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턴농부 이남근
[인턴농부 이남근. 작년에 찍은 사진이다]
8.19일(토), 태풍 ‘우쿵’이 현해탄 부근 어딘가에서 부산해안을 향해 돌진해 오던 오전 10시 즈
음, ‘백두대간 내려잇기’ 13구간(도래기재-고치령) 답사를 위해 경북 봉화군 춘양면의 도래기
재로 향하다.
당연히 큰 바람과 많은 비를 예상하며 길을 나서지만,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나를 바라보는 식구
들의 눈길이 예사롭지 않다. 뭐랄까... '측은하다'라는 느낌이 가장 가까울 듯하다.
비 내리는 도시의 거리, 대형배낭을 맨 모습에 꽂히는 눈길들을 감당하기엔 이제 나도 부담스
럽다. 부산에서-춘양,
그 먼 길을 차를 몰고 나선다.
함께 산행할 서울 아우들의 도래기재 야영지(정자 쉼터) 도착 예정시각은 20:00시경이다.
내가 이렇게 약 너댓 시간의 여유를 두고 일찍 출발하는 이유는 속리산 자락 경북 상주 화북면
상오리 쉰섬마을에서 스스로 ‘인턴농부’라고 자처하며 귀농생활을 하고있는 친구 이남근군을
만날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차를 가지고 가는 또 다른 이유이기도 하다.
대구를 지날 즈음에는 거의 퍼붓듯 굵은 빗줄기가 차창을 때린다. 비가 계속해서 이렇게 내린
다면 산행은 힘들게 될 것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다소 어수선해진다. 그런데 경부고속도를 빠져
나와 중부내륙선으로 갈아타니, 이 쪽으로는 가는 빗줄기로 숨을 많이 죽였다.
[선산휴게소]
선산휴게소로 빠져 나와 비로소 친구에게 전화를 넣었다.
‘지금 거신 전화는…’, 친구의 휴대전화는 불통이다.
집으로 다시
연결하니 잔잔한 목소리의 친구 아내가 전화를 받는다.
“접니다. 좁(趙)니다.” 몇 마디 인사를 나누고 친구를 바꿔달라 하니 뜻밖의 대답을 듣게된다.
“아이아빠, 지금 지리산 실상사 귀농학교에
가 있습니다’
“아니 그 많은 농사일은 다
어쩌고요?”
“올해...할 일이 별로
없어예...”
지난 7월, 온나라가 물난리로 야단이 났을 때이다. 문경을 비롯한 경북 내륙 지방에도 많은
비가 내려 피해가 크다는 뉴스를 보고, 문경 농암에서 작업을 하고 있는 정기아우와 그 곳과
이웃하고 있는 남근에게 안부 전화를 했었는데, 이 때에는 둘 다에게서 그리 큰 피해가 없다
는 다행스런 대답을 들었었다.
친구의 아내에게서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니 물난리와 그 뒤를 이은 병충해에 금년 농사
는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망쳐버렸다는 것이다. 농사를 포기했으니 할 일이 별로 없다고.
힘들게
논밭을 갈고 씨를 뿌렸을 친구 내외를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하다.
3년 전 어느 초여름날, 농사일에 입문한 지 얼마되지 않는 친구를 격려한다며 쉰섬마을을
들른 적이 있다. 그 때 마침 친구가 하고 있던 고추밭 일을 거들겠다며 김을 매러 들어갔었다.
나는 땀을 뻘뻘 흘리며 명아주 등, 그 질기디 질긴 잡초들을 참으로 완벽하게 뽑아 나갔다.
농약을 뿌리지않으니 친구의 농사는 대부분 이런 식이란다.
허리를 펴고 잠시 쉬겠노라며 일어서니 다른 고랑에서 같이 출발해 저만치 앞서있는 친구가
물수제비를 뜬 호수의 수면처럼 끊임없이 일렁이는 울림의 말을 던졌다.
"친구야, 잡초 그리 매매 안 뽑아도 된다. 고추 저 놈들도 옆에서 시비 거는 놈들이 있어야
강하게 크거든..” 그 때 나는 바로 그 자리에서 ‘이남근씩 농법’이라고 이름 붙여 주었다.
[노동의 강도를 짐작할 수 있는 고추밭 600평. 작년 여름에 쉰섬마을을 방문했을 때 찍은 사진이다]
자연에 대한 경외심, 농사일에 대한 경건한 마음, 선한 마음으로 주위의 살아있는 모든 것들을
아우르며 살아가는 친구, 그리고 착한 친구를 더 착하게 받아들여주는 그의 아내. 그들은 함께
귀농학교를 수료하였고, 그 후 친구는 다니던 대기업의 간부직을 버리고 이 멀고 먼 곳으로
들어왔다.
귀농학교에는 가끔씩 강의와 기고를 하고 있다고 소식을 들었는데, 이번에는 무슨 일로 들어
갔다는
것일까?
미리 기별을 두었으면 혹시 나를 기다리느라 농사일에 방해를 줄까봐, 살짝 방문하려던 일이
이렇게 되어 버렸다. 하지만 아쉬워할 일은 없다. 이제 대간길은 친구집과 점점 가까워지기
때문이다. 조만간 소줏잔 기울이며 친구와 함께 밤을 세울 날을 기다려 본다.
인턴농부 이남근, 인턴생활이 계속되든, 전문농부가 되든 나는 그를 전적으로 신뢰하며,
그의 앞길은 평화로움으로 가득찰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친구 가족의 건강과 마음의 평화가 늘 깃들기를 거듭 빌며, 내 마음의 흔적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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