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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반정59

병자호란 다시 읽기(38)정묘호란 일어나다③ [병자호란 다시 읽기] (38)정묘호란 일어나다 Ⅲ 조선 사신이 ‘재조지은을 배신할 수 없다.’며 침략을 힐문했을 때 아민은 즉각 반박했다. 반박의 핵심은 ‘조선이 명의 은혜만 기억할 뿐 자신들이 베푼 은혜에는 눈을 감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민은 과거 울라(烏拉)의 부잔타이(布占泰)가 조선을 .. 2007. 9. 27.
병자호란 다시 읽기(37)정묘호란 일어나다② [병자호란 다시 읽기] (37)정묘호란 일어나다Ⅱ 1627년 후금이 갑자기 정묘호란을 도발했던 배경은 무엇일까? 그것은 복합적이었다. 조선과 후금, 명과 후금, 그리고 조선과 명(-모문룡 문제를 포함) 사이의 문제점들이 서로 얽혀 있었다. 특히 누르하치가 죽은 뒤 추대 형식으로 즉위했지만 한(汗)의 위.. 2007. 9. 19.
병자호란 다시 앍기(36)정묘호란 일어나다① [병자호란 다시 읽기] (36) 정묘호란 일어나다Ⅰ 후금군 파죽지세… 인조 강화로 피난갈 궁리만 홍타이지는 1627년 1월8일 대패륵(大貝勒) 아민(阿敏)에게 조선을 정벌하라고 명령했다. 홍타이지는 “조선이 오랫동안 후금에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설명한 뒤 모문룡도 제압하라고 지시했다. .. 2007. 9. 12.
병자호란 다시 읽기(35)명과 후금의 정세③ [병자호란 다시 읽기] (35) 명과 후금의 정세 Ⅲ 1626년(인조4, 천계6) 1월23일 누르하치는 영원성으로 들이닥쳤다. 그가 이끄는 병력은 20만이라는 설도 있고,13만이라는 설도 있다. 어쨌든 누르하치의 대병력이 나타나자 영원성의 전면에 머물던 명의 관민(官民)들은 경악했다. 대릉하(大凌河), 소릉하(小.. 2007. 9. 5.
병자호란 다시 읽기(34)명과 후금의 정세② [병자호란 다시 읽기] (34) 명과 후금의 정세 Ⅱ 천계 연간 격렬한 당쟁이 빚어지고 결국 위충현을 비롯한 엄당이 국정을 장악하게 되자 그 불똥은 곧바로 산해관 바깥으로 튀었다. 요동, 요서(遼西)의 방어를 책임진 최고위 지휘관들 또한 당쟁의 여파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어느 당파에 속하느냐가 .. 2007. 8. 31.
병자호란 이야기(31)모문룡의 작폐① [병자호란 다시 읽기] (31) 모문룡의 작폐Ⅰ 인조반정 성공 이후 조선이 표방했던 대외정책의 성격은 ‘친명배금(親明排金)’이었다. 그런데 ‘친명’은 분명 실천했지만 ‘배금’은 쉽사리 실천할 수 없었다.‘배금’을 실천하려 할 경우 필연적으로 후금과의 군사적 충돌 가능성이 높아지고, 조선의.. 2007. 8. 8.
병자호란 다시 읽기(30)이괄의 난이 끼친 영향④ [병자호란 다시 읽기] (30) 이괄(李适)의 난(亂)이 끼친 영향 Ⅳ 이괄의 난을 계기로 인조정권의 취약점과 한계는 여지없이 드러났다. 뿐만 아니라 인조정권이 구상하고 있던 계획들을 흐트러뜨렸다. 인조반정 성공 직후 ‘후금을 정벌하여 명의 은혜에 보답하겠다.’고 호기롭게 내세웠던 표방은 물거.. 2007. 8. 1.
병자호란 다시 읽기(29)이괄의 난이 일어나다 [병자호란 다시 읽기](29)이괄(李适)의 난(亂)이 일어나다Ⅲ 1624년 2월10일 이괄이 서울로 입성한 직후, 도원수 장만은 관군을 이끌고 서울을 향해 달렸다. 장만은 초조했다. 반란군에게 도성을 내주고 국왕으로 하여금 파천 길에 오르게 만든 일차적 책임이 자신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장만은 파주 혜음.. 2007. 7. 26.
