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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반정59

병자호란 다시 읽기(61)반란자와 귀순자들② [병자호란 다시 읽기](61) 반란자와 귀순자들 Ⅱ 공유덕과 경중명이 이끄는 반란군이 후금으로 도주하려 하자 명에는 비상이 걸렸다. 명 조정은 주문욱(周文郁)에게 수군을 이끌고 공경(孔耿) 일당을 저지하도록 지시했다. 주문욱은 나름대로 분투했지만 반란군의 도주를 차단하지 못했다. 급기야 공유.. 2008. 3. 5.
병자호란 다시 읽기(60)반란자와 귀순자들① [병자호란 다시 읽기] (60) 반란자와 귀순자들Ⅰ 明장수 공유덕·경중명 수군과 함선 이끌고 후금에 투항 후금이 명을 압박하면서 조선과 후금의 관계 또한 살얼음판을 걷고 있던 1633년 무렵, 세 나라의 관계를 뿌리째 흔드는 사건이 일어났다. 반란을 일으켜 등주(登州)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명나라 .. 2008. 2. 28.
병자호란 다시 읽기<59>곤혹스런 상태가 지속되다 [병자호란 다시 읽기] &lt;59&gt; 곤혹스러운 상태가 지속되다 조선이 후금과의 관계를 안정시키려면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어야 했다.1630년 무렵부터 병자호란이 일어날 때까지 후금이 요구했던 핵심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자신들과의 교역에 성의를 보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가도( 島)의 한.. 2008. 2. 20.
[병자호란 다시 읽기](58)전운 그림자에 불안, 막막한 현실 [병자호란 다시 읽기] (58) 전운 그림자에 불안, 막막한 현실 후금이 대릉하 원정에 앞서 평안도 일원에 병력을 보내 위협하자 조선의 위기의식은 바짝 높아졌다. 인조는 강화도 정비에 몰두하는 한편, 후금의 침략에 대비한 군사적 방책 마련에도 신경을 썼다.1631년 8월, 인조는 서쪽 교외로 나아가 무.. 2008. 2. 13.
병자호란 다시 읽기(57)대릉하성의 비극② [서울신문] [병자호란 다시 읽기](57) 대릉하성의 비극 (2) 명이 조대수를 시켜 대릉하성을 쌓은 목적은 명확했다. 산해관의 방어를 확고히 하면서, 후금에 빼앗긴 요서(遼西)와 요동을 수복하기 위한 전진기지로 삼으려 했다. 하지만 후금군은 성의 방어 시설이 채 완공되기도 전에 들이닥쳤다. 조대수는.. 2008. 2. 6.
병자호란 다시 읽기(56)대릉하성의 비극① [병자호란 다시 읽기] (56) 대릉하성의 비극 (1) 1631년(인조 9) 8월5일 밤, 후금군은 대릉하성을 포위했다. 당시 성안에는 사령관 조대수(祖大壽)를 비롯하여 1만 5000명 남짓한 명군이 있었다. 성의 치첩(雉堞) 공사가 끝나지 않은 상태라 미처 돌아가지 못한 인부가 3000명, 상인이 2000명 정도 있었다. 후금군.. 2008. 1. 30.
병자호란 다시 읽기(55)후금,조선을 떠보다 [병자호란 다시 읽기] (55) 후금,조선을 떠보다 후금군이 침략해 오고, 사신을 보내 배를 빌려달라고 요구하자 조선의 위기 의식은 높아졌다. 조정은 김시양(金時讓)을 도원수로, 이완(李浣)을 평안병사로 임명하여 서북으로 내려보내고 전국에 징병령을 내렸다. 하지만 후금과 맞설 수 없는 처지에서 .. 2008. 1. 23.
병자호란 다시 읽기(54)후금, 조선에 배(船)를 요구하다 [병자호란 다시 읽기] (54) 후금,조선에 배(船)를 요구하다 정묘호란이 끝난 뒤부터 병자호란이 일어날 때까지 조선과 후금의 관계는 아슬아슬했다. 조선은 후금과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바로 명과 가도라는 바깥 변수 때문이었다. 유흥치가 피살된 뒤, 가도를 탈출하.. 2008. 1. 16.
병자호란 다시 읽기(53)끝없는 가도의 風雲 [병자호란 다시 읽기] (53) 끝없는 가도의 風雲 인조가 원종 추숭을 위해 골몰하고 있을 때 가도의 상황은 심상치 않게 돌아갔다. 반란을 일으켜 조선의 정벌 대상이 되었던 유흥치(劉興治)는 조선에 대한 물자 징색(徵色)을 멈추지 않았다. 유흥치를 토벌하려 했던 ‘원죄’ 때문에 조선은 그의 보복을 .. 2008. 1. 9.
병자호란 이야기(51)원숭환의 죽음과 그 영향 [병자호란 다시 읽기] (51) 원숭환의 죽음과 그 영향 홍타이지의 반간계에 휘둘리고, 엄당의 참소가 곁들여져 원숭환에 대한 반감과 증오가 높아 가던 분위기 속에서 엄당 계열의 온체인(溫體仁)은 다섯 차례나 상소를 통해 원숭환을 죽이라고 촉구했다. 반면 동림당 계열의 신료들은 ‘적이 성 아래까.. 2007. 12. 26.
병자호란 다시 읽기(50)자멸의 길로 들어서다 [병자호란 다시 읽기] (50)자멸의 길로 들어서다 우여곡절 속에 조선이 후금과의 관계를 힘겹게 이어가고 있을 무렵 명의 정세는 어떠했는가? 후금의 위협이라는 커다란 외환(外患)을 앞에 두고 명은 이런저런 내우(內憂)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극복은커녕 망하는 길로 확실히 접어들고 있었다.1630.. 2007. 12. 19.
