상을, 그 주위에 목조십육나한과 사자상·인왕상을 각각 2구씩 모셨다. 이 가운데 가섭존자의 모습은 매우 귀엽고 익살스러워 보는 이로 하여금 친근감을 느끼게 한다. 벽암스님이 창건한 應眞堂이 나한전의 전신일 것으로 추정된다. 17세기 중엽에 건축된 소규모의 翼工系 불전으로 조선후기 익공계 건축의 법식 연구에 좋은 자료이다.21)

 

⑧寂默堂(경남 문화재 자료 제46) : 정면 6,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현재 요사로 사용되고 있다. 창건연대는 확인되지 않으며 1641년 벽암스님이 중수하고 1978년에 고산스님이 다시 중수하였다.22)

 

⑨說禪堂(경남 문화재 자료 제153) : 정면 7,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현재 쌍계사 승가대학으로 사용되고 있다. 창건연대는 확인되지 않으며 1641년에 벽암스님이 중수하고 1801, 1974, 2002년 중수되었다.23)

 

2) 金堂영역의 殿閣

금당영역은 舊位라 하여 쌍계사 북쪽 가파른 산자락에 3단의 공간을 이루며 전각들이 들어서 있는 공간을 말하는데, 금당을 비롯하여 동·서방장과 팔상전·영주당·방장실·봉래당·청학루가 있다. 창건 당시부터 맨 위쪽에 있는 금당이 六祖의 影堂이고, 그 아래에 있는 八相殿이 법당인데, 이는 禪宗 초기 가람의 특징으로 탑과 회랑이 없고 불보와 법보에 대한 의미보다는 육조 혜능에 대한 존경과 조사에 대한 숭배가 중시되었음을 알 수 있다.

 

①六祖頂相塔殿(金堂. 경남 유형문화재 제125) : 육조정상탑을 내부에 봉안하고 있는 정면 3, 측면 2칸의 다포계 팔작지붕 건물로 金堂이라고 한다. 三法和尙이 六祖의 頂相(머리뼈)을 모시고 와 석감에 넣어 이곳 땅 밑에 안치했다고 한다. 그 뒤 신라 민애왕 때 진감선사가 석감을 보호하기 위해 건물을 세워 六祖影堂이라 불렀다. 현재 건물 내 석감 위에 세워져 있는 7층석탑은 1864(철종15) 봄에 완성된 것이다. 전각 정면에 걸려있는 六祖頂相塔稅界一花祖宗六葉’’은 원래 秋史의 글씨로서 지금은 보관상의 이유로 模刻하여 걸어두었고, 진본은 박물관인 聖寶殿에 전시되어 있다.24)

 

②靑鶴樓(경남 문화재 자료 제15) : 정면 3, 측면 2칸 맞배지붕의 2층 누각 건물이다. 「삼신산 쌍계사 청학루 중창기」을 비롯한 청학루 관련기록에 따르면 진감국사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그 후 조선시대 후기에 이르러 수 차례의 중창과 중수 불사가 이어졌으며 현재의 건물은 1930년에 손민스님이 중건한 것이다. 2층 누각은 예부터 스님들이 기도정진하는 곳으로 쌍계사 역사의 일 면모를 알려줄 뿐만 아니라 풍류객들의 발자취가 담긴 현판류들이 걸려 있다.25)

 

③八相殿(경남 유형문화재 제87) : 정면 3, 측면 3칸의 다포계 팔작지붕 건물이다. 1290(고려 충렬왕 16) 진정국사에 의해 창건되었으며, 1466(세조 12)에 선비스님이 중수하였다. 조선후기에 들며 3차례의 중수와 한차례의 보수공사가 이루어졌으며 현재의 전각은 1978년 현 쌍계사 조실인 고산스님이 중창한 것이다. 조선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목조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원래 봉안되어 있던 팔상탱은 보물로서 성보전에 전시되어 있으며 현재는 보물과 똑같이 조성한 팔상탱을 모셔두고 있다.26)

 

④기타 금당영역의 殿閣 : 쌍계사의 금당영역에는 영주당·봉래당 동·서방장등이 있는데, 이 殿堂들의 이름은 다름 아닌 한라산.금강산 지리산의 다른 이름이다. 이는 곧 三神山을 상징하는 것으로 영산숭배사상을 배경으로 하는 쌍계사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 殿閣들은 1980년부터 2003년에 걸쳐 重建되었다

 

4. 梵唄와 八詠樓

쌍계사 八詠樓는 우리나라 불교 음악의 창시자인 진감선사(774-850) 중국에서 불교 음악을 공부하고 돌아와 우리 민족에 맞는 불교음악 梵唄를 만든 불교음악의 발상지이며, 훌륭한 범패 명인들을 배출한 교육장으로, 섬진강에서 뛰노는 물고기를 보고 八音律로써 魚山(범패) 작곡했다고 해서 八詠樓라고 한다.27)