병자호란 다시 읽기(28)이괄의 난이 일어나다② [병자호란 다시 읽기] (28) 이괄(李适)의 난(亂)이 일어나다 Ⅱ 인조반정을 일으키던 당일, 대장 김류는 미적거렸다. 성공 여부를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2경에 모이기로 했던 약속을 어겼고, 그가 나타나지 않자 반정군 진영은 동요했다. 바로 그 때 군사들을 다잡아 대오를 안정시킨 사람이 .. 2007. 7. 18.
병자호란 다시 읽기(27)이괄의 난이 일어나다① [병자호란 다시 읽기] (27) 이괄의 난이 일어나다① 반정 직후 인조정권이 명에 대해 충성을 다짐했던 것과 맞물려 후금에 대한 적개심도 높아져 갔다. 인조와 신료들은 후금과 전쟁이 일어나는 상황을 가상하고 작전과 승패 향방을 자주 논의하곤 했다. 하지만 후금과의 군사적 대결을 구체적으로 준.. 2007. 7. 10.
병자호란 이야기(26)인조반정과 외교적 파장③ [병자호란 다시 읽기] (26) 인조반정의 외교적 파장 Ⅲ 명 조정이 인조반정을 ‘찬탈’이라고 비판하면서도 조선의 새 정권을 승인하기로 결정한 것은 분명 자신들이 처한 수세(守勢)를 염두에 둔 결단이었다. 명 조정은 마치 ‘모문룡의 은혜’ 때문에 인조를 책봉하는 것처럼 포장했다.‘자격이 되지.. 2007. 7. 4.
병자호란 다시 읽기(25)인조반정과 외교적 파장② [병자호란 다시 읽기] (25) 인조반정의 외교적 파장Ⅱ 인조반정을 ‘찬탈’이라고 비판하면서도 조선을 후금과의 대결 속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절실했던 명은 고민을 거듭했다.‘찬탈’을 자행한 난신적자(亂臣賊子)들을 응징하여 상국으로서 명분을 살릴 것인가? 아니면 이미 바뀌어버린 조선의 현.. 2007. 6. 27.
병자호란 이야기(24)인조반정과 외교적 파장① [병자호란 다시 읽기] (24) 인조반정의 외교적 파장 Ⅰ 인조반정의 발생과 성공은 대외적으로도 커다란 파장을 몰고 왔다. 조선에서 정변이 일어나 광해군이 폐위되고 새로운 정권이 들어섰다는 소식에 명은 민감하게 반응했다. 당시 후금의 군사적 압박에 밀려 수세에 처해 있던 명에 조선은 가장 중.. 2007. 6. 20.
병자호란 이야기(23)심하전역과 인조반정⑤ [병자호란 다시 읽기] (23) 심하전역과 인조반정 Ⅴ 1623년(광해군 15) 3월13일 새벽, 광해군은 다급하게 창덕궁의 담을 넘었다. 내시의 등에 업힌 채 궁인 한 사람만을 대동한 초라한 몰골이었다. 자신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된 반정군(反正軍)의 함성 소리를 뒤로하고 그는 안국방(安國坊)의 여염으로 숨어.. 2007. 6. 13.
병자호란 다시 읽기(22)심하전역과 인조반정④ [병자호란 다시 읽기] (22)심하전역과 인조반정 Ⅳ 강홍립이 이끄는 원군이 심하전역(深河戰役)에서 패하여 누르하치에게 항복했다는 소식은 조선 조야(朝野)에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다. 한편에서는 강홍립의 가족을 잡아들여 가두라는 아우성이, 다른 한편에서는 그의 항복 때문에 조선도 오랑캐가 .. 2007. 6. 7.
병자호란 이야기(21)심하전역과 인조반정 [병자호란 다시 읽기] (21) 심하전역과 인조반정 Ⅲ 광해군이 명의 파병 요구를 거부하려 했던 것은, 폐모논의와 궁궐 건설 문제 등 내정(內政)의 현안들을 해결하는 것도 벅찼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명의 압력과 내부의 채근에 밀려 군대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1619년(광해군 11) 2월, 조선군은 압록.. 2007. 5. 30.
병자호란 다시읽기(19)심하전역과 인조반정① [병자호란 다시 읽기] (19) 심하전역과 인조반정 Ⅰ 광해군은 노회한 명과 사나운 후금 사이의 대결 속으로 말려들지 않기 위해 노심초사했다. 그가 정보를 수집하고, 기미책을 강구하며, 자강 능력을 배양하려 애썼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당시의 정세는 결코 간단하지 않았다. 비록 외교적 노.. 2007. 5.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