병자호란 다시 읽기(49)우여곡절 속 후금과의 관계 [병자호란 다시 읽기] (49)우여곡절 속 후금과의 관계 정묘호란 직후 조선은 후금에 유연한 태도를 취했다. 모문룡을 비롯한 한인(漢人)들의 비방과 방해에도 불구하고 후금 사자에 대한 접대나 그들과의 무역에 성의를 보였다. 하지만 조선의 입장에서 후금과의 우호 관계는 그다지 내키지 않는 것이.. 2007. 12. 12.
병자호란 이야기(48)가도 정벌이 유야무야되다 [병자호란 다시 읽기] (48)가도 정벌이 유야무야되다 가도 정벌 방침이 전격적으로 결정되자 신료들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먼저 병조판서 이귀가 나섰다. 그는 ‘주장(主將) 진계성을 함부로 살해한 유흥치를 토벌하는 것은 당연하다.’면서도 ‘바다 건너 정벌하는 데 한 달 이상 걸리고, 중국 조정.. 2007. 12. 5.
병자호란 다시 읽기(47)親明意識의 고양과 가도 정벌 [병자호란 다시 읽기] (47) 親明意識(친명의식)의 고양과 가도 정벌 모문룡을 제거한 이후 원숭환은 가도( 島)에 대한 정비 작업에 나섰다. 부총병 진계성(陳繼盛)에게 임시로 가도의 군병들을 지휘토록 하는 한편, 유해(劉海)를 시켜 진계성을 보좌하도록 했다. 그리고 자신의 휘하인 부총병 서부주(徐.. 2007. 11. 28.
병자호란 다시 읽기(46)自强論의 이상과 현실 [병자호란 다시 읽기] (46) 自强論의 이상과 현실 우여곡절 끝에 후금과 화친함으로써 정묘호란은 끝났다. 인조 정권은 어렵사리 종사(宗社)를 보전할 수 있었지만 남겨진 과제는 참으로 버거웠다. 먼저 후금군과 이렇다할 전투 한 번 변변히 치러보지 못하고 강화도로 피란했던 현실을 돌아보아야 한.. 2007. 11. 21.
병자호란 다시 읽기(45)모문룡의 죽음과 파장② [병자호란 다시 읽기] (45)모문룡의 죽음과 파장 Ⅱ 모문룡은 쌍도로 향하면서 엄청난 수의 병력을 대동했다. 수백 척의 선박에 2만 8000명의 병력을 싣고 갔다고 한다. 말하자면 3만명 가까운 경호원을 대동한 셈이다. 원숭환으로부터 소환 통보를 받았을 때 무엇인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기 때문일 것이.. 2007. 11. 14.
병자호란 다시 읽기(44)모문룡의 죽음과 파장① [병자호란 다시 읽기] (44) 모문룡의 죽음과 파장 1 앞에서 언급했듯이 정묘호란이 벌어지는 동안 모문룡은 조선에 아무런 보탬이 되지 못했다. 보탬은커녕 그의 부하들이 끼친 작폐 때문에 청북 백성들의 고통은 극에 달했다. 그럼에도 모문룡은 명 조정에 보낸 보고서에서 ‘자신의 활약 덕분에 후금.. 2007. 11. 7.
병자호란 다시 읽기(42)일본의 氣가 살아나다 [병자호란 다시 읽기] (42) 일본의 氣가 살아나다 Ⅰ 정묘호란의 발생은 조선과 일본 관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쓰시마(對馬島)와 도쿠가와(德川) 바쿠후(幕府)는 동원할 수 있는 채널을 모두 가동하여 전쟁의 추이와 승패를 파악하려 했다. 그들은 조선과 후금의 동향을 주시하면서 전쟁이 자신들에게 .. 2007. 10. 24.
병자호란 다시 읽기(41)정묘호란의 후유증 [병자호란 다시 읽기] (41) 정묘호란의 후유증 인조는 1627년 4월12일, 서울로 돌아와 경덕궁(慶德宮)으로 들어갔다.1624년 이괄의 난을 맞아 서울을 버렸다가 되찾았던 경험을 3년 만에 되풀이했던 것이다. 이번에도 어렵사리 정권은 지킬 수 있었지만 그 후유증은 컸다. 청북에서는 의병들이 계속 저항하.. 2007. 10. 17.
병자호란 다시 읽기(40)정묘호란과 모문룡 [병자호란 다시 읽기] (40) 정묘호란과 모문룡 1627년 4월21일, 용골산성의 영웅 정봉수로부터 긴급 보고가 올라왔다.‘평안도 구성부터 곽산까지 후금 군사들이 가득 차 있고 용골산성은 고립되어 있다. 성안에는 7000명 가까운 군사가 있지만 양식이 다 떨어져 굶어 죽은 자가 이미 30명이 넘었다. 후금군.. 2007. 10. 10.
병자호란 다시 읽기(39)정묘호란 이모저모 [병자호란 다시 읽기] (39) 정묘호란 이모저모 ‘인조실록’과 장유(張維)의 ‘계곡만필(谿谷漫筆)’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정묘호란 당시 강화도의 분위기는 흉흉했다. 불과 100리 밖까지 적의 대병이 압박해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정 신료들은 대개 화의가 이루어지기를 바랐다. 척화(斥.. 2007. 10.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