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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로운 글방/숲속의 글마당

[詩]벗에게 부탁함/정호승

by 지리산 마실 2007. 3. 28.
[시가있는아침] `벗에게 부탁함` [중앙일보]

 

'벗에게 부탁함' - 정호승(1950~ )

벗이여

이제 나를 욕하더라도

올 봄에는

저 새 같은 놈

저 나무 같은 놈이라고 욕을 해다오

봄비가 내리고

먼 산에 진달래가 만발하면

벗이여

이제 나를 욕하더라도

저 꽃 같은 놈

저 봄비 같은 놈이라고 욕을 해다오

나는 때때로 잎보다 먼저 피어나는

꽃 같은 놈이 되고 싶다


꽃이 귀해서, 새가 귀해서, 현대인의 삶과 가슴속에 봄비가 하도 귀해서 욕으로라도 꽃으로, 새로, 봄비로 불리고 싶네. 꽃이 지천이어도 꽃을 모르고 사랑과 고통이 지천이어도 사랑과 고통에 둔감해지네. 꽃으로도 나무로도 새로도 실패하고 겨우 냉혈인간이나 된 나에게 욕이라도 봄비 같은 놈이라고 해다오. 모두 잎일 때 꽃인 놈, 새가 사라진 뒤에도 새인 놈, 비 그친 뒤에도 봄비인 놈으로 기억해 다오. 나의 내밀한 행불행의 벗들이여.

<김선우.시인>

[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