혜소 진감선사는 애장왕 5 중국() 들어가 그곳의 神鑑(신감)에게 배웠으며 다시 숭산의 소림사에서 범패의 음곡과 창법을 익혀 당나라에서 유학한 26 만인 흥덕왕 5(830) 귀국하여 상주 장백사에 머무르다가, 6 만에 그곳을 떠나 지리산 화개골로 들어와 삼법의 옥천사를 수리하여 도량을 크게 넓히고, 문성왕 12(850) 77세로적하기까지 12 동안 옥천사(쌍계사) 지키며 팔영루에서 범패음곡을 가르쳤다고 전해진다. 이렇듯 범패음곡은 쌍계사에서 원류를 낳고, 나아가 쌍계사는 신라에 범패음곡을 널리 보급시킨 중심지가 되었던 것이다.

범패음곡은 魏나라 사람, 曺植이 泉石이 깊고 아름다운 魚山의 수도장에서 頌經에 열중하다가 홀연 공중에서 하늘의 소리가 맑고 哀婉함을 듣고 곡조를 따서 만들었으며, 그래서 처음에는 어산의 (魚山之妙)라고도 불렸다고 한다.28)

지리산 유람록에도 범패와 관련된 내용이 자주 등장하는데, 조선시대에도 齋를 올리거나 공양을 드리는 불사에서는 물론 무용이나 육체적 수련에서도 음곡이 쓰여졌음을 있다. 金馹孫의 지리산 유람록인 「頭流紀行錄」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금대암(金臺庵)29) 이르렀다. 누더기 납의를 입은 승려 20여명이 가사를 둘러매 뒤

따르며 범패를 하고 있었는데 그 속도가 매우 빨랐다. 내가 물어보니 정진도량이라

. 묵계사(默溪寺)30) 당도하였다... 금대암의 승려들처럼 20 명의 승려가

묵묵히 정진하는 모습이 만하였다 정상에서 서둘러 하산하여 정오 의신사

(義神寺)31) 닿았다. 의신사는 평지에 있었다. 승려 30 명이 정진하고 있었다.32) 

범패음악은 삼국시대에서부터 있어온 속악, 고구려 왕산악의 거문고, 대가야 우륵의 가얏고, 지리산 삼신동 옥보대의 피리 등과 아울러 우리민족의 음악발전에 크게 기여하였고, 특히 세종대왕 때의 영산회상곡, 월인천강지곡과 같은 아악장의 巨曲이 나오게 것은 불교음악인 범패의 영향이 매우 컸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팔영루는 우리나라 범패음악의 발상지로서 역사적·문화적으로 의미가 큰 곳이라 하겠다.33)

 

5. 眞監禪師大公靈塔碑

쌍계사 팔영루와 대웅전 사이의 공간에는 오래된 탑비(塔碑) 서있다. 비신(碑身) 한면을 가득 메우며 해서체로 또박또박 새겨져 있는 글은 어렵기도하지만 파손과 마모가 심해 이제 알아보기도 쉽지않다. 국보 47호인 탑비의 정식명칭은 ‘진감선사대공령탑비(眞監禪師大空靈塔碑)’이며(이하 탑비라 한다), 치원 글을 지었다는 이른 사산비명(四山碑銘) 중의 하나이다. 탑비는 지금으로부터 1120여년 (885~886 신라 헌강왕 ~정강왕) 쌍계사(당시의 이름은 玉泉寺) 창건주 진감선사 혜소스님의 탑비를 조성하라는 임금의 지시에 의해 고운 선생이 글을 짓고 썼으며 환영(奐榮)스님이 새겨, 진성여왕 1(887) 완성하였다.

세상의 명리에 초연하며 왕의 부름도 마다하던 진감선사는 자신의 행적에 대한 기록을 일절 남기지마라는 유언을 남기지만, 후일 선사를 사모하는 후학들의 뜻을 받아들인 임금은 당나라에서 귀국한 서른 즈음의 최치원에게 탑비 조성을 지시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드러내지 마라 하던 진감선사의 행적과 쌍계사의 역사는 선명한 기록으로 남아 천년세월동안 지리산 자락에 살아 숨쉬고 있는 것이다. 탑비가 세워진 것은 스님 입적 36, 고운 귀국 1 후의 일이다.

어떠한 기록도 남기지 말라고 스님의 유언을 어기고 글을 남기게 것에 대해 최치원 마땅히 일을 했음을 밝히며 탑비에 다음과 같은 내용을 남겼다.

