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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두류실/두류실 일기

모자라서 행복하다?

by 지리산 마실 2006. 10. 10.

-모자라서 행복하다?

 

미쳐야 미친다.(不狂不及).

미치지 않으면 이룰 수가 없다는 말을 참으로 멋지게 풀어놓았다. 학문이던 일상의 크고
작은 일이건, 매사를 대함에 있어 일로매진(一路邁進)하는 태도를 취해야 함을 강조하는
말일 것이다.

 

나는 이번 추석명절 연휴 내내 짬을 낼 수 있는 시간 대부분을 놀고 먹고, 또 먹고 놀았다.
물론 동생들과 함께 지낸 추석 당일 차례, 처갓집 인사로 이틀을 보냈으니 그리 많은 시간이
난 것은 아니지만.

 

연휴 마지막 날, TV 앞에서 리모콘을 쉴 새 없이 누르던 나에게, 비아냥거리는 한마디가

던져졌다.

 

‘노니까 시간 잘 가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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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둘러 차려입은, 노타이에 양복을 걸친 모습이 낯설다. 그렇다고 약 20년 전부터 교류한
형님 댁에 명절 인사차 들르는데 등산복 차림이 가당하겠는가?

 

‘왜 자꾸 나에게 빚을 지우려 하노?’라는 말에는 정색의 느낌보다 담담함이 묻어있어 그나마
마음이 편하다. 이럴 때는 길을 나서게 해준 내 그림자가 참으로 고맙다.

 

‘이 책 한번 봐라’하며 건네는 책은,

책의 내용이나 두께가 나를 충분히 질식시키고도 남을 '다석' 선생님의 글이다.

그러고는 뜬금없이 묻지도 않은 말을 하신다.


“나는 보던 책 다 집어놓고 천자문 다시 보고 있다.”

 

두어 잔 소주를 들이킨 나는 용기를 내어 Y형에게 말했다.

 

‘형님 저는 근기도 되지않고, 또 그 정도의 공부까지는 생각도 하지않고 있습니다.’

 

''''''''''''' 

"모자람을 느꼈으면서도 게으름을 멈추지 않고, 자주 술에 취해 가슴은 붕 뜨고 머리는

텅 빈 채 있음이 부끄럽습니다. 그리고 특히 형님께는, 제대로 하지도 이룬 것도 없는

저의 세상일이 민망해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다만 그런 부끄러움에도 불구하고 형님께 얼굴을 보이는 것은 형님이 늘 나의 모자람을
일깨워주시기 때문입니다.

 

형님, 천박하지만 저의 요즈음 생각은 이렇습니다.

 

‘아직도 모자라니 채울 수 있음이 다행이고,

뜻을 높이 세우지 않았으니, 마음 바쁘지 않은 일도 다행스러운 일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한가지 저가 고민하지않을 수 없는 일은

게으르고 산만해서 미치기(狂) 못함을 잘 알기에, 이룸(及)에는 뜻을 두고있지 않다고는 
하나, 내심 차고있는 욕심 덩어리가 크다는 사실입니다.

 

형님, 부디 너무 나무라지는 말아 주십시오."

 

희미하게 웃는 형님의 눈길이 부담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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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치고도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데, 어찌 너같은 놈이 힐끗힐끗 곁눈질

하느냐! 이 도적 같은 놈아!’

 

가끔씩 끝없는 수렁으로 빠질 때면 나에게 손 건네는 내 그림자의 외침이기도,

소리없이 웃고 계시던 형님의 꾸짖음이기도 하리라.

 

 

두류/조용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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