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인조반정

병자호란 다시 읽기(66)유화적인 대일정책① [병자호란 다시 읽기] (66) 유화적인 대일정책Ⅰ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직전인 1635년 후반 무렵, 조선은 또 다른 난제를 안고 있었다. 다름 아닌 ‘일본 문제’였다. 조선은 갈수록 높아지는 후금의 군사적 위협과 명의 요구를 감당하기에도 버거운 처지였다. 당연히 일본과의 관계 안정이 절실했다. 그.. 더보기
[병자호란 다시 읽기(65)전란의 전조(前兆) [병자호란 다시 읽기] (65) 전란의 전조 1634년 말부터 이듬해 봄까지 조정은 강학년(姜鶴年) 발언의 파장 때문에 뒤숭숭했다.‘포악함으로써 포악함을 제거했다.’며 인조반정의 정당성 자체를 부정했던 강학년의 직격탄은 인조와 조정 신료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인조와 반정공신들의 실정(失政)을 문.. 더보기
병자호란 다시 읽기(64)외환(外患) 속의 내우(內憂) [병자호란 다시 읽기] (64) 외환(外患) 속의 내우(內憂) 재원 문제 때문에 청북(淸北) 지역의 성곽 수리와 군량 공급마저 여의치 않았던 상황에서 노유녕에게 십만 냥 가까운 은화를 뜯겼던 것은 너무나 큰 손실이었다. 하지만 인조는 노유녕이 다녀간 뒤 상당히 고무되었다. 명 조정이 왕세자를 책봉해 .. 더보기
병자호란 다시 읽기(63)엎친데 덥치다 [병자호란 다시 읽기] (63) 엎친 데 덮치다 공유덕과 경중명 일당의 후금 귀순은 조선에 치명적이었다. 조선은 명의 강요 때문에 ‘공경 사건’을 놓고 벌어진 명과 후금의 싸움에 말려들었다. 하지만 공경을 저지하는 데 실패했고, 결국 후금으로부터 원망만 사고 말았다. 후금은, 공경의 귀순을 저지.. 더보기
병자호란 다시 읽기(62)반란자와 귀순자들③ [병자호란 다시 읽기] (62) 반란자와 귀순자들 Ⅲ 조명연합군의 필사적인 저지 작전에도 불구하고 공유덕과 경중명은 후금으로 귀순하는 데 성공했다. 비록 중간에 다소의 손실이 있었지만 공경(孔耿)이 끌고 갔던 전함과 수군의 대부분은 후금군으로 넘어갔다. 후금의 홍타이지는 공경이 가져온 전함.. 더보기
병자호란 다시 읽기(61)반란자와 귀순자들② [병자호란 다시 읽기](61) 반란자와 귀순자들 Ⅱ 공유덕과 경중명이 이끄는 반란군이 후금으로 도주하려 하자 명에는 비상이 걸렸다. 명 조정은 주문욱(周文郁)에게 수군을 이끌고 공경(孔耿) 일당을 저지하도록 지시했다. 주문욱은 나름대로 분투했지만 반란군의 도주를 차단하지 못했다. 급기야 공유.. 더보기
병자호란 다시 읽기(60)반란자와 귀순자들① [병자호란 다시 읽기] (60) 반란자와 귀순자들Ⅰ 明장수 공유덕·경중명 수군과 함선 이끌고 후금에 투항 후금이 명을 압박하면서 조선과 후금의 관계 또한 살얼음판을 걷고 있던 1633년 무렵, 세 나라의 관계를 뿌리째 흔드는 사건이 일어났다. 반란을 일으켜 등주(登州)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명나라 .. 더보기
병자호란 다시 읽기<59>곤혹스런 상태가 지속되다 [병자호란 다시 읽기] <59> 곤혹스러운 상태가 지속되다 조선이 후금과의 관계를 안정시키려면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어야 했다.1630년 무렵부터 병자호란이 일어날 때까지 후금이 요구했던 핵심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자신들과의 교역에 성의를 보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가도( 島)의 한..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