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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史.文化 이야기

병자호란 이야기<80>근왕병이 패하다①

[병자호란 다시 읽기]<80> 근왕병이 패하다 Ⅰ

팔도 근왕병 속속 기치 들지만 중과부적에 한숨만…

몇 차례 소소한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상황은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시간은 속절없이 흐르고 있었고, 날씨가 추운 것도 그대로였다. 근왕병이 올 기약은 보이지 않는데 식량이 줄어들면서 조바심은 갈수록 높아졌다. 산성의 민심도 심상치 않았다. 성 밖으로 나가 전투를 치렀던 병사들 가운데서 불만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비단 옷 입은 벼슬아치들은 후방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서 왜 우리들만 사선(死線)으로 밀어 넣느냐?’는 항변이었다. 이렇게 저렇게 안간힘을 써 보고 있었지만 청군의 포위망은 좀처럼 뚫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 남한산성의 숭렬전. 백제 시조 온조 임금과 남한산성 축성의 총책인 이서 장군을 모신 사당. 청이 침입하자 인조는 어영대장 이서로 하여금 성을 지키도록 하고 8도에 교서를 내려 근왕병을 모집했다.
경기 광주시 홈페이지

명을 향한 丹心은 변함 없건만

1636년 12월24일, 진눈깨비가 내렸다. 이날은 명 나라 황제의 생일이었다. 이른바 성절(聖節)이다. 인조는 여러 신하들을 거느리고 서쪽으로 북경 황궁(皇宮)을 향해 절을 올렸다. 충성스러운 조선이었다. 청군에 쫓겨 손바닥만 한 산성에 갇혀 버린 상황에서도 황제에 대한 망궐례(望闕禮)는 거르지 않았다.

홍타이지가 황제를 칭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말도 되지 않는다고 펄펄 뛰었던 것도 사실은 명나라 때문이었다.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이 있을 수 없듯이 이 세상의 황제는 오로지 한 사람뿐이었다. 대다수 신료들은 명에 대해 충성과 의리를 지키려다가 조선이 이렇게 참담한 지경으로 내몰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조선의 일편단심을 명나라는 과연 알고 있는 것일까?

▲ 숭렬전의 원래 이름은 ‘온조왕사’였으나 정조 19년(1795)에 왕이 ‘숭렬(崇烈)’이라는 현판을 내려 숭렬전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남상인기자 sanginn@seoul.co.kr
진눈깨비가 비로 바뀌어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성첩을 지키는 장졸들의 몸이 모두 젖었다. 인조는 세자와 함께 행궁 후원(後苑)으로 갔다. 기청제(祈晴祭)를 올리기 위해서였다. 향을 피우고 네 번 절을 올린 뒤, 축문을 읽었다.

“이 외로운 성에 들어와 믿는 것은 하늘뿐인데, 찬비가 갑자기 내려 모두 흠뻑 젖었으니 끝내는 얼어죽고 말 것입니다. 이 한 몸이야 죽어도 아까울 것 없지만 백관과 만백성이 하늘에 무슨 죄가 있습니까. 조금이라도 날을 개게 하시어 우리 신민들을 살려 주옵소서.”

인조는 땅바닥에 엎드려 통곡했다. 울면서 계속 기도했다. 옷이 모두 젖어도 멈추지 않았다. 승지들을 비롯한 주변의 신료들도 비를 맞으며 같이 울었다. 승지들이 인조를 만류했지만 듣지 않았다. 대신들이 달려왔다. 영의정 김류가 어의(御衣)를 잡아당기며 만류한 뒤에야 인조는 다시 사배(四拜)하고 일어났다.

일어난 뒤에도 인조는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기둥 옆에 자리를 깔고 앉아 통곡했다. 인조의 처절한 기도가 하늘을 움직였는지 얼마 뒤 비가 그쳤다.

근왕병 소식 전해지다

12월24일, 산성 안의 마초(馬草)가 고갈되었다는 소식이 퍼졌다. 말에게 줄 먹이가 없는 이상 기마전을 벌이기는 글러버렸다. 바야흐로 조선군 장졸들은 말을 잡아먹기 시작했다.

이날 체찰부(體察府) 군관(軍官) 임몽득(任夢得)이 희소식을 전했다. 충청병사 이의배(李義培)가 12월19일 병력 4000명을 이끌고 올라와 죽산(竹山)에 머물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전진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인조는 성의 형세가 한결 나아졌다고 기뻐했다. 김류는 충청도 군사에 이어 경상도 근왕병도 차례로 올라올 것이라며 기대감을 표시했다. 성안의 분위기는 일시에 밝아졌다. 김류는 근왕병들이 성안의 형세를 잘 몰라서 전진하지 않는 것이라며 결사대를 모집하여 죽산으로 보내자고 했다.

하지만 산성에서 보내는 전령이 죽산까지 도달한다는 보장은 없었다. 곳곳에 배치된 청군 복병들 때문이었다. 이미 충청병사가 보낸 전령이 산성 문 앞까지 다 왔다가 청군 복병에게 잡히고 말았다는 우울한 소식이 날아들었다.