 

『어떤 사람이 “선사께서 명도 하지 말고 탑도 하지 말라는 훈계를 내렸는데, 후대에 내려와 우리 제자들에 이르러서는 확실히 선사의 뜻을 받들지 못하였다. 이는 그대들이 구하고자 것인가, 아니면 왕이 하라고 명한 것인가? 실로 백옥의 티로구나” 하였다. ! 그르다고 하는 사람은 또한 그르도다. 명예를 가까이 하지 않아도 이름이 드러남은 수행의 남은 보답이니, 재처럼 없어지고 번개처럼 끊어지는 것보다는 때에 만한 일을 하여 명성을 대천세계(大千世界) 떨치게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34)

 

탑비의 비문은 4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1단은 서론으로 당나라 유학에 대한 자부심을 피력하여 불교와 유교가 추구하는 도에 차등이 있을 없고, 신라인과 중국인이 인성에 차이가 있을 없다는 자존의식을 표출하며, 진감스님이 당나라로부터 선도(禪道) 전하여 나라를 빛낸 인물임을 부각시키고 있다. 2단은 진감선사의 출생 출가를 비롯하여 쌍계사 창건과정 그의 생애를 서술하고 있으며, 3단은 비문을 찬술하게 경위를 서술하고 있다. 4단은 4언절구로 이루어진 게송으로 명사(銘詞) 해당한다.

탑비는 귀부와 이수 탑신을 완전하게 갖추고 있으며 이수 정면 용트림 조각이 전액 좌우에서 서로 머리를 들고 입을 벌리고 있으며, 중앙에 피어난 연꽃받침 위의 동그란 보주를 서로 차지하고자 대결하는 힘차 보인다. 현재 비신(碑身) 우측 상부는 크게 떨어져 나간 부분이 있고 균열이 심하여 비신사면에 보조철골을 세워놓은 상태이다. 이처럼 비면에 손상이 많으나 1725(영조1) 목판에 模刻한 비문이 있어 내용을 있다. 비문의 글씨는 자경(字徑) 2.3cm, 자수(字數)2423개이다.35)

신라 경문왕 8(868), 12살의 어린 나이로 중국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던 최치원 그곳에서 18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고, 당나라에서 황소의 난이 일어나던 25 때에는 토벌군의 종사관으로 종군하여 반란군의 두목 황소에게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지어보내 혼비백산을 하게함으로써 문명을 크게 떨쳤다. 헌강왕 11(885) 귀국하여 '시독한림학사 병부시랑 지서지감'이란 직위에 올랐던 그의 벼슬생활은 정강왕의 뒤를 이어 진성여왕이 왕에 오르고 후부터는 그리 평탄하지 않았던 듯하다. 태산(정읍), 천령(함양), 부성(서산) 등지의 외직을 전전하다가 기득권 세력에 의해 외면당하고 중용되지 못하다가, 끝내 벼슬을 버리고 방랑의 길에 올라 지리산으로 들어가며, 효공왕 3(899), 방랑에서 돌아온 최치원 가족을 데리고 세속의 명리와 완전히 결별하며 가야산으로 들어가고, 신라는 그로부터 36 멸망하게 된다.(935)36)

 

-계속-

 
두류/조용섭

1) 백두대간 산줄기가 마지막 머무는 곳이라 하여 頭留山이라고도 한다.

2) 국민대 국사학과, 『지리산 문화권』, 역사공간, 2003, 20

3) 전북 진안군 백운면 데미샘

4) 국민대 국사학과, 앞의 책, 23~4

5) 雙磎寺, 『삼신산 쌍계사지』, 성보문화재연구원, 2004, 24~5.

6) 李陸 외 7,『智異山記 외』,최석기 3명 譯,「선인들의 지리산 유람록」, 돌베개, 2000, 385.

7) 쌍계사, 앞의 책, 24

8) 智異山雪裏葛花處

9) 『河東郡誌』, 「寺刹條」,雙磎寺 , 雙磎寺 , 앞의 , 85.

10) 쌍계사, 앞의 책, 28.

11) 최치원과 진감선사를 말한다.

12) 莊子 逍遙遊  名者 實之賓 : 장자 소요유에 나오는 것으로 名에는 실덕이 수반되어야 한다. 實이 主이고 名은 客이라는 말이다

13) 휴정, 『청허집』, 5, 쌍계사譯, 앞의 , 105~106.

14) 이양희, 「한국사찰의 일주문에 대한 연구」, 동국대 석사학위논문, 2001, 29.

15) 쌍계사, 앞의 , 31.

16) 같은 , 31.

17) 같은 책, 31.

18) 같은 책, 31.

19) 같은 책, 32.

20) 같은 책, 34.

21) 같은 책, 35.

22) 같은 책, 35.

23) 같은 책, 35.

24) 같은 책, 29.

25) 같은 책, 30.

26) 같은 책, 30.

27) 쌍계사, 같은 책, 32.

28) 김경렬, 『다큐멘타리 르포 지리산2, 일중사, 1988. 243~5.

29) 현 경남 함양군 마천면에 있는 암자.

30) 현 경남 하동군 청암면에 있었던 암자로 추정.

31) 현 경남 하동군 화개면에 있었던 암자.

32) 이육 외 7, 『두류산기 외』최석기 3명 譯, 앞의 책, 71, 80, 90.

33) 김경렬, 앞의 책, 247.

34) 쌍계사, 앞의 책, 348.

35) 같은 책, 36.

36) 국민대 국사학과, 앞의 책, 175~1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