충청도 근왕병이 산성 근처로 다가오기를 고대하고 있던 12월26일, 마침내 강원도에서 근왕병이 달려왔다. 강원감사 조정호(趙廷虎)에게 소속된 병력이었다. 그는 청군의 침략 소식을 들은 직후 도내 각 고을 수령들에게 병력 동원을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조정호는 병력을 이끌고 12월24일 양근(楊根·양평)으로 진군했다. 그는 양근에서 후속 부대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면서 원주영장(原州營將) 권정길(權井吉)을 선봉장으로 삼아 남한산성 쪽으로 먼저 진군하게 했다.

권정길 휘하에는 원주, 횡성, 인제, 홍천 출신의 병력 약 1000명이 배속되어 있었다. 권정길은 12월26일 병력을 이끌고 남한산성 부근의 검단산(檢丹山)까지 진출했다. 행군 도중 인제 출신 병사들이 청군 2명을 잡아 목을 베고 그들의 말을 노획해 왔다. 권정길은 청군의 목을 매달도록 하는 한편, 말을 잡아 병사들을 먹였다.

당시 검단산과 남한산성 사이의 평야 지대에는 청군 진영이 설치되어 있었다. 청군 진영 부근에서 진을 칠 만한 적당한 장소를 찾지 못한 권정길은 휘하 병력을 이끌고 검단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산길 곳곳에 널린 눈과 얼음 때문에 병졸들은 미끄러지는 것을 수없이 반복하는 악전고투 끝에 정상에 오를 수 있었다.

날이 어두워지자 검단산 정상의 병사들은 횃불을 밝혀 들고 포를 쏘았다. 남한산성을 향해 보내는 신호였다. 산성에서도 검단산 쪽으로 북을 치며 호각을 울려 호응했다. 얼마나 기다렸던 근왕병이던가.

권정길은 병사들에게 남초(南草·담배)를 나눠주어 사기를 북돋았다. 늦은 밤, 산성에서 왔다는 승려 한 사람이 권정길 앞에 나타났다. 그는 검단산에서 남한산성으로 이어지는 샛길을 알고 있다며 스스로 향도(嚮導)가 되겠다고 나섰다. 권정길은 그의 말을 믿었다.

권정길은 병졸들에게 군장(軍裝)을 꾸리라고 지시했다. 이튿날 아침 포위를 뚫고 산성으로 들어가려는 작전을 세웠다.

권정길의 근왕병 패퇴하다

12월27일 아침, 권정길 부대는 산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인조와 조정이 남한산성에 고립된 이후, 청군의 포위망을 뚫어보려는 최초의 시도였다. 청군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청군 2000여명은 나무로 만든 방패에 몸을 숨긴 채 조선군을 포위하려 들었다. 권정길 부대는 청군을 향해 일제히 조총과 화살을 쏘았다. 선봉에 섰던 청군들은 견디지 못하고 뒤로 물러섰다. 이렇게 하기를 세 차례, 시간이 흐를수록 청군 측의 사상자는 늘어났다.

일단 물러났던 청군은 병력을 증원하여 다시 공격해 왔다. 전투가 한창일 때, 조선군 진영에서 병사 하나가 ‘화약이 다 떨어졌다. 빨리 더 보내달라.’고 외쳤다. 군중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청군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증강된 청군 병력의 공격에 조선군은 산 쪽으로 밀렸다. 전사자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비록 조총과 화살을 발사했지만 청군의 기세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조선군의 퇴로는 미끄럽고 험준했다. 달아나는 병사들은 발을 제대로 디딜 수 없었다. 우왕좌왕하는 조선군을 향해 청군 기마대가 들이닥쳤다. 전세가 기울었다고 생각한 권정길은 칼을 뽑아 스스로 목을 찌르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부하들이 다투어 말리는 바람에 미수에 그쳤다. 결국 권정길은 병력 대부분을 잃고 패주하고 말았다.

춘천으로 돌아간 권정길은 군관을 보내 흩어진 병사들을 모아 부대를 수습하려고 노력했다. 선봉장이었던 그의 부대가 패한 것은 강원도 근왕병 전체의 사기를 떨어뜨렸다.

하지만 패전의 책임을 권정길에게 돌릴 수는 없었다. 그는 중과부적(衆寡不敵)의 악조건 속에서도 분전했다. 겨우 1000명 정도의 병력만으로, 산성을 포위하고 있는 수만의 청군과 상대하기란 애초에 역부족이었다.

양근에 주둔하고 있던 조정호 휘하의 본대로부터 지원병이 왔어야 마땅했다. 그러나 조정호의 본대는 움직이지 않았다. 또 남한산성의 조선군이 권정길 부대와 공동작전을 벌이지 못한 것도 아쉬운 대목이다.

그것은 결국 당시 청군이 남한산성과 외부와의 연계를 철저하게 차단하고 있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근왕병은 계속 일어나고 있었지만, 그들은 모두 각개 격파될 위기에 처해 있었다.

권정길 부대의 패전 이후, 산성의 탄식이 더 커져 가고 있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